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할 건 또 뭐야? 한 번 죽은 마당에 다시 한번 죽는 게 두려울 것 같아?” 이건 이유영이 했던 말이었다.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한번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회사로 돌아오자 조형욱이 와서 말했다. “대표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왜 그래?” “유경원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그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눈빛이 깊어졌다. “누가 들여보냈어?” “그게…” 조형욱은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유경원이 청하시에서의 신분이 특수하기 때문이었다. 그녀 배후의 유씨 가문은 일반 가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감히 막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강이한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가 가서 보낼까요?” “응.” 강이한은 유경원에게 조금도 인내심이 없었다. 이 모든 게 진영숙 혼자만의 착각 때문에 초래한 일이었다. 강이한은 강씨 본가에서 진영숙과 유경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예전에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유경원은 고개를 돌렸다. 들어온 사람이 조형욱인 걸 보고 그녀는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직 안 돌아왔어?” “아가씨, 방금 대표님께 전화를 했는데 바쁘다고 오늘은 먼저 돌아가시라고 합니다.” “아니, 나 오늘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해.” 유경원은 얼굴을 갈고 울먹이며 말했다.원래는 한지음의 일에서 양보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날 강씨 본가에서 그런 말을 하고 떠난 후 그들이 한지음을 잘 배치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강주에 데려갈 줄은 몰랐다. 이어서 강이한과 이유영의 스캔들이 터지자 진영숙은 온갖 핑계를 대서 유경원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유경원은 이유영이 그렇게 집착할 줄은 몰랐다. 강이한과 이혼까지 해놓고 또다시 엮이다니. “대표님께서 정말 바쁜 것 같으니 제가 모셔다 드릴 게요.”
유경원은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강서희와 마주쳤다. 강서희와 비교하면 유경원이 더 우아했다. 강서희도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 “경원 언니, 오빠 찾으러 온 거예요? 오빠 바쁠 텐데 만났나요?” 그녀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물었다. 유경원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너였어?” 강서희는 황급히 말했다. “언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흥, 뭘 그렇게 의기양양한 거야? 강이한과 이유영이 재결합하면 너에게 득이 될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신이 난 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강서희의 얼굴이 굳더니 눈빛에 음험한 빛이 스쳤다. 유경원은 강서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강씨 가문에서만 오냐오냐하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발걸음이 멀어지자 강서희는 유경원의 뒷모습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강이한이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강서희가 왔다. 그녀는 웃는 모습이 어릴 때와 똑같이 귀여웠다. 게다가 지금은 커서 예쁘고 우아함도 묻어났다. “오빠, 어떻게 됐어? 새 언니 쪽은 해결했어?” 강서희는 친근하게 불렀지만 오전에 이유영이 발표회에서 의기양양한 모습만 생각하면 질투의 불이 타올랐다. 강이한은 강서희의 웃음을 보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설었다. “왜 그래? 잘 안 됐어?” “너도 가든의 규칙 알잖아. 올해 너무 늦게 말한 거 아니야? 주문 다 나갔대.” “하지만 새 언니가 가든의 사장이잖아.” 강서희는 불만스러워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투 속에 실망이 섞여 있었는데 왠지 듣기 거북했다. 강서희는 계속 말했다. “그럼 안 되는 거야?” “응!” “새 언니가 아직도 날 싫어 하나보다.” 강이한은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강서희를 한 눈 보더니 말했다. “강씨 가문에서 누가 누굴 싫어하는지 몰라?” “오빠, 그건 엄마 때문에…….” 강서희는 뒤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뻔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진영숙에게 돌렸다. 강이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너!” “새 언니는 분명 날 싫어하는 거야. 날 좋아한다면 틀림없이 줬을 거라고!” 강이한은 그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강서희는 일부러 그런 거였다. 그녀가 억울해하면 강이한은 이유영이 쪼잔하다고 책망할 테니까. 그럼 지금의 이유영은 당연히 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겠지. 그게 바로 강서희와 한지음의 계획이었다.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러자 조형욱이 들어왔다. “대표님.” “무슨 일이야?” 강이한은 강서희 때문에 찌푸린 미간을 만지며 물었다. 조형욱은 강서희를 한 눈 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강이한은 알아차리고 강서희에게 말했다. “너 먼저 돌아가. 나 회의 있어.” “오빠!” 강서희는 억울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다시 말해볼게.” 강이한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고마워, 오빠! 꼭 말해야 해. 내 친구들 모두 내가 구름을 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생일파티에 그거 하지 않으면 비웃을 거야.” “응.” 강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그녀는 조형욱 곁을 지나갈 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조형욱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에 강이한과 조형욱 두 사람만 남았다. 강이한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한지음 씨의 수술,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강이한은 표정이 굳더니 조형욱을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어제 한지음 씨가 약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한지음 씨에게 수술해 줬던 의사가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 강이한이 물었다. “네.” “어떻게 확신해?” “이 자료 보세요!” 조형욱은 자료를 강이한 앞에 놓았다.자료로 봐서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수술 후의 신분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 게 문제였다. 전에는 그냥 병원 안과의 주임이었는데, 지금은 운영자금이 8억이나 하는 의료기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족은?” “조사해 봤는데
