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노에 그의 준수한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그에게서는 진한 살기마저 풍겼다.“내일 아침 아홉 시, 법원 앞에서 만나.”그 말을 끝으로 유영은 홀연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강이한은 고집스러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남자의 두 눈에 진한 아픔이 서렸다.그녀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이 뒤섞여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면서도 그에게서는 멀어지려고 하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그는 치미는 분노를 담배로 달랬다.다음 날.법원 앞에 도착한 강이한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유영을 보았다. 그녀는 오늘 깔끔한 오피스룩에 머리를 위로 올린 모습이었다.그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떠나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을 이루기까지 그녀가 한 일들이 혐오스러웠지만.강이한이 차에서 내려 다가오자 유영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들어가자.”평온하고 담담한 말투였다.강이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과거에 사랑했던 그녀를 바라보았다.평생 지켜주고 싶던 여자인데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다.그는 길게 심호흡하며 감정을 갈무리했다.“이유영 나를 떠나서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겠어. 나중에 후회하며 나를 찾지나 마.”강이한이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박연준, 정국진 모두 좋은 남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그녀가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겠다면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심연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비웃듯 말했다.“그런 날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 사람들이 장님이 된 널 영원히 지켜줄 것 같아?”유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조금이라도 남았던 그 미련조차 남자의 한 마디에 깡그리 사라졌다.유영은 덤덤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조금의 주저도, 미련도 없는 모습에 강이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이혼 서류를 접수하는 절차는 단숨
유영은 강이한이 갑자기 생각을 바꿀까 봐 초조했다.오래 지속되었던 싸움이고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세강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그녀에게 족쇄와도 같았다. 여론의 질타와 비난이 그녀를 숨막히게 했다.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고민 끝났고 이대로 처리해 주세요.”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어쩌면 이혼이 서로에게 해방일 수도 있었다.지금 이 상태로 계속 지속하다가는 서로의 추한 모습만 계속 보게 될 것 같았다.법원에서 나올 때, 두 사람의 손에는 이혼 서류가 한 장씩 들려 있었다. 손잡고 혼인신고하러 왔을 때랑은 확연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을 알았을까? 그때는 서로에 대한 무한한 확신만 있었고 언젠가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유영이 자신의 포르쉐로 향해 가자 강이한은 갑자기 갑갑함을 느꼈다.하지만 이제는 남남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면서도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그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며 말했다.“가자.”유영이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딜 간다는 거야?”“병원.”강이한이 말했다.유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잊지 마, 이혼하기로 한 조건은 망막을 기증하는 거야.”강이한이 차갑게 말했다.그녀가 그의 사랑을 거부한다면 처참하게 망가뜨릴 생각이었다.지금부터 더 이상 그녀에게 그 어떤 애정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남은 건 배신감과 복수심뿐.유영이 웃었다.예쁘장한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잠이 덜 깬 것 같네.”말을 마친 유영이 뒤돌아섰다.강이한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지금 날 가지고 논 거야?’그랬다. 이혼을 위해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뿐, 진짜로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지금의 유영은 그가 하자는 대로 다 하던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강이한과 이혼한 유영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파티도 약속했다. 소은지는 소식을 듣고 연차를 낸다며 서둘렀다.그들은 유영의 집
그녀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유영을 바라봤다.그런 조건에 동의한 유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유영은 창백하게 질린 친구를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나도 놀랐어. 그런 유치한 조건까지 내걸 줄은.”지난 생에 한번 경험한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주겠다고 했어?”소은지가 물었다.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제안을 거부했더라면 이혼 서류에 도장도 찍지 못했을 것이다.소은지는 이런 조건에 동의한 친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사람이 시력을 잃으면 그때부터 암흑 속에 사는 건데 그걸 동의했다니!생각만 해도 속이 갑갑하고 울렁거렸다.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겠다고 했지.”“너 미쳤어?”“내가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어줬을 리 없잖아. 안 주면 그만이야.”“그러니까….”소은지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유영은 조건에 동의했지만 그건 단지 이혼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이혼 서류에 도장까지 찍었으니 그 말도 안 되는 약속은 번복하면 그만이다.그녀에게서 망막을 빼앗기 위해 이혼 서류에 사인했을 강이한을 보니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처음부터 유영이 망막을 기증하기 위해서 이혼까지 거부했던 게 아닐까?세상에 이 사람보다 더 매정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이미 매정하다는 말로 그를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면 된다는 거지?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까?”“이혼까지 했는데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무시하면 돼.”“정말 이대로 포기할 것 같아?”“산 사람의 망막을 뜯어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건 위법 행위야.”유영이 웃으며 말했다.변호사인 소은지가 더 잘 아는 상식이었지만 친구의 일이다 보니 이성이 날아가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다.유영이 약속을 번복했다고 해서 강이한이 유영에게 소송을 걸 방법은 없다는 얘기였다.“너무 놀라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어.”만약 유영이 이혼을 위해 정말 그 제안에 동의했다면
