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그제야 박연준이 아마 앞으로도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그녀는 문 비서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상황에서 박연준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문 비서가 유일했다.“그럼 들어가지 않을게요.”“잘 생각하셨어요.”문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의 급한 성격을 아는 문 비서는 혹시라도 그녀가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가려 할까 봐 걱정했다.이유영이 물었다.“박 대표님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별로 좋지 않아요. 잠 자는 것 말고는 일만 하시는데 동교 얘기는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해요.”동교 재개발 프로젝트가 금기어가 되었다는 얘기였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기회가 되면 한 마디만 전해줄 수 있을까요?”“그러죠.”결국 문 비서는 이유영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현장에서 가져온 설계도안이랑 제가 그린 설계도안이랑 비교를 했어요. 현장 설계도안이 바꿔치기 당한 거예요.”“뭐라고요?”문 비서는 떨떠름하면서도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동교 프로젝트가 강성건설 내부에서 금기어가 되기는 했지만 설계도가 바뀌었다는 얘기는 심각한 얘기였다.“이쪽으로 오시죠.”문 비서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유영을 손님 접대실로 안내했다.안으로 들어간 이유영은 설계도를 꼼꼼히 대조했던 것과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자체 조사를 했던 상황을 설명했다.그리고 현장에 사람을 보내 설계도를 가져와서 대조했을 때에야 설계도가 바꿔치기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범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문 비서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문 비서는 접대실을 떠나 박연준의 사무실로 향했다.만약 그녀의 설계도에 문제가 생겼고 그 실수 때문에 박청하가 죽었다면 그녀와 박연준의 관계는 여기서 끝장이 날 것이다.잠시 후, 돌아온 문 비서가 한숨을 쉬었다.“어떻게 됐어요? 박 대표는 뭐래요?”이유영이 아
이유영은 무슨 정신으로 강성건설을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차에 올랐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잡히지 않았다.이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스튜디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솔직히 그녀는 회사나 스튜디오 쪽에서 연락이 오면 지금은 심장부터 떨렸다.마치 그녀가 지금 처한 상황을 자꾸만 일깨워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두 번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사방이 꽉 막힌 이런 느낌에 그녀는 방향을 잃어가고 있었다.“여보세요.”“작업실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또 무슨 일인데요?”긴박한 조민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유영은 절망을 느꼈다.조민정이 말했다.“서원이랑 진행했던 사업이요.”서재욱?“그건 또 왜요?”“그쪽에서 자꾸 재촉이 들어와서요. 아시다시피 대부분 디자이너들이 사직서를 낸 상태라….”조민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만약 긴박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유영 본인이 직접 가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되지도 않은 시간 안에 거의 대부분 디자이너들이 사직서를 냈고 현재는 신입들만 남은 상황이라 서원 같은 큰 사업의 디자인을 맡길 수 없었다.“무슨 말인지 알았어요.”전화를 끊은 이유영은 바깥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래! 정신 차리자! 나 이유영이야!’회귀를 하고 돌아오면서 강이한과 한지음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모두를 자신 앞에 무릎 꿇고 빌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그 이유영이었다.그러니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 서원그룹으로 향했다.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을 입은 서재욱이 마침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싸늘한 인상을 한 김연우가 따르고 있었다.이유영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서 대표님!”남자는 그녀를 알아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이유영 씨가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그는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지금 바빠요? 프로젝트 때문에 잠깐 드릴
“다만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주세요.”“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과거 그녀를 믿어주었던 사람들 중에 이 사건에 엮이지 않은 소은지만 제외하고 모두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소은지라면 엮였다고 해도 믿어주겠지만 다른 사람은 확신할 수 없었다.가장 그녀를 믿어줬어야 할 강이한조차도 가장 먼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서재욱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믿어요.”그 말 한마디에 이유영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사실 울어도 괜찮아요. 지금 상황이 웃을 상황은 아니잖아요?”남자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며 말했다.하지만 이유영은 끝까지 눈물을 참아냈다.그녀는 줄곧 강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다.어렵게 한번 더 살 기회를 주었는데 우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연준이 그 녀석한테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서재욱은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이유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박청하는 그 녀석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거든요. 연준이랑 강성 일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죠? 사실 혼자였던 연준이를 가문으로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 박청하였어요.”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무거운 무언가를 가슴에 얹은 느낌이었다.강성 일가는 방대한 가문이었다. 전대 회장은 많은 첩을 두었는데 박연준의 모친은 줄곧 밖에서 명분도 없이 생활했다고 한다.엄마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가문 사람들도 박연준을 가족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줄곧 엄마와 함께 밖에서 생활했다.여기까지는 이유영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그런데 박연준을 가문으로 데리고 간 사람이 박청하였다니! 아마 박연준이 지금의 대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박청하의 도움이 가장 컸을 것이다.어쩌면 박청하는 박연준에게 유일한 따스함을 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여동생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무너지는 건 당연했다.“얘기해 줘서 감사해요.”이유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
