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생각보다 더 뻔뻔한 인간이었네. 바깥이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여기서 데이트를 즐길 여유까지 있다니.”배준석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는 원래 항상 밝은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도 악담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유영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의 목에 칼을 꽂고 싶었다.유영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배준석을 노려보았다.그녀가 뭐라고 하려는데 박연준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그의 그런 행위에 자극 받은 배준석이 차갑게 코웃음쳤다.“하,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여자는 다르네.”“배준석,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인신공격을 퍼붓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박연준, 저 여자는 이한이 형 전처야. 둘이 이렇게 붙어 다니는 거 집에서 알아?”배준석은 가소롭다는 듯이 박연준을 노려보며 말했다.유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가 뭐라고 해명하려고 했지만 배준석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예쁘면 뭐해. 그래 봐야 이혼녀잖아. 안 그래?”유영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배준석 씨,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범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나한테 찾아와서 화풀이할 이유가 없다고요.”“무죄라. 이유영, 결국 정국진 믿고 그러는 거잖아? 모든 증거가 밝혀졌을 때도 그렇게 고고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유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과 더 이상 실랑이를 벌여도 소용없었기에 박연준의 손을 잡아끌었다.배준석이 다가와서 그녀의 앞을 막았다.“그런 짓을 했으면 당당히 인정을 해야지. 욕 좀 했다고 벌써 화를 내는 거야?”“경찰에 신고했다면서요. 나한테 행패를 부려서 얻는 게 뭐죠? 정신 좀 차려요. 아직 조사가 끝나지도 않았다고요.”유영도 차갑게 받아치며 루이스에게 눈짓했다.루이스가 앞으로 나섰다.유영은 박연준의 팔을 잡고 뒤돌아섰다. 배준석이 따라가려 했지만 루이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이번에는 아가씨
그녀가 전에 분실한 카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지음 납치와 배준석 약혼녀의 납치 모두 그 카드로 출금한 내역이 있었다.강서희는 그녀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다행히도 지현우가 카드의 행방을 알아냈다.“나한테 보내줘요.”“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유영은 서둘러 메일에 접속했다.박연준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강서희와 관련된 단서를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핸드폰을 박연준에게 보여주었다.메일에는 납치범들에게 입금한 날짜와 강서희가 같은 날 은행에 출입한 시간이 쓰여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본가와 멀리 떨어진 은행으로 가서 입금했다.다행히 정국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행방을 추적해서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강서희 본인도 아마 정국진의 사람들이 이 일을 추적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사설 탐정이 아니라 정국진의 인력을 동원할걸, 유영은 후회했다.안타깝게도 그때는 외삼촌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주저했던 것이 사건을 지체하는 원인이 되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증거들을 신속히 공개하는 게 우선이었다.박연준에게서 핸드폰을 받은 그녀는 당장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휴대폰 화면에 기사 알람이 었다.‘천문학적 가격으로 판매되는 보석의 원가는 단돈 5천원?’너무 터무니없는 기사라 그녀는 무시하려고 했다.하지만 기사의 제목에 커다랗게 뜬 크리스탈 가든이라는 문구가 그녀의 이목을 끓었다.기사를 확인하자마자 지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당장 회사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지현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기사가 크리스탈 가든을 저격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 현기증이 몰려왔다.박연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유영은 착잡한 시선으로 박연준을 바라
굳이 누가 얘기해 주지 않아도 강이한과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그게….”이번에 그녀는 더 이상 지난 번처럼 일을 숨기지 않았다.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진행되었는데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았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정국진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너 미친 짓인 건 알고 이러는 거야?”“외삼촌….”“당장 다 내려놓고 파리로 돌아와!”“하지만 회사는….”“내가 사람 보내서 처리할게!”정국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같은 남자로서 강이한이 미친 사람처럼 유영을 물어뜯기 시작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그래서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할 테지만 정국진은 일단 이유영부터 빼돌리기로 했다.그와 강이한 사이에 쌓인 원한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도 늦지 않았다.“그럼 지금 회사로 갈까요?”“손에 맡은 업무 인수인계 작업만 마무리하고 내일 아침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들어와.”“알겠어요.”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이럴수록 외삼촌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차는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려는데 손목에서 강력한 힘이 그녀를 잡았다.고개를 돌리자 박연준이 진지하면서도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 있나요?”그가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유영을 힐끗 보고는 식지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박연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그녀를 잡고 있던 손도 어느새 힘을 뺀 상태였다.박연준이 말했다.“알겠어, 지금 갈게.”전화를 끊은 그는 유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어요?”그녀의 등 뒤에서도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돋고 있었다.가장 두려운 건 모든 일이 같이 터지는 것이었다.그렇다는 건 상대가 이 날을 위해 수많은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말이기도 했다.“동교 쪽에 문제가 좀 생겨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무슨 일인데 그래요?”유영은 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막혀왔다.박연준이 말했다
