이유영은 그제야 박연준이 아마 앞으로도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그녀는 문 비서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상황에서 박연준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문 비서가 유일했다.“그럼 들어가지 않을게요.”“잘 생각하셨어요.”문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의 급한 성격을 아는 문 비서는 혹시라도 그녀가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가려 할까 봐 걱정했다.이유영이 물었다.“박 대표님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별로 좋지 않아요. 잠 자는 것 말고는 일만 하시는데 동교 얘기는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해요.”동교 재개발 프로젝트가 금기어가 되었다는 얘기였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기회가 되면 한 마디만 전해줄 수 있을까요?”“그러죠.”결국 문 비서는 이유영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현장에서 가져온 설계도안이랑 제가 그린 설계도안이랑 비교를 했어요. 현장 설계도안이 바꿔치기 당한 거예요.”“뭐라고요?”문 비서는 떨떠름하면서도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동교 프로젝트가 강성건설 내부에서 금기어가 되기는 했지만 설계도가 바뀌었다는 얘기는 심각한 얘기였다.“이쪽으로 오시죠.”문 비서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유영을 손님 접대실로 안내했다.안으로 들어간 이유영은 설계도를 꼼꼼히 대조했던 것과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자체 조사를 했던 상황을 설명했다.그리고 현장에 사람을 보내 설계도를 가져와서 대조했을 때에야 설계도가 바꿔치기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범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문 비서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문 비서는 접대실을 떠나 박연준의 사무실로 향했다.만약 그녀의 설계도에 문제가 생겼고 그 실수 때문에 박청하가 죽었다면 그녀와 박연준의 관계는 여기서 끝장이 날 것이다.잠시 후, 돌아온 문 비서가 한숨을 쉬었다.“어떻게 됐어요? 박 대표는 뭐래요?”이유영이 아
이유영은 무슨 정신으로 강성건설을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차에 올랐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잡히지 않았다.이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스튜디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솔직히 그녀는 회사나 스튜디오 쪽에서 연락이 오면 지금은 심장부터 떨렸다.마치 그녀가 지금 처한 상황을 자꾸만 일깨워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두 번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사방이 꽉 막힌 이런 느낌에 그녀는 방향을 잃어가고 있었다.“여보세요.”“작업실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또 무슨 일인데요?”긴박한 조민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유영은 절망을 느꼈다.조민정이 말했다.“서원이랑 진행했던 사업이요.”서재욱?“그건 또 왜요?”“그쪽에서 자꾸 재촉이 들어와서요. 아시다시피 대부분 디자이너들이 사직서를 낸 상태라….”조민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만약 긴박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유영 본인이 직접 가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되지도 않은 시간 안에 거의 대부분 디자이너들이 사직서를 냈고 현재는 신입들만 남은 상황이라 서원 같은 큰 사업의 디자인을 맡길 수 없었다.“무슨 말인지 알았어요.”전화를 끊은 이유영은 바깥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래! 정신 차리자! 나 이유영이야!’회귀를 하고 돌아오면서 강이한과 한지음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모두를 자신 앞에 무릎 꿇고 빌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그 이유영이었다.그러니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 서원그룹으로 향했다.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을 입은 서재욱이 마침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싸늘한 인상을 한 김연우가 따르고 있었다.이유영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서 대표님!”남자는 그녀를 알아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이유영 씨가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그는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지금 바빠요? 프로젝트 때문에 잠깐 드릴
“다만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주세요.”“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과거 그녀를 믿어주었던 사람들 중에 이 사건에 엮이지 않은 소은지만 제외하고 모두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소은지라면 엮였다고 해도 믿어주겠지만 다른 사람은 확신할 수 없었다.가장 그녀를 믿어줬어야 할 강이한조차도 가장 먼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서재욱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믿어요.”그 말 한마디에 이유영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사실 울어도 괜찮아요. 지금 상황이 웃을 상황은 아니잖아요?”남자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며 말했다.하지만 이유영은 끝까지 눈물을 참아냈다.그녀는 줄곧 강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다.어렵게 한번 더 살 기회를 주었는데 우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연준이 그 녀석한테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서재욱은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이유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박청하는 그 녀석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거든요. 연준이랑 강성 일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죠? 사실 혼자였던 연준이를 가문으로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 박청하였어요.”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무거운 무언가를 가슴에 얹은 느낌이었다.강성 일가는 방대한 가문이었다. 전대 회장은 많은 첩을 두었는데 박연준의 모친은 줄곧 밖에서 명분도 없이 생활했다고 한다.엄마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가문 사람들도 박연준을 가족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줄곧 엄마와 함께 밖에서 생활했다.여기까지는 이유영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그런데 박연준을 가문으로 데리고 간 사람이 박청하였다니! 아마 박연준이 지금의 대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박청하의 도움이 가장 컸을 것이다.어쩌면 박청하는 박연준에게 유일한 따스함을 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여동생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무너지는 건 당연했다.“얘기해 줘서 감사해요.”이유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
