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이 탄식하며 말했다.“지음이한테 망막을 이식해 주는 조건으로 원하는 대로 다 줘. 지음이한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들었어.”비록 강이한도 그런 결정을 내렸었지만 엄마의 입에서 그 말을 듣자 저절로 숨이 막혔다.유영이 멀쩡한 망막을 떼서 한지음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아팠다.“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강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전에는 그 역시 이런 식으로 유영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사실 그녀가 시력을 잃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손을 뻗으면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 그런 세상에 산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서투르게 손을 뻗으며 주변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걷는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익숙하지만 안쓰러운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손발이 흠칫 떨렸다.‘아… 아니야! 최근에 피곤해서 환각이 보였나 봐!’비록 유영에게 많이 실망하고 배신감도 느꼈지만 그런 모습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자존심 강한 그녀가 밥 먹는 것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런 고통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안 돼! 그렇게 되면 이유영은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거야!’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릿하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진영숙은 아들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땀 좀 봐!”집안의 온도는 적절했고 땀을 흘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강이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 생각, 포기하세요.”“이한아!”“제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한지음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렇다고 유영을 시각장애인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금도 걔 편을 드는 거야?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걔가 최근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잊었어?”이혼도 하지 않고 해외로 가서 늙은 남자랑 바람이 난 며느리였다.그것만 생각하면 진영숙은
유영은 일에 치여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업무만 끝난다면 모든 것을 양승호 변호사에게 넘기고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법.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우우웅-이때,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저장되지 않는 번호였지만, 유영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난번에 한지음이 그녀에게 걸었던 번호였다.유영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난 이미 강이한과 이혼했어.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한지음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선수 쳤다.사실 이혼한 것만으로 이 상황이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건 유영도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전화 넘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설마 겨우 이혼으로 모든 것이 끝날 거라 생각했어? 내가 원하는 게 강이한, 그 뿐인 줄 알았어?”“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난 너의 눈, 팔, 다리… 모든 걸 원해!”강이한은 시작에 불과했다.목소리만으로 유영은 한지음의 강한 증오와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유영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미움을 받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만났다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너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전화 너머 한지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듯 악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뱉었다.유영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한지음이 자신을 왜 이토록 증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회귀 전에 강이한에게 접근했던 이유도 자신을 향한 이 악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러나 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이번엔 절대로 호락호락 당해줄 마음이 없었다.“그래? 어디 해봐! 내가 그냥 당해 줄 것 같아?”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유영이 말했다.“하, 그래! 어디 한번 사랑하던 남자한테 눈을 뺏기는 기분이 뭔지 느껴봐!”라는 말과 함께 한지음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충격에 한동안 자리에 미동도 할 수 없었다.우우웅-그러다가 다시 울리는 벨 소리
유영은 이 중대한 사실을 이제야, 그것도 강이한이나 그의 가족이 아닌 삼촌한테 듣게 됐다는 사실에 놀랐다.“강이한이 10살 때 일어난 일이야. 그때 거의 죽을뻔했다고 들었어.”정국진이 말했다.이 말을 들은 유영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그래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구나….’끔찍한 일이었을 테니, 강이한은 어쩌면 이 사건을 입에 담기조차 싫었으리라 그녀는 추측했다."그때, 한지음의 오빠가 강이한을 구해줬어. 강이한은 살아남았지만, 한지석은 죽었지."“….”그녀는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한지석이 죽었다고…? 그래서…!’“유영아, 조심해. 강이한은 물론 그 주변 인물 모두를. 아니면 차라리 지금 파리로 돌아올래?”정국진의 추측대로라면 강씨 집안사람들은 아직 한지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강이한이 유영과의 갈등으로 집안사람들한테 말할 시기를 놓친 것이다. 한지석은 강이한은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큰 은인이었다. 그러니 한지석의 동생인 한지음이 나타난다면 강씨네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떠받을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지음이 유영을 적대시한다? 그러면 당연히 온 가족이 그녀의 편을 들 것이고 유영은 궁지에 몰릴 것이다.정국진은 이부분이 매우 걱정스러웠다.깊이 숨을 들이킨 유영이 입을 열었다."그런데 이 일이 한지음이 저를 미워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그녀는 한지음으로부터 적나라한 증오를 느꼈다.“그건 나도 아직 뭐라 단정 짓진 못하겠어. 일단 빨리 파리로 돌아오기나 해!”정국진이 단호하게 말했다.강이한과 이혼한 지금, 유영이 청하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유영은 머뭇거렸다.“저 아직 이쪽에서 맡은 일을 끝마치지 못했어요. 파리로 돌아가려면 우선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요.”“이런….”유영이 지금 맡고 있는 건 아주 큰 프로젝트였다.이번 프로젝트는 그녀의 커리어에 큰 획을 그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유영이 파리로 돌아오려면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으리
