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자식!’유영이 말했다.“외삼촌,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유영은 정국진에게 계획 전부를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방향은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정국진은 그녀의 생각을 듣고 바로 의도를 알아챘다.“알았어. 크리스탈 가든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하지만 회사에 영향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거야. 알겠니?”“네, 외삼촌.”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이 원하는 건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당한 게 있는데 되돌려주지 않으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을 정국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하는 일을 막고 싶지 않았다.“곧 한 해가 지나가는데 박 대표랑 같이 파리로 와서 같이 보내는 건 어때?”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외삼촌, 사실 저랑 박 대표 사이는….”“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적응해 보도록 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어디 쉽겠어? 하지만 박 대표는 좋은 사람이야. 외삼촌 안목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어.”결국 유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사실 외삼촌을 만난 뒤로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눈빛이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매번 그런 눈빛을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하고 씁쓸했다.전화를 끊은 유영은 홀로 사색에 잠겼다.강이한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미친 짓의 의도는 결국 그녀를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다.유영은 그가 지나간 그들의 10년을 내려놓지 못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그녀는 그들이 옛날처럼 서로를 사랑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에게 미련이 남았다면 박연준이 떠나 있는 동안에 벌써 흔들렸을 것이다.매번 강이한과 함께 있을 때면 지난 생에 자신을 억지로 수술실에 들여보내던 광기 어린 얼굴과 자신의 목숨을 앗아갔
비록 해외로 도망가긴 했지만 유영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대략 어디쯤으로 갔는지 알아냈으니 슬슬 범위를 좁히며 수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호언장담하는 사설 탐정의 얘기를 들으며 유영은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잘했어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 주세요.”“그럼요.”수화기 너머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그녀의 주변은 또다시 평온이 찾아왔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면 그녀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정국진에게 사실을 알린 뒤로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을 이루어냈다.퇴근 시간에 그녀를 찾아온 강이한에게 그녀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이제 순정동으로 돌아가야겠어.”“이유영!”“이 게임, 이제 끝이야.”“게임? 여태 이걸 놀이로 알았어?”“그게 아니면 뭔데? 강이한, 억지 부리지 마. 내가 이렇게 하면 바보처럼 네 진심을 믿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니?”유영은 강이한이 진심으로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잡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정말 그녀가 소중했다면 전생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보기에 그가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건 한지음의 상황이 그 정도로 최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다면 이 남자는 결국 망설임 없이 그녀를 수술대에 올렸을 것이다.이 점에서 그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남자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이유영, 감히 네가 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유영은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그 성격은 여전했다.“내가 못할 게 뭐가 있어? 평생 당신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줄 알았니?”전생의 그녀는 그랬다.그때 그녀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결국 시력
하지만 조형욱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남달랐다.얼마 전부터 조형욱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유영은 기억에 조형욱에게 불만을 살만한 일을 한 적 없었다.설마….그녀는 전에 한지음이 강이한의 본가에 찾아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조형욱이었다.‘남자 홀리는 재주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조 비서, 태도 똑바로 해.”강이한은 불손한 그의 태도를 보고 경고 섞인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조형욱은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히 화제를 돌렸다.“배준석 씨 오셨습니다. 지금 접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준석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드리웠다.최근 그는 줄곧 배준석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한 원인도 배준석이 수술 당일에 환자를 버리고 갔기 때문이었다.배준석이 집도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수술이었다.솔직히 말해 이번 일에서 강이한은 배준석을 원망했다.그가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일단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난….”“조 비서, 도망 못 가게 잘 지키고 있어. 놓치면 조 비서 너도 옷 벗을 줄 알아!”말을 마친 사내는 씩씩거리며 접대실 방향으로 갔다.유영은 떠나는 그의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사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비서실 직원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세강은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여직원은 어렵게 구한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에게 싸늘한 두 갈래의 시선이 쏠렸다. 조형욱과 유영이었다.유영은 여직원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조형욱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그러고는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조형욱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커피 가져왔습니다.”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영은 나가려는 조형욱을 불러세웠다.“조 비서님.”“네. 무슨 일이시죠?”조형욱은 끝까지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유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조 비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조 비서는 그 감정 잘 숨겨야 할 거예요.”강이한은 딴 맘을 품은 인간을 절대 곁에 둘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조형욱이 자신 몰래 한지음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큰 소란이 일 것이다.