서원그룹에서 나온 이유영은 바로 세강그룹으로 향했다. 조형욱은 병원으로 갔기에 다시 왔을 때 그녀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비서실 직원들은 온몸으로 냉기를 뿜는 그녀를 보고 아무도 감히 다가와서 말을 걸지 못했다.나중에 정윤아가 기를 쓰고 달려와서 막았지만 이유영은 그 자리에서 손을 들어 그녀의 귀뺨을 쳤다.다른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귀뺨을 맞은 정윤아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이유영 거기 서!”쾅!이유영은 앞에 거슬리는 의자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는 그대로 사무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우당탕 하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유영에게로 쏠렸다. 강이한은 다시 돌아온 그녀를 보고 굳은 얼굴로 임원들에게 말했다.“다들 나가 있어요.”“네, 대표님.”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분분히 사무실을 나갔다.이유영은 그들이 나가자마자 발로 문을 차서 닫아버렸다.그녀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서재욱에게서 박성하가 박연준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뒤로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녀는 강압적인 기운을 풍기며 남자에게 다가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강이한,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이건 너무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생각 안 해봤어?”“웃기네. 당신이 나한테 도덕을 논하다니.”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피식거리며 대꾸했다.이유영은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 사내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박성하 씨가 박 대표한테 중요한 사람인 걸 알고 있었지?”마음속으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박성하가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부러 공사현장 사고를 계획하고 주도한 것이다.그리고 그의 목적은 이유영이 박연준의 신임을 철저히 잃어버리는 것이었다.“며칠 전까지도 당신 일이라면 무조건 돕겠다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어때? 이제 얼굴도 보기 싫어하지?”짝!이유
이유영이 물었다.“대체 원하는 게 뭐야?”“말했잖아. 네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널 지켜주는 사람을 죄다 잃게 될 거라고! 처음부터 정국진 믿고 한 짓이잖아?”“아껴주던 사람에게 당하는 기분은 어떨까? 정국진 그 인간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야. 내 해외 사업을 적지 않게 건드렸더라고.”이유영은 오늘처럼 그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괴로운 적이 없었다.짝!그녀는 그대로 손을 들어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남자는 힘껏 그녀를 밀쳤고 가녀린 그녀는 그에게 떠밀려 책상에 옆구리를 부딪혔다.“강이한, 넌 사람도 아니야!”“정국진이 곧 널 죽을만큼 괴롭게 해줄 거야.”남자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유영의 두 눈에서도 증오의 불길이 치솟았다.“강이한, 나한테 약점 잡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그리고 사람들이 다 너처럼 멍청한 줄 알아? 외삼촌은 결국 내 말을 믿게 될 거야.”말을 마친 이유영은 차갑게 뒤돌아섰다.도도하고 차가운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이한은 손을 뻗어 허리를 부러뜨리고 싶었다.전에는 저런 모습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세강에서 나온 이유영은 옆구리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차로 돌아갔다.그녀는 이마에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지야.”“유영아, 무슨 일 있는 거야?”수화기 너머로 소은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매번 그녀는 몸에 다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가장 먼저 소은지를 찾았다.이유영은 복부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꾹 참으며 말했다.“걱정 마. 참을만해!”“내 앞에서는 강한 척 안 해도 된다니까!”“그럼! 우리 소 변호사님 앞에서는 거짓말도 못한다니까?”소은지는 법률을 공부한 변호사였기에 이유영이 지금 겪고 있는 사건이 얼마나 귀찮은 사건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일단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유영은 감옥행을 피
강이한!이유영은 끝없이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며 d이를 갈았다. 지난 생에 그녀의 목숨을 거두어 간 사람에게 이번 생도 무능하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유영아, 괜찮은 거지?”수화기 너머로 소은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정국진이 거의 정유라 신변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정유라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예감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지금 상황도 딱히 좋다고 볼 수 없었다.아버지인 정국진이 딸을 먼저 신경 쓰는 건 당연한 거지만 소은지는 친구가 더 걱정이었다.이유영은 아랫배에서 묵직한 통증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나 괜찮아.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아랫배에서 또 다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혹시 조금 전 강이한의 사무실에서 어딘가 잘못 부딪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조민정은 최근 오로라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우며 반박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민정 씨, 당장 이쪽으로 와봐요.”“무슨 일인데요?”“내 몸이 좀 이상해요!”이유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의식을 잃어버렸다.탁!핸드폰은 그대로 차 안에 떨어졌고 조민정의 애타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차 안에 전해지고 있었다.“대표님, 대표님?”그리고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그 시각, 강성건설.박연준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의 앞에는 박 회장이 앉아 있었다.노인은 근엄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당장 출국해!”박연준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두 사람은 부자 사이라기보다는 원수 사이에 더 가까웠다.그들 사이에는 여느 부자에게서 보이는 가족의 정 따위는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연준아, 성하 일은 나도 유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박 회장은 박연준을 빤히 바라보며 정색해서