회사를 나온 유영은 핸드폰으로 계속해서 강이한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루이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뒤따라왔다.걸음을 멈춘 유영이 말했다.“따라오지 마세요.”“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아가씨의 신변 안전을 위해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루이스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강이한은 그녀에 대한 모든 증오를 크리스탈 가든에 쏟아 붓고 있었다. 현재는 오밤중에 감찰 기관까지 동원한 상황.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녀 역시 쉽게 출국할 후 없을지도 모른다.계속해서 그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강이한은 받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차에 올라 루이스에게 말했다.“홍문동으로 가요.”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홍문동을 향해 차를 몰았다.사실 강이한이 홍문동에 꼭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었다.다행히도 홍문동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집사의 눈빛에서 강이한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유영 씨.”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집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유영은 집사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죠?”“대표님 께서 유영 씨는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유영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이제 방문마저 금지했다는 말인가!유영은 루이스에게 눈짓했다. 눈짓을 알아들은 루이스가 달려와서 집사를 밀어내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하지만 루이스의 도움으로 유영은 그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집사가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이럴수록 대표님의 화만 자극할 뿐이에요!”하지만 유영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이번 사건은 지난 번보다 더 심각했다.강이한은 손에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은 이상 절대 모험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안으로 들어가자 강이한이 음침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강이한!”유영은 완전히 인내심을 잃어버렸다.그녀는 온몸에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그에게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동교 개발 지역에서 인명 사고가 났다는 얘기가 틀림없었다.유영은 그의 잔인함에 눈앞이 아찔해졌다.이건 정상인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수단이었다.그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런 짓까지 버렸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지난 생이든 이번 생이든 한지음이 납치를 당한 그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이번에도 그는 외부의 적을 쳐내는 수단으로 그녀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이건 이미 잔인함의 정도를 벗어난 행위었다.이 순간에야 유영은 강이한이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전에 느꼈던 실망의 감정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녀를 완전히 적으로 상대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보였다.그는 이미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고 벼랑에서 그녀를 떨어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부족하다면 더 있어.”“내가 한 거 아니야!”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남자는 분노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도 치미는 분노를 참으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그리고 메일을 열어 자신이 수집한 증거들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똑바로 봐. 배준석 약혼녀를 납치한 진짜 범인이 누군지! 그리고 대체 누가 한지음을 납치해서 장님으로 만들었는지!”유영은 직접적으로 강서희가 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이 여자가 남긴 증거를 찾느라 동분서주하던 지난 날이 눈앞에 스치는 것 같았다.강이한은 그녀가 내민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그는 담담히 휴대폰 화면을 살폈다. 그 안에는 강서희가 은행을 출입하는 화면이 담겨 있었다.그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서희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련고?”다정하게 강서희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그 모습을 보자 유영은 눈앞이 캄캄했다.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간 것처럼 어지러웠다.그녀가 해명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항상 아니라고 말해도 믿
