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조형욱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남달랐다.얼마 전부터 조형욱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유영은 기억에 조형욱에게 불만을 살만한 일을 한 적 없었다.설마….그녀는 전에 한지음이 강이한의 본가에 찾아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조형욱이었다.‘남자 홀리는 재주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조 비서, 태도 똑바로 해.”강이한은 불손한 그의 태도를 보고 경고 섞인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조형욱은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히 화제를 돌렸다.“배준석 씨 오셨습니다. 지금 접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준석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드리웠다.최근 그는 줄곧 배준석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한 원인도 배준석이 수술 당일에 환자를 버리고 갔기 때문이었다.배준석이 집도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수술이었다.솔직히 말해 이번 일에서 강이한은 배준석을 원망했다.그가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일단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난….”“조 비서, 도망 못 가게 잘 지키고 있어. 놓치면 조 비서 너도 옷 벗을 줄 알아!”말을 마친 사내는 씩씩거리며 접대실 방향으로 갔다.유영은 떠나는 그의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사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비서실 직원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세강은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여직원은 어렵게 구한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에게 싸늘한 두 갈래의 시선이 쏠렸다. 조형욱과 유영이었다.유영은 여직원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조형욱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그러고는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조형욱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커피 가져왔습니다.”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영은 나가려는 조형욱을 불러세웠다.“조 비서님.”“네. 무슨 일이시죠?”조형욱은 끝까지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유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조 비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조 비서는 그 감정 잘 숨겨야 할 거예요.”강이한은 딴 맘을 품은 인간을 절대 곁에 둘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조형욱이 자신 몰래 한지음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큰 소란이 일 것이다.조형욱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유영 씨, 원래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요?”“뭐라고요?”“아무리 못나도 피를 나눈 동생이잖아요.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한지음 씨의 불행은 다 이유영 씨 때문이잖아요.”유영은 그제야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에게만 전 재산을 물려준 일을 두고 한지음이 조형욱이나 강이한 앞에서 불쌍한 척을 적지 않게 해댄 모양이었다.“당장 내 앞에서 꺼져!”“이유영 씨!”“꺼지라고!”유영은 더 이상 조형욱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한지음의 출생의 비밀에 대하여 알게 된 이후로 유영은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한지음은 그녀에게 치욕과도 같은 존재였다.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말을 마친 조형욱이 뒤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이제 대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가셨잖아요. 한지음 씨는 시력을 잃은 불쌍한 인생에 불과해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신 분이 계속 약자를 괴롭히는 건 세간에 보기도 좋지 않아요.결국엔 유영이 속이 좁다는 얘기를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유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말했다.“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조 비서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요.”조형욱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유영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입에서 한지음이 불쌍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막혔다.조형욱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졌는지
전에 강이한의 옆에 있을 때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소은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내일 동교 개발 지역에 한번 가볼래요? 설계도 가지고 나와요.”“알겠어요.”유영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일이고 그녀가 현장에 꼭 가봐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아침에 데리러 갈까요?”“좋아요. 설계도면은 회사에 있으니까 회사로 와요.”요즘 유영은 거의 크리스탈 가든에 있으며 업무를 처리했다. 그래서 작업실 일도 회사로 가져가서 시간이 날 때마다 처리하고는 했다.강성건설과 서원의 의뢰는 줄곧 유영이 혼자서 담당하고 나머지 업무는 작업실 디자이너들에게 전부 맡겼다.작업실 쪽은 조민정이 알아서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한편, 손님 접대실.방 안에서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강이한은 배준석이 건넨 서류를 굳은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배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그가 수술 직전에 사라지면서 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배준석은 뜻밖의 자료를 그에게 건넸다.그는 도깨비 기왓장 넘기듯이 서류를 단숨에 읽었다.그리고 탁 하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을 해봐!”강이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그에 비해 배준석의 표정은 처연했다.평소의 생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강이한 역시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그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지금의 배준석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이렇게 변하기까지 그의 신변에 분명 무언가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강이한은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물었다.배준석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그 여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어.”그 여자란 배준석이 줄곧 마음에 품었던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실종된지 오래 되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거야?”강이한이 다급한 어투로