그래도 능력은 인정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강이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그녀에게는 대단한 외삼촌이 있었지만 이곳은 청하였다.“내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박연준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나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박 회장이 말했다.“연준아, 세강그룹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니란다! 재벌가 사내들이 어떤 심성을 가졌는지 잘 알잖니. 그런데 강이한 옆에 10년이나 같이 있은 여자야. 네가 끼어들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고!”“현재는 둘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서로를 미워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오해가 풀리면 어떨 것 같니?”쾅!박연준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박 회장은 꾹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지훈아!”“네, 회장님.”구석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훈이 박 회장에게 다가갔다.“봤지?”“네? 네….”“쟤 국내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큰일 나겠어.”“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박 회장은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이었지만 이혼녀인 이유영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이유영이 능력 있고 훌륭한 배경을 가졌다고 해도, 그녀에게 정국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가문의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박 회장은 진영숙과는 다르게 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이유영의 첫사랑은 강이한이었기에 예전에 아무리 꼴도 보기 싫어했지만 나중에 이유영의 배경을 알았을 때 진영숙은 둘이 잘 되기를 바랐다.하지만 박 회장은 아니었다.한편, 외부에서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가 아니라는 추문이 돌고 돌았지만 로열 글로벌 홍보팀에서는 이렇다 할 입장문을 내지 않고 있었다.세강그룹.강이한은 정국진의 동향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정유라의 신변에 사고가 생기면서 정국진이 이유영을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국진은 정유라의 신변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실질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시각, 병원.이유영은 진한 소독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조민정이 병실에서 노트북을 놓고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옆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순정동 가정부를 부르지 그랬어요.”이유영은 초췌해 보이는 조민정을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조민정은 바로 서류를 내려놓고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깨셨어요? 좀 어때요?”“아랫배가 많이 당기고 아프네요.”“지금 당장 의사 부를게요.”말을 마친 조민정은 다급히 병원을 나갔다.이유영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잠시 후, 의료진이 병실로 들어왔다.“이유영 대표님.”의사는 당연히 요즘 장안의 화제인 이유영을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그녀의 얼굴은 핏기 한 점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의사가 담담히 말했다.“임신하셨습니다.”충격적인 소식에 이유영은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멍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의사가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조민정은 옆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의료진이 나가고 병실에 둘만 남게 되자 이유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조민정을 바라보았다.“이… 임신이라니!”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조민정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일단은 병원 측에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 두었고 비밀유지 계약도 썼어요.”조민정도 이유영의 정확한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이게 최선의 조치였다. 그녀는 확실히 보좌관으로써 해야 할 일을 깔끔히 처리했다.이유영은 왜 조민정이 직접 옆을 지키며 순정동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는지 그제야 이해했다.임신 사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고마워요.”이유영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힘없이 말했다.눈을 감는 순간 지옥의 저 끝에서 강이한이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민정 씨.”“네, 대표님.”“병
“가고 싶어?”“가면 안 돼?”소은지는 차갑고 비꼬는 표정으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는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목이 부서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소은지의 등이 차가운 벽에 밀쳐졌고 집사와 하인들이 다가가려 하자 남자가 고함쳤다.“다 꺼져!”집사와 하인들은 그 자리를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아 얼어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나가세요.”이 남자가 미친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소은지의 눈빛에는 오히려 두려움이 없었다.집사와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소은지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말했다.“다들 나가세요!”“...”사모님의 엄한 명령에 마음이 조여왔지만 결국 모두 급히 자리를 떠났다.엔데스 명우와 소은지만 남았을 때, 소은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증인들은 다 나갔어. 네 마음대로 해.”소은지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표정은 예전에 그와 함께 있을 때와 똑같았다. 그가 아무리 고문해도 그녀는 항상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다.명우가 소은지를 가장 아프게 해도, 소은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했다.마치 그녀의 세계에는 고통도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소은지에게는 약점이 없었다.한때 엔데스 명우는 이런 여자가 길들여지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교만한 뼈 구조마저 너무 미워서 하나하나 뜯어내고 싶을 정도였다.그녀의 오만함은 뼈와 피에서부터 자라 세포로 뻗어 나온 듯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자라 아무리 짓밟고 억눌러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두 눈을 직접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이 싫었다.그녀는 항상 무관심하고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명우를 바라봤기 때문이다.“왜? 안 때릴 거야?”“그렇게 쉽게 내 손에 죽고 싶어?”“흥!”하긴, 이렇게 쉽게 그녀를 보내줄 순 없었