오후에 유영은 사무실로 나갔다.조민정이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그녀의 사무실로 왔다. 대충 검토하고 사인을 마치자 조민정은 서류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게 뭐예요?”유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난번에 요구하셨던 병원 쪽 자료입니다.”“벌써 조사를 끝마쳤어요?”유영이 놀라며 말했다.“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죠. 10억을 주고 진실을 밝혀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어요.”10억이나 나갔다는 말에 유영은 살짝 가슴이 아팠다.강이한과 결혼하고 이제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절대 작은 숫자는 아니었다.서류에 적힌 진실을 마주한 순간, 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네요.”예쁜 얼굴에 냉기가 스치고 지나갔다.거기에는 한지음과 병원 내부 관계자가 돈을 주고받은 입금 기록과 영상이 들어 있었다.한지음이 멀쩡하게 병원을 돌아다니는 영상이었다.유영은 이 영상을 본 강이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기대가 됐다.한지음의 시력을 되찾아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10년을 함께한 조강지처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려 했던 남자였다.그렇게 정성 들여 보살핀 여자의 추악한 이면을 마주했을 때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조민정이 물었다.“일단은 그냥 가지고만 있죠. 아직은 거기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최근 그녀는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넘쳐나는 의뢰를 처리하기도 바빴다.병원 쪽에서도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진영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한지음의 손을 잡았다.“네가 고생이 많아.”“아줌마….”한지음이 울먹이며 말끝을 흐렸다.“네 오빠가 목숨을 바쳐 도와준 덕분에 우리 이한이가 살 수 있었어. 그때는 지석이가 고아인 줄 알고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이렇게 여동생이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이야.”오빠 얘기가 나오자 한지음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드리웠다.“다 지난 일인걸요.”“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이한 씨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줌마가 속상해하실 거라면서요.”한
그때는 한지음도 강이한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지는 않은 상태였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그래서 갑자기 태도가 바뀐 진영숙을 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조차 난감했다.“아줌마….”진영숙이 말했다.“걱정 마. 내가 다 해결해 줄게.”그녀는 한지음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한지음은 괜찮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아니야, 약해지면 안돼! 이유영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려면 아줌마 도움이 필요해!’한지음은 이혼으로 부족했다. 비록 강이한과 이혼했지만 유영은 여전히 활개치며 살아가고 있었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강이한이 아니라 유영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결말이었다.“감사해요, 아줌마.”한참 고민을 마친 뒤, 한지음이 말했다.진영숙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불쌍한 아이에게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이 세상에 가족 하나 없이 혼자 살아가는 불쌍한 아이였다. 유일한 혈육인 오빠는 강이한을 구해주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솔직히 너를 양녀로 입양하고 싶지만 최근에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에 대해 말이 많잖아.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 같아.”한지음이 안타깝지만 세강의 이미지도 고려해야 했다.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한지음을 양녀로 들이면 세강은 또 온갖 여론을 몰고 다닐 것이다.“이해해요.”한지음이 말했다.“이한 씨도 그걸 걱정해서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요.”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이 진영숙을 소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강이한은 유영과 싸우느라 바쁘고 한지음도 모든 신경을 유영에게 쏟았다.하지만 진영숙은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더 애잔한 눈빛으로 한지음을 바라보았다.한지음의 병실을 나온 진영숙은 주치의를 만났다. 하지만 주치의는 오늘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라졌다고 했다.진영숙은 묻고 물어서 한지음이 처한 상황을 듣게 되었다. 망막 이식이 시급하다는 내용이었다.병원에서 나온 진영숙은 곧장 강이
진영숙이 탄식하며 말했다.“지음이한테 망막을 이식해 주는 조건으로 원하는 대로 다 줘. 지음이한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들었어.”비록 강이한도 그런 결정을 내렸었지만 엄마의 입에서 그 말을 듣자 저절로 숨이 막혔다.유영이 멀쩡한 망막을 떼서 한지음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아팠다.“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강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전에는 그 역시 이런 식으로 유영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사실 그녀가 시력을 잃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손을 뻗으면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 그런 세상에 산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서투르게 손을 뻗으며 주변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걷는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익숙하지만 안쓰러운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손발이 흠칫 떨렸다.‘아… 아니야! 최근에 피곤해서 환각이 보였나 봐!’비록 유영에게 많이 실망하고 배신감도 느꼈지만 그런 모습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자존심 강한 그녀가 밥 먹는 것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런 고통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안 돼! 