조형욱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유영 씨, 원래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요?”“뭐라고요?”“아무리 못나도 피를 나눈 동생이잖아요.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한지음 씨의 불행은 다 이유영 씨 때문이잖아요.”유영은 그제야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에게만 전 재산을 물려준 일을 두고 한지음이 조형욱이나 강이한 앞에서 불쌍한 척을 적지 않게 해댄 모양이었다.“당장 내 앞에서 꺼져!”“이유영 씨!”“꺼지라고!”유영은 더 이상 조형욱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한지음의 출생의 비밀에 대하여 알게 된 이후로 유영은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한지음은 그녀에게 치욕과도 같은 존재였다.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말을 마친 조형욱이 뒤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이제 대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가셨잖아요. 한지음 씨는 시력을 잃은 불쌍한 인생에 불과해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신 분이 계속 약자를 괴롭히는 건 세간에 보기도 좋지 않아요.결국엔 유영이 속이 좁다는 얘기를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유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말했다.“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조 비서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요.”조형욱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유영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입에서 한지음이 불쌍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막혔다.조형욱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졌는지
전에 강이한의 옆에 있을 때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소은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내일 동교 개발 지역에 한번 가볼래요? 설계도 가지고 나와요.”“알겠어요.”유영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일이고 그녀가 현장에 꼭 가봐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아침에 데리러 갈까요?”“좋아요. 설계도면은 회사에 있으니까 회사로 와요.”요즘 유영은 거의 크리스탈 가든에 있으며 업무를 처리했다. 그래서 작업실 일도 회사로 가져가서 시간이 날 때마다 처리하고는 했다.강성건설과 서원의 의뢰는 줄곧 유영이 혼자서 담당하고 나머지 업무는 작업실 디자이너들에게 전부 맡겼다.작업실 쪽은 조민정이 알아서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한편, 손님 접대실.방 안에서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강이한은 배준석이 건넨 서류를 굳은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배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그가 수술 직전에 사라지면서 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배준석은 뜻밖의 자료를 그에게 건넸다.그는 도깨비 기왓장 넘기듯이 서류를 단숨에 읽었다.그리고 탁 하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을 해봐!”강이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그에 비해 배준석의 표정은 처연했다.평소의 생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강이한 역시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그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지금의 배준석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이렇게 변하기까지 그의 신변에 분명 무언가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강이한은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물었다.배준석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그 여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어.”그 여자란 배준석이 줄곧 마음에 품었던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실종된지 오래 되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거야?”강이한이 다급한 어투로
“형, 그 여자가 사람을 죽였다고!”배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처음으로 보는 그의 분노에 강이한은 가슴이 철렁했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 배준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웃으며 흘려 보내는 사람이었다.그만큼 이 일이 그의 한계를 건드렸다는 증명이었다.그가 모든 시간과 정력을 들여 찾고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생기가 넘치지 않았고 뼈를 에이는 것 같은 차가움이 자리를 잡았다.“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지금 이 서류들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어.”강이한은 사건의 진실을 전부 파헤치기 전에 일단 배준석을 진정시켜야 했다.배준석은 실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강이한의 마음도 무거웠다.배준석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래. 형에게는 정말 중요한 여자지. 한지음이 시력을 잃었는데도 그 여자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무사하잖아?”강이한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쳤다.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했다.“네가 많이 힘들고 절망적인 거 알아. 이 일은 내가 조사할게. 나한테 맡겨!”“그 여자가 진범이 맞다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준석이 물었다.그랬다. 진범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강이한은 온몸에 혈액이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가슴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최근 그는 유영의 신변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기도 전에 배준석의 신변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형, 한지석은 형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어. 그런 사람의 유일한 동생이 한지음인데 형은 한지음을 위해 뭘 해줬지?”“부부 관계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단을 만든 것도 형이야. 이유영 그 여자의 두꺼운 가면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형의 책임이고! 그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납치해서 수술을 진행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어쩌면 유 선생도 그 여자가 매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강이한은 매서운 눈으로 배준석을 노려보며