소은지는 누군가를 한 번도 깊이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송연미의 눈 속에서 마치 그런 깊은 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이었다.송연미의 눈에 담긴 감정은 차분하고 억제된 것이었으며 심지어 극단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졌다.모두 그 한 사람만을 위한 감정이었다.처음 송연미를 봤을 때, 엔데스 가문의 여자들 사이에서 송연미는 유난히 고독하고 차가운 아름다움으로 돋보였다.엔데스 가문에 변화가 생기자 송연미는 반산월에서 그녀는 네 번째 사모님과 송씨 가문의 아가씨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고 미친 듯이 화를 냈었다.아버지가 사촌 여동생을 양녀로 삼으려는 얘기를 했을 때, 송연미는 절망적이면서도 차분한 모습이었다.이유영에게서 보았던 것, 즉 결혼의 끝을 생각하면 소은지는 감정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하지만 그런 사랑이 송연미에게서 보인 것이다. '그가 좋다면 나는 뭐든지 괜찮다'는 그런 사랑을.그 사랑은 소은지가 감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뒤엎어 버렸다. 송연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소은지는 이제 송연미가 불쌍하고 애석하게 느껴졌다.엔데스 운빈과 송씨 가문과의 관계를 깨면서까지 현우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송연미를 파리에서 떠나게 한 이유도 현우 때문이었다.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사촌을 입양한 사실을 참고 있는 이유도 현우 때문이었다.이런 여자가 감정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난 오늘 밤 떠나.”잠시 후 소은지는 송연미에게 이렇게 말했다."..."송연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 속에 기쁨이 스쳤다.“진짜로 떠날 거야?”“응.”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지는 진심이었다.송연미가 한숨을 돌린 듯했다. 마치 그 전까지의 모든 계획이 소은지에게 걸려 있었던 것처럼.이제 소은지가 입을 열었으니 그들도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반응을 보며 송연미의 눈 속에서 깊고 날카
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큰 압박감을 주었고 그 느낌이 너무나도 무겁고 답답했다.송연미는 단호하게 말했다.“왜냐하면 현우는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이기 때문이야.”그 말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왜?”송연미의 아버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 일은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엔데스 가문의 회장은 현우에게 무언가를 남겼을 거야. 그분이 가장 아끼던 사람은 바로 현우였으니까.”가장 아끼던 사람이 현우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복잡한 상황을 남겨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 회장이 정말로 자신의 사람을 아꼈다면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리가 없었다.“내 아버지가 쥐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파리에서의 권력이었어. 네 좋은 친구인 이유영에게 물어보면, 내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거야.”송연미도 소은지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소은지는 강압적인 방식보다는 부드러운 접근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써왔던 여러 방법이 소은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결국,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은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일이 너무 복잡하고 방대하기도 했고 현우가 이 사건에 소은지를 전혀 끌어들이지 않아서 이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정씨 가문은 이 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거야?”소은지는 문득 그렇게 물었다.정씨 가문은 매우 큰 상업 제국이었다. 정국진은 언제나 무사히 지나갔고 그만큼 이 사람이 능숙하다는 뜻일 것이다.정씨 가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송연미는 이렇게 말했다.“만약 이유영 옆에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더라면, 엔데스 가문이 정국진을 그냥 놔뒀을 리가 없어.”하지만 아쉽게도 정씨 가문의 유일한 딸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과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따라서 이유영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사실 송연미가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바로 이유영이었다.왜냐하면 이유영이 이 파리에서 보았던
송연미는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께서 아직 현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셨어.”그 말을 하면서 송연미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그 무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소은지가 송연미를 바라보는 눈빛은 침묵 속에서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네가 아직 여기 있기 때문이야.”송연미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어느 정도 압박감이 배어 있었다.소은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송연미는 오늘 밤 소은지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소은지는 품에서 잠든 고양이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송연미가 그 고양이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왜냐하면, 송연미도 고양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아마 현우는 그것을 잊었을 것이다. 송연미와 현우의 사이가 좋았을 때, 송연미는 현우에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좋아, 예쁜 고양이 한 마리 찾아 줄게.”