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은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정말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강이한이 화난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네?”유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기분이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일에 박 대표님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요.”남자를 이용해서 강이한을 자극하는 일? 그런 비겁한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박연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용이 아니에요.”결국 유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박연준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갔다.기자는 모두 조민정이 부른 사람들이었고 정국진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너무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이유영 대표님, 밖에서 사람들이 대표님을 아주 악랄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남편과 이혼했을 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복동생의 수술까지 방해하여 완전히 실망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이것에 대해 이유영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동생이 있는 것도 몰랐어요. 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은 저예요.”“정말 그런가요?”“네. 여기 호적등본을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유영은 가족등기부를 꺼내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한지음을 비난하지 않았고 그녀가 외도해서 낳은 사생아라는 얘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유영은 학교 때 등록한 가족 증명 서류까지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만약 한지음 씨가 진짜 대표님의 이복동생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아니요. 저에게는 동생이 없어요.”유영은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이 대표님!”“이 질문은 그만해 주시면 안 될까요?”유영은 이 주제를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가 과거에 바람을 피우고 그것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했다. 그럴수록 한지음에 대한 증오만 커져갔다.“그럼 다음 질문으로 이어가죠.”기자들은 그녀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압박하지 않았다.“외부 소문에 의하면 한지음
기자회견이 끝나고 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손목에서 압박감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풍기고 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박연준이 보였다.“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다고요?”“동교 신도시 개발 사업, 그거 돈 엄청 되는 사업이잖아요. 당연히 그걸 얘기한 거죠.”유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자가 그녀의 턱을 잡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유영은 그의 눈에서 열망을 보았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이거 좀 놓고 얘기해요.”“나를 이용해서 강이한을 자극하기 위한 대답이었나요?””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한 사람은 대표님이시잖아요.”박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여우였네요.”“미안해요. 아까는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제가 좀 경솔했어요.”기자의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던 게 그녀의 실수였다.“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생각났다는 거잖아요.”박연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회귀하기 전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는 강이한을 떠나면 살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한편, 강이한은 회사에서 기자회견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박연준 얘기를 하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자 주변 공기마저 차가워졌다.사무실을 방문한 이시욱은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을 보고 흠칫하며 그에게 다가갔다.“대표님.”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리고 탁 하고 소리 나게 라이터를 책상에 던지자 라이터가 두 동강이 났다. 남자는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뒤에 말했다.“아무런 실수가 없었다는 거지?”이시욱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발신 위치는 분명히 홍문동이었습니다.”홍문동은 그와 유영이 과거에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한숨이 나왔다.그는 짜증