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쪽을 살폈다.설마 배준석과 이 일이 관련될 걸까?유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음침한 얼굴로 서 있는 강이한이 보였다.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준석이 갔어.”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영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당신이 했어?”유영은 남자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재결합을 강요하던 남자였다. 하지만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은 집착 앞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예전이었다면 아마 열심히 해명하려 했을 것이다.적어도 내가 아니라는 말을 큰소리로 말했을 수도 있었다.어쩌면 그의 이런 태도에 실망해서 눈물이 나왔을 수도 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그건 형사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당신한테 해명해야 할 이유는 없어.”“이유영!”“설마 당신, 형사들보다 먼저 내 죄를 입증하고 싶은 거야?”남자의 눈에 담긴 분노를 보고도 그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이한은 그녀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났다.“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그는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하지만 표정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비틀 것 같았다.유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그 웃음이 강이한의 눈에는 악녀의 미소로 보였다.“어차피 속으로는 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이지?”예전에 그녀가 아니라고 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던 사람이었다.그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다.그는 한지음을 신뢰하고 강서희를 신뢰하고 모두를 신뢰하면서 유독 그녀의 말은 신뢰하지 않았다.“이유영!”“정말 나를 믿고 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면 이런 멍청한 질문을 나한테 하지도 않았겠지!”강이한의 두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그는 다가가서 손아귀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강이한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유영은 사무실 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았다.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강이한은 진짜 배후를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진범이 유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한지음은 한지석의 여동생이었기에 처음부터 옆에 두고 보살필 생각이었다.그리고 이제 그녀는 유영의 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불행은 유영으로 인해 시작되었다.예전에 그의 마음 속에서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유영이 어떤 사람이든 절대 그녀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녀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 소리마저 치미는 분노에 휩쓸려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강이한은 유영이 만약 자신이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한편, 밖으로 나온 유영은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는 밤새 조사를 받으며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했다.그 사이 조민정을 비롯한 작업실 직원들이 다녀갔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만큼, 모두가 그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조민정은 정국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유영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외삼촌의 도움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일만 생기면 외삼촌에게 손을 벌리는 건 원치 않았다.강서희는 본가에서 소식을 듣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휴대폰으로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이유영? 넌 내 손바닥 안을 못 벗어나!’“지난 번 서류, 아는 기자한테 보내서 발설하도록 해.”그녀는 휴대폰으로 자료를 심복에게 전송했다. 유영과 한지음에게 관련된 내용이었다. 여태 가지고만 있은 이유는 유영의 신분 때문이었다.그때 여론에 바로 흘렸다면 한지음과 유영의 신분에만 이목이 집중될 뿐이지 둘을 쓰러뜨리는 작용을 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눈을 뜬 이유영은 곧 이상한 점을 느꼈다. 침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상황을 확인하려고 눈을 떴다.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이유영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휙’ 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유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러나… 어둠뿐이었다. 눈앞은 온통 깜깜했다.손을 뻗었지만, 손끝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었다.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아무리 어두워도 시력이 있다면 손그림자 정도는 보인다고. 그러나 지금 이유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이 이런 상태로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동안, 강이한이 움직임을 느꼈다.다가가 보니, 이유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눈은 공허하고 생기를 잃은 채 텅 비어 있었다. 강이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눈이 저토록 생기 없이 죽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리고 지금 이유영은…“유영아…”가슴이 답답하고 아프기까지 했다. 입을 열었을 때, 강이한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이 더욱 긴장했다. 그의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보려는 듯했다.설마…“너…”설마 지난 생으로 돌아온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대체 무슨 일이야?”강이한이 앞으로 다가와 이유영을 단단히 끌어안았다.이유영은 창백한 얼굴로 귀신이라도 본 듯 강이한을 밀어냈다. 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과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진정은커녕 점점 더 불안해졌다. 마치 폭풍처럼 이유영의 신경과 이성을 휘몰아쳤다.“여기가 어디야?”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유영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이 답했다.“비행기 안이야.”비행기?이유영은 지난 생을 떠올리려 애썼다. 강제로 수술을 받은 뒤로 강이한이 이유영을 홍문동 밖으로 데리
“국진 씨, 제발 유영이를 꼭 데려와 주세요!”임소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반드시 빨리 찾아와야 한다. 절대로 강이한 곁에 남겨둬선 안 된다.현재 서주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강이한이 서주에서 가진 특별한 신분을 생각하면 이유영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그 순간,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임소미는 재빨리 여진우에게 다가가 물었다.“진우야, 소식 있어? 설마 서주로 간 건 아니지?”서주!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처음 떠올린 건 서주였다.지금 서주의 상황을 보았을 때 강이한이 이유영을 서주로 데려갔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그런데 서주의 상황 자체가 이미 그리 좋지 않은데 강이한이 하필이면 지금 이유영을 데려갔으니... 임소미는 이미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여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이 답변은 모두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아니라고? 서주로 간 게 아니라고?“강이한과 함께 파리에서 온 이정은 돌아갔지만, 강이한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이 말을 듣자, 임소미는 완전히 기운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서주의 상황이 지금 이상하긴 하지만, 만약 강이한이 이유영을 서주로 데려갔다면 최소한 목적지가 있어 이유영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강이한은 자신이 데려온 사람을 되돌려보냈을 뿐, 이유영을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유영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사람과 엮인 걸까!”임소미는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였다.정국진도 임소미와 마찬가지로 긴장된 상태였다.이 소식은 그들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상황을 모를수록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기 쉽다.게다가 그들은 이미 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 희생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그것은