그렇게 되면 이유영은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거야!’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릿하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진영숙은 아들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땀 좀 봐!”집안의 온도는 적절했고 땀을 흘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강이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 생각, 포기하세요.”“이한아!”“제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한지음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렇다고 유영을 시각장애인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금도 걔 편을 드는 거야?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걔가 최근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잊었어?”이혼도 하지 않고 해외로 가서 늙은 남자랑 바람이 난 며느리였다.그것만 생각하면 진영숙은
유영은 일에 치여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업무만 끝난다면 모든 것을 양승호 변호사에게 넘기고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법.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우우웅-이때,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저장되지 않는 번호였지만, 유영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난번에 한지음이 그녀에게 걸었던 번호였다.유영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난 이미 강이한과 이혼했어.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한지음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선수 쳤다.사실 이혼한 것만으로 이 상황이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건 유영도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전화 넘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설마 겨우 이혼으로 모든 것이 끝날 거라 생각했어? 내가 원하는 게 강이한, 그 뿐인 줄 알았어?”“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난 너의 눈, 팔, 다리… 모든 걸 원해!”강이한은 시작에 불과했다.목소리만으로 유영은 한지음의 강한 증오와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유영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미움을 받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만났다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너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전화 너머 한지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듯 악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뱉었다.유영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한지음이 자신을 왜 이토록 증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회귀 전에 강이한에게 접근했던 이유도 자신을 향한 이 악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러나 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이번엔 절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마음이 없었다.“그래? 어디 해봐! 내가 그냥 당해 줄 것 같아?”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유영이 말했다.“하, 그래! 어디 한번 사랑하던 남자한테 눈을 뺏기는 기분이 뭔지 느껴봐!”라는 말과 함께 한지음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충격에 한동안 자리에 미동도 할 수 없었다.우우웅-그러다가 다시 울리는 벨 소리
유영은 이 중대한 사실을 이제야, 그것도 강이한이나 그의 가족이 아닌 삼촌한테 듣게 됐다는 사실에 놀랐다.“강이한이 10살 때 일어난 일이야. 그때 거의 죽을뻔했다고 들었어.”정국진이 말했다.이 말을 들은 유영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그래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구나….’끔찍한 일이었을 테니, 강이한은 어쩌면 이 사건을 입에 담기조차 싫었으리라 그녀는 추측했다."그때, 한지음의 오빠가 강이한을 구해줬어. 강이한은 살아남았지만, 한지석은 죽었지."“….”그녀는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한지석이 죽었다고…? 그래서…!’“유영아, 조심해. 강이한은 물론 그 주변 인물 모두를. 아니면 차라리 지금 파리로 돌아올래?”정국진의 추측대로라면 강씨 집안사람들은 아직 한지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강이한이 유영과의 갈등으로 집안사람들한테 말할 시기를 놓친 것이다. 한지석은 강이한은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큰 은인이었다. 그러니 한지석의 동생인 한지음이 나타난다면 강씨네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떠받을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지음이 유영을 적대시한다? 그러면 당연히 온 가족이 그녀의 편을 들 것이고 유영은 궁지에 몰릴 것이다.정국진은 이부분이 매우 걱정스러웠다.깊이 숨을 들이킨 유영이 입을 열었다."그런데 이 일이 한지음이 저를 미워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그녀는 한지음으로부터 적나라한 증오를 느꼈다.“그건 나도 아직 뭐라 단정 짓진 못하겠어. 일단 빨리 파리로 돌아오기나 해!”정국진이 단호하게 말했다.강이한과 이혼한 지금, 유영이 청하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유영은 머뭇거렸다.“저 아직 이쪽에서 맡은 일을 끝마치지 못했어요. 파리로 돌아가려면 우선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요.”“이런….”유영이 지금 맡고 있는 건 아주 큰 프로젝트였다.이번 프로젝트는 그녀의 커리어에 큰 획을 그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유영이 파리로 돌아오려면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으리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관계는 철저히 계약으로 엮여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서도 소은지가 굳이 현우와 동행할 이유는 없었다.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선을 그어 외부의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미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현우는 소은지가 예상외로 순순히 나오는 모습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왜 그래요?”“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이 모든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싶어요.”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내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곧 새로운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소은지는 그 결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만약 엔데스 명우가 이긴다면요?”