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 처음 청하시에 올 때부터 나한테 복수하려고 작정하고 온 거야!”한지음이 그녀의 가정을 파탄내고 그녀에게서 광명을 앗아가려고 모든 것을 설계할 때도 가족애 따위는 없었다.그런데 계략이 실패하고 처지가 비참하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잘못을 그녀에게 돌리려 하고 있었다.“그렇지 않아!”강이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이유영은 어차피 사실을 물어도 한지음이 제대로 대답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이유영이 장문의 해명을 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회사를 나온 강이한은 박연준의 차에 오르는 이유영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녀는 마치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그의 옆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자유를 얻은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무능력한 전처가 아니었다.30분 뒤.강이한은 병원으로 돌아갔다. 한지음은 피폐한 모습으로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이것 봐요. 이제는 어둠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절망이 묻어났다.그런 모습의 그녀가 그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강이한은 입구에 서서 말없이 한지음을 바라보기만 했다.이유영에게 사실을 들은 뒤에 한지음을 바라보니 그녀의 오관은 이유영과 무척 닮아 있었다.전에는 둘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라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던 것뿐이었다.“일찍 돌아오셨네요? 거절당한 거죠?”한지음이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그만큼 이번 일에서 그녀의 태도는 강경했다.그런 모습에 강이한의 두 눈도 싸늘하게 식었다.“너랑 이유영 사이의 관계, 왜 전에는 말 안 했어?”병원으로 오기 전, 강이한은 모든 사실관계를 속으로 정리했다.한지음은 청하시에 금방 왔을 때부터 자신과 이유영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그들이 만나게 된 이유가 한지석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전에는 항상 한지음이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한지음은 아버지의 바람과 자신이 이유영을 어떻게 함정에 빠뜨렸는지만 쏙 빼놓고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진술했다.그녀는 전혀 반성하거나 찔리는 어투가 아니었다. 이미 강이한이 이 질문을 할 줄 알고 반복해서 연습한 결과였다.“지금 보면 유영은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이런 모습이 되지도….”한지음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울먹이며 고개를 속였다.강이한은 한지음을 그토록 증오하던 이유영의 얼굴을 떠올렸다.“이한 오빠, 그 여자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제 혈육이기도 하지만 저는 용서해 줄 수 없어요.”“그 여자가 저와 제 엄마를 증오하는 거 알아요. 저와 제 엄마가 자신의 가정을 파탄냈다고 생각할 거니까요. 하지만 처음부터 제 엄마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간 건 그 여자의 엄마였어요.”강이한은 혼란스러웠다.중재하려고 해도 두 여자 사이에는 이미 증오밖에 남은 게 없었다.그래도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유영은 한지음에 비해 운이 좋은 편이었다.“유영의 엄마는 우리 엄마의 존재를 알고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돌렸어요. 그래서 유영은 가족을 잃은 뒤에도 생활에는 부족함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어땠을까요?”한지음이 어떻게 자랐는지 강이한도 조사해 본 바가 있어서 알고 있었다.“정말 좋은 엄마를 두었더군요. 다른 사람의 남자를 빼앗아가고 죽더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먹고 살 걱정 없이 모든 걸 처리해 놓았으니까요.”“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딛고 성립된 거죠. 처음에는 미운 감정이 들지도 않았어요. 저한테 무슨 짓을 해도 가만히 있었죠. 제가 언제 반항한 적 있나요? 하지만 이번은 달라요. 어떻게 우리 엄마한테….”그러고 보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한지음은 먼저 강이한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구한 적 없었다.그녀가 요구한 것은 사과뿐이었다.강이한은 혼란에 빠졌다.한지음과 이유영의 관계는 그가 처음 이유영에게 정국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질
마라탕을 맛본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이유영은 야채를 골라 그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처음 이거 먹었을 때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어요.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먹고 싶어지는 맛이에요. 절대 후회는 없을 거예요.”그녀가 강이한을 처음 이 가게에 데려왔을 때 그도 오만상을 쓰며 거부했었다.결국 강이한은 그녀가 살던 평범한 세상에 녹아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세계에 적응한 사람은 이유영이었다.“이거 정말 먹을 수 있는 거 맞아요?”박연준이 오만상을 쓰며 물었다. 미식가인 그에게는 참 받아들일 수 없는 매운 맛이었다.“먹어보면 괜찮다니까요?”박연준은 의심의 눈초리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결국 젓가락을 들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마치 사약을 먹는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이유영이 웃음을 터뜨렸다.“어때요?”사실 이유영은 박연준도 강이한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을지 테스트하고 있었다.전에 강이한을 데리고 이 집에 왔을 때, 그는 먹자마자 음식물을 뱉어낸 뒤로는 한 번도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박연준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기대에 찬 이유영의 눈빛을 보자 결국 이를 악물고 음식물을 삼켰다.“흠. 괜찮네요.”그 모습을 보자 이유영의 두 눈에 씁쓸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만약 과거 강이한도 조금 더 적응해 보려는 시도를 해보았다면 어땠을까?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로 강이한은 그녀가 추천하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아야! 왜 그래요?”박연준이 손을 뻗어 이유영의 볼을 꼬집자 이유영은 불만스럽게 남자를 노려부았다.“나랑 있으면서 다른 남자 생각하는 거예요?”이유영은 억울한 표정으로 볼을 만졌다.“진짜 데이트도 아니잖아요.”사실 그들의 데이트는 정국진이 하도 닦달해서 성사된 것이었다.이유영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기에 재벌가 사람을 다시 만날 생각은 없었다.박연준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의 가족들이 자신을 곱게 봐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나한테는 진짜 데이트인걸요?”박연준이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말
