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물어본 사람은 강이한이었는데 이유영의 답을 들으니 그는 더 화가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의자에 던지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이유영. 너 참 대단하다.”그는 계속 말했다.“네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날 도발할 수 있을까?”“경고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이유영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강이한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날 도발할 수 있는 것도 네 뒤에 외삼촌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그의 말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협박이라는 건 확실했다.이유영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눈가의 위험한 눈빛도 순간 더욱 짙어졌다.강이한이 계속 말했다.“난 정말 그렇게 해보고 싶어.”“그래. 나도 네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보고 싶네.”이유영이 말했다.그녀는 강이한이 계속 외삼촌으로 협박을 하니 꼭대기에서 겨룰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위험한 압박력을 지닌 키스가 이유영의 입술에 떨어졌다.이유영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손톱으로 강이한의 목을 그어 핏자국이 생기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강이한은 화가 나서 이유영을 놓고 핸드폰을 그녀의 앞에 던지며 물었다.“이 번호 알아?”강이한의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이유영은 어리둥절해졌다.그녀는 강이한을 째려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보았다. 한 눈만 보았을 뿐인데 그녀의 눈에는 위험한 눈빛이 스쳤다.이유영은 강이한도 조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몰라.”이유영은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유영!” 강이한은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이유영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내가 강서희의 번호라고 하면 믿을 거야?” “너 무슨 일이나 서희와 엮지 마.” “그럼 몰라. 나는 강서희와 상관있다고 생각해. 모호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강이한의 선택이야.’ 이유영이 말을 마치자 강이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그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마치 강이한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강이한이 떠난 뒤, 이유영은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려고 심호흡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돌았다. 박연준이 했던 말처럼 그는 절대 곱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외삼촌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벌인 일이었다.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 억울하고 분이 내려가지 않았다.“유영아.”“일은 어떻게 되었나요?”이유영이 물었다.지금도 그 남자를 생각하면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정국진이 말했다.“걱정 마. 잘 처리했어.”“외삼촌.”“그래.”“로열 본사 내부에 다른 문제는 없죠?”그녀는 크리스탈 가든에 생긴 것과 비슷한 문제가 로열 글로벌 내부에 존재할까 봐 걱정했다.비록 그녀가 한 일은 아니지만 이미 기업의 수장이 되었으니 책임을 피해갈 수 없었다.이미 전임 대표가 만들어 놓고 간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만 해도 그녀는 골머리가 아팠다.“본사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 설마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거니?”정국진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정국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짜증을 숨겼다.그녀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을 토로했다.“이번 일, 강이한이 주도한 거예요.”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넌 진작에 알고 있었고?”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국진이 물었다.“네.”“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말을 꺼내는 거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 했어!”정국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최근 로열 글로벌 내부에 생긴 문제는 그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내부에서만 생긴 문제라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갈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면 앞뒤가 설명이 됐다.“죄송해요, 외삼촌.”“그 인간이 너 협박했어?”“외삼촌….”“이유영,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외삼촌도 못 미더웠다 그거지?”“그게 아니라….”