“주문 상황은요?”유영이 걱정하는 건 회사가 그녀의 일로 영향을 받지 않을까였다.지현우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그 말을 듣고 유영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탈 가든은 그만큼 고객 신뢰도가 높은 기업이었다.“사건은 조사해 봤나요?”“기사를 발표한 계정이요?”“네.”“누구인가요?”유영의 질문에 지현우가 답했다.“게스트 계정이었는데 실명 인증을 하지 않고 휴대폰으로만 등록되어 있었습니다.”“누구 번호죠?”“그 번호의 주인은 강서희입니다.”유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서희, 또 너야?’“그럼 신고하죠?”전에는 단지 플랫폼에서 신고만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상대가 강서희라면 말이 달라진다. 지현우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지현우가 나간 뒤, 유영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기사를 보고 놀라서 전화를 걸어온 소은지였다.“그래, 은지야.”유영의 피곤한 목소리에 소은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너는 괜찮아?”소은지는 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하면 모든 고난이 끝날 줄 알았다.그런데 다 끝난 마당에 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말하자면 길어. 난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 맞지?”그녀의 힘없는 목소리에 소은지는 더 조바심이 났다.“응. 괜찮아.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강이한은 뭐래?”전화를 끊기 전에 소은지가 물었다.“여전히 안 믿지 뭐.”잠시 정적이 흐르고 소은지가 말했다.“그 미친년 정말 대단한 일을 벌였네!”“그만큼 조작된 증거가 많다는 거겠지.”유영이 말했다.전에 강이한이 그녀에게 휴대폰번호를 보여줄 때 그 역시 조사에 착수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 조사 결과는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 나왔다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지금 그런 인간을 이해한다는 거야?”“그런 얘기 아니야.”강이한을 이해한다?그냥 한심할 뿐이고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이제 관심
그 시각 진영숙은 강서희와 함께 강주를 방문했다. 한지음은 며칠 전보다 더 야위어 있었고 얼굴색도 창백했다.하지만 진영숙은 더 이상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았다. 전에 한지음에게 느꼈던 고마운 마음은 이번 일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그들이 도착하자 간병인은 긴장한 얼굴로 차를 내왔다.한지음은 불안에 떠는 간병인의 기분을 느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리 좀 비켜주세요.”“네, 아가씨.”간병인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한지음을 힐끗 보고는 도망치듯이 주방으로 달려갔다.거실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진영숙은 험악한 표정을 드러냈다.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했니?”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다.진영숙은 처음에 한지음이 유영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건 절대 언론에 공개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영이 그만큼 한지음을 증오했기 때문이었다.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하게 된 것도 한지음 때문인데 이 관계까지 언론에 드러나면 세강에도 타격이 컸다. 현재도 모두가 세강의 가정사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영숙이었기에 이번 일이 더욱 화가 났다.“아줌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사실 한지음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녀와 강서희는 한때는 동맹이었지만 기껏해야 강서희에게서 강이한의 동향을 듣는 일에 불과했다.강이한이 유영과 함께 있는 시간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 유영을 자극한 게 다였다.진영숙은 찻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음, 한때는 네 상황이 가련해서 내가 많이 봐주려고 했어.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어!”한지음에 대한 일말의 연민의 감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그만큼 실망이 컸다.강서희가 옆에서 진영숙을 말렸다.“엄마, 화 풀어. 어쩌면 뭔가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오해는 무슨 오해!”오해라는 소리에 진영숙은 더 화가 났다.전에 유영과 강이한이 이혼한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야. 알아들었으면 앞으로 얌전히 지내. 그러면 지금처럼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말을 마친 진영숙은 더 이상 얼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강서희는 먼저 밖으로 나간 진영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지음을 보며 말했다.“엄마가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이유영이 요즘 나락 갔거든.”그 말이 한지음에게는 가장 큰 위로였다.그녀는 유영을 증오했고 유영의 괴로움이 그녀의 위로였다.“아직 부족해!”“배준석이 돌아왔어. 약혼녀가 납치당했다는 소식 듣고 너 수술하는 날 수술 포기하고 달려나간 주치의 말이야. 지금 모든 증거가 유영을 향하고 있어.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강서희의 말에 한지음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영이 뭘 하든 이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말을 마친 강서희도 서둘러 나가버렸다.홀로 남은 한지음은 멍하니 앉아 주변의 암흑을 피부로 느꼈다.이런 숨막히는 암흑을 체감할수록 유영이 더 증오스러울 뿐이었다.간병인이 주방에서 나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모님도 참… 어떻게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할 수가 있죠?”간병인은 한지음을 착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전에는 앞을 못 보는 장님이라 만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점차 한지음의 힘든 처지를 공감하게 되었다.그래서 간병인들은 진심으로 한지음을 따랐다.한지음은 간병인의 손등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재벌가 사람들은 출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죠.”“가장 중요한 건 인품 아닌가요? 그 언니라는 사람은….”“그만해요!”한지음은 싸늘한 목소리로 간병인의 말을 끊었다.유영을 감싸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냥 유영을 언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유영이 그녀를 거부하는 것 만큼 그녀 역시 유영이 증오스러웠다.어릴 때 겪은 모든 고난을 생각하면 유영의 사지를 찢어 죽여도 부족했다.분명 같은 아버지를 가졌는데
