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영은 곧바로 조민정에게 USB를 건네며 단호히 말했다.“다 공개해 버리세요!”“그럼 강 대표님도….”조민정이 놀라 물었다.이걸 전부 공개해버리면 강이한에게도 큰 영향이 갈 게 뻔했다. 원래 그녀는 조용히 강이한한테만 한지음의 정체를 까발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태도를 본 이유영은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유영은 다시 한번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흥, 이젠 신경 안 써요.”이유영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너무나 바보 같았던 자기 자신이었다.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남자. 아무리 십 년이라는 세월이 쌓였다고는 하지만, 더 이상의 배려는 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 그 남자야말로 십 년의 세월이 무성하게도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가 이 일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던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조민정은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그럼 어서 가보세요!”“네.”USB를 챙겨 사무실로 나가려던 조민정이 다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정말 괜찮아요? 후회 안 하겠어요?”이유영은 마치 작정하고 강이한을 망가뜨리려는 사람 같았다.조민정의 물음에 이유영은 질끈 눈을 감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요!”그녀의 답을 들은 조민정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조민정은 이 자료를 기자가 아닌 직접 터트리기로 했다. 그녀는 요즘 가장 핫한 소셜 앱에 계정을 만들어 영상을 업로드 하였고 한지음과 의사간의 금전거래가 담긴 사진 기록도 첨부했다.한지음은 최근 이유영과 강이한, 이 두 사람과 함께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들이 올라가자 모두 앞다투어 소식을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거의 몇 분 만에 실시간 검색어가 이 이슈로 도배되었고 청하시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한편, 달리는 차 안.“강 대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동안 강이한이 진실이라 믿고 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한지음의 모습뿐이었다. 눈에는 붕대를, 다리엔 깁스를… 모든 것이 이유영이 저지른 짓이라고 끊임없이 되뇌게 하는 모습!이유영이 고용한 납치범으로 인해 한지음은 두 눈이 멀고 다리도 부러졌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으며 실명까지했다!한지음의 인생은 이유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진실이었다. 그런데 이 영상은 뭔가?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눈이 멀쩡할 수 있지? 왜 두 다리로 걷고 있는 거지? 무수히 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하…!”차가운 조소가 그의 입을 비집고 나왔다.그런데 바로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연락이었다.“여보세요.”“강 대푠님, 지금 한지음 씨가 위독합니다! 보호자가 빨리 오셔서 서명해 주셔야 해요!”하지만 다급했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강이한이 뿜어대고 있는 위압감이 전화 너머까지 전해진 까닭이었다.“가, 강 대표님…. 그 한지음 씨…”“알아서 하세요!”그 말과 함께 강이한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지금 당장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지금 간다면 그는 한지음을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이유영과의 이혼도 모두 누구 때문이었는가! 그는 과거를 되짚으며 수많은 의문점이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다.‘어떻게 이럴 수가!’강이한은 핸드폰을 열어 다시 영상과 그 아래에 첨부된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사진엔 한지음과 의사의 금전거래가 있었음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다. “조 비서!”분노한 강이한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차 안엔 숨 막히는 기운이 가득 돌았다. 조 비서는 좌불안석,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네!”조형욱은 자기도 모르게 가득 힘을 주어 답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강서희도 지지 않겠다는 듯 냉담하게 답했다.“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 벌써 날 제거하려고 움직였더라?”강서희를 향한 한지음의 의심은 점점 짙어졌다. 처음엔 주치의 그리고서 영상에 사진까지, 이제 그녀는 의심을 넘어 확신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배후가 강서희라는 것을! 강서희도 물론 한지음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뜻밖에 아군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나도 너 같은 가식덩어리 빨리 없애고 싶지,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한 거 아니야!”강서희도 알고 있었다, 한지음이 지금 꾀병 부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녀에겐 아직 충분히 이 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이한이 말려드는 이런 방식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일은 저질렀는데 인정은 못 하시겠다?”“내가 한 짓이었으면 했다고 하지, 왜 부정해! 내가 너 같은 줄 알아?”강서희가 경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강이한은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부단히도 그의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유영이 그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달랐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싫으면 싫다, 대놓고 앞에서 티를 내고 다녔다. 전화 너머, 한지음은 다시 팽팽하게 눈을 하얀 천으로 감쌌다. 더 이상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흥, 너 두고 봐!”한지음은 절대로 강서희를 믿지 않았다. 강서희가 강이한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지음이 멀쩡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 강서희,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 누가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을까? 강서희밖에 없었다!“그래 어디 한번 해봐! 누가 무서워하나!”강서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한참 전화로 씩씩거리던 한지음은 결국 분에 못 이겨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요함 속에 오로지 한지음만