‘비겁한 자식!’유영이 말했다.“외삼촌,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유영은 정국진에게 계획 전부를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방향은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정국진은 그녀의 생각을 듣고 바로 의도를 알아챘다.“알았어. 크리스탈 가든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하지만 회사에 영향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거야. 알겠니?”“네, 외삼촌.”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이 원하는 건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당한 게 있는데 되돌려주지 않으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을 정국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하는 일을 막고 싶지 않았다.“곧 한 해가 지나가는데 박 대표랑 같이 파리로 와서 같이 보내는 건 어때?”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외삼촌, 사실 저랑 박 대표 사이는….”“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적응해 보도록 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어디 쉽겠어? 하지만 박 대표는 좋은 사람이야. 외삼촌 안목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어.”결국 유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사실 외삼촌을 만난 뒤로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눈빛이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매번 그런 눈빛을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하고 씁쓸했다.전화를 끊은 유영은 홀로 사색에 잠겼다.강이한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미친 짓의 의도는 결국 그녀를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다.유영은 그가 지나간 그들의 10년을 내려놓지 못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그녀는 그들이 옛날처럼 서로를 사랑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에게 미련이 남았다면 박연준이 떠나 있는 동안에 벌써 흔들렸을 것이다.매번 강이한과 함께 있을 때면 지난 생에 자신을 억지로 수술실에 들여보내던 광기 어린 얼굴과 자신의 목숨을 앗아갔
비록 해외로 도망가긴 했지만 유영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대략 어디쯤으로 갔는지 알아냈으니 슬슬 범위를 좁히며 수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호언장담하는 사설 탐정의 얘기를 들으며 유영은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잘했어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 주세요.”“그럼요.”수화기 너머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그녀의 주변은 또다시 평온이 찾아왔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면 그녀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정국진에게 사실을 알린 뒤로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을 이루어냈다.퇴근 시간에 그녀를 찾아온 강이한에게 그녀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이제 순정동으로 돌아가야겠어.”“이유영!”“이 게임, 이제 끝이야.”“게임? 여태 이걸 놀이로 알았어?”“그게 아니면 뭔데? 강이한, 억지 부리지 마. 내가 이렇게 하면 바보처럼 네 진심을 믿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니?”유영은 강이한이 진심으로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잡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정말 그녀가 소중했다면 전생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보기에 그가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건 한지음의 상황이 그 정도로 최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다면 이 남자는 결국 망설임 없이 그녀를 수술대에 올렸을 것이다.이 점에서 그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남자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이유영, 감히 네가 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유영은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그 성격은 여전했다.“내가 못할 게 뭐가 있어? 평생 당신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줄 알았니?”전생의 그녀는 그랬다.그때 그녀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결국 시력
하지만 조형욱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남달랐다.얼마 전부터 조형욱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유영은 기억에 조형욱에게 불만을 살만한 일을 한 적 없었다.설마….그녀는 전에 한지음이 강이한의 본가에 찾아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조형욱이었다.‘남자 홀리는 재주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조 비서, 태도 똑바로 해.”강이한은 불손한 그의 태도를 보고 경고 섞인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조형욱은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히 화제를 돌렸다.“배준석 씨 오셨습니다. 지금 접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준석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드리웠다.최근 그는 줄곧 배준석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한 원인도 배준석이 수술 당일에 환자를 버리고 갔기 때문이었다.배준석이 집도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수술이었다.솔직히 말해 이번 일에서 강이한은 배준석을 원망했다.그가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일단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난….”“조 비서, 도망 못 가게 잘 지키고 있어. 놓치면 조 비서 너도 옷 벗을 줄 알아!”말을 마친 사내는 씩씩거리며 접대실 방향으로 갔다.유영은 떠나는 그의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사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비서실 직원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세강은 대기업 중에서도 연봉이 가장 높은 편에 속했다. 여직원은 어렵게 구한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에게 싸늘한 두 갈래의 시선이 쏠렸다. 조형욱과 유영이었다.유영은 여직원을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조형욱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그러고는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조형욱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커피 가져왔습니다.”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영은 나가려는 조형욱을 불러세웠다.“조 비서님.”“네. 무슨 일이시죠?”조형욱은 끝까지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유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조 비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조 비서는 그 감정 잘 숨겨야 할 거예요.”