박연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난 유영 씨가 다른 얘기를 할 줄 알았어요.”유영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 믿어요.”걱정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박연준이 말했다.이번에 강이한은 절대 유영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모든 증거가 유영을 향하고 있었고 결국 강이한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두 사람 사이에 신뢰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기에 더욱 그랬다.유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꿎은 술만 들이켰다.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강이한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그의 손에 대체 얼마나 많은 로열 글로벌 관련 약점을 쥐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정 회장님도 대비를 해뒀을 거예요.”“그래야겠죠.”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와 10년을 함께 했기에 그가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해 정국진을 공격한 일만 놓고 봐도 그랬다.이제 한지음이 실명한 원인이 유영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 그때보다 더 거센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유영 씨.”“네.”“출국하는 거에 대해 고민해 봤어요?”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박연준은 혼란스러운 이 도시에 계속 머물기보다 밖으로 나가는 게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다.“그럼 동교 프로젝트는 어떡해요?”“기초를 잘 다졌으니 앞으로는 직원들에게 맡기면 돼요.”박연준이 말했다.그는 유영이 이곳을 떠났다가 일이 다 조용히 해결된 뒤에 돌아오기를 바랐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고민했다.머릿속에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강이한이 떠오르자 결국 그녀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곧 새해도 돌아오니 파리로 날아가서 외삼촌과 함께 명절을 같이 보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어차피 기사에서 어떻게 떠들어대든 무시하면 결국 지나갈 것이다.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수록 하이에나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정말 생각보다 더 뻔뻔한 인간이었네. 바깥이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여기서 데이트를 즐길 여유까지 있다니.”배준석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는 원래 항상 밝은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도 악담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유영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의 목에 칼을 꽂고 싶었다.유영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배준석을 노려보았다.그녀가 뭐라고 하려는데 박연준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그의 그런 행위에 자극 받은 배준석이 차갑게 코웃음쳤다.“하,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여자는 다르네.”“배준석,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인신공격을 퍼붓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박연준, 저 여자는 이한이 형 전처야. 둘이 이렇게 붙어 다니는 거 집에서 알아?”배준석은 가소롭다는 듯이 박연준을 노려보며 말했다.유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가 뭐라고 해명하려고 했지만 배준석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예쁘면 뭐해. 그래 봐야 이혼녀잖아. 안 그래?”유영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배준석 씨,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범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나한테 찾아와서 화풀이할 이유가 없다고요.”“무죄라. 이유영, 결국 정국진 믿고 그러는 거잖아? 모든 증거가 밝혀졌을 때도 그렇게 고고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유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과 더 이상 실랑이를 벌여도 소용없었기에 박연준의 손을 잡아끌었다.배준석이 다가와서 그녀의 앞을 막았다.“그런 짓을 했으면 당당히 인정을 해야지. 욕 좀 했다고 벌써 화를 내는 거야?”“경찰에 신고했다면서요. 나한테 행패를 부려서 얻는 게 뭐죠? 정신 좀 차려요. 아직 조사가 끝나지도 않았다고요.”유영도 차갑게 받아치며 루이스에게 눈짓했다.루이스가 앞으로 나섰다.유영은 박연준의 팔을 잡고 뒤돌아섰다. 배준석이 따라가려 했지만 루이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이번에는 아가씨