더 이상 청하시에서 이유영이 미련을 둘만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수년간 이곳에서 자리 잡고 지낸 세월 때문인지 쉽게 외국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끈 풀린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전화 너머 정국진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넌 여기 돌아와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지!”“무슨 역할이요?”이유영이 반사적으로 물었다.“어제 얘기를 좀 진지하게 나눠봤는데, 유라가 우리 로열 글로벌 그룹에 전혀 뜻이 없는 것 같아. 유영아, 그러니 네가 앞으로 로열 글로벌 그룹을 이끌어야 해. 한동안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대신 움직여줄 테니.”‘로열 글로벌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니? 그 큰 그룹을?’정국진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영은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요!”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그토록 큰 기업을 운영하라니, 그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로열 글로벌 그룹은 어디 동네 가계가 아니었다.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큰 기업이었다. 그런 회사를 그녀가 무슨 수로 총괄하겠는가?“내가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 급할 거 없다.”“아니….”이게 교육의 문제인가? 로열 글로벌 그룹과 연관된 나라며 기업이며 상상을 초월하는데 겨우 입사한지 삼 개월밖에 안 된 그녀에게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기다니! 유영은 이제 겨우 수박 겉핥기도 못 했는데, 무슨 수로? 유영은 문득 정유라의 심정이 이해됐다. 상상만 해도 벅차고 힘겹게 느껴졌다.“삼촌, 전 우선 오로라 스튜디오나 잘 관리하고 싶어요. 그거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너무 큰 것부터 말고요.”전에는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으나, 정국진한테 이 소리를 들으니까 조금 있던 마음도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제는 아예 두렵기까지 했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 뭐든 작은 것부터 배우는 게 맞긴 하지만!”유영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이었다.그녀가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 할 때, 정국진
정국진은 이유영이 하루라도 빨리 파리로 돌아오길 바랬다. 그녀를 위해 이미 많은 것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지금 당장은 그가 대신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결국 이 자리는 이유영이 물려받아야 할 자리! 하루라도 빨리 직접 이 자리에서 일해봐야 더 많은 것을 볼 시야와 능력이 생길 터였다.정국진과의 통화를 마친 이유영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가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이유영은 정유라와 일단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통화음이 계속 울렸으나 정유라는 무슨 일로 바쁜지 한참이 지나서야 연락을 받았다.전화 너머 정유라다운 당당하고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소식 들었어, 언니라면 아주 잘할 거야!”이유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이 작은 몸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정유라는 이유영과 반대로 짧은 단발에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있으면 자매가 아니라 남매로 오해받기도 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여기서 이 비유가 적절한진 모르겠지만, 언니는 잘할 거야! 자신을 믿어!”정유라는 이유영의 작은 체구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 이유영은 그녀만의 장점들이 많았으니까!반면 이유영은 절망했다.‘아, 내 청춘, 내 여행, 내 그림들…!’한편 강이한 쪽에선….강이한은 원래 병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 이슈로 인해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이유영이 이미 떠난 사무실만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이유영, 그는 좀 전에 그녀가 들고 왔던 USB를 떠올리며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이때 그의 핸드폰에 이유영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울렸다. 안 그래도 나빴던 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결국 그는 전화를 받았다.“강이한!”전화 너머 이유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네 짓이야?”“맞아!”“하…
폭풍우가 몰아치듯 강이한의 세계는 이번 일로 완전이 쑥대밭이 되었다.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한지음, 그녀의 납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와 이유영의 관계가 금이 가다 못해 와장창 깨져버렸었다.물론 전에도 이유영과 사소한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지음의 납치 사건이 있은 후로 강이한은 과도하게 그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이유영이 질투에 눈멀어 더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 시작한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뒤에서 이런 사실이 숨어 있을 줄!그의 머릿속에 한지음과 왕 주치의 사이에 오간 송금 명세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지음이 여유롭게, 아주 멀쩡한 몸으로 병원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에 강이한은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저녁이 되었다. 이유영은 퇴근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그녀의 회사는 바로 강이한의 옆 건물에 있었다. 두 건물은 지하 주차장을 공용으로 쓰고 있었으므로 둘은 쉽게 이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또각또각-이유영은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곳엔 미리 온 불청객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강이한이 등을 이유영 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아 꽤 긴 시간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자는 상당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강이한의 잘생김 때문에 퇴폐미만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하이힐 소리를 들은 강이한이 고개를 돌려 이유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피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 꺼버렸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이유영도 자리에 멈춰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이 지속되었다.하지만 결국 참다못한 이유영이 먼저 말했다.“거기 내 찬데, 좀 비켜줄래?”“나랑 얘기 좀 해.”“이혼까지 한 마당에, 얘기는 무
