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는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유영은 긴장을 풀고 의자에 기댄 채 잠에 들었다.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박연준은 그녀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손바닥 하나로 다 가려질 만큼 작은 얼굴에 피곤이 잔뜩 묻어 있었다.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 알람에 그는 상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기사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잠든 유영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린 그는 뒤편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당장 기사 퍼지기 전에 막아!”“이유영 씨가 설마….”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최근 박연준과 유영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전부터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왔지만 명백한 입장 표명이 없었던 박연준이 드디어 대놓고 그녀를 지켜주기로 한 것이다.비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다급히 말했다.“지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박연준의 얼굴이 사납게 빛났다.지금 상황으로 보면 강이한과 유영의 사이는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유영의 태도는 명확했지만 강이한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전화를 끊자마자 또 전화가 걸려왔다.발신자를 확인한 박연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알아.”박연준도 똑같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유영의 앞에서 보였던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목소리였다.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은 거칠게 숨을 고른 뒤 그에게 말했다.“박연준, 너랑 일 적으로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그건 나도 바라는 바야.”“그러니까 나랑 이유영 사이에 너도 더 이상 끼어들지 마!”박연준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해외에서 벌어진 일 아직 너한테 빚을 갚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그렇다고 해두지!”“그럼 나도 한마디 할게. 이유영 씨
아직 채 내리지 못한 기사를 읽은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좀 마실래요?”박연준은 그녀에게 시원한 생수 한 병을 건넸다.유영은 혼란스러운 가슴을 달래며 담담히 그의 손에서 생수를 받았다.“고마워요.”그러고는 황급히 생수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제야 갑갑한 기분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청하시 전체가 뒤집어지고 있었다.그녀와 강이한이 이혼한 뒤에도 자주 공공장소를 들락거린 일과 박연준과의 스캔들로 그녀의 명성은 이미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한지음과 그녀가 이복 자매라는 기사까지 뜨면서 여론은 순식간에 피해자로 보이는 한지음 쪽으로 돌아섰다.유영이 예전에 했던 모든 노력은 그녀가 이복 자매인 한지음을 질투해서 한 소행으로 여론이 기울고 있었다.그렇게 그녀는 천하 제일의 악녀가 되었다.사람들은 그녀가 이복 동생과 강이한 사이의 스캔들을 참지 못하고 의사를 매수해서 일부러 수술을 실패하게 만들었다고 떠들고 있었다.사람들은 바람을 피운 그녀가 남편의 외도를 용납하지 못하여 한지음을 지옥으로 내몰았다고 말하고 있었다.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인데도 기사에 댓글이 수만 개 이상이 달렸다.네티즌들은 또다시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괜찮아요?”박연준은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의 자상함에 유영은 따뜻함을 느꼈다.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녀를 믿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감사해요. 저 괜찮아요.”그의 이런 배려에 감사하기에 절대 그와 같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수포로 만들 수 없었다.박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차에서 내리려는 유영의 손을 잡고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고마워요.”유영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박연준은 그 미소를 보며 잠깐 넋을 놓았다.온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공격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녀의 이런 점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다.그녀가 만약 만악의 근원이라면 모든 게 까발려졌을 때 이렇게 당
청하의 여론은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다.한지음이 유영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곧이어 유영의 주치의 배준석의 약혼녀가 수술 직전에 납치당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배준석이 자리를 비운 후에 대리로 수술을 진행한 유 선생이 수술 직후에 가치가 수억 원에 달하는 회사의 실 소유주가 되었다는 사실도 기사에 올랐다.청하의 모든 사람들은 유영이 한지음이 완전히 시력을 잃게 하기 위해 배준석의 약혼녀를 납치하고 유 선생을 매수했다고 떠들었다.물론 유영의 편을 드는 쪽도 있었다. 누군가는 한지음이 먼저 유부남에게 꼬리쳤으니 당해도 싸다고 했다.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유영의 처벌 수단이 너무 악랄했다고 욕했다.유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터져 나오는 기사에 조금씩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그만 봐요.”운전대를 잡은 박연준이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유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저를 걱정해 주는 건가요?”“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요?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요?”박연준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모든 사람들이 저를 손가락질하는데도 박 대표님은 여전히 저를 믿어주시네요.”유영은 그의 이런 배려가 감사했다.모두가 그녀를 사악한 마녀라고 욕하는 시점에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었다.다른 사람이었으면 정의의 편에 선답시고 그녀를 비난했을 것이다.하지만 박연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난 강이한이랑 달라요. 난 머리가 정상이거든요.”그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유영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강이한이 좀 멍청하긴 하죠.”코끝을 찡그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박연준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그가 아는 유영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영과 완전히 달랐다.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지만 속으로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갔다. 이미 끝난 관계라고 해도 그녀와 강이한 사이에는 10년의 시간이 있었다.하지만 단순한 사업 파트너인 박연준보다도 그들 사이에는 믿음이 없었다.“유영