강이한은 딴 맘을 품은 인간을 절대 곁에 둘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조형욱이 자신 몰래 한지음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큰 소란이 일 것이다.조형욱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유영 씨, 원래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요?”“뭐라고요?”“아무리 못나도 피를 나눈 동생이잖아요.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한지음 씨의 불행은 다 이유영 씨 때문이잖아요.”유영은 그제야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에게만 전 재산을 물려준 일을 두고 한지음이 조형욱이나 강이한 앞에서 불쌍한 척을 적지 않게 해댄 모양이었다.“당장 내 앞에서 꺼져!”“이유영 씨!”“꺼지라고!”유영은 더 이상 조형욱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는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한지음의 출생의 비밀에 대하여 알게 된 이후로 유영은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한지음은 그녀에게 치욕과도 같은 존재였다.조형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말을 마친 조형욱이 뒤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이제 대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의 자리까지 올라가셨잖아요. 한지음 씨는 시력을 잃은 불쌍한 인생에 불과해요. 높은 곳까지 올라가신 분이 계속 약자를 괴롭히는 건 세간에 보기도 좋지 않아요.결국엔 유영이 속이 좁다는 얘기를 돌려서 하는 말이었다.유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말했다.“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조 비서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요.”조형욱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유영은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입에서 한지음이 불쌍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막혔다.조형욱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졌는지
전에 강이한의 옆에 있을 때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소은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내일 동교 개발 지역에 한번 가볼래요? 설계도 가지고 나와요.”“알겠어요.”유영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일이고 그녀가 현장에 꼭 가봐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아침에 데리러 갈까요?”“좋아요. 설계도면은 회사에 있으니까 회사로 와요.”요즘 유영은 거의 크리스탈 가든에 있으며 업무를 처리했다. 그래서 작업실 일도 회사로 가져가서 시간이 날 때마다 처리하고는 했다.강성건설과 서원의 의뢰는 줄곧 유영이 혼자서 담당하고 나머지 업무는 작업실 디자이너들에게 전부 맡겼다.작업실 쪽은 조민정이 알아서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한편, 손님 접대실.방 안에서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강이한은 배준석이 건넨 서류를 굳은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배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그가 수술 직전에 사라지면서 한지음의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배준석은 뜻밖의 자료를 그에게 건넸다.그는 도깨비 기왓장 넘기듯이 서류를 단숨에 읽었다.그리고 탁 하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을 해봐!”강이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그에 비해 배준석의 표정은 처연했다.평소의 생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강이한 역시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그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지금의 배준석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이렇게 변하기까지 그의 신변에 분명 무언가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강이한은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물었다.배준석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그 여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어.”그 여자란 배준석이 줄곧 마음에 품었던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실종된지 오래 되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거야?”강이한이 다급한 어투로
“형, 그 여자가 사람을 죽였다고!”배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처음으로 보는 그의 분노에 강이한은 가슴이 철렁했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 배준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웃으며 흘려 보내는 사람이었다.그만큼 이 일이 그의 한계를 건드렸다는 증명이었다.그가 모든 시간과 정력을 들여 찾고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생기가 넘치지 않았고 뼈를 에이는 것 같은 차가움이 자리를 잡았다.“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지금 이 서류들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어.”강이한은 사건의 진실을 전부 파헤치기 전에 일단 배준석을 진정시켜야 했다.배준석은 실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강이한의 마음도 무거웠다.배준석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래. 형에게는 정말 중요한 여자지. 한지음이 시력을 잃었는데도 그 여자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무사하잖아?”강이한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쳤다.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했다.“네가 많이 힘들고 절망적인 거 알아. 이 일은 내가 조사할게. 나한테 맡겨!”“그 여자가 진범이 맞다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준석이 물었다.그랬다. 진범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강이한은 온몸에 혈액이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가슴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최근 그는 유영의 신변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기도 전에 배준석의 신변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형, 한지석은 형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어. 그런 사람의 유일한 동생이 한지음인데 형은 한지음을 위해 뭘 해줬지?”“부부 관계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단을 만든 것도 형이야. 이유영 그 여자의 두꺼운 가면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형의 책임이고! 그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납치해서 수술을 진행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어쩌면 유 선생도 그 여자가 매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강이한은 매서운 눈으로 배준석을 노려보며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