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잡았다.현우는 소은지의 손바닥에 맺힌 차가운 땀을 확연히 느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의 승리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소은지와 현우의 관계는 사실상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대결로 비쳤다. 현우의 말을 듣고 소은지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출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이렇게까지 와서도 어쩔 수 없는 건가요?”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물었다.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현우는 미소를 지었다.특히 소은지의 눈빛에 담긴 불만을 보며 현우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그게 그렇게 쉽겠어요?”현우는 활짝 웃으며 소은지를 안고 안쪽으로 데려갔다.소은지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엔데스 명우를 파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건 쉽지 않지만, 이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그래서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인가요?”소은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눈앞의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소은지는 엔데스 회장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재 남겨진 것은 문서라는 단어뿐이었다
이유영은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똑같은 부류야. 다 좋은 사람이 아니야.”이유영의 비웃음은 강이한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이유영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연서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이유영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지듯 아팠다.이유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하나하나가 강이한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다.“전기봉의 소식이라니, 하하!”그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는 강이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사실, 이유영은 이미 강이한의 선택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사건 때처럼 반복될지 확인하고 싶었다.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때와 같을지 알고 싶었다.이온유가 위급했던 그때, 강이한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유영을 떠났다.“서주의 모든 것은 네가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아, 유영아. 나를 성급히 판단하지 마.”이유영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강이한은 신중히 말을 꺼냈다.이유영이 서주의 복잡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강이한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유영이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까 봐 걱정했다.예전 이온유의 사건처럼.“흥!”이유영이 코웃음 쳤다.강이한의 말을 듣기 전에, 이유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기봉의 소식을 듣고 나서 강이한이 어떻게 행동할지.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강이한의 진심을 확인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사실, 강이한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유영의 차가운 말투는 강이한을 더욱 아프게 했다.너무 쓰리고 아렸다.병원에서 돌아온 후에
처음엔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데려갔다니, 그는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아이가 그의 딸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생명이었다. 강이한에겐 그 아이에게 손댈 자격조차 없었다.그 며칠은 아이와 이유영 모두에게 끔찍한 악몽이었다.이유영은 지금도 병원을 헤매며 미친 듯 아이를 찾았던 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밤낮없이 걱정하며 엄마로서 견딜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이유영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결국, 당신은 아이가 당신 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온유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했어.”어떤 이유를 들어도 강이한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강이한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과 모든 진실을.하지만 그런데도 강이한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 그래서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그때, 그 아이가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을 때... 강이한, 정말 그 순간조차도 넌 아무런 동정심도 못 느꼈어?”“...”그 말은 강이한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왔다.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동정심이 없었을까?사실 그도 동정심을 느꼈다.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강이한이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그 아이가 소중했고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온유의 위급한 상태는 강이한을 잔인한 선택의 기로로 몰아넣었다.“이유영, 나는...”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이유영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했다.그 사건은 지금도 강이한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 역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물었다.“
