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해외로 도망가긴 했지만 유영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대략 어디쯤으로 갔는지 알아냈으니 슬슬 범위를 좁히며 수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호언장담하는 사설 탐정의 얘기를 들으며 유영은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잘했어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 주세요.”“그럼요.”수화기 너머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그녀의 주변은 또다시 평온이 찾아왔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면 그녀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정국진에게 사실을 알린 뒤로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을 이루어냈다.퇴근 시간에 그녀를 찾아온 강이한에게 그녀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이제 순정동으로 돌아가야겠어.”“이유영!”“이 게임, 이제 끝이야.”“게임? 여태 이걸 놀이로 알았어?”“그게 아니면 뭔데? 강이한, 억지 부리지 마. 내가 이렇게 하면 바보처럼 네 진심을 믿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니?”유영은 강이한이 진심으로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잡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정말 그녀가 소중했다면 전생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보기에 그가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건 한지음의 상황이 그 정도로 최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다면 이 남자는 결국 망설임 없이 그녀를 수술대에 올렸을 것이다.이 점에서 그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남자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이유영, 감히 네가 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유영은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그 성격은 여전했다.“내가 못할 게 뭐가 있어? 평생 당신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줄 알았니?”전생의 그녀는 그랬다.그때 그녀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결국 시력
하지만 조형욱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남달랐다.얼마 전부터 조형욱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유영은 기억에 조형욱에게 불만을 살만한 일을 한 적 없었다.설마….그녀는 전에 한지음이 강이한의 본가에 찾아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조형욱이었다.‘남자 홀리는 재주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조 비서, 태도 똑바로 해.”강이한은 불손한 그의 태도를 보고 경고 섞인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조형욱은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히 화제를 돌렸다.“배준석 씨 오셨습니다. 지금 접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준석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드리웠다.최근 그는 줄곧 배준석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한 원인도 배준석이 수술 당일에 환자를 버리고 갔기 때문이었다.배준석이 집도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수술이었다.솔직히 말해 이번 일에서 강이한은 배준석을 원망했다.그가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일단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난….”“조 비서, 도망 못 가게 잘 지키고 있어. 놓치면 조 비서 너도 옷 벗을 줄 알아!”말을 마친 사내는 씩씩거리며 접대실 방향으로 갔다.유영은 떠나는 그의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사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비서실 직원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세강은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여직원은 어렵게 구한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에게 싸늘한 두 갈래의 시선이 쏠렸다. 조형욱과 유영이었다.유영은 여직원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조형욱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그러고는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조형욱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커피 가져왔습니다.”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영은 나가려는 조형욱을 불러세웠다.“조 비서님.”“네. 무슨 일이시죠?”조형욱은 끝까지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유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조 비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조 비서는 그 감정 잘 숨겨야 할 거예요.”강이한은 딴 맘을 품은 인간을 절대 곁에 둘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조형욱이 자신 몰래 한지음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큰 소란이 일 것이다.조형욱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유영 씨, 원래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요?”“뭐라고요?”“아무리 못나도 피를 나눈 동생이잖아요.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한지음 씨의 불행은 다 이유영 씨 때문이잖아요.”유영은 그제야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에게만 전 재산을 물려준 일을 두고 한지음이 조형욱이나 강이한 앞에서 불쌍한 척을 적지 않게 해댄 모양이었다.“당장 내 앞에서 꺼져!”“이유영 씨!”“꺼지라고!”유영은 더 이상 조형욱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한지음의 출생의 비밀에 대하여 알게 된 이후로 유영은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한지음은 그녀에게 치욕과도 같은 존재였다.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말을 마친 조형욱이 뒤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이제 대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가셨잖아요. 한지음 씨는 시력을 잃은 불쌍한 인생에 불과해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신 분이 계속 약자를 괴롭히는 건 세간에 보기도 좋지 않아요.결국엔 유영이 속이 좁다는 얘기를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유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말했다.“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조 비서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요.”조형욱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유영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입에서 한지음이 불쌍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막혔다.조형욱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졌는지