그녀가 전에 분실한 카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지음 납치와 배준석 약혼녀의 납치 모두 그 카드로 출금한 내역이 있었다.강서희는 그녀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다행히도 지현우가 카드의 행방을 알아냈다.“나한테 보내줘요.”“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유영은 서둘러 메일에 접속했다.박연준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강서희와 관련된 단서를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핸드폰을 박연준에게 보여주었다.메일에는 납치범들에게 입금한 날짜와 강서희가 같은 날 은행에 출입한 시간이 쓰여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본가와 멀리 떨어진 은행으로 가서 입금했다.다행히 정국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행방을 추적해서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강서희 본인도 아마 정국진의 사람들이 이 일을 추적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사설 탐정이 아니라 정국진의 인력을 동원할걸, 유영은 후회했다.안타깝게도 그때는 외삼촌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주저했던 것이 사건을 지체하는 원인이 되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증거들을 신속히 공개하는 게 우선이었다.박연준에게서 핸드폰을 받은 그녀는 당장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휴대폰 화면에 기사 알람이 었다.‘천문학적 가격으로 판매되는 보석의 원가는 단돈 5천원?’너무 터무니없는 기사라 그녀는 무시하려고 했다.하지만 기사의 제목에 커다랗게 뜬 크리스탈 가든이라는 문구가 그녀의 이목을 끓었다.기사를 확인하자마자 지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당장 회사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지현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기사가 크리스탈 가든을 저격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 현기증이 몰려왔다.박연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유영은 착잡한 시선으로 박연준을 바라
강이한은 조용히 이유영을 방으로 데려다주었다.방 안에서는 이미 우지와 우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이한이 문밖으로 나가자, 이유영이 차분히 물었다.“연락해 봤어요?”정국진과 임소미와의 연락을 의미했다.“아가씨, 모르셨나요? 우리가 여기로 올 때 강 선생님이 우리의 휴대폰을 전부 통제하셨어요!”이유영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이유영의 표정은 우지와 우현의 말을 듣는 순간 다시 굳어졌다.강이한, 제정신이 아니구나!우지가 말을 이었다.“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아가씨의 눈이 나아질 때까지는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라고 하셨어요!”이유영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이 강이한!이게 대체 뭐야? 늘 그랬듯이 언제 어디서든 자기 멋대로 하겠다는 거야?지금 상황에서 강이한이 정말 몰래 이유영을 데려온 거라면 백산 별장 쪽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그렇다면 부모님 쪽은...!이유영이 생각했던 대로였다.아침부터 지금까지, 임소미와 정국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특히 임소미는 계속해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정국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때, 여진우가 돌아왔다.임소미는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어때? 소식 있어?”‘소식’은 이유영의 행방에 관한 것이었다. 임소미는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애초에 강이한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임소미와 정국진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강이한 옆에 있으면 사건 사고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없어요.”하지만 여진우가 가져온 소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그 말은 임소미의 이미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했다.“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강이한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갖춘 거라도 된다는 말인가? 사실 강이한이라는 인물은 누구에게나 항상 베일에 싸여 있었다.임소미의 초조함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여진
전생에서 이유영은 손을 뻗기만 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곤 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어둠이 여전히 두렵고 무섭지만, 전생의 기억 탓인지 어딘가 익숙하기도 했다.어둠 속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덕분일까? 기본적인 생활은 오히려 이유영이 가장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그런 이유영을 바라보며 강이한의 마음은 아픔으로 물들었다.강이한은 깊은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게 아니야. 지금은 이런 문제를 다룰 때가 아니야.”“...”“네 눈을 치료하고 나서, 우리 사이의 문제는 네 뜻대로 해결해.”강이한의 말은 하나하나 무겁고 또렷했다.이유영의 뜻대로?“나는 너를 천 번이라도 갈기갈기 찢고 싶을 만큼 증오해.”“좋아. 그럼 내가 칼을 네 손에 쥐여줄게. 어때?”그렇게 하면 되는 걸까? 이렇게 하면 이유영이 치료에 협조해 줄까?“...”온몸이 얼어붙은 듯했고 답답했던 가슴은 더욱 숨이 막혔다.강이한의 말은 언제나 마치 주먹을 솜에 내리친 듯 공허하고 숨 막히게 했다.“흥.”이유영이 더는 따지지 않자 강이한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유영의 시력 문제였다.다른 문제는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 이유영의 뜻에 따라 다시 다뤄도 늦지 않았다.저녁 식사가 끝났다.이유영은 작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살짝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식들은 이유영의 입맛에 잘 맞는 듯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표정을 보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이유영은 사실 음식에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이유영과 함께했던 시간 동안에도 강이한은 이유영의 입맛에 맞추느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생각하기만 하면 답답한 마음에 참을 수 없었다.그때 이유영이 물었다.“언제 돌아갈 거야?”이유영의 물음은 여전히 단도직입적이었다. 강이한과 이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망설인 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네 눈이 회복되면, 그때 떠날게.”이유영은