“그렇게 됐어요.”“못난 녀석. 널 크리스탈의 대표 자리에 올린 건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으라고 올린 게 아니야!”“네. 제가 좀 못났죠?”지난 밤에 배준석 약혼녀 사건 때문에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고 나왔더니 나오자마자 이렇게 여론의 풍파가 일어날 줄이야!강이한이 전에 했던 일들은 이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정국진이 물었다.유영은 우아하게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그냥 무시하려고요.”그랬다. 이게 그녀의 입장 표명이었다.그녀가 보기에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여론은 며칠 지나면 가라앉을 것이다.하지만 정국진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넌 지금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야. 조민정한테 기자회견 준비하라고 할게.”“그게 무슨 말씀이시죠?”“강이한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으라는 얘기야. 그런 인간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알겠어요.”유영은 한 번도 자신이 강이한에게 끌려다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외삼촌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청하시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 것도 분명 강이한의 작품이었다.그가 한지음과 강서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이번 일로 그 역시 철저히 그녀와 선을 그었다고 볼 수 있었고 이건 유영도 바라던 바였다.전화를 끊자 박연준이 잘 자른 스테이크를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먹어요.”“감사해요.”“정 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기자회견을 잡겠다고 하던데요?”“유영 씨의 입장을 분명히 할 때이긴 하죠. 그렇지 않으면 그쪽에서 계속 들러붙을 테니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 이게 맞아요.”정말 끈질기게 따라다닐까?지금 상황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유영은 덤덤히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맛은 어때요?”“좋네요.”유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박연준의 앞으로 내밀었다.“한번 드셔볼래요?”무의식적인 행동
그 시각 강이한의 본가.강서희는 자신의 방에서 핸드폰으로 기사를 읽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진영숙이 화를 못 이겨 행패를 부리는 소리였다.강서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방을 나섰다. 진영숙이 아래층에서 통화하고 있었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그쪽에서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나 진영숙의 얼굴이 분노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둘이 잘 지낸다고 했잖아!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또 한지음 쪽에 문제가 생긴 거니?”진영숙은 강이한과 통화하고 있었다.예전에 진영숙은 유영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싫었다.하지만 그녀의 배후에 로열 글로벌이 버티고 있다는 것과 정국진 회장이 그녀를 후계자로 육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유영을 놓치기 싫었다. 그래서 강이한에게 빨리 유영과 화해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그런데 유영이 마음 속의 응어리를 내려놓기도 전에 강이한이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쾅!강이한이 또 뭐라고 했는지 그녀는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본가의 고용인들은 경직된 자세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강서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진영숙에게 다가갔다.“엄마,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거야?”겉으로는 진영숙을 관심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던 유영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진영숙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나랑 어디 나갔다 오자.”“어딜 가려고?”“강주!”진영숙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강서희는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음은 줄곧 강이한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했지만, 진영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 강이한이 그렇게 한지음을 감싸고 돌았으니 마음이 변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진영숙은 이익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강이한과 유영의 사이가 이 정도로 틀어졌으니 골머리가 아팠다. 진영숙도 바보는 아니