서원그룹에서 나온 이유영은 바로 세강그룹으로 향했다. 조형욱은 병원으로 갔기에 다시 왔을 때 그녀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비서실 직원들은 온몸으로 냉기를 뿜는 그녀를 보고 아무도 감히 다가와서 말을 걸지 못했다.나중에 정윤아가 기를 쓰고 달려와서 막았지만 이유영은 그 자리에서 손을 들어 그녀의 귀뺨을 쳤다.다른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귀뺨을 맞은 정윤아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이유영 거기 서!”쾅!이유영은 앞에 거슬리는 의자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는 그대로 사무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우당탕 하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유영에게로 쏠렸다. 강이한은 다시 돌아온 그녀를 보고 굳은 얼굴로 임원들에게 말했다.“다들 나가 있어요.”“네, 대표님.”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분분히 사무실을 나갔다.이유영은 그들이 나가자마자 발로 문을 차서 닫아버렸다.그녀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서재욱에게서 박성하가 박연준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뒤로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녀는 강압적인 기운을 풍기며 남자에게 다가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강이한,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이건 너무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생각 안 해봤어?”“웃기네. 당신이 나한테 도덕을 논하다니.”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피식거리며 대꾸했다.이유영은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 사내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박성하 씨가 박 대표한테 중요한 사람인 걸 알고 있었지?”마음속으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박성하가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부러 공사현장 사고를 계획하고 주도한 것이다.그리고 그의 목적은 이유영이 박연준의 신임을 철저히 잃어버리는 것이었다.“며칠 전까지도 당신 일이라면 무조건 돕겠다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어때? 이제 얼굴도 보기 싫어하지?”짝!이유
이유영이 물었다.“대체 원하는 게 뭐야?”“말했잖아. 네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널 지켜주는 사람을 죄다 잃게 될 거라고! 처음부터 정국진 믿고 한 짓이잖아?”“아껴주던 사람에게 당하는 기분은 어떨까? 정국진 그 인간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야. 내 해외 사업을 적지 않게 건드렸더라고.”이유영은 오늘처럼 그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괴로운 적이 없었다.짝!그녀는 그대로 손을 들어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남자는 힘껏 그녀를 밀쳤고 가녀린 그녀는 그에게 떠밀려 책상에 옆구리를 부딪혔다.“강이한, 넌 사람도 아니야!”“정국진이 곧 널 죽을만큼 괴롭게 해줄 거야.”남자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유영의 두 눈에서도 증오의 불길이 치솟았다.“강이한, 나한테 약점 잡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그리고 사람들이 다 너처럼 멍청한 줄 알아? 외삼촌은 결국 내 말을 믿게 될 거야.”말을 마친 이유영은 차갑게 뒤돌아섰다.도도하고 차가운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이한은 손을 뻗어 허리를 부러뜨리고 싶었다.전에는 저런 모습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세강에서 나온 이유영은 옆구리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차로 돌아갔다.그녀는 이마에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지야.”“유영아, 무슨 일 있는 거야?”수화기 너머로 소은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매번 그녀는 몸에 다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가장 먼저 소은지를 찾았다.이유영은 복부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꾹 참으며 말했다.“걱정 마. 참을만해!”“내 앞에서는 강한 척 안 해도 된다니까!”“그럼! 우리 소 변호사님 앞에서는 거짓말도 못한다니까?”소은지는 법률을 공부한 변호사였기에 이유영이 지금 겪고 있는 사건이 얼마나 귀찮은 사건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일단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유영은 감옥행을 피
강이한!이유영은 끝없이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며 d이를 갈았다. 지난 생에 그녀의 목숨을 거두어 간 사람에게 이번 생도 무능하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유영아, 괜찮은 거지?”수화기 너머로 소은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정국진이 거의 정유라 신변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정유라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예감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지금 상황도 딱히 좋다고 볼 수 없었다.아버지인 정국진이 딸을 먼저 신경 쓰는 건 당연한 거지만 소은지는 친구가 더 걱정이었다.이유영은 아랫배에서 묵직한 통증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나 괜찮아.