사무실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조형욱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네, 지금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조형욱은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강이한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조형욱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강이한이 불렀다. “잠깐!” “대표님, 왜 그러세요?” “한지음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조사해 봐.” “네!” 이번 일을 얼핏 생각하기엔 이유영이 그런 것 같지만 요즘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해서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 이유영에게도 조심스러웠다. 특히 이유영이 한지음의 일에 있어서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다. ……. 같은 시각, 이유영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신제품 발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오로라 스튜디오에서도 엄청 바빠졌다. 게다가 박연준의 동교 신도시도 공사를 시작해서 이유영은 도면의 상세한 부분을 잘 처리해야 했다. 저녁에 퇴근 시간에도 사무실에서 야근을 했다. 강이한이 전화가 오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나 오늘 밤 새야 하니까 먼저 들어가!” “내가 같이 있어줄 게.” 남자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유영의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이 떨렸다. 사실 수공도면은 이미 완성했다. 지금은 전자판을 하고 있는데 차질이 생길까 봐 이유영이 직접 하고 있었다. “너……!” “십 분 후에 도착해!” 이유영은 욕하고 싶었다. 방금 강이한의 부드러운 말투는 이유영으로 하여금 옛날이 생각나게 했다. ‘그땐 강이한이 너무 바빠서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애교를 부리고 때를 써야 했었는데, 지금은…….’ 십 분 후. 강이한은 이유영이 좋아하는 떡까지 사들고 그녀의 사무실에 나타났다.매번 줄 서서 사야 했는데 모두 그가 직접 가서 산 것이었다. 예전엔 이 떡만 사 오면 아무리 화가 나도 감동되어서 풀리곤 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앞으로 사지 마. 나 안 좋아해.” 강이한은 외투를 벗는 동작을 멈칫
이유영은 바빠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강이한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는 정말로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혼하면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영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사무실에는 이유영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한참 후!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저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해외의 프로젝트가 문제 생겼습니다.” “뭐?” 남자는 순간 날카롭고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이유영은 이상하다고 느껴져 고개를 들어 강이한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그의 깊은 눈빛과 마주쳤다. 5 분 후, 그는 전화를 끊고 이유영에게로 다가왔다. “너 뭐 하는 거야?” 이유영은 그의 안색을 보며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강이한은 직접 이유영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올려 키스를 퍼부었다. 이유영은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거 아니야?’ 그녀가 손을 들어 때리려고 할 때, 강이한이 말했다. “네 외삼촌이 내 해외의 프로젝트를 건드렸어.” “쌤통이다.” 이유영이 반박했다. 정국진은 로열 글로벌의 사장인데, 그렇게 큰 손해를 보고도 가만있을 리가 없지. 이유영은 갑자기 턱에 통증이 느껴왔다. “넌 그런 외삼촌이 있어서 자랑스러운 가봐?” “당연하지.” 이유영은 숨김없이 말했다. 강이한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마음이 개운했다.강이한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몸을 굽혔다. 이유영은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강이한, 이 미친놈아…” “욕해! 좀 있으면 욕할 힘도 없을 테니까.” “너….” “계속해!” 이유영은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강이한을 죽이고 싶었다. 청하시의 밤은 엄청 아름다웠지만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강이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외삼촌이 네 해외의 프로젝트를 모두 망쳤으
세강그룹에 도착하자 이유영은 조형욱, 이시욱과 직원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부서마다 긴급회의가 열렸는데 강이한의 엄숙한 모습을 보니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유영의 마음은 차가웠다. 해외의 프로젝터가 문제가 생긴 건 엄청 난 일이었다. 그래서 각 부서에서 모두 돌아와 야근을 하며 문제를 처리했다. 3시간 후, 강이한은 이유영이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유영은 강이한의 눈빛을 느끼고 정신을 차려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이 회사가 오늘 망했으면 좋겠어.” “너 오늘 잘 처리하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잘 생각하지 마.” 그의 말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유영도 자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건 명백한 복수야! 외삼촌이 그에게 한 화풀이를 나도 함께 감당하라는 거야.’ 강이한은 화를 돋우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유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너 대단하잖아? 그럼 거의 다 해결했겠지?” 이유영이 화난 말투로 말했다. 그건 강이한이 예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었다. 예전엔 회사에 어떤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도 그녀가 걱정할까 봐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유영도 커리어우먼으로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너희 외삼촌 그렇게 대단한데 하룻밤에 해결될 리가 없잖아?” “너…” 이유영은 화가 나서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요즘 그녀는 매일 바빴다. 오전에는 발표회의 일로 바쁘고 오후에 가든에서 회의를 마치면 다시 박연준의 일로 바빴다. 동교 신도시의 공사도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서 쉬고 싶은데 강이한이 이럴 줄은 몰랐다. 강이한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피로가 가득한 이유영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유영은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다.특히 지금 여기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바로 이유영이었다. 게다가 밤이라 그녀는 지루해서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그런데 강이한의 사무실에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려서 잠을 잘 수가