과거의 강이한에게는 이유영과 함께 이런 여유로운 장소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이유영은 음식을 특별히 거부하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갔을 때, 그곳 음식이 전혀 입에 맞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그 후 서주에 머물던 동안에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지만, 다행히 박연준이 정성을 다해 챙겨줬다.한지음과 이온유가 없을 때는 강이한의 관심이 온전히 이유영에게 향했었다.하지만 그 둘이 함께 있었을 때는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남는 관심을 겨우 받을 뿐이었다.이유영은 문득 생각했다.“얼마나 됐지?”이유영의 예기치 않은 질문이 강이한의 가슴을 세차게 조였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질문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챘다.“유영아, 미안해.”강이한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했다.강이한은 최근에서야 깨달았다.자신이 얼마나 이유영을 외면해 왔는지를. 연서의 사건이 터진 후, 강이한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지나간 감정.이 단어는 언제나 무겁게 느껴진다.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지나간 감정이 상처를 더 깊게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그러나 그가 이유영과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였을 뿐이다.“흥!”이유영은 강이한의 사과에 차가운 냉소로 응답했다.유천의 음식은 대체로 매콤한 편이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눈 상태를 염려해 매운 음식을 철저히 배제했다. 대신 음식을 담백하고 특별하게 준비했는데 그럼에도 맛있는 요리였다.저녁 식사.테이블에는 이유영과 강이한 단둘만이 있었다.“우지 씨는?”이유영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우지와 우현의 부재를 눈치챘다.“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했을 것 같아 따로 식사하게 했어.”이유영은 강이한의 대답을 듣고 더 차갑게 굳어갔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런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다.“이 국물 좀 먹어봐. 족발이 들어갔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아. 너 예전에 이거 먹고 싶다고 계속 말했잖아.”이유영이 우천에서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은 아주 많았었다. 다만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손을 뻗었다.강이
차에서 내릴 때, 강이한이 자연스레 이유영을 안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유영의 단호한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우지 씨.”“네, 아가씨.”강이한의 손이 닿기 전, 우지가 서둘러 다가와 이유영의 곁에 섰다. 우지는 이유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이유영은 귀를 기울이며, 주변의 적막함과 선선한 바람 속에서 지금이 밤임을 직감했다.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는 차갑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부드러웠다. 어디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어떤 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향기는 달콤하면서도 상쾌했다.입구에서.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부축하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문턱이 있어요.”문턱? 강이한이 데려온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이유영의 마음속에 의문이 떠올랐다.집 안에 들어서자 은은한 나무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그리고 은은한 페인트 냄새도 섞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지만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향이었다.“선생님, 돌아오셨군요.”집사가 다가와 공손히 강이한에게 인사했다.강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분간 여기서 머물 거예요.”“예,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집사는 공손히 대답했다.강이한은 이미 도착 전에 이곳을 정리하도록 지시했던 듯했다.전통 가옥의 집은 제대로 청소하고 정돈해야 비로소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집사는 강이한과 이유영을 방으로 안내했다.우지는 정원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집은 크지 않았지만 아늑했고 작은 정원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심겨 있었다.그 덕분에 공기마저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이유영은 방 안에 들어와 단단한 나무 의자에 앉으며 손끝으로 그 감촉을 느꼈다.이곳 환경에 궁금했다.“우지 씨.”“네, 아가씨. 물 드실래요?”“여기는 어디예요?”이유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환경은 이유영에게 항상 큰 공포를 주었다. 주변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참기 어려웠다.“여긴 전통 가옥이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차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차 안에 있던 강이한과 이유영 외의 모든 사람, 특히 우지와 우현은 숨조차 삼가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모두가 이유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선명히 느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연서라는 사람이 강이한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 문서를 보게 된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연서는 강이한에게 있어 한지음이나 이온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다.