박연준은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정말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강이한이 화난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네?”유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기분이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일에 박 대표님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요.”남자를 이용해서 강이한을 자극하는 일? 그런 비겁한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박연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용이 아니에요.”결국 유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박연준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갔다.기자는 모두 조민정이 부른 사람들이었고 정국진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너무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이유영 대표님, 밖에서 사람들이 대표님을 아주 악랄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남편과 이혼했을 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복동생의 수술까지 방해하여 완전히 실망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이것에 대해 이유영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동생이 있는 것도 몰랐어요. 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은 저예요.”“정말 그런가요?”“네. 여기 호적등본을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유영은 가족등기부를 꺼내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한지음을 비난하지 않았고 그녀가 외도해서 낳은 사생아라는 얘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유영은 학교 때 등록한 가족 증명 서류까지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만약 한지음 씨가 진짜 대표님의 이복동생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아니요. 저에게는 동생이 없어요.”유영은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이 대표님!”“이 질문은 그만해 주시면 안 될까요?”유영은 이 주제를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가 과거에 바람을 피우고 그것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했다. 그럴수록 한지음에 대한 증오만 커져갔다.“그럼 다음 질문으로 이어가죠.”기자들은 그녀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압박하지 않았다.“외부 소문에 의하면 한지음
기자회견이 끝나고 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손목에서 압박감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풍기고 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박연준이 보였다.“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다고요?”“동교 신도시 개발 사업, 그거 돈 엄청 되는 사업이잖아요. 당연히 그걸 얘기한 거죠.”유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자가 그녀의 턱을 잡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유영은 그의 눈에서 열망을 보았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이거 좀 놓고 얘기해요.”“나를 이용해서 강이한을 자극하기 위한 대답이었나요?””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한 사람은 대표님이시잖아요.”박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여우였네요.”“미안해요. 아까는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제가 좀 경솔했어요.”기자의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던 게 그녀의 실수였다.“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생각났다는 거잖아요.”박연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회귀하기 전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는 강이한을 떠나면 살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한편, 강이한은 회사에서 기자회견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박연준 얘기를 하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자 주변 공기마저 차가워졌다.사무실을 방문한 이시욱은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을 보고 흠칫하며 그에게 다가갔다.“대표님.”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리고 탁 하고 소리 나게 라이터를 책상에 던지자 라이터가 두 동강이 났다. 남자는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뒤에 말했다.“아무런 실수가 없었다는 거지?”이시욱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발신 위치는 분명히 홍문동이었습니다.”홍문동은 그와 유영이 과거에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한숨이 나왔다.그는 짜증
“주문 상황은요?”유영이 걱정하는 건 회사가 그녀의 일로 영향을 받지 않을까였다.지현우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그 말을 듣고 유영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탈 가든은 그만큼 고객 신뢰도가 높은 기업이었다.“사건은 조사해 봤나요?”“기사를 발표한 계정이요?”“네.”“누구인가요?”유영의 질문에 지현우가 답했다.“게스트 계정이었는데 실명 인증을 하지 않고 휴대폰으로만 등록되어 있었습니다.”“누구 번호죠?”“그 번호의 주인은 강서희입니다.”유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서희, 또 너야?’“그럼 신고하죠?”전에는 단지 플랫폼에서 신고만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상대가 강서희라면 말이 달라진다. 지현우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지현우가 나간 뒤, 유영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기사를 보고 놀라서 전화를 걸어온 소은지였다.“그래, 은지야.”유영의 피곤한 목소리에 소은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너는 괜찮아?”소은지는 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하면 모든 고난이 끝날 줄 알았다.그런데 다 끝난 마당에 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말하자면 길어. 난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 맞지?”그녀의 힘없는 목소리에 소은지는 더 조바심이 났다.“응. 괜찮아.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강이한은 뭐래?”전화를 끊기 전에 소은지가 물었다.“여전히 안 믿지 뭐.”잠시 정적이 흐르고 소은지가 말했다.“그 미친년 정말 대단한 일을 벌였네!”“그만큼 조작된 증거가 많다는 거겠지.”유영이 말했다.전에 강이한이 그녀에게 휴대폰번호를 보여줄 때 그 역시 조사에 착수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 조사 결과는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 나왔다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지금 그런 인간을 이해한다는 거야?”“그런 얘기 아니야.”강이한을 이해한다?그냥 한심할 뿐이고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이제 관심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