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상처를 내버려두면 환자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예요.”의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강이한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말은 그렇게 해도 산 사람에게서 기증을 받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곧 죽을 사람이라고 해도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강이한이 암울한 기분에 빠져 있을 때, 진영숙이 다가와서 의사에게 말했다.“선생님은 먼저 나가 있어요.”“네, 사모님.”의사는 진영숙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왜 이렇게까지 걔를 챙기는 거야?”의사가 자리를 비운 뒤, 진영숙은 다짜고짜 강이한에게 따져 물었다.최근 들어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데 대해 이미 불만이 많았던 진영숙이었다.강이한은 어머니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낫게 해줘야 하니까요.”“그렇다고 네가 친히 나설 이유는 없잖아.”안 그래도 한지음이 거슬리는데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감싸고 돌자 진영숙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아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강이한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어머니는 상관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세요.”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진영숙인데 아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자 점점 더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고 정색하며 말했다.“넌 집으로 돌아가. 차라리 엄마한테 맡겨.”진영숙의 태도는 강경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아들의 행동을 방관할 수 없었다.유경원 모친에게 거절당한 일을 생각하면 한지음을 당장 청하에서 쫓아내도 모자랐다.“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러세요?”강이한이 싸늘한 눈빛으로 모친을 바라보며 물었다.말투에서 깊은 짜증이 묻어났지만 진영숙은 물러서지 않았다.“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아직도 부족하세요? 엄마는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요?”“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강이한이 버럭 고함을
강이한은 엄마를 바라보며 실망감이 커져만 갔다.언제부터 엄마가 이렇게까지 냉철하게 변했을까? 그가 어렸을 때는 종종 복지센터로 가서 자원봉사도 했었던 사람이었다.강서희는 보육원에 봉사하러 갔다가 입양한 아이였다. 비록 양녀로 들였지만 진영숙은 친딸처럼 그녀를 아껴주었다.“왜 이렇게 변했나요?”한참이 지난 뒤, 강이한이 실망한 어투로 물었다.갑자기 달라진 아들의 태도에 진영숙이 당황했다.분노에 이성을 잃어서 말이 좀 심했던 건데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분노를 억눌렀다.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이한아, 나도 그 아이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걸 다 네가 떠안을 필요는 없어. 안 그래?”평생 옆에 끼고 살 게 아니면 차라리 관심을 주지 않는 게 나았다.세강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장님을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었다.강이한은 말없이 모친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진영숙이 계속해서 말했다.“너 잊었어? 나랑 네 아버지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세강은 전대 회장이 돌아가고 방계 가족들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겪었다. 집안 싸움에 회사가 공중분해 될뻔한 것을 겨우 살려냈다.강이한이 그만큼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그때 진영숙은 다른 가문들과 암암리에 정략결혼을 약속해서 세강의 입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략결혼이 가져다 주는 이득에 맛을 들였다.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닌가.그래서 강이한이 유영을 데리고 왔을 때 그토록 그녀를 싫어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지음의 존재는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엄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강이한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세강이 여기까지 오는데 풍파가 적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고 그가 그룹 경영을 맡으면서 비로소 입지를 튼튼히 다질 수 있었다.“이한아, 엄마도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사람은 멀리
강이한에게는 유영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그가 가장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그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그때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강이한은 한지음이 예뻐서, 그녀에게 반해서 잘해준 게 아니었다. 한지음이 세강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픈 과거와 연관이 있었다.그때 강이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방계 친척들의 물밑 공격이 시작되었다.진영숙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대 회장이 세상을 뜨고 회사의 주주들과 지분을 보유한 방계 친척들은 합세해서 세강을 차지하려고 했다.그들은 어린 강이한을 납치하고 강이한의 아버지에게 경영권에서 물러나라고 협박했다.강이한은 가까스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한 소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사고가 있은 후, 가족들은 소년의 가족을 찾아가서 보상을 해주려 했지만 강이한에게서 그 아이가 고아라는 말을 들었다.강이한은 침통한 얼굴로 진영숙에게 말했다.“한지음 걔는… 지석이 동생이에요.”진영숙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쳤다.“너 뭐라고 했어?”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강이한을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강이한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저도 우연히 알았어요.”“그때는 걔가 고아라고 했잖아.”“동생이 있는데 행방불명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 아이를 찾고 있었어요.”강이한은 일부러 그 사실을 가족에게 숨겼던 것이다.진영숙은 손발이 떨려왔다.지금 강이한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한지석 덕분이었다.그래서 모든 걸 잊어도 세강의 사람이라면 한지석은 잊을 수 없었다.그런데 한지음이 그의 동생이었다니!“지석이 동생이라고? 확실해?”진영숙이 확실치 않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한지음에 대한 진영숙의 생각이 바뀌고 있을 때, 유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에 몰두했다.점심을 조민정과 대충 때우고 업무에 열중하는데 문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연준이 식사를 같이 하자는 요청이었다.유영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서 모든 일정을 미루고 박연준과