“형, 그 여자가 사람을 죽였다고!”배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처음으로 보는 그의 분노에 강이한은 가슴이 철렁했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 배준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웃으며 흘려 보내는 사람이었다.그만큼 이 일이 그의 한계를 건드렸다는 증명이었다.그가 모든 시간과 정력을 들여 찾고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생기가 넘치지 않았고 뼈를 에이는 것 같은 차가움이 자리를 잡았다.“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지금 이 서류들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어.”강이한은 사건의 진실을 전부 파헤치기 전에 일단 배준석을 진정시켜야 했다.배준석은 실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강이한의 마음도 무거웠다.배준석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래. 형에게는 정말 중요한 여자지. 한지음이 시력을 잃었는데도 그 여자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무사하잖아?”강이한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쳤다.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했다.“네가 많이 힘들고 절망적인 거 알아. 이 일은 내가 조사할게. 나한테 맡겨!”“그 여자가 진범이 맞다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준석이 물었다.그랬다. 진범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강이한은 온몸에 혈액이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가슴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최근 그는 유영의 신변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기도 전에 배준석의 신변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형, 한지석은 형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어. 그런 사람의 유일한 동생이 한지음인데 형은 한지음을 위해 뭘 해줬지?”“부부 관계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단을 만든 것도 형이야. 이유영 그 여자의 두꺼운 가면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형의 책임이고! 그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납치해서 수술을 진행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어쩌면 유 선생도 그 여자가 매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강이한은 매서운 눈으로 배준석을 노려보며
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쪽을 살폈다.설마 배준석과 이 일이 관련될 걸까?유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음침한 얼굴로 서 있는 강이한이 보였다.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준석이 갔어.”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영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당신이 했어?”유영은 남자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재결합을 강요하던 남자였다. 하지만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은 집착 앞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예전이었다면 아마 열심히 해명하려 했을 것이다.적어도 내가 아니라는 말을 큰소리로 말했을 수도 있었다.어쩌면 그의 이런 태도에 실망해서 눈물이 나왔을 수도 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그건 형사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당신한테 해명해야 할 이유는 없어.”“이유영!”“설마 당신, 형사들보다 먼저 내 죄를 입증하고 싶은 거야?”남자의 눈에 담긴 분노를 보고도 그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이한은 그녀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났다.“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그는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하지만 표정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비틀 것 같았다.유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그 웃음이 강이한의 눈에는 악녀의 미소로 보였다.“어차피 속으로는 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이지?”예전에 그녀가 아니라고 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던 사람이었다.그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다.그는 한지음을 신뢰하고 강서희를 신뢰하고 모두를 신뢰하면서 유독 그녀의 말은 신뢰하지 않았다.“이유영!”“정말 나를 믿고 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면 이런 멍청한 질문을 나한테 하지도 않았겠지!”강이한의 두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그는 다가가서 손아귀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강이한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유영은 사무실 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았다.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강이한은 진짜 배후를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진범이 유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한지음은 한지석의 여동생이었기에 처음부터 옆에 두고 보살필 생각이었다.그리고 이제 그녀는 유영의 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불행은 유영으로 인해 시작되었다.예전에 그의 마음 속에서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유영이 어떤 사람이든 절대 그녀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녀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 소리마저 치미는 분노에 휩쓸려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강이한은 유영이 만약 자신이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한편, 밖으로 나온 유영은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는 밤새 조사를 받으며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했다.그 사이 조민정을 비롯한 작업실 직원들이 다녀갔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만큼, 모두가 그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조민정은 정국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유영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외삼촌의 도움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일만 생기면 외삼촌에게 손을 벌리는 건 원치 않았다.강서희는 본가에서 소식을 듣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휴대폰으로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이유영? 넌 내 손바닥 안을 못 벗어나!’“지난 번 서류, 아는 기자한테 보내서 발설하도록 해.”그녀는 휴대폰으로 자료를 심복에게 전송했다. 유영과 한지음에게 관련된 내용이었다. 여태 가지고만 있은 이유는 유영의 신분 때문이었다.그때 여론에 바로 흘렸다면 한지음과 유영의 신분에만 이목이 집중될 뿐이지 둘을 쓰러뜨리는 작용을 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