“집에 준비 다 해놨어. 오늘은 출근 안 해도 돼.”밤새 야근을 했으니 사장님은 회사에 나오지 않겠지.차에 탄 후, 이유영은 강이한과 떨어져 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일부러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이시욱이 운전했는데 이 시간의 거리는 차량도 적고 엄청 조용했다.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나 좀 놔줘.”“이젠 네 외삼촌한테 무슨 짓을 하라고 하지 않겠지?”“무슨 뜻이야? 내가 그랬다는 말이야?”“아니야? 네 외삼촌이 널 엄청 사랑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안 그래도 화가 난 이유영은 그의 말을 듣자 더 화가 났다.만약 정말 그녀가 외삼촌과 강이한이 이렇게 대치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면, 그날 강이한이 그런 짓을 했을 때 가장 먼저 외삼촌과 박연준에게 말했을 것이었다.“나는 떳떳해서 그런 뒤통수를 치는 일을 하지 않아. 내가 네 여동생과 한지음 같은 사람인 줄 알아?말을 마치자 차 안의 공기가 조용해지더니 남자의 숨결도 응결되었다.이유영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그녀는 강이한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저번 생에서도 강서희에게 당한 후, 강이한에게 말하자 돌아온 건 그의 가책과 경고였다.그 후로부터 그녀는 다시는 강이한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받은 억울함을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한 번으로 남자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은 점점 어두워지는 강이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이유영을 품에서 놓고 거리감을 유지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롱했다.“서희가 널 싫어하는 건 우리 엄마 때문이야. 그러니까 이젠 신경 쓰지 마.”“…….”‘그래서? 그게 무슨 뜻인데? 전에 강서희가 나에게 그렇게 대한 건 모두 진영숙 때문이다?’인정하기 싫지만 강서희는 아주 똑똑했다.하지만 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해봤자 그가 믿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왜 말을 안 해?”이유영이 말을 하지 않자 강이한은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
두 사람이 홍문동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게 준비되었다. 이유영은 식탁에서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차에서 강이한이 다시 한번 강서희의 편을 든 후부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왠지 강이한은 폭풍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유영아.” 결국, 강이한은 참지 못하고 평온을 깨뜨렸다. “왜?” “전에 본가에서 너에게 잘 대해주지 못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다 지난 일이잖아.” “지금 나보고 따지지 말라고 권하는 거야? 아님 우리 외삼촌을 봐서 지나가라는 거야?” 이유영은 비웃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알던 과거와 다른데. 비록 강이한이 외삼촌의 도움 없이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진영숙이 나에게 준 느낌은 좀 다른 것 같아.’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다. “너희 엄마,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겠지? 자존심을 버리고 날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 너에게 별로 자신이 없나 봐!” 이유영의 말은 점점 과분해졌다. 그러자 강이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유영이 이렇게 자신의 어머니를 말하는 게 싫었다. 진영숙이 어떤 사람이든 강씨 가문의 후계자를 정할 때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부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왜 강이한에게 집안이 걸맞은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로서 자식을 감싸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자신이 보호할 수 없더라도 의지할 곳을 찾아주려고 하는 게 엄마의 마음이었다. 강이한은 필요 없지만 엄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 몇 년 동안 강씨 본가에서 살면서 둘째 삼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둘째 삼촌?’ 이유영의 인상 속에 강씨 가문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무섭게 날뛰던 사람이 둘째 삼촌이었다. 강이한은 줄곧 삼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 분파 간에도 비율이 클 뿐만 아니라 본분을 지키지도 않았다. “우리 아버지의 일이 그와 관련이 있을 수 있어!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영아, 엄마도 강씨 가
과거에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겼으면서 이제 와서 단 하나의 일로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생각하다니?갑자기, 허리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순간, 이유영이 강이한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고 그와 동시에 키스가 마치 폭풍처럼 이유영을 휘감았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강이한의 손길은 더욱 강하고 거칠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숨결에는 알 수 없는 절망과 말을 잃은 듯한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마치 자신을 뼛속 깊이 각인시키려는 듯한 격렬한 집착이 느껴졌다.강이한의 따뜻한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리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그렇게 해줄게.”서주의 혼란이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덫이라면, 강이한은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줄 각오를 다졌다.만약 이것이 이유영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강잏나은 모든 걸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다.“이건 네가 해주는 게 아니야. 그건 네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일 뿐이야.”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의 이유영은, 내뱉는 말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꽂혔다.이유영을 품에 안고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서도 그 숨결에서 단 한 점의 온기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강이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이유영은 마치 온기를 잃은 사람 같았다.어쩌면 이유영이 가진 마지막 온기는 강이한이 스스로 다 소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차가움뿐이었다.“네 말이 맞아. 이건 내가 받아야 할 대가야.”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반복하며 인정했다.하지만 강이한이 그게 무엇이든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다짐했다.강이한의 키스가 다시 한번 이유영을 집요하게 덮쳤다. 그 속에는 강이한의 절박함과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이유영의 손은 강이한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을
“한지음이 당신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 내가 마지막으로 알아낸 사실이었어.”이유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여자가 이런 고통을 감내했다면 어떤 보상으로도 그 상처를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그들은 그것이 전생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강이한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유영의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그것은 한 여자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아!”강이한은 지금껏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설명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과거에 한지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유영의 반응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이유영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이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떤 일이 있었던지 지금은 분명히 해명해야 했다.