유영은 당황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그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둘의 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절대 좋은 말이 나올 수 없는 관계였다.“꼭 그렇지만은 않아요.”박연준이 말했다.최근 유영과 강이한의 이혼설은 청하시 사람들의 관심사였다.그들의 이혼을 바라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그런데 강이한에 대해 좋게 말한 사람이 그의 오랜 라이벌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그렇게 비교해 보니 강이한이 더 속 좁은 인간으로 보였다.“저와 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정말 되돌릴 여지가 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유영이 아픈 표정으로 말했다.박연준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남자의 눈동자에 유영의 슬픈 얼굴이 담겼다.강이한과 이혼 싸움을 하면서 그녀는 항상 강압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그런데 모든 가면을 벗어 던진 그녀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박연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그러네요. 둘이 오래 사귀고 결혼했다는 말은 들었어요.”10년의 사랑, 그건 전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들이 헤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10년을 함께한 커플마저 마지막이 이토록 진흙탕 싸움인데 세상에 과연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까?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유영은 묵묵히 고기를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입맛이 썼다.“그래요. 10년을 함께했죠.”그녀는 다시 지난 생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불 타서 죽어갈 때 그 절망적인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단호하게 이혼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매정해 보일지라도 그녀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아무도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식사가 끝난 뒤, 둘은 함께 동교 개발 현장으로 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현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이 남자 때문에 직장을 잃을 뻔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그 로펌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찾은 직장이었고 지금까지 성징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노력과 피땀이 작용했다.만약 정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로펌을 나오게 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소은지는 처음부터 이 재벌가 도련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자신의 이득만을 쫓으며 서민의 생계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이들을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평등과 존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더 혐오스러웠다.강이한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이유영 지금 어디 사는지 당장 알아봐.”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조형욱에게 전해졌다.홍문동을 나간 뒤로 줄곧 소은지의 오피스텔에 같이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또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해외 기사를 떠올렸다.소은지네 집에서 나갔다면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생각할수록 의심만 깊어졌다.잠시 후, 조형욱에게서 답장이 왔다. 유영이 순정동에 산다는 소식이었다.보고를 들은 순간 강이한의 분노가 폭발했다.“지금 순정동이라고 했어?”“네, 옮긴지 좀 된 것 같아요.”조형욱이 말했다.순정동 땅이 얼마나 비싼지, 강이한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그곳에 저택을 구매하기 위해 수많은 인맥을 동원했는데도 구매하지 못한 땅이었다.그런데 유영이 순정동으로 이사했다니!대체 그 집 주인이 누굴까?“그 집 누구 명의로 되어 있어?”강이한이 이를 으드득 갈며 물었다.순정동 집주인의 신상은 여태 공개된 적 없었다.그래서 아무리 능력 좋은 조형욱이라고 해도 단기간에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당장 그것부터 조사해!”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의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스멀스멀 풍겼다.대체 무슨 재주로 순정동에 들어갔을까?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의 두 눈이