"루이스를 네게 보낼게." 정국진이 말했다.‘루이스? 삼촌의 개인 경호원?’"그러실 필요 없는데…." 유영이 말했다. 청하시의 치안은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루이스가 필요할 것 같아요."전화를 끊은 후, 유영은 정국진이 말한 한지음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둘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사이였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이혼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혼하지 않았다면 한지음한테 얼마나 더 많은 증오를 받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분명 더 큰 문제들이 생겼으리라.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유영이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만날 수 있어?""지금?" 전화 넘어 강이한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응, 지금!" 유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이 시점에 만나자고 요청할 줄 몰랐다. 최근 이유영은 마치 그를 피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나 지금 사무실에 있어.""알았어, 곧 갈게!" 이유영이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조민정이 준 물건들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다 잠시 정국진이 좀 전에 말한 한지음과 강이한의 관계를 떠올렸다. 그녀는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절대로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사랑과 은혜, 강이한이 선택한 것은 항상 한지석의 은혜였다.한편 외출했다가 돌아온 강서희는 강이한과 이유영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이제는 대놓고 이유영을 싫어하는 티를 내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앞으로 한지음에게 좀 더 잘해줘." 진영숙이 강서희에게 말했다.강서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엄마?"진영숙은 살짝 못마땅한 듯 강서희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한지음에게 좀 더 잘해주라고 했어."그제야 강서희는 말의 뜻을 자각했다. "왜?" 그녀는 왜 진영숙이 이런 말을 했는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어?”강서희가 진영숙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위험 신호가 깜빡거렸다. 한지음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 왜 이런 요구를 하는 걸까?강서희는 진영숙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한지음에게 이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 진영숙이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강서희를 바라보았다.“한지음은 네 오빠의 은인이자, 우리 강씨 집안의 은인이니까!”“은인?”강서희가 놀라 물었다.“그래.”진영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사건은 여전히 그녀에게 악몽으로 떠오를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었다. 겉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그녀도 속에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에 관한 거라면 더욱 그랬다.강서희는 이야기를 들으며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전혀 한지음의 오빠가 강씨 집안과 이런 깊은 인연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지석의 유일한 핏줄이 한지음인데, 우리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지음한테 잘해 줘야지!”진영숙이 말했다.“그, 그렇긴 한데….”비록 마음속으로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강서희도 일단 겉으론 동의하는 척했다. 진영숙이 한지음을 언급할 때마다 보이는 연민의 감정이 무엇보다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강서희가 아는 진영숙은 결단코 쉽게 누군가에게 연민을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영숙의 마음속에 한지음의 위치가 얼마나 높을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한편 병원에서 한지음은 자신의 주치의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했다. 그녀는 벌써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봤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때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온 것을 본 한지음이 물었다.“제 주치의는 어디 갔죠?”“이제 유 선생님이 담당하시게 되었어요.”“그게 무슨 말이죠?”“왕 선생님은 그만두셨어요.”“그만뒀다고요?”한지음이 놀람과 의아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물었다.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그만두셔서 오늘부터 출근 안 하세요.”그 말을 들은 한지음은