“내가 나온 게 의외인가 봐?”밖에서 오래 기다린 걸 알지만 유영은 그에게 살갑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그의 이런 행동이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강이한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유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그에게 말했다.“박연준 씨랑 같이 어디 가기로 약속했어.”“이유영, 더 이상 선을 넘지 마!”“대체 우리 중에 선을 넘은 사람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지?”유영도 날카롭게 받아쳤다.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지난 생에 그녀를 산 채로 불 태워 죽인 인간이었다. 그날을 기억하면 유영은 이 남자와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일단 타고 얘기해.”강이한이 말했다.유영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전혀 두려움 없는 그녀의 모습이 강이한의 화를 자극했다.그가 뭐라고 하려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조형욱이었다.“여보세요.”“대표님, 유 선생 신변 조사 다 끝났습니다.”“말해 봐.”“지금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자 조형욱이 보낸 메일이 도착했다.메일을 확인한 강이한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이런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유영과 이 사건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이시욱에게서도 통화기록 관련 보고가 도착했다.통화한 시간과 통화기록 모두 홍문동이었다.그것들을 확인한 순간 그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이유영.”유영은 그가 뭘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 표정으로 보아 또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이제 가도 되지?”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고 그는 또 다시 한지음과 강서희의 편에 선 게 분명했다.온몸이 불 타는 고통을 겪고 다시 눈을 떴을 때부터 이 남자에 대한 신뢰는 사라졌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실망이라기보다는 가련한 마음마저 들었다.“가.”유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는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유영은 긴장을 풀고 의자에 기댄 채 잠에 들었다.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박연준은 그녀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손바닥 하나로 다 가려질 만큼 작은 얼굴에 피곤이 잔뜩 묻어 있었다.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 알람에 그는 상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기사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잠든 유영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린 그는 뒤편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당장 기사 퍼지기 전에 막아!”“이유영 씨가 설마….”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최근 박연준과 유영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전부터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왔지만 명백한 입장 표명이 없었던 박연준이 드디어 대놓고 그녀를 지켜주기로 한 것이다.비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다급히 말했다.“지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박연준의 얼굴이 사납게 빛났다.지금 상황으로 보면 강이한과 유영의 사이는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유영의 태도는 명확했지만 강이한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전화를 끊자마자 또 전화가 걸려왔다.발신자를 확인한 박연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알아.”박연준도 똑같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유영의 앞에서 보였던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목소리였다.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은 거칠게 숨을 고른 뒤 그에게 말했다.“박연준, 너랑 일 적으로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그건 나도 바라는 바야.”“그러니까 나랑 이유영 사이에 너도 더 이상 끼어들지 마!”박연준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해외에서 벌어진 일 아직 너한테 빚을 갚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그렇다고 해두지!”“그럼 나도 한마디 할게. 이유영 씨
한때 청하시에 머물던 시절.소은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온 탓에 결혼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다.남자를 광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녀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결국 아픔으로 끝난다면, 그런 사랑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특히 현우의 내면을 어느 정도 들여다본 지금, 그녀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하지만 여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감정 문제에 있어서는 순진하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과거에 소은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래, 여자가 순진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마지막에 우는 건 그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소은지의 말은 냉소적이었고 태도는 언제나 가벼워 보였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소은지는 여자가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야 더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왜 굳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 모를 그런 감정에 휘말려야 할까?사랑은 진심을 다한 사람이 결국 패배자가 되는 잔인한 게임 같았다.소은지는 너무 많은 상처받은 여자들을 보아왔다.그리고, 너무나 많은 상처받은 남자들도 보아왔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던 소은지는, 현우를 마주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얼마나 걸릴까요?”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천시로 떠나는 것에 관한 질문이었다.현우가 소은지를 우천시로 보내려 한다는 건, 현재 파리의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시간은 얼마나 필요한 걸까?“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소은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엔데스 가문이 정말로 벼랑 끝에 다다른 걸까?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억눌렀다.