엔데스 명우는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소은지에게 철저히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백산 별장 쪽 상황.아침부터 백산 별장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백산 별장은 이유영의 실종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유영이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없어졌다. 그런데 그 편지의 글씨는 이유영의 필체가 아니었다.정국진이 편지를 들고 살펴본 뒤 이 글씨는 강이한 것임을 확신했다. 편지 내용은 단 한 문장이었다.“무사한 상태로 데려올 겁니다.”“무사한 상태? 무사한 상태라는 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 건가?”분명한 것은, 임소미도 이 편지가 누가 쓴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어제 강이한이 여기 나타났고 오늘 아침 이유영이 사라졌다.백산 별장의 모든 보안 시스템을 무사히 뚫고 사람을 데리고 나가다니, 강이한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했다.그러나 강이한의 이런 능력은 사람들의 이를 갈게 만들었다.정국진의 눈빛 역시 날카로웠다.“국진 씨, 반드시 유영이를 데려와야 해요. 반드시...”임소미는 이미 감정이 북받쳐 올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상태였다.많은 일이 벌어진 뒤였다.임소미는 이제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재앙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와 함께 있는 한,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유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일 정도였다.“알겠어.”정국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정국진의 눈에도 살기가 번뜩였다.이유영은 지금 누구보다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수술을 앞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이유영을 데려가다니.다른 때는 마음대로 날뛰어도 괜찮다 쳐도, 지금은... 여진우의 사람들까지 이유영을 찾으러 나갔다.그 순간, 반산월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집사가 전화를 받은 뒤, 엄중한 표정으로 다가왔다.“사모님, 선생님!”“무슨 일이야?”“반산월 쪽에서...”여기까지 말하고 집사가 잠시 머뭇거렸다.“반산월에 무슨 일이야?”이미 충분히 긴장한 상황에서 반산월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더욱 긴
“소은지, 네가 그 사람과 정말 오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 사람 마음속에 네 자리는 없어. 언젠가 너는 버려질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그때쯤이면, 여섯째 도련님, 네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실컷 봤겠지. 너의 모든 추한 꼴을 확인했으니 나는 손해 볼 게 없어.”“...”말이 끝나자, 남자의 분위기는 한층 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소은지는 단순히 다루기 어려운 상대를 넘어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난공불락의 존재였다.결국, 엔데스 명우는 화를 억누르며 소은지를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지금의 소은지는 그야말로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엔데스 명우가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제안했음에도 소은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이런 태도는 엔데스 명우에게 증오와 답답함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차 안에서.옆자리에 있던 배천명이 어색한 공기를 감지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은지 아가씨 쪽에서 여전히 거절이신 건가요?”‘아가씨’라는 호칭은 엔데스 명우의 측근들 사이에서 소은지를 지칭하는 통상적인 표현이었다.과거에, 누군가 그녀를 ‘일곱째 사모님’이라 불렀다가 엔데스 명우에게 바로 응징당해 입에 피를 흘리며 쫓겨난 일이 있었다.이런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관계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소은지의 완강한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배천명의 물음에, 엔데스 명우는 한 손으로 짓눌리듯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이 여자를 너무 쉽게 본 것 같다.”이 말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엔데스 명우가 처음 소은지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소은지를 굴복시켰던 걸까?분명한 것은, 소은지가 끝내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은지의 눈 속에 담긴 강인한 고집은 언제나 선명했다.수년간 얼마나 많은 여자가 그에게 몰려들었는가? 그들이
언제 조건을 말했다는 건데?도대체 언제였다는 걸까?눈 내리던 날, 설선비의 추락 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며 반복적으로 항변했던 그때를 말하는 걸까?‘넌 나를 이렇게 대할 자격이 없어.’라고 했었던 말을 가리키는 걸까?그 모든 말 속에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에게 내건 조건들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결과는?결과는 뻔했다.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청하시 사업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소은지의 명성을 어떻게 철저히 짓밟았는지.청하시에서는 패배를 모르는 전설적인 변호사 소은지의 진짜 얼굴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떠들썩했지만, 그 기사를 본 소은지의 마음은 고통과 분노로 폭발 직전이었다.“과거에 나를 파멸로 몰아넣을 때 그토록 신속하고 냉혹하더니, 여섯째 도련님도 감정에 얽매일 때가 있다니 놀랍군.”소은지의 말은 점점 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워졌다.그랬다.그날,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에게 모든 진실과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전했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소은지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조건을 듣겠다니! 소은지의 삶에는 더 이상 조건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설령 소은지가 내건 모든 조건이 하나하나 충족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그건 소은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나는 항상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나아가는 사람이야.”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네가 나한테 주는 보상들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설령 같은 사회적 위치를 되찾아준다 해도 그것은 소은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이 모든 것을 소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어떤 보상도 소은지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게 지금의 소은지였다.“정말 잘난 척하는군. 스스로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 사실 너도...”“맞아, 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해. 하지만 예전에 내 대단함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어