두 사람은 전통 사옥으로 돌아왔다.빗물이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이유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의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이유영에게 잔잔한 평온을 안겨주었다.“아가씨, 점심으로 탕을 끓였습니다.”우지가 말했다. 병원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이유영에게 보양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건강도 되찾았으니 이제 든든하게 먹어야 했다.“네.”우지가 조용히 이유영에게 속삭였다.“아가씨, 아까 강 선생님께서 통화 중이셨는데, 전기봉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을 거라 오랫동안 확신해 왔다.“네, 알겠어요.”어두운 방. 이유영은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이유영은 전기봉 문제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강이한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음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강이한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했다.만약 이유영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었다면, 이미 세상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조용히 문이 열리며 강이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우지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이제 방 안에는 이유영과 강이한만 남았다.“우지가 네게 모든 걸 말했나 보군.”강이한의 목소리는 깊고 무거웠다.“...”우지를 우연히 본 걸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소식을 전한 걸까? 하지만 이유영이 표정은 평온했다. 이유영은 그의 질문에 흔들림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당장 퍼뜨릴 거야.”“...”“네 약점을 당장 적들에게 넘겨버릴 거야!”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는 그 말에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매우 아팠다.박연준의 말처럼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제 대놓고 그를 배신하려 했다.그것도 강이한의
연서.그 이름은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그 기억은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잔인했다.만약 이유영이 이번에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강이한과 박연준은 평생 서로를 외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연준, 참 가엾네.”연서… 박연준은 연서에게 흔들린 적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연서를 데려가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었다.“가엾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게 할 거야, 말 거야?”그가 말하는 것은 서주였다. 강이한은 그의 말을 듣고 조소를 터뜨렸다.“평생 계획하던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과거 박연준의 계획 중심에는 항상 서주가 있었다.처음엔 연서가 그 중심이었고 이후엔 이유영이 그 중심이었다. 박연준의 복잡한 속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강이한조차 박연준의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런 박연준이 이제 와서 포기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 말 뒤에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박연준은 단호히 말했다.“나는 이유영만 있으면 돼.”다른 건 모두 필요 없었다.과거의 교훈은 피로 새겨진 기억처럼 그에게 깊게 남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무의미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는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웃기지 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놓고 이렇게 대립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이한의 눈에 비친 박연준은 감정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만 원한다고?“이유영은 사람이야. 살아있는 사람!”이유영은 물건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사람의 감정은 상호 존중이 기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이 사실을 강이한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박연준은 냉소적으로 되받아쳤다.“이유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박연준은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
이유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지금...”“넌 이미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이유영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평생토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박연준은 강이한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박연준 자신은?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늘 모든 사람을 조종하던 강이한이 이번에는 스스로 그 틀에 갇힌 셈이었다.이유영의 눈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은 폭풍처럼 요동쳤다.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가 끝나게 된 이유는 강이한의 우유부단함이 컸다.하지만 자신이 꾸민 일과 계산도 분명히 한몫했다.만약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심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감옥에서 일어난 화재 같은 비극도 이유영의 삶에 없었을 것이다.그 화재만 없었다면, 이유영의 눈은 무사했을 것이다.“하하, 참 우습군!”오랜 침묵 끝에 강이한이 비웃음을 터뜨렸다.“이건 네가 내게 진 빚이야.”진 빚? 그렇다.강이한은 연서와 관련된 일로 박연준에게 진 빚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빚을 갚기 위해 이유영을 이용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품은 마음을 오래전부터 알아차렸다.그렇지 않았다면 이유영이 연서에 대해 알아갈 무렵, 박연준이 급히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그 모든 행동은 박연준이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음을 보여줬다.그리고 그 당황의 이유는 바로 이유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유영과의 관계를 위해 박연준에게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뜻인가?강이한은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속여왔으면서, 진실이 뭔지 알고나 있어?”진실?오랫동안 사람들을 조종하며 살아오다 보니, 박연준은 자신조차 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박연준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강이한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박연준, 감정이라는