“네.”짧은 한마디.그러나 그 짧은 대답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은 오직 소은지만이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에게 우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일에 대해 스스로 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보상이라는 형태로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하지만 복수를 결코 잊지 않는 성격답게, 이 모든 보상 또한 결국 갚으려는 계산일지도 모른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가 현우에게 차분히 말했다.그 말을 듣고 현우는 그녀를 감싸던 팔이 잠시 멈췄다. 한참을 생각하던 현우는 말했다.“제가 바래다줄게요.”“...”바래다준다니? 어디로?“일곱째 도련님?”“이유영은 지금 우천시에 머물고 있어요. 은지 씨도 잠시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소은지는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거예요?”“전기봉을 강이한이 찾아냈어요.”“...”전기봉. 이 중요한 인물을 찾는 일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였다.전기봉이 나타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단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를 찾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모두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이제는...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찾아냈다고요?”“네.”이제 엔데스 가문의 운명은 앞으로의 며칠간 모든 것이 결정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소은지는 현우의 표정을 보며 더욱 불안해졌다.“하지만 전...”“지금 우천시에는 박연준이 있어요. 은지 씨도 그쪽에 있으면 더 안전할 거예요.”지금의 파리는 너무 위험했다.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런 위험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청하시에 있던 시절, 평화롭게 지내던 소은지의 삶에 갑작스럽게 파리의 사건들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 충격은 소은지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만약 우천시에 있었다면, 소은지는 지금처럼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지금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 속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그리고 그 분노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저는...”소은지는
기다리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강이한, 박연준, 그리고 이유영. 세 사람의 얽힌 관계는 이제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한편, 파리에서는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고 그와 관련된 문서는 점점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도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반산월.남자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가 희미하게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소은지는 품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현우의 묵직한 눈빛이 그녀를 스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이 녀석을 꽤 잘 돌본 모양이에요. 아주 잘 자랐네요.”길에서 처음 이 고양이를 주웠을 때는 겨우 갓난 새끼 고양이였다.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작은 생명체였는데 지금은 소은지의 품에서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로 감싸인 작은 생명체로 자라 있었다. 여전히 조그마했지만 이제는 생명의 따뜻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는 작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현우의 옆에 앉았다.“작은 동물들은 금세 자라잖아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아이는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다.반면, 동물들은 마음만 쓰면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줬다.“...”소은지가 아이를 언급하자, 현우는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아이 좋아해요?”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은지는 잠시 멈칫했다.아이를 좋아하냐고?“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설명할 수 없어요.”“왜요?”“아마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존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였다.그러나 소은지가 지금까지 보아온 아이들은 대부분 그보다 더 복잡했다.청하시에서 일하며 소은지는 직업 특성상 아이들과 얽힌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했다.처음엔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결국 이혼을 앞두고는 지독히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우리, 결혼하자.”이유영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갑자기 말했다.“...”공기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이 남자, 미쳤나 봐.이유영은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볼 수는 없었지만 텅 빈 두 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의 눈빛에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이유영은 차갑게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유영아.”“서주...”서주?“네가 원하는 건 결국 우리 아버지의 지원이야?”지원?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온 확신마저 이유영에게는 이익을 위한 계산으로 보인단 말인가?“괜찮아. 세상 모든 일은 사실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려줄게.”“흥!”박연준의 다짐이 이유영에게는 터무니없게만 들렸다.“내가 기회를 줄 것 같아?”이유영은 단호했다.박연준이 자신을 이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싫었다. 그런데 이제 가족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박연준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박연준,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날카롭게 내뱉었다.이유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만약 지금 이유영이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분명 서주로 돌아가 강이한과 박연준을 혼란의 중심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박연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그날, 서재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에게 물었다.“이유영이 시력을 되찾으면, 서주를 가장 먼저 공격할 거야.”