그의 말은 여전히 소은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그때 그들은 정말 행복했다. 그 누구도 그때가 마지막 평화로운 순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후,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고 서로 다른 인생의 궤도로 나아갔다.송연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기다린 것은 현우가 약속한 예쁜 고양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녀를 엔데스 운빈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이었다.송연미는 강하게 반항했다. 미친 듯이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가문 내의 압박과 협박에 못 이겨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송연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하루를 겪었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모든 것이 단번에 깨져버렸고 그녀는 고통과 분노 속에서 절망했다.그래서 그녀는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너랑 엔데스 운빈의 관계 때문에 네 아버지가...”소은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연미를 바라보았다.도대체 이 가문은 어떤 집안인 걸까?소은지가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송연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하지만 소은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어딘가 고독한 기운이 스며드는 걸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넌 어떻게 생각해? 나와 현우 씨, 나름 함께 고난을 겪어온 사이 아닌가?”소은지는 송연미에게 시선을 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소은지의 말에 송연미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송연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고 눈 속에는 질투의 불씨가 번뜩였다.하지만 송연미는 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인 만큼 그런 감정들은 금세 억누를 수 있었다.“엔데스 가문이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어.”중대하다?소은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우가 자신을 이렇게 급하게 파리에서 떠나게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섯째 도련님이 큰형수를 데려갔어.”“...”그 말을 듣고 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송연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송연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여전히 충격을 받았다.“소은지, 너 모르지?”“뭘 말하는 거야?”“예전에 회장님 세대 때, 집안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소은지는 조용히 송연미의 말을 들었다.송연미가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송연미 말대로 소은지는 그들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아버지가 그러셨어. 그 당시 엔데스 회장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었다고. 지금의 여섯째 도련님보다 훨씬 더 무서웠대.”“...”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소은지는 가족 모임 때 한 번 마주쳤던 차가운 눈빛의 백발 회장님을 떠올렸다.단 한 번의 시선으로도 그녀를 얼어붙게 할 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분이었다.엔데스 명우조차 이미 충분히 무서운 존재였는데, 회장님은 그보다 더했다니. 엔데스 가문이란 현우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끝없는 심연이었다.“다섯째 도련님이 큰형수를 데리고 간 이유는 미도로 여행을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큰형이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야.”단서 하나로
한때 청하시에 머물던 시절.소은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온 탓에 결혼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다.남자를 광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녀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결국 아픔으로 끝난다면, 그런 사랑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특히 현우의 내면을 어느 정도 들여다본 지금, 그녀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하지만 여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감정 문제에 있어서는 순진하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과거에 소은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래, 여자가 순진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마지막에 우는 건 그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소은지의 말은 냉소적이었고 태도는 언제나 가벼워 보였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소은지는 여자가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야 더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왜 굳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 모를 그런 감정에 휘말려야 할까?사랑은 진심을 다한 사람이 결국 패배자가 되는 잔인한 게임 같았다.소은지는 너무 많은 상처받은 여자들을 보아왔다.그리고, 너무나 많은 상처받은 남자들도 보아왔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던 소은지는, 현우를 마주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얼마나 걸릴까요?”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천시로 떠나는 것에 관한 질문이었다.현우가 소은지를 우천시로 보내려 한다는 건, 현재 파리의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시간은 얼마나 필요한 걸까?“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소은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엔데스 가문이 정말로 벼랑 끝에 다다른 걸까?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억눌렀다.“네.”짧은 한마디.그러나 그 짧은 대답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은 오직 소은지만이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에게 우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일에 대해 스스로 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보상이라는 형태로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하지만 복수를 결코 잊지 않는 성격답게, 이 모든 보상 또한 결국 갚으려는 계산일지도 모른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가 현우에게 차분히 말했다.