드디어 강이한과 이유영이 이혼을 했다. 이제 한지음의 이용 가치는 없어졌다.강서희는 차갑게 조소를 날리며 한지음에게 거침없이 말했다.“하, 왜 이래?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분명 네 입으로 우리 오빠랑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뒤에선 더러운 수단을 써서 우리 엄마의 신임을 얻어?”이렇게 된 이상 한지음의 신분은 조만간 노부인의 귀까지 들어갈 터였다. 만약 노부인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지음은 강씨 집안에서의 위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강서희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있던 혹 떼려다가 더 큰 혹을 붙인 격이었다. 한지음은 이유영보다 다루기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유영은 강씨 집안에 있을 때 더러운 술수를 쓰지 않았으나, 한지음은 달랐다. 한지음은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한지음이 강씨 집안의 일원이 된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강서희는 반드시 한지음을 막아야 했다!“한지음, 내가 말했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강서희는 단호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런 강서희의 태도에 한지음을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한지음은 자신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강서희는 물론 이유영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그녀는 왕 주치의를 해고한 강서희의 대한 분노를 삭였다.“쯧!”전화를 끊은 한지음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은 간호사에게 향하지 않고 남겨둔 의료용 트레이에 머물렀다.한편 강이한의 사무실에서는….그는 드물게 주도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이유영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비록 이혼했을지라도 이유영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이유영은 자신이 가져온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강이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무엇이 담겨 있는지 물었다.“열어 봐, 놀라거야.”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이한은 자기도 모
아주 망설임 없이 돌아온 이유영의 답에 강이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냉소를 머금은 강이한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리고 이유영이 동영상 시작 버튼을 누르려던 동시에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너머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이한 씨,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한지음 환자가….”“무슨 일인데요?”강이한은 한지음의 이름이 들리자 초조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거의 이유영과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큰 키 때문에 이유영은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목을 한참 꺾어야 했다. 비록 통화 내용이 정확히 들리진 않았으나,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바로 가겠다고 답을 한 뒤, 이유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외투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잠깐!”이유영이 소리쳤다.“지금은 안 돼, 오늘 일은 다음에 다시 시간 될 때 얘기해.”강이한은 지금 이유영이 찾아온 이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그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잠깐, 아주 잠깐이면 돼…!”그녀가 말했다.“그냥 고개만 잠깐 돌려서 모니터를 보면 되는 일이야. 한지음의 진짜 모습 좀 보라고!”그러나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유영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강이한은 항상 한지음이 최우선이었다. 그녀는 회귀 전에 그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강이한이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이유영이 갑자기 뛰어오더니 그를 붙잡았다. 강이한의 싸늘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마치 떼를 쓰는 철부지 아이를 보듯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강이한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이거 놔!”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하지만 이런 그의 태도는 처음이 아니었다. 강이한은 심지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에게 손찌검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오늘 그는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닌 거의 살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영은 곧바로 조민정에게 USB를 건네며 단호히 말했다.“다 공개해 버리세요!”“그럼 강 대표님도….”조민정이 놀라 물었다.이걸 전부 공개해버리면 강이한에게도 큰 영향이 갈 게 뻔했다. 원래 그녀는 조용히 강이한한테만 한지음의 정체를 까발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태도를 본 이유영은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유영은 다시 한번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흥, 이젠 신경 안 써요.”이유영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너무나 바보 같았던 자기 자신이었다.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남자. 아무리 십 년이라는 세월이 쌓였다고는 하지만, 더 이상의 배려는 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 그 남자야말로 십 년의 세월이 무성하게도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가 이 일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던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조민정은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그럼 어서 가보세요!”“네.”USB를 챙겨 사무실로 나가려던 조민정이 다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정말 괜찮아요? 후회 안 하겠어요?”이유영은 마치 작정하고 강이한을 망가뜨리려는 사람 같았다.조민정의 물음에 이유영은 질끈 눈을 감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요!”그녀의 답을 들은 조민정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조민정은 이 자료를 기자가 아닌 직접 터트리기로 했다. 그녀는 요즘 가장 핫한 소셜 앱에 계정을 만들어 영상을 업로드 하였고 한지음과 의사간의 금전거래가 담긴 사진 기록도 첨부했다.한지음은 최근 이유영과 강이한, 이 두 사람과 함께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들이 올라가자 모두 앞다투어 소식을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거의 몇 분 만에 실시간 검색어가 이 이슈로 도배되었고 청하시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한편, 달리는 차 안.“강 대표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