그녀의 처연한 눈빛과 얼굴에 진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고 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지만 억지로 참아냈다.마음속에서 어떤 소리가 또 울리고 있었다. 그의 영혼이 울고 있었다.‘이유영한테 그러면 안 돼! 그만 멈춰!’하지만 결국 분노가 그 소리를 완전히 잠재우고 말았다.“이유영, 이건 시작일 뿐이야. 당장 내 앞에서 꺼져!”그녀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나는 분명히 떠난다고 했는데 온갖 방법을 써서 나를 이 홍문동에 묶어두려고 하던 사람이 이러니까 우습네.”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강이한의 세상에서 그녀의 존재는 이렇듯 하찮은 존재였다.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애완동물에 불과했다.그리고 그가 기분이 나쁘면 언제든지 꺼지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자리에서 일어선 유영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귀뺨을 날렸다.그녀는 음침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한 거 돌려준 거야. 당신은 나를 때릴 자격도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고고한 모습으로 등을 돌렸다.강이한은 화가 나서 퍼렇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따라가려다가 핸드폰이 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여보세요.”“이한아, 서희가 경찰에 잡혀갔어!”“어떻게 된 거예요?”“이유영이야. 서희가 이유영이랑 박연준이 같이 있는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하는 바람에 신고가 들어가서….”수화기 너머로 진영숙의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이 강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강서희가 잡혀간 상황이었다.“알겠어요.”강이한은 다급히 전화를 끊고 유영을 향해 소리쳤다.“거기 서!”유영은 싸늘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그녀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문 앞에 서서 그에게 물었다.“아직도 볼일이 남았어?”“서희 경찰에 신고한 사람, 너야?”“그래.”유영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뒤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등 뒤에 다가온 강이한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돌려세웠다.분노를 담은 두 사람의
그녀는 한 번도 진정으로 그의 세상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그들의 결혼은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실패였다.그는 한번도 유영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았다. 한 달에 수천만 원의 용돈을 받으며 다른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정작 유영은 행복하지 않았다.“당장 지금 하려는 거 멈춰.”“싫어!”“이유영!”“증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당신은 믿지 않는구나. 하지만 경찰도 과연 당신처럼 멍청할까?”오늘 그녀가 가지고 온 증거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그는 그녀가 그 증거들을 경찰에 제출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두 사람의 숨막히는 기싸움이 이어졌다.남자가 거의 폭발할 때쯤, 유영이 말했다.“한지음 사고에 대해 경찰 쪽에서는 계속 추적하고 있었어. 아마 내가 증거를 가져가면 아주 좋아할걸? 어떻게 생각해?”“감히!”“뭘 위해서 나한테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거야? 일이 귀찮아질까 봐? 아니면 사실은 당신도 강서희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확고하지 않은 거 아니야?”공기마저 얼어붙었다.전에 진범이 강서희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도 유영은 한 번도 이렇게 그의 앞에서 주장을 펼친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이 남자에게 명확히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다.더 이상 없는 죄명을 뒤집어쓸 이유가 없었다.“꼭 그렇게 해야겠어?”“경찰에 증거만 제출할 뿐이야. 진범이 누구든 상관없어. 강서희가 아니라면 무사하겠지.”유영이 또박또박 말했다.남자는 그녀를 놓아주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후회하지 마.”“우리 사이에 그런 얘기하는 게 웃기지 않아? 후회라면…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그 말을 끝으로 유영은 걸음을 돌렸다.그랬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강이한을 만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고 이렇게 될 거면 왜 자신에게 한번의 삶을 더 주었는지 하늘을 탓했다. 차라리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강이한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그러면 아마 세상을 유람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결국 한번의 삶을 더 얻었지만 여전히 이 남자에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는 크리스탈 가든에서 가짜 보석을 원자재로 썼다는 기사만 올렸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인지는 다루지 않았다.지현우는 이미 준비한 자료들을 가지고 유영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그녀에게 서류를 건넸다.“최근 주문한 리스트들입니다. 감정 결과는 인터넷에서 다운했고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그녀는 비록 대표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런 일을 처리해 본 경험이 없었다. 지현우는 정국진의 옆에서 일하며 유사한 상황을 많이 겪었기에 그의 뜻에 따르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유영은 자신이 강이한을 찾아간 시간에 지현우가 이미 대처 방안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믿었다.“주문이 나간 제품들을 모두 회수하고 저희 회사에서 발주한 게 맞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는 그 작업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뭔데요?”“크리스탈 가든에서 나간 제품 중에는 가품이 있을 수 없어요!”이점에서 그녀는 정국진을 믿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신지?”“누가 가장 먼저 기사를 터뜨렸는지 확인하고 우리 고객인지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지 먼저 확인해요. 고객이 아니라면 이 기사를 발표한 사람이 우리 고객과 친분이 있는지도 확인하고요.”유영은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지현우는 이 상황에서도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영의 기지에 탄복했다는 눈빛을 보냈다.그녀는 주문이 나간 제품을 모두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믿는 쪽을 선택했다.“그럼 감찰 기관 쪽에는요?”“우리는 절대 가품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조사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세요. 아, 그리고….”유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만약 진짜 우리 고객이라면 직접 공장에 내려가서 조사를 해봐야겠어요.”그녀는 문제가 공장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만약 정말 공장 생산라인에서 생긴 문제라면 생각보다 귀찮아질 것이다.“알겠습니다.”공장 얘기가 나오자 지현우의 표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