전에 강이한의 옆에 있을 때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소은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내일 동교 개발 지역에 한번 가볼래요? 설계도 가지고 나와요.”“알겠어요.”유영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일이고 그녀가 현장에 꼭 가봐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아침에 데리러 갈까요?”“좋아요. 설계도면은 회사에 있으니까 회사로 와요.”요즘 유영은 거의 크리스탈 가든에 있으며 업무를 처리했다. 그래서 작업실 일도 회사로 가져가서 시간이 날 때마다 처리하고는 했다.강성건설과 서원의 의뢰는 줄곧 유영이 혼자서 담당하고 나머지 업무는 작업실 디자이너들에게 전부 맡겼다.작업실 쪽은 조민정이 알아서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한편, 손님 접대실.방 안에서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강이한은 배준석이 건넨 서류를 굳은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배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그가 수술 직전에 사라지면서 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배준석은 뜻밖의 자료를 그에게 건넸다.그는 도깨비 기왓장 넘기듯이 서류를 단숨에 읽었다.그리고 탁 하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을 해봐!”강이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그에 비해 배준석의 표정은 처연했다.평소의 생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강이한 역시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그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지금의 배준석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이렇게 변하기까지 그의 신변에 분명 무언가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강이한은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물었다.배준석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그 여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어.”그 여자란 배준석이 줄곧 마음에 품었던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실종된지 오래 되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거야?”강이한이 다급한 어투로
“형, 그 여자가 사람을 죽였다고!”배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처음으로 보는 그의 분노에 강이한은 가슴이 철렁했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 배준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웃으며 흘려 보내는 사람이었다.그만큼 이 일이 그의 한계를 건드렸다는 증명이었다.그가 모든 시간과 정력을 들여 찾고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생기가 넘치지 않았고 뼈를 에이는 것 같은 차가움이 자리를 잡았다.“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지금 이 서류들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어.”강이한은 사건의 진실을 전부 파헤치기 전에 일단 배준석을 진정시켜야 했다.배준석은 실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강이한의 마음도 무거웠다.배준석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래. 형에게는 정말 중요한 여자지. 한지음이 시력을 잃었는데도 그 여자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무사하잖아?”강이한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쳤다.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했다.“네가 많이 힘들고 절망적인 거 알아. 이 일은 내가 조사할게. 나한테 맡겨!”“그 여자가 진범이 맞다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준석이 물었다.그랬다. 진범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강이한은 온몸에 혈액이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가슴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최근 그는 유영의 신변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기도 전에 배준석의 신변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형, 한지석은 형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어. 그런 사람의 유일한 동생이 한지음인데 형은 한지음을 위해 뭘 해줬지?”“부부 관계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단을 만든 것도 형이야. 이유영 그 여자의 두꺼운 가면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형의 책임이고! 그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납치해서 수술을 진행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어쩌면 유 선생도 그 여자가 매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강이한은 매서운 눈으로 배준석을 노려보며
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쪽을 살폈다.설마 배준석과 이 일이 관련될 걸까?유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음침한 얼굴로 서 있는 강이한이 보였다.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준석이 갔어.”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영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당신이 했어?”유영은 남자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재결합을 강요하던 남자였다. 하지만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은 집착 앞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예전이었다면 아마 열심히 해명하려 했을 것이다.적어도 내가 아니라는 말을 큰소리로 말했을 수도 있었다.어쩌면 그의 이런 태도에 실망해서 눈물이 나왔을 수도 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그건 형사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당신한테 해명해야 할 이유는 없어.”“이유영!”“설마 당신, 형사들보다 먼저 내 죄를 입증하고 싶은 거야?”남자의 눈에 담긴 분노를 보고도 그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이한은 그녀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났다.