이런 사람이 과연 미래를 꿈꿀 자격이 있을까?“유영 씨?”“네?”“유영 씨는 남편을 잃었을 뿐이지 인생을 잃은 건 아니에요.”“하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걸요.”그녀는 이 과정에서 원래의 자신을 잃어갔다.그 말을 들은 박연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아직도 강이한을 내려놓지 못한 건가요?”이유영은 그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그 미소에는 씁쓸한 감정도 담겨 있었다.그녀가 말했다.“그건 내려놓고 안 내려놓고의 문제가 아니에요.”“그럼 뭐죠?”남자가 물었다.그는 모든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이유영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최근 외부에서 전해지는 소문과 공개되지 않은 진실까지 전부 박연준에게 말해주었다.박연준은 조용히 끝까지 듣고만 있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남자는 차디찬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그러니까 그 녀석은 끝까지 그 여자 말만 믿었다는 거죠?”“맞아요.”이유영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회사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그는 그렇듯 당연하게 그녀에게 사과와 이해를 요구했다.“그 사람은 나는 상처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래서 자신이 시키는 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분노하고 나한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죠.”“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겠네요.”둘 사이는 이제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는 얘기였다.이유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말도 맞네요. 고민할 필요가 없죠.”세강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그와의 결혼 자체가 잘못된 시작이었던 것이다.“지금 세강 사람들은 유영 씨한테 뭐라고 해요?”박연준이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은 별말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죠.”
[그게 무슨 소리야?]강이한은 갑작스러운 말에 기분이 상했다.장성호가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영상 속에서 이유영은 박연준과 같이 밥을 먹고 손을 잡고서 마라탕 가게를 나서고 있었다.가게 간판을 자세히 들여다본 강이한은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이유영!”그는 부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그와 신나게 싸워대던 그녀였다.그런데 박연준과 함께 둘이 처음 데이트를 나갔던 가게에서 밥을 먹다니!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가게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익숙한 가게 이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장성호에게서 화상 통화 요청이 왔다.강이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정말 이혼했어?”“그래.”“너도 참 대단하다. 너 이혼하자마자 연준이 걔한테 전처를 빼앗긴 셈인데 화도 안 나?”대학교 때부터 박연준과 강이한은 라이벌 관계였다.둘은 평소에 별로 교류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둘을 두고 비교했고 그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둘 사이는 점점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다.하지만 그냥 서로 짜증 난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정작 대놓고 싸운 적은 없었다.이런 상황에 기분이 안 나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둘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데?”“그야 나도 모르지. 나도 차 타고 지나가다가 둘이 같이 있는 걸 보고 너한테 보낸 거야.”“둘이 꽤 가까워 보이던데 곧 결혼 발표가 있을지도 모르지.”눈치 밥 말아먹은 장성호의 말에 강이한의 얼굴은 점점 음침하게 굳어갔다.“둘이 10년을 만났잖아. 어쩌다가 이혼하게 된 거야?”“설마 네가 밖에서 만나는 그 여자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너희들까지 이러면 누가 감히 사랑을 믿겠어?”탁!강이한은 그대로 전화를 바닥에 던져버렸다.10년을 쌓아온 사랑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는 욱하는 마음에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장성호가 보내온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이유영이 웃으며 박연준의 입에 마라탕을 넣어주고 있었고 박연준도 과거
“아… 알겠습니다!”수화기 너머로 긴장한 이시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을 제외하고 그의 신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유영은 금기어와도 같았다.잠시 후, 시욱에게서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대표님, 이유영 씨는 박연준 대표와 같이 식사를 하시고 음악회 관람하러 갔습니다.”“음악회?”“네. 해외 오케스트라가 하는 공연인데 요즘 장안의 화제라고 하더군요.”음악회는 박연준의 취향이었다.강이한은 듣는 순간 오만상을 썼다.벌써 둘이 같이 취미생활을 공유할 정도로 가까워진 걸까?그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가능하다면 이유영을 홍문동으로 납치해서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다.과거의 이유영의 생활은 단조로우면서도 강이한 위주로 돌아갔다. 지금과 비교하니 속이 뒤틀렸다.