그 오랜 세월 동안, 강이한은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 그만큼 그 이름은 강이한의 마음속 깊이 봉인된 듯한 존재였다.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그 이름만 떠올려도 그의 가슴은 터질 듯한 고통으로 무너졌다.그리고 지금, 연서의 이름을 다시 언급하자 강이한의 마음은 다시금 옥죄어왔다.연서...“하하.”이유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 비웃음은 강이한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했다.“유영아...”“강이한, 만약 연서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여자가 너에게 날 죽이라고 하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강이한은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한지음을 위해서도 이유영에게 그렇게 잔혹하게 굴었던 강이한이다. 만약 그것이 연서라면? 이유영에게는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이유영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그 태도는 강이한의 숨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유영아, 사실은...”“그럴 거야, 맞지?”“아니!”강이한은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그의 부정에도 이유영의 냉소는 더욱 짙어졌다.“한지음을 위해서 넌 강무혁을 감옥에 보냈잖아. 연서는 한지음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 아닌가?”지금 와서 아니라고? 누가 믿겠는가!강이한은 몸이 굳어버렸다.강이한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이유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의미 없어.”“홍문동 그 화재에 대해 난 전혀 몰랐어!”이유영이 예전에 말
이유영은 이미 강이한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도 강이한은 이미 이유영이 모든 걸 놓아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이 연서라는 이름을 알고 난 후, 그건 단순히 내려놓은 정도를 넘어선 감정이었다.“강 선생님, 아가씨를 내려놓으세요.”우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서 강이한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상황에서 우지가 이런 용기를 낸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상황이 어떻든, 이유영을 지키려는 우지의 태도는 꽤 인상적이었다.강이한은 앞을 막아선 우지를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비켜.”짧은 두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차가움과 위협이 짙게 묻어 있었다.“아가씨께서는 강 선생님께 안기는 걸 원하지 않으십니다.”우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원하지 않는다고그 말은 강이한의 차가운 분위기를 한층 더 얼어붙게 했다.하지만 우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강 선생님, 아가씨께서 함께 유천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아가씨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최대한의 배려?그래, 이유영의 본래 뜻은 파리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지금 이유영은 강이한과 함께 어떤 곳으로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이유영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단 하나, 우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임소미가 걱정할 것이라고 했던 말 때문이었다.그렇다. 임소미가 걱정할 것 같아 이유영은 잠시 집으로 돌아가려던 뜻을 접었다.이유영은 아직 어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 임소미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임소미의 마음은 걱정과 슬픔으로 가득 찰 것이다.이유영은 가족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억지로나마 머물러 있는 것이다.결국 강이한은 우지의 말을 무시한 채, 이유영을 안은 그대로 차로 걸음을 옮겼다.우지와 우현은 할 수 없이 뒤따라갔다.차 안.“그 사람, 믿을 만해?”강이한이 자신을 데리고 유천까지 온 것만 봐도 그 의사는 분명 특별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걱정하지 마. 철
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온몸이 굳어버렸다.어머니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크게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다.마음속에서 요동치던 불안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간절함은 이 순간 잠잠해지며 차분함이 찾아왔다.“아가씨.”“우지 씨, 물 좀 가져다주세요.”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우지는 서둘러 나갔다가 금방 물을 들고 돌아왔다.강이한은 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 안이 차분해진 모습을 보며 강이한의 눈에 안도감이 비쳤다.역시, 익숙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상황이 달랐다.지금 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것이 강이한을 가장 답답하게 했다.하지만 지금은 우지와 우현이 함께 있으니, 이유영도 차분해진 것 같았다.비행기가 유천에 착륙했다.그 순간, 마치 공기까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리와 서주의 날씨는 좋지 않은 날이 많았지만 유천은 달랐다.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불리며 은퇴한 사람들이 여생을 즐기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었다.