강이한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비가 없었다.마찬가지로 그의 가족, 친척들 또한 각자 자신의 몫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강씨 노부인의 칠순 잔치만 봐도 그들의 사이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친척들 중 많은 이들이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강이한의 입에서 박연준의 복잡한 가족사가 나오자,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고고하기만 보였던 박연준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리라.“그렇다 한들 이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이유영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주차장엔 둘뿐이었고, 그녀가 의도했든 안 했든 강이한의 통화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받은 연락은 병원이었다. 한지음이 이토록 집요하게 나올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했다. 빠져나올 구멍 하나 없이 모두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한지음은 여전히 뻔뻔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유영은 이제 한지음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야.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너도 잘 알잖아!”“….”그래, 이젠 강이한도 알아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지음의 계략이었다는 것을!그러나 강이한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유영이 말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오늘 네가 날 찾아온 목적, 나에게 먼저 그 자료들을 넘기려고 했던 거 아냐?”“….”“힘들게 그 자료들을 모은 이유, 너도 지난 우리 10년동안 함께 했던 세월에 미련이 있었던 거잖아, 그지?”한지음의 본 보습을 알아차리게 함으로서 강이한이 사과하도록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 그녀가 애쓴 것이 아닌지 강이한은 묻고 있었다.그의 질문에 내재되어 있는 뜻을 알아차린 이유영이 고개를 돌려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비꼬는 표정으로 말했다.“착각도 유분수지.”“이유영!”“난 그저 네가 해야 했을 일을 대신 해준 것뿐이야! 너에게 뭔가 기회를 주려고 그런 것이
”정말 끝냈나 보군요.”그 말과 함께 박연준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한 조각 썰어 입에 넣었다.“오늘 뉴스 헤드라인 보셨어요?”유영이 물었다.하지만 곧이어 이러한 질문을 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바쁜 박연준이 이런 것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유영 씨가 벌인 일이죠?”질문이었지만, 이미 답을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어지간히도 그 남자가 미웠나 보네요?”박연준이 말한 남자는 다름 아닌 강이한이었다.만약 유영이 강이한을 증오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퍼뜨릴 수 없는 자료들이었다. 유영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고 이 일이 강씨 집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 못 했을 리도 없었다.그러나 강씨 가문은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이유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얼마나 그 남자를 증오하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료들을 공개했는지, 어떤 세월을 겪어왔는지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것 같네요. 하지만 덕분에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요.”박연준이 말했다.“뭐를요?”“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아무리 온화해 보이는 여자라도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요!”이유영은 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이 웃음의 뜻은 무엇일까? 박연준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는 청하시에서 가장 지적이고 온화하기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졌다.박연준 또한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이 여자… 절대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상대야.’박연준의 말대로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이는 여자라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어떤 후폭풍으로 닥쳐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한편 강이한은 병원에서 계속 연락이 오
연서가 없었다면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녀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서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달랐다.결국, 그녀는 연서로 인해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휘말렸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나 자신을 용서하라고?”“...”“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워?”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건 이유영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그들의 단순한 생각이 너무 우스웠고 증오스러웠다.“...”이미 창백했던 박연준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기다림은 언제나 잔인한 법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대신 꼬박 이틀 동안 강이한의 연락만을 기다렸다.하지만 강이한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한참 후에야 박연준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예약한 병원으로 데려와.]전에 서재에서 박연준과 함께 예약한 병원이었다.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박연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문기원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가 본 박연준은 검은색 긴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여전히 깔끔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겼지만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상실감은 감취지지가 않았다.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박연준의 마음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선생님.”박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문기원을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었음에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아마 느꼈을 것이다. 그와 이유영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모든 것을 이유영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기원아.”박연준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용성시로 갈 준비해.”“...”