순정동.강이한의 차는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청하시 최고급 별장 단지답게 경비도 삼엄하고 눈이 가는 곳마다 휘황찬란했다. 순정동 설계도면이 공개됐을 때, 수많은 재벌들이 구매하려고 줄을 섰었다.하지만 넓은 면적에 비해 지어진 별장은 고작 세 채에 불과했다.박연준의 차가 뒤늦게 대문으로 들어왔다.강이한은 차창을 통해 유영의 얼굴을 보았다.순간 그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이 시간까지 박연준과 같이 있었던 걸까?그리고 이때,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조형욱이었다.“말해!”“대표님, 순정동 주민의 개인정보는 워낙 꽁꽁 숨겨져 있어서 조사가 쉽지 않았어요. 다른 두 명은 알아낼 수도 없고 현재 확인된 입주민 중에 박연준 대표님이 있네요.”이로써 강이한의 추측이 확실해졌다.이 시간에 같이 돌아온 것 자체가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핸드폰을 잡은 그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일단 알았어.”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강이한은 바로 유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같이 돌아왔다는 건 같은 집에 산다는 의미일까?해외에 있는 남자는 그녀에게 포르쉐를 사주고 지금은 박연준과 같이 생활한다니!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사실 박연준의 저택은 단지 맨 안쪽에 있었고 유영의 저택은 중간 위치에 있었다.유영이 장난치듯 말했다.“우리가 이웃사촌일 줄은 몰랐네요.”비록 이웃이라고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입주민 간에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들어가요.”박연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영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출근할 때 같이 갈래요?”박연준이 차에서 내리는 유영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도 살짝 당황하며 걸음을 멈추었다.박연준과 같이 출퇴근하면 아주 편할 것 같지만 귀찮은 일들이 생길 위험성이 따르기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비서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그래요.”박연준도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차에서 내린 유영은 박연준
지금 생각해 보면 유영과 결혼할 때도 가족들의 반대에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 같았다.“이유영!”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이 무심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당장 나와!”유영은 한숨이 나왔다.“나 지금 순정동 대문 앞이야.”유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마치 바람난 마누라를 잡으러 온 남편의 말투였다.귀찮아질 것 같아서 거처를 숨기려 한 건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유영은 이 남자가 외삼촌과 자신의 관계까지 밝혀내기 전에 이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안 나오면 너랑 박연준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갈 거야!”유영이 말이 없자 남자의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그건 또 무슨 소리야?”여기서 왜 박연준이 나오지?전에는 소은지의 커리어로 협박하더니 이제는 대상을 바꿔 박연준이었다.“무슨 소리인지 몰라? 둘이 같이 들어가는 거 내가 다 봤어. 이유영, 당신 이렇게 헤픈 여자였어?”말할수록 강이한은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수화기 너머로 라이터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긴 숨소리가 들려왔다.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저럴까 싶었지만 짜증 나는 건 유영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지금 나갈게.”왜 강이한이 이토록 이성을 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녀가 박연준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순정동 입구.강이한에게서는 싸늘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10년을 사랑했던 여자였고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10년 동안이나 그의 옆에서 연기를 했던 걸까?이게 그녀의 본모습일까?유영은 그와 멀리 떨어져서 차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해.”“나한테 해명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강이한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그는 여자의 당당한 태도에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우리 곧 이혼할 사이야. 내가 뭘 해명해
“나랑 같이 살 때는 다 죽어갈 것처럼 하더니, 박연준한테 가면 인생이 편해질 것 같아?”유영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세강의 며느리로 살면서 불행했던 그녀의 삶마저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걸까?시어머니가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도 내 탓이라는 걸까?그의 가족들이 그들의 아이를 죽였는데 그것도 내 탓인 걸까?강서희가 볼 때마다 시비를 걸어댄 것도 내가 먼저 잘못해서 그랬다는 걸까?이 남자 옆에서 자존심을 굽혀가며 살아온 세월들이 갑자기 허무해졌다.겉보기에는 항상 유영을 지켜주려 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가족들 편에 서서 유영을 평가했던 게 아닐까?진영숙이 유영을 외부인 취급했지만 어쩌면 강이한도 한 번도 그녀를 진짜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난… 당신이 사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했어. 결국… 돌아오는 건 이런 거구나.”유영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자의 작은 얼굴에는 실망감과 싸늘함만 가득했다.강이한의 분노와 여자의 얼굴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난 당신과 살면서 한 번도 스스로 결정을 내려본 적 없어. 그때는 모두를 위해 내가 양보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유영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녀가 바보라서 계속 양보만 한 게 아니었다.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어떤 건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그녀가 차갑게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바라는 대로 해줄게.”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덤덤히 대답했다.“고마워. 내일 법원 앞에서 봐.”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다.이제는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지난 생의 아픔을 다시 경험하기 싫어서 먼저 이별을 택했지만 그가 알겠다고 하는 순간, 가장 아픈 건 그의 입에서 이별의 말을 듣는 순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그들의 10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주 잔인한 조건과 함께.강이한이 말했다.“망막 기증해 줘.”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