독특한 지역 문화를 담은 공항의 건축 양식을 바라보며 강이한은 그곳에 한눈에 반한 듯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이유영은 강이한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그가 느끼는 편안함을 감지하고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는 이곳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유영도 과거 유천의 특별한 매력을 들었을 때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유영과 강이한은 늘 긴박한 환경 속에서 지내왔기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유영아, 조금만 얌전히 있어. 여긴 낯선 곳이니 내 옆에 있는 게 안전해.”강이한은 이유영이 어둠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민감해도 지금 있는 이곳은 완전히 낯선 환경이었다.그가 기억하는 지난 생애에서 이유영이 시력을 잃은 뒤 거의 홍문동을 벗어나지 않았다.그곳에서는 기본적인 생활은 어느 정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
한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갈등이나 의견 차이가 있을 때마다 둘 사이의 아름다웠던 기억들에 기대어 버텼다.이유영은 자신과 강이한의 만남은 아름답고 추억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아무리 아름다웠던 기억도 이유영의 마음을 지탱해 주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그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를 일찌감치 떠나온 것을.만약 아직도 미련을 붙잡고 있었다면, 가장 소중했던 추억들이 거대한 음모 속에서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유영은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도 이유영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다른 건 모두 네 뜻대로 해도 돼. 하지만 유천에 가는 건 반드시 내 말대로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조심스레 침대 위로 눕혔다. 지금 강이한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은 너무나 강압적이었다. 이유영은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그 감각은...이유영의 마음을 한없이 불안하게 했다.이유영은 깨달았다. 마치 자신이 지난 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시절, 이유영은 너무 오랫동안 어둠 속에 머물며 어둠에 대한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그리고 그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이유영의 머릿속으로 몰려들었다.강이한이 방을 나갔다.잠시 후, 우지와 우현이 방으로 들어왔다.“아가씨.”우지가 이유영의 곁으로 다가왔다.우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유영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우지 씨,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아가씨… 혹시, 눈이...”우지는 이유영의 두 눈을 보고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조차 초점 없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우지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이유영은 예상하지 못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여기로 데려온 것도 모자라 반산월에서 우지까지 데려올 줄은.“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이유영은 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미칠 듯 서글펐고 동시에 눈물까지 흘러내릴 만큼 절망적이었다.“유영아...”강이한은 이유영의 웃음에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돼서는 안 됐다. 왜 꼭 이런 지경까지 와야만 했을까? 그리고 이렇게까지 오게 된 게, 과연 누구 탓인가?이유영은 광기가 폭발하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평온을 되찾았다.하지만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이유영의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강이한은 그 떨림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강이한, 네 인생에서 나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아.”한때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전생의 기억까지 모두 떠올랐다...사람들은 말했다. 이유영은 복 받은 여자라고. 강이한에게 아낌없이 사랑받으며, 그저 강씨 가문의 작은 부인으로 편안히 지내기만 하면 되는 인생이라고.강이한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선택하든, 항상 강이한이 결정했고 이유영은 강이한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혼자 선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제 와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을 때, 강이한 역시 깨달았다. 자신이 이유영의 삶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 잡았는지를.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그래서 무엇이든 그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이유영의 삶을 세세히 돌보는 데도 강이한의 성격이 드러났다.작은 것 하나까지 강이한의 뜻에 따라야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이유영은 그에게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게 되었다.“유영아...”과거, 모두 이유영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알아?”“...”이유영이 계속해서 강이한에게 상기시켰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이 다시금 이혼 이야기를 꺼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