“갈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이한의 온몸이 굳어졌다.이유영의 말은 너무도 날카로웠다. 때로는 이유영의 날카로운 직감이 강이한의 가슴을 찌르고 아프게 했다.강이한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그 고통은 너무도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었다.“떠나는 게 나을 거야. 서주에 너무 오래 머물렀잖아. 네가 돌아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기대되네.”이유영의 말은 마치 비웃음과도 같았다.엔테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그 문서를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문서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었다.하지만 절반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온전한 문서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었다.문제는 전기봉이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이다. 문서의 절반을 가진 강이한에게 이 문서는 귀중한 자산이 아니라 끝없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다.게다가 그의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였다. 만약 강이한에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직 이유영과 아이뿐이었을 것이다.“유영아...”강이한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었다.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곁을 지킬 권리도 자격도 없었고 이유영의 말처럼, 강이한은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이한이 이유영의 곁에서 겪었던 내적 변화를.이유영을 바라볼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쓰라리고 깊게 파고들었다....점심이 되자 또다시 쓰디쓴 약이 준비되었다.그때 박연준이 찾아왔다.박연준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의 무거운 분위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서주 쪽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현 씨.”“네, 아가씨.”우현이 이유영의 부름에 공손히 다가왔다.“국물 맛있네요. 한 그릇 더 줘요.”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가 이유영의 마음속에 묘한 위안을 주는 듯 이유영의 말투는 가벼웠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유영과 강이한, 그리고 박연준 사이의 관계였다.두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만 이유영의 마음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에서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영은 두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그들을 미워하며 마주할 때마다 이유영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건 인과응보와도 같았다.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아가씨.”우현은 조심
모두가 아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다.왜냐하면 아이가 건강해져야 이유영도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강이한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 강이한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유영이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는지를.그 아이는 이유영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언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던 아이였으니, 이유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강이한, 너 알아? 난 한 번도 너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었어.”“알아, 나도 알아.”강이한은 이유영을 끌어안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를.이유영은 단지 아이와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단순한 바람마저 결국 강이한의 손으로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서 이유영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버렸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싸움을 이어가며 아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더 이상 이유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었다.어디에도 즐거운 기억은 없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심장은 항상 불타고 있었다.그 누구도, 월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했다.“그만해.”“이게 네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아니었어?”“...”“이게 바로 그 아이를 키우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
끝없는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영의 마음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이유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길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허락된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마주하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이유영은 지금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를 파리로 돌려보내 줘.”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강이한의 마음은 이미 어둠에 억눌린 상태였는데 이유영의 요구를 듣고 나니 더욱 숨이 막혀왔다.“유영아...”“염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잖아. 그런데 약을 먹어도 전혀 좋아지는 기미가 없어.”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이유영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한지 그대로 드러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들으며 눈에 깊은 고통과 상처가 서렸다.“수술... 생각해 본 적 있어?”만약 정말 수술을 하게 된다면...수술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눈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달랐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염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어쩌면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수술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수술을 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두려웠다. 강이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유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강이한은 그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유영아, 나는 두려워.”강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그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의 수술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이유영은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이한은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