이유영은 신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신씨 가문이 어떤 관계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신지수가 이유영 편에 선다는 건 그 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그런데 서주 자체가 워낙 복잡하니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강이한이 정국진에게 말했다.염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이유영을 평생 어둠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키겠다고도 덧붙였다.“자신을 벌하고 있는 거예요.”한참을 침묵하던 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임소미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정말 자신을 벌하고 있는 걸까?그렇다.정국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벌하고 있었다.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도 무거웠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속죄가 가능할까?...강이한은 떠났다.잠시 후 월이가 임소미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리며 들어왔다.“할머니, 아까 모르는 사람이 준 거 안 먹었어요.”“정말 잘했구나.”월이의 말을 들은 임소미의 마음은 더없이 씁쓸했다. 이 모든 것이 강이한이 자초한 일이었고 그의 업보였다. 누구도 그에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그럴까?임소미는 이유영이 평생 월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그리고 강이한이 오늘 월이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임소미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월이는 정말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의존은 본능적이었다.“곧 돌아올 거야.”“할머니, 제 아빠는 누구예요?”“...”임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불편했던 호흡은 월이의 질문을 듣고 더욱 답답해졌다.월이의 아빠는...“월이, 아빠가 보고 싶니?”임소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월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왜?”“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사랑하지 않는다고?월이가 기억하는 한, 월이의 세상에는 아빠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인 이유영 혼자뿐이었다.아이는 단순했고 이유영의 외로움을
강이한은 아마도 세상에서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을 것이다.세상에 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 있을까?그는 지금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아이는 그렇게 경계하며 강이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 월이는 강이한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다가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퉁이를 돌 때, 강이한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놀라서 움찔했다.남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월이에게 말했다.“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기억해.”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월이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월이가 침묵하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이한은 절망을 느꼈다. 이 모든 고통은 한때 이유영이 홀로 겪었던 것이었다.이제 그 고통이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이유영이 겪었던 아픔이 하나하나 그의 뼛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강이한은 떠났다.한편, 임소미는 조용히 정국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국진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임소미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이것이 이유영이 항상 수술을 거부했던 이유였다. 이유영은 죽은 사람의 장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그렇게 눈앞이 흐릿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다.살아있는 사람의 것은 정말 구하기 힘들었고 기꺼이 수술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유영은 어떤 수단도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두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강이한의 말대로 만약 석 달 후에 이유영이 염 선생의 약을 먹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강이한이 책임지겠다고 했다.이것이 서재에서 정국진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딸이 이렇게 다치고 나서 임소미는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강이한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가 사라져야만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이유영이 돌아온 이후 몇 년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에게서 벗어나려 얼마나 애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한편으로는 한지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유영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행복을 방해해 왔다.그런 상황에서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소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이한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뒷마당에서.강이한은 멀리서 나비를 쫓는 아이를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강이한의 마음이 아파졌다.그 아이는 나비를 쫓으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곳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곳인 듯했다.정씨 가문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 아이는 꽤 작은 몸집을 가졌는데 아마 조산 때문일 것이다.“유씨 할머니, 저 잡았어요!”아이가 나비 한 마리를 잡고 기쁜 얼굴로 도우미에게 달려갔다.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아가씨는 점점 더 빨라졌네요. 나비도 잡을 수 있군요.”“저 정말 대단하죠?”“네, 정말 대단해요.”찬을 받은 아이는 더욱 밝게 웃었다.“유씨 할머니.”“네?”“수박 먹고 싶어요.”“알겠어요. 가져다줄게요.”그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었다.여기서 그녀는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임소미는 종종 한탄했다. 그 아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되었다.그런데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다.아이는 나비를 놓아주었다.아이는 나비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절대로 해치려 하지 않았다. 수박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 아주머니가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강이한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경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