“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그는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하지만 표정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비틀 것 같았다.유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그 웃음이 강이한의 눈에는 악녀의 미소로 보였다.“어차피 속으로는 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이지?”예전에 그녀가 아니라고 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던 사람이었다.그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다.그는 한지음을 신뢰하고 강서희를 신뢰하고 모두를 신뢰하면서 유독 그녀의 말은 신뢰하지 않았다.“이유영!”“정말 나를 믿고 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면 이런 멍청한 질문을 나한테 하지도 않았겠지!”강이한의 두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그는 다가가서 손아귀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강이한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유영은 사무실 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았다.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강이한은 진짜 배후를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진범이 유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한지음은 한지석의 여동생이었기에 처음부터 옆에 두고 보살필 생각이었다.그리고 이제 그녀는 유영의 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불행은 유영으로 인해 시작되었다.예전에 그의 마음 속에서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유영이 어떤 사람이든 절대 그녀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녀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 소리마저 치미는 분노에 휩쓸려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강이한은 유영이 만약 자신이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한편, 밖으로 나온 유영은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는 밤새 조사를 받으며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했다.그 사이 조민정을 비롯한 작업실 직원들이 다녀갔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만큼, 모두가 그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조민정은 정국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유영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외삼촌의 도움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일만 생기면 외삼촌에게 손을 벌리는 건 원치 않았다.강서희는 본가에서 소식을 듣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휴대폰으로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이유영? 넌 내 손바닥 안을 못 벗어나!’“지난 번 서류, 아는 기자한테 보내서 발설하도록 해.”그녀는 휴대폰으로 자료를 심복에게 전송했다. 유영과 한지음에게 관련된 내용이었다. 여태 가지고만 있은 이유는 유영의 신분 때문이었다.그때 여론에 바로 흘렸다면 한지음과 유영의 신분에만 이목이 집중될 뿐이지 둘을 쓰러뜨리는 작용을 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
“내가 나온 게 의외인가 봐?”밖에서 오래 기다린 걸 알지만 유영은 그에게 살갑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그의 이런 행동이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강이한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유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그에게 말했다.“박연준 씨랑 같이 어디 가기로 약속했어.”“이유영, 더 이상 선을 넘지 마!”“대체 우리 중에 선을 넘은 사람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지?”유영도 날카롭게 받아쳤다.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지난 생에 그녀를 산 채로 불 태워 죽인 인간이었다. 그날을 기억하면 유영은 이 남자와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일단 타고 얘기해.”강이한이 말했다.유영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전혀 두려움 없는 그녀의 모습이 강이한의 화를 자극했다.그가 뭐라고 하려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조형욱이었다.“여보세요.”“대표님, 유 선생 신변 조사 다 끝났습니다.”“말해 봐.”“지금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자 조형욱이 보낸 메일이 도착했다.메일을 확인한 강이한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이런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유영과 이 사건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이시욱에게서도 통화기록 관련 보고가 도착했다.통화한 시간과 통화기록 모두 홍문동이었다.그것들을 확인한 순간 그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이유영.”유영은 그가 뭘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 표정으로 보아 또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이제 가도 되지?”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고 그는 또 다시 한지음과 강서희의 편에 선 게 분명했다.온몸이 불 타는 고통을 겪고 다시 눈을 떴을 때부터 이 남자에 대한 신뢰는 사라졌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실망이라기보다는 가련한 마음마저 들었다.“가.”유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나는 이제 유영이의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유영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진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박연준의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었지만 여진우에게는 마치 농담처럼 들렸다.그는 냉정하게 말했다.“유영이를 붙잡고 싶다면 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 보여줘.”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박연준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여진우는 병실로 들어갔고 복도에는 박연준만이 남았다.그의 눈에는 전에 없던 결의가 서려 있었다.그가 이유영에게 저지른 악행은 너무 많았다.하지만 이번에는 온 힘을 다해 그녀 곁을 지키고 싶었다.문기원이 박연준의 뒤에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문기원의 가슴도 아려왔다.“선생님.”문기원은 다가가 박연준을 불렀다.“갔어?”“네.”“어디로?”“그게...”문기원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박연준도 강이한이 정말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강이한의 사람들이 모두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온유도 함께 떠났다.