병원 맞은편의 카페.박연준은 강이한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놀랍네. 이런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지금 서주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이한의 차가운 눈빛에는 점점 더 날 선 위협이 깃들었다.“아무래도 엔데스 회장은 이번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네.”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이번 달은 못 넘긴다고?”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이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지금까지도 엔데스 회장의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따라서 이 시점에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 결과는 대단히 끔찍할 수 있었다.서주는 지금 아주 중요하 시기를 맞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문서는 핵심 열쇠로 작용할 거였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기봉...”그 세 글자를 뱉어내며 강이한은 이를 악물었다.전기봉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지만, 모두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을 찾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박연준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냉소를 띤 채 말했다.“전기봉, 네가 데리고 있지?”“박연준!”강이한은 이를 갈며 말했다.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박연준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돌린 것이 분명했다.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모든 걸 넘길게.”“...”그 뜻밖의 말에 강이한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모두 넘겨준다니?“전기봉의 행방을 찾는 즉시, 너에게 넘길게.”“무슨 뜻이야?”강이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연준은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눈빛에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박연준은 강이한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염 선생이 그러더라고. 석 달 후에도 약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이유영의
염 선생의 눈빛에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전남편이든 현재 남편이든, 두 분 모두 이유영 씨를 아꼈다면 어째서 이유영 씨의 눈을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했나요?”눈은 사람의 창밖을 비추는 창문과도 같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체 부위였다. 하지만 이유영의 눈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특히 이유영이 정국진의 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비극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석 달 후, 이유영 씨는 어떻게 되나요?”그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만약 석 달 후에도 아무런 개선이 없다면... 이유영 씨의 눈은 아마...”염 선생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박연준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고 이어서 염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유영 씨의 두 눈은... 아마 복구가 불가능할 겁니다."“...”복구 불가능. 그 단어가 박연준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박연준의 머릿속은 갑자기 울리는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끔찍한 결과가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조차 너무 끔찍했다.만약 이유영의 눈에 희망이 없다면, 이유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와 위협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염 선생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를 협박하는 겁니까?”박연준은 차갑게 말했다.“선생님의 아들, 염명훈 말입니다.”“뭐라고요?”“이유영 씨의 눈이 회복된다면, 선생님의 아들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염명훈. 염 선생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자 동시에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이었다. 염 선생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도 상당 부분이 아들 때문이었다.“좋습니다.”현재 염명훈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거래를 승낙하는 순간, 염 선생의 눈에는 깊은 체념과 결심이 스쳐 지나갔다.박연준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렇다면 잘 부탁드립니다.”설득만으
지난밤은 단지 짧은 하룻밤이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정말로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우지가 이유영에게 이불을 더 덮어주었지만,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그 추위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유난히 불편했다.결국 링거를 맞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올 때마다, 이유영은 항상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무서워하지 마.”박연준은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유영을 달랬지만, 이유영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이유영은 마치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 무기력했다.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더욱 단단해진 듯 보였다.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벽이 느껴졌다.병실 침대에서.“물 좀 마셔.”박연준은 컵에 빨대를 꽂아 이유영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유영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목마르지 않아.”사람들은 열이 나면 몸이 뜨겁고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곤 했다.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려고 하는데 이유영은 그런 느낌 대신 온몸이 춥기만 했다.병원에서 제공한 얇은 담요는 추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고 링거를 맞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이 팔 전체로 번졌다.“박연준.”“응?”“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왜 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왔을 때, 진료 후의 협상은 모두 강이한과 염 선생이 나섰기 때문에 이유영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박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염 선생은 왜 만나려고 해?”박연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유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