그 말을 듣고 현우는 그녀를 감싸던 팔이 잠시 멈췄다. 한참을 생각하던 현우는 말했다.“제가 바래다줄게요.”“...”바래다준다니? 어디로?“일곱째 도련님?”“이유영은 지금 우천시에 머물고 있어요. 은지 씨도 잠시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소은지는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거예요?”“전기봉을 강이한이 찾아냈어요.”“...”전기봉. 이 중요한 인물을 찾는 일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였다.전기봉이 나타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단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를 찾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모두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이제는...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찾아냈다고요?”“네.”이제 엔데스 가문의 운명은 앞으로의 며칠간 모든 것이 결정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소은지는 현우의 표정을 보며 더욱 불안해졌다.“하지만 전...”“지금 우천시에는 박연준이 있어요. 은지 씨도 그쪽에 있으면 더 안전할 거예요.”지금의 파리는 너무 위험했다.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런 위험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청하시에 있던 시절, 평화롭게 지내던 소은지의 삶에 갑작스럽게 파리의 사건들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 충격은 소은지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만약 우천시에 있었다면, 소은지는 지금처럼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지금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 속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그리고 그 분노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저는...”소은지는
기다리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강이한, 박연준, 그리고 이유영. 세 사람의 얽힌 관계는 이제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한편, 파리에서는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고 그와 관련된 문서는 점점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도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반산월.남자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가 희미하게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소은지는 품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현우의 묵직한 눈빛이 그녀를 스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이 녀석을 꽤 잘 돌본 모양이에요. 아주 잘 자랐네요.”길에서 처음 이 고양이를 주웠을 때는 겨우 갓난 새끼 고양이였다.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작은 생명체였는데 지금은 소은지의 품에서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로 감싸인 작은 생명체로 자라 있었다. 여전히 조그마했지만 이제는 생명의 따뜻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는 작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현우의 옆에 앉았다.“작은 동물들은 금세 자라잖아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아이는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다.반면, 동물들은 마음만 쓰면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줬다.“...”소은지가 아이를 언급하자, 현우는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아이 좋아해요?”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은지는 잠시 멈칫했다.아이를 좋아하냐고?“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설명할 수 없어요.”“왜요?”“아마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존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였다.그러나 소은지가 지금까지 보아온 아이들은 대부분 그보다 더 복잡했다.청하시에서 일하며 소은지는 직업 특성상 아이들과 얽힌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했다.처음엔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결국 이혼을 앞두고는 지독히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우리, 결혼하자.”이유영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갑자기 말했다.“...”공기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이 남자, 미쳤나 봐.이유영은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볼 수는 없었지만 텅 빈 두 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의 눈빛에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이유영은 차갑게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유영아.”“서주...”서주?“네가 원하는 건 결국 우리 아버지의 지원이야?”지원?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온 확신마저 이유영에게는 이익을 위한 계산으로 보인단 말인가?“괜찮아. 세상 모든 일은 사실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려줄게.”“흥!”박연준의 다짐이 이유영에게는 터무니없게만 들렸다.“내가 기회를 줄 것 같아?”이유영은 단호했다.박연준이 자신을 이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싫었다. 그런데 이제 가족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박연준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박연준,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날카롭게 내뱉었다.이유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만약 지금 이유영이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분명 서주로 돌아가 강이한과 박연준을 혼란의 중심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박연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그날, 서재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에게 물었다.“이유영이 시력을 되찾으면, 서주를 가장 먼저 공격할 거야.”이유영은 신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신씨 가문이 어떤 관계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신지수가 이유영 편에 선다는 건 그 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그런데 서주 자체가 워낙 복잡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