하지만 어디로 떠났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강이한은 정말로 이유영의 세상에서 모든 흔적을 지우듯 떠나버렸다.그런 떠남은 숨이 막히는 듯했고 동시에 고통스러웠다.“갔으니 다행이야.”한참 후, 박연준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떠난 사람은 고통스럽지만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은 더 아팠다.강이한은 왜 이때 떠났을까? 아마도 어둠 속에서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연준은 이유영 곁에 남았고 미래는 더욱 불확실했다....마취가 풀리자 이유영은 엄청난 고통에 신음했다.“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죽을 좀 드시라고 하셨어요.”“괜찮아요.”이유영은 온몸을 떨었고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여진우가 들어오며 고통을 참고 있는 이유영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갔다.“많이 아파?”“오빠.”“내가 의사 선생님께 진통제를 놔달라고 할게.”“괜찮아!”“너
그러니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이었다.병원 복도에서 여진우는 박연준에게 담배를 건넸다.“병원에서는 담배 안 피워.”박연준의 말에 여진우의 손이 굳었다. 결국 그는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이 다 나으면 두 사람 이혼 서류 준비해.”여진우의 어조는 단호했고 그 말에 박연준은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여진우를 쏘아보았고 그 순간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강이한이 떠났다고 해서 유영이가 네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여진우의 날카로운 말이 박연준의 마음을 꿰뚫었다.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는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유영은 수술 후 마취가 풀리면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모든 것을 견디고 있었다.그 이유는 바로 박연준과 강이한 때문이었다.“너...”“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여진우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 미소는 차갑고 조롱 섞였지만 동시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이유영의 세상에는 이제 그녀를 지키는 장벽이 생겼고 박연준은 더 이상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과거 강이한의 세계에서 이유영은 혼자였다. 그녀의 세상은 강이한이 만들어낸 틀 속에 존재했고 그의 말이 법이었다.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녀의 곁에는 가족이 있었고 그녀를 보호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제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박연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지만 가슴속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엔데스 가문은 지금...”“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위기의 순간이라고!”여진우는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박연준은 할 말을 잃었다. 여진우의 말이 옳았다.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박연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진우는 덧붙였다.“엔데스 가문 하나쯤이야, 정씨 가문이 이유영을 지키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처음 그가 이유영과 강제로 결혼한 이유는 그녀
여진우는 이유영을 계속해서 달래며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긴장 풀고 심호흡해. 응?”시간이 흐르면서 이유영의 불안한 감정은 점차 가라앉았다. 마치 맹수처럼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들은 여진우의 따뜻한 위로에 힘없이 사라져 갔다.그녀의 마음은 평온을 되찾았고 여진우 역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수술이 시작되었다.마취 단계에 접어들자 이유영은 조심스레 물었다.“이식할 각막이 누구의 것인지 알려줄 수 있어?”그 말을 들은 여진우는 무의식적으로 강이한을 쳐다보았고 강이한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과 씁쓸함이 감돌았다.결국, 여진우는 시선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모르겠어. 기증받은 거야.”“그 사람은?”“죽었어.”여진우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미련을 갖기엔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이유영은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녀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마취가 퍼지며 이유영의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여진우는 문득 물었다.“유영아, 만약 강이한이 처음부터 자기 각막을 너에게 주겠다고 했으면 받아들였어?”그 순간, 수술실의 공기는 얼어붙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고통이 가득했다.하지만 이유영은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기에 대답하지 못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증오했고 혐오했다. 그의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도 자신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유영의 고집은 누구보다 강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연서의 그림자 속에 머물렀을지라도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려 애썼다.하지만 이유영은 몰랐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연서의 그림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연서는 그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강이한과 박연준 역시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수술이 끝났다.수술실에 함께 들어갔던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나왔다.마치 그들의 인생처럼, 이