이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이한이 내리는 모든 결정이 결코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선택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유영은 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이번에 우천으로 간다면, 최소 반년은 걸립니다.”이정은 무거운 목소리로 강이한에게 말했다.반년.평소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금처럼 서주가 긴박한 상황에서는 반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정은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의 태도를 보니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여진우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중요한 것, 그리고 포기.삶에는 지켜야 할 것이 많지만, 때로는 과감히 선택하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지금 이 상황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알겠습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이한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 순간, 이정이 강이한에 대한 모든 의문과 흔들림이 경외심으로 바뀌었다.이 남자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강이한의 삶에는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주위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결코 눈을 감고 지나칠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한편.서주의 상황은 점점 더 긴박해지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 역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엔데스 명우가 서주에 나타났다. 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을 드나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소은지.”남자는 커피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하지만 소은지는 그를 비웃듯 바라보며 그의 이가 갈릴 정도로 억눌린 분노를 아무렇지 않게 감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여자, 곧 죽어?”소은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기운은
서주가 이런 상황인데도 강이한은 굳이 파리로 찾아갔다.이유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아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 아이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어떤 존재로 비치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정은 깊게 숨을 고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를 보셨습니까?”소월이...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보자마자 이유영 품으로 달려갔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월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꽉 찼다.아무리 숨을 고르려 해도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하나 피워 물며 무겁게 말했다.“그 사람... 소식은 들었어?”강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 사람에 관해 묻기 시작하자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한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염 선생님은 지금 우천에 머물고 있습니다.”“우천?”“네, 주소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몇 년간 그곳에서 은거하며 지내고 계셨습니다.”염 선생님은 명망 높은 의학자였다. 그는 70세에 서주 국제병원에서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의 진료는 항상 예약이 어려웠으며 그의 손을 거친 환자는 어떤 이유로 실명을 겪더라도 결국 시력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이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는 한지음을 데려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염 선생님이 이미 은퇴한 후라,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드디어 찾아내게 되었다. 강이한은 이유영과 함께 전생을 경험했기에, 이유영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어둠이었다. 수술을 계속 미뤄왔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차라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수술이 실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평생 어둠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이유영은 이미 한 번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무력함을
남자의 따뜻한 손끝이 이유영의 눈가를 살며시 스쳤다.아주 조심스럽게...이유영은 마치 그 온기가 자신을 태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여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말로는 상황이 심각하대. 이번엔 제발 말 좀 들어줘, 응?”“응.”그동안 가족들은 계속해서 이유영이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유영은 전생에 겪었던 어둠 속에서의 공포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유영은 다시 과거의 어둠 속으로 빠지기 싫었기에 항상 핑계를 대며 수술을 미뤘다.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눈 수술은 본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실패라도 한다면 이유영에게 남는 것은 끝없는 어둠뿐이었다.그 고통은 전생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다시는 그런 어둠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그 어둠은.마치 악마의 동굴과 같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유영아.”“응?”“수술 전까지는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가져봐. 그러면 수술에도 좋을 거야.”여진우의 말은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그는 마치 곧 기증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말투였다.여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유영이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았다.“왜?”여진우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모든 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알겠지?”이유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여진우는 잠시 멈칫하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유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정씨 가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상의 수술 환경을 준비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이 지금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이유영은 너무 많은 고난을 겪었다.강이한, 한지음, 이온유... 이들은 모두 이유영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유영은 이런 고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