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아랫배에서 또 다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혹시 조금 전 강이한의 사무실에서 어딘가 잘못 부딪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조민정은 최근 오로라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우며 반박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민정 씨, 당장 이쪽으로 와봐요.”“무슨 일인데요?”“내 몸이 좀 이상해요!”이유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의식을 잃어버렸다.탁!핸드폰은 그대로 차 안에 떨어졌고 조민정의 애타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차 안에 전해지고 있었다.“대표님, 대표님?”그리고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그 시각, 강성건설.박연준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의 앞에는 박 회장이 앉아 있었다.노인은 근엄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당장 출국해!”박연준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두 사람은 부자 사이라기보다는 원수 사이에 더 가까웠다.그들 사이에는 여느 부자에게서 보이는 가족의 정 따위는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연준아, 성하 일은 나도 유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박 회장은 박연준을 빤히 바라보며 정색해서
그래도 능력은 인정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강이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그녀에게는 대단한 외삼촌이 있었지만 이곳은 청하였다.“내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박연준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나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박 회장이 말했다.“연준아, 세강그룹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니란다! 재벌가 사내들이 어떤 심성을 가졌는지 잘 알잖니. 그런데 강이한 옆에 10년이나 같이 있은 여자야. 네가 끼어들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고!”“현재는 둘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서로를 미워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오해가 풀리면 어떨 것 같니?”쾅!박연준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박 회장은 꾹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지훈아!”“네, 회장님.”구석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훈이 박 회장에게 다가갔다.“봤지?”“네? 네….”“쟤 국내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큰일 나겠어.”“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박 회장은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이었지만 이혼녀인 이유영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이유영이 능력 있고 훌륭한 배경을 가졌다고 해도, 그녀에게 정국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가문의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박 회장은 진영숙과는 다르게 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이유영의 첫사랑은 강이한이었기에 예전에 아무리 꼴도 보기 싫어했지만 나중에 이유영의 배경을 알았을 때 진영숙은 둘이 잘 되기를 바랐다.하지만 박 회장은 아니었다.한편, 외부에서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가 아니라는 추문이 돌고 돌았지만 로열 글로벌 홍보팀에서는 이렇다 할 입장문을 내지 않고 있었다.세강그룹.강이한은 정국진의 동향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정유라의 신변에 사고가 생기면서 정국진이 이유영을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국진은 정유라의 신변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실질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시각, 병원.이유영은 진한 소독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조민정이 병실에서 노트북을 놓고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옆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순정동 가정부를 부르지 그랬어요.”이유영은 초췌해 보이는 조민정을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조민정은 바로 서류를 내려놓고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깨셨어요? 좀 어때요?”“아랫배가 많이 당기고 아프네요.”“지금 당장 의사 부를게요.”말을 마친 조민정은 다급히 병원을 나갔다.이유영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잠시 후, 의료진이 병실로 들어왔다.“이유영 대표님.”의사는 당연히 요즘 장안의 화제인 이유영을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그녀의 얼굴은 핏기 한 점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의사가 담담히 말했다.“임신하셨습니다.”충격적인 소식에 이유영은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멍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의사가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조민정은 옆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의료진이 나가고 병실에 둘만 남게 되자 이유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조민정을 바라보았다.“이… 임신이라니!”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조민정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일단은 병원 측에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 두었고 비밀유지 계약도 썼어요.”조민정도 이유영의 정확한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이게 최선의 조치였다. 그녀는 확실히 보좌관으로써 해야 할 일을 깔끔히 처리했다.이유영은 왜 조민정이 직접 옆을 지키며 순정동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는지 그제야 이해했다.임신 사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고마워요.”이유영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힘없이 말했다.눈을 감는 순간 지옥의 저 끝에서 강이한이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민정 씨.”“네, 대표님.”“병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