자신의 오빠이자 가장 믿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수술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유영은 든든했다.“그래, 다행이야.”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긴장으로 몸까지 떨리는 모습을 보며 여진우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스쳤다.이런 감정은 여진우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그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래서 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부드러워졌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늘 곁에 있을게.”여진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사실 이유영은 아직도 이 수술을 왜 꼭 용성시에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파리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수술실에서.이유영은 이미 수술대에 누워 있었고 여진우는 약속대로 그녀 곁을 지켰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소독약 냄새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고 그녀는 주변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진우는 강이한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여진우는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이유영과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정말 끝난 걸까?“오빠.”“왜 그래?”“무서워.”차가운 의료 기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떨렸다.여진우는 그녀가 대기실에 있을 때보다 더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말할 때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가 묻어났다.“무서워하지 마. 오빠가 곁에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있으니까, 좀 편안하게 있어 봐.”“그래도 무서워...”이유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공포는 마치 그녀의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았다.수술대 반대편에 누워 있던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듣고 온몸이 떨렸다.그는 그녀의 공포가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박연준에게 자신의 곁은 지옥과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유영은 강이한 곁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편안한 날을 보낸 적이 없었다.그의 눈앞
밤은 그렇게 평온하게 지나갔다.이유영은 깊이 잠들었고 여진우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며 박연준과 강이한에 대한 불쾌한 감정도 점차 사라졌다.물론 임소미는 계속해서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어 곁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유영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걱정스레 거절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는 마음 깊숙이 가족들이 곁에 있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여자는 다 그렇다. 가장 힘든 순간에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이 곁을 지켜 주길 바라는 것이다.이유영은 편안하게 잠들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우지와 우현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쳤다.오늘은 이유영의 수술이 예정되어 있어 아침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가자.”여진우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그는 조심스럽게 이유영을 품에 안아 일으켜 세웠다.“수술실까지 같이 가는 거야?”“응.”“박연준은?”“그가 보고 싶어?”“아니, 그런 건 아니야!”요즘 계속 박연준이 곁에 있었기에 갑자기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박연준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유영은 계속 화가 났다.차 안에서도 이유영은 박연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진우가 온 이후로 박연준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오빠.”“응?”“수술이 끝나면 나를 집으로 데려가 줘.”이유영은 집에 가고 싶었다. 월이도 보고 싶었다.그녀는 요즘 밤마다 월이를 그리워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아버지조차도 아이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유영은 더욱 두려워졌다.그런 세상 속에서 그녀는 아이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그러나 그보다도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 변화를 실제로 느끼고 싶었다.“물론이지.”여진우의 목소리는 따뜻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하지만 앞좌석에 앉아 있던 박
여진우는 마치 아무런 빛도 없는 건조한 사람이었다.과거에 강이한과 박연준은 그 면을 이용해 이유영을 협박했지만 지금은 그런 방법을 포기했다.강이한은 이미 포기했고 박연준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수술, 다 준비됐어?”여진우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엿보였다.“그럼.”박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실수는 절대 없어야 해.”여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물론이지.”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번 수술이 이유영에게 다시 빛을 가져다줄 마지막 기회라고 믿었고 최고의 의료진을 준비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그럼 다행이야.”여진우는 짧게 답했다.“너는 내일 여기 있을 거야?”박연준이 물었다.“맞아. 수술이 끝나면 유영이를 데리고 같이 돌아갈 거야.”박연준은 말없이 여진우를 바라보았다.이유영과 함께 돌아간다고? 이게 무슨 뜻인가?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의 남편이었다. 그들의 관계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여진우는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쏘아붙였다.“그런 생각은 하지 마. 만약 너희 사이에 희망이 없다면, 이제 그만 포기해.”그의 말은 날카롭게 박연준의 가슴을 찔렀다. 이미 답답한 가슴이 더 찢어지는 것 같았다.포기라고? 말은 쉽지만 실제로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포기라니, 흥.”“포기 말고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더 좋은 방법? 없었다.“너와 그 녀석, 둘 다 유영이에게 어울리지 않아.”여진우의 단언에 박연준은 씁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네 말이 맞아. 나도, 강이한도, 유영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유영에게 접근한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으니까.그들은 그녀에게 험난한 세상을 선물했고 그녀는 그 폭풍 속에서도 강인한 난초처럼 꿋꿋이 살아남았다.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유영을 자신의 세계로 억지로 끌어들이려 했고 그녀는 더 거센 폭풍을 맞아야 했다.만약 자신들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모이산의 코코넛 주스는 유명해서 파리 수도에서도 판매될 정도였다. 임소미도 피부에 좋다며 코코넛 주스를 즐겨 마셨다.“정말 신선하고 은은한 맛이네!”“원액 그대로라서 그래. 원래 이런 맛이야.”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정말 맛있어.”코코넛 주스의 맛은 확실히 좋았다. 적어도 이제는 익숙해진 맛이었다.