그가 씩씩거리고 있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조형욱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분명 한지음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전화한 것일 텐데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하지만 결국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받고 말았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병원에서는 한지음 씨 퇴원해도 된다고 하는데 어디로 모셔야 할까요?”한지음은 이제 광명을 회복할 기회를 잃었기에 입원해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건 없었다.게다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으면 사람만 피폐해질 뿐이었다.강이한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부동산 하나 새로 마련하신다고 했으니까 그쪽으로 전화해 봐.”“네, 알겠습니다.”그는 하마터면 홍문동으로 데려가라 하려고 했지만 결국 참아냈다.이유영이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었다.비록 지금은 집을 나갔지만 그곳은 이유영이 오랜 시간 생활한 곳이었다.비록 둘 사이는 이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지만 잠재의식 속에서 다른 여자가 그곳에 돌아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 여자가 한지음이라고 해도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진영숙도 한지음의 거취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지음이 한지석의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잘 돌봐주려고 했는데 일이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진영숙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말을 마친 그녀는 따뜻한 차를 한잔 들이켰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강서희의 두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사실 요즘 여론이 떠들썩하긴 하지만 원래 진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잖아.”“이유영은 이미 오빠랑 이혼했고 일을 크게 만드는 성격도 아니야. 현재는 일하느라 여념이 없을걸? 그렇다고 경원 언니가 소문 냈을 가능성도 없어. 언니는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했으니까.”진영숙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오빠랑 결혼할 사람이 세강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일에 가담했을 리는 없어.”그렇게 다 배제하고 나면 한지음 한 사람만 남았다.이제 시력을 잃었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세강뿐이니 소문이 나서 이득을 보는 쪽은 한지음이었다.강서희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영숙은 그 뒤에 숨은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하지만 걔가 무슨 수로 상류층 사람들과 접촉하겠어?”강서희가 말했다.“걔 지금 있는 병원, 재벌가 사람들만 찾는 병원이야.”“그러니까 걔가 세강의 사람이 되려고 일부러 소문을 퍼뜨렸단 거야?”“그거야 모르지. 세강에 입성하려고 온갖 짓을 다 벌이던 여자가 한둘이야? 엄마도 알잖아.”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강서희는 이때다 싶어 계속해서 말했다.“게다가 걔 이제 완전히 시력을 잃었잖아. 지금 걔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었다.“일단은 여기서 살게 해. 다른 방법이 없잖아.”지금 이 시점에서 한지음을 밖에 거처만 마련해 주고 치워버리면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강서희의 두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그야 어쩔 수 없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모시고 살 수밖에!”누군가가 이 일을 통해 이득을 보았다면 그 사람이 배후일 수밖에 없었다.진영숙의 눈빛도 싸늘하게 빛났다.“걔 들어오면 네가 잘 좀 지켜봐. 절대 오빠랑 단둘이 있게 하지 말고.”강서희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걱정 마!”“서희야.”“응
“네?”“처음 볼 때만해도 엄청 딱딱하고 차가운 분인 줄 알았는데.”누가 박연준이 이토록 다정할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지금은 어때요? 괜찮아요?”“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박 대표님 와이프 될 사람은 엄청 행복하겠어요!”사람은 첫 인상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만났던 첫 날을 떠올렸다.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하하!”박연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혔다. 그러나 이어서 나온 말에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그렇지만, 삼촌이 괜한 수고를 한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강이한이랑도 첫 시작은 아름다웠으니까.”그는 이유영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가 보여드릴게요.”박연준이 입고 있던 검은 코트를 이유영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그는 구태여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함께하다 보면 이유영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와 강이한은 달랐다. “고마워요.”이유영이 미소 지으며 감사함을 표했다. “집까지 배웅해드릴게요.”“네, 알겠어요.”이유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매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계가 더 발전하지 못하더라도 둘은 계속 함께 계속 일을 해야 하는 파트너였으니까. 둘은 그렇게 함께 순정동에 도착했다.“내일도 데리러 와줄 수 있나요? 제가 차를 안 가져와서.”이유영이 차에서 내리며 박연준에게 말했다. “그럴게요.”박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오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솔직해진 덕분에 둘은 전보다 훨씬 편한 관계가 되었다. “먼저 들어가요.”박연준이 신사답게 말했다. 이유영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집안으로 들어갔다. 박연준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한 것이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유영은 당장 연애를 할 생각이 없었다. 정국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유영은 그의 뜻을 이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때, 현관문을 열자마자 이유영은 무언가 이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