예전에는 하얀 색감과 끈적한 질감이 부담스러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이곳의 코코넛 주스는 맑고 달콤했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신선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멀리서 강이한과 박연준이 광장 한가운데 펼쳐진 캠프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제 가야 해?”강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난 먼저 갈게.”박연준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했다.“안 가봐?”강이한이 물었다.“여진우가 곁에 있으니까. 이유영은 내가 안 가는 걸 더 좋아할 거야.”박연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실 박연준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마주할 때마다 냉정했고 그의 접근을 극도로 거부하는 태도는 박연준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다행히도 유영이의 곁에는 정씨 가문이 있어.”강이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박연준도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정씨 가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용감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가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면서도 이유영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다.한 번 넘은 선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듯,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갑옷을 두른 채 자신을 지켜냈다.강이한은 돌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만약 나와 유영이 사이에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그럼에도 박연준은 이해했다.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강이한은 온 힘을 다해 이유영을 붙잡았을
“나랑 이유영이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미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포기할게.”강이한은 여진우의 품에 안긴 이유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온전히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박연준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오고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저녁노을은 붉은빛을 띠며 마치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아름다웠다. 강이한은 저 붉게 물든 노을처럼 이유영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마음 깊이 새겼다.“내가 왜 수술을 내일로 잡았는지 알아?”“...”“나는 해 뜨는 아침의 유영이를 보고 싶었어. 희망 속에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아침 해는 희망을 상징한다.그는 이유영이 희망 속에서 빛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네 곁에 그렇게 오래 있을 동안 그런 모습 한 번도 보지 못했어?”“유영이에겐 절망의 순간들이 너무 많았어.”강이한의 말에 박연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강이한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지난 시간 동안, 이유영은 강이한 곁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고 그 절망은 결국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그 어떤 상황도 그 절망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내일 수술이 끝나면, 그녀의 미래는 희망으로 채워질 것이며 비로소 진정한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강이한은 떠났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우지와 우현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유영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여진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했고 이유영은 모닥불이 뿜어내는 따스한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다.“입 벌려.”옆에서 여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할 수 있어!”“입 벌려!”여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결국 이유영은 조용히 입을 벌렸고 여진우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구운 고기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고
여진우의 품에 안기자 이유영은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부터 이유영은 이런 안정적인 가족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위로를 받고 있었다.“수술은 언제로 잡혔어?”“내일.”“그러면 여기서 같이 있어 줄게.”“좋아.”여진우가 곁에 있어 준다는 말에 이유영의 불안은 잦아들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더욱 꽉 껴안았다.그는 이유영이 겪은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수술이 성공해도 그 고통은 평생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맞은편 건물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은 나란히 서서 여진우 품에 안긴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눈에는 슬픔과 씁쓸함이 서렸고 목소리는 이미 쉰 듯했다.“나는 유영이의 세상에 나만 있다고 생각했어.”“그래서 평생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유영은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믿어왔다.하지만 결국, 강이한의 생각은 틀렸다.이유영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강이한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그녀 곁에 가족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상 용서는 거의 불가능했다.“내일 이후로...”박연준은 말을 멈추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내일 이후로 어떻게 될까?내일 이후, 그는 이유영이 견뎌온 그 숨 막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내일 이후... 박연준, 유영이 곁에는 이제 네가 유일해!”강이한은 진심으로 결심했다.이유영을 떠나 박연준을 우천시로 보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완전히 결심했다.이유영의 곁에서 떠나기로.“너 정말...”박연준은 불안한 마음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예전부터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 말해왔다.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있었던 걸까?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그는 한때, 이유영과의 관계가 이렇게 변할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