용성시로 가다니, 결국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인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몰랐다고는 해도, 그래도 이유영의 딸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박연준이 침묵하자 이유영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너와 그 사람, 둘 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이미 숨 막힐 듯한 답답함이 가득한 가슴에 이유영의 말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릴 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과거 연서 사건으로 분노했던 것처럼 지금은 이유영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었다.“사실 네가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은 나야.”박연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이 박연준이라고? 그는 자신이 증오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박연준은 강이한과 마찬가지로 증오스러운 존재였다.“날 알프산에 데려갔을 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유영아.”“지금 와서 착한 척하며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려고 하네.”이유영의 말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고 박연준은 그 냉소를 느끼며 가슴이 더욱 아팠다.“넌 그저 한지음을 그 사람 곁에 보냈을 뿐이라고 하며 누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저울이 결정할 거라고 했어.”답답했던 가슴은 이유영의 말에 더욱 아픔으로 퍼져 나갔다.맞다. 박연준은 한지음을 강이한 곁에 보냈을 뿐이었다. 강이한이 왜 한지음을 이유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심지어 한지음의 딸을 이유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는지, 박연준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이유영도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다.“박연준.”“응?”“네가 아버지라면, 과연 누가 네 아이보다 더 소중할까?”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누가 자기 자식보다 더 중요할까?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답만 존재했다. 누구도 자기 자식을 능가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유영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고 그러니 그녀를…“유영아, 너도 한 번쯤은 스스로를 용서해 줘. 응?”“이온유는 아직도 그 사람 곁에
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담배를 연거푸 피웠지만 가슴속 답답함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 강이한의 번호가 떠올랐다. 곧 신호음이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시간이 됐어.”“언제 돌아올 거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평온했다.참으로 아이러니했다.지난 몇 년 동안,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엔 언제나 칼날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두 사람 사이에 평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모든 것은 연서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이유영 때문에 잠잠해졌다.하지만 그 평온함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네가 와서 데려가.”박연준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데려가라고? 박연준은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수술은 내가 할게.”박연준은 전화 너머의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공기는 다시 정적에 휩싸였고 박연준은 그 말을 하는 데 온 힘을 다 쓴 듯 강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차갑고 외로운 기운을 내뿜었다.그는 모든 것을 잘못했다. 단 한 가지, 서주에 대한 인식만은 옳았다.서주는 마치 늪과 같았다. 하지만 그 늪은 결국 그와 강이한을 삼켜버렸고 그는 이유영까지 그 늪으로 끌어들였다.만약 빚을 따진다면… 그와 강이한 중,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박연준이었다.만약 그 음모와 계략이 없었다면 이유영과 강이한은 원래대로 행복했을 거지만 결국 박연준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은 것이다그날 밤,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아침 식탁에는 이유영을 떨리게 했던 쓴 약이 사라졌다.“내가 먹여줄게.”“싫어.”“유영아, 나에게 그렇게 냉정하지 마.”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의 감정은 분명히 이상했지만 어디가 이상한지는 이유영도 알 수 없었다.박연준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유영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다.그때 박연준은 이유영을 도와주려고 했고 이유영
이유영의 차가운 떨림이 전해지는 순간, 박연준의 마음속을 지배하던 집착이 산산이 무너졌다.“네 말이 맞아. 만약 그 약이 효과가 없다면 넌 괜히 3일 동안 고생하는 거잖아.”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결국 그 약이 이유영에게 효과가 없다면 그녀는 수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그와 강이한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강이한은...강이한의 얼굴이 떠오르자, 박연준의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이유영은 박연준의 말에 온몸의 긴장이 풀린 듯했다.박연준은 그 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또다시 깨닫게 되었다.밤이 깊어지자 이유영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박연준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언제 파리로 돌아갈지는 말하지 않았다.우지가 이유영에게 담요를 하나 더 덮어주며 말했다.“아가씨, 이렇게 하면 좀 따뜻해질 거예요.”“네.”그러나 이유영은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었고 여전히 싸늘했다.우천시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였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견뎌내기 힘든 혹독한 추위였다.“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여기 너무 추워요.”이곳의 추위는 그녀가 알프산에서 느꼈던 한기보다 더 혹독했다. 알프산은 눈이 전부 덮여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이렇게 춥지 않았다.그러나 이곳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도 서늘했고 비가 내리면 뼈마저 얼어붙을 만큼 냉혹했다.“우지 씨.”“네, 아가씨.”“아니네요, 나가 보세요. 자야겠어요.”이유영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우지는 이유영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그럼 아가씨, 푹 주무세요.”우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유영은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눈을 떴다.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공허와 끝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은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암흑이었고 이유영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서재에서.희미한 조명 아래,
이유영이 어떻게 버텨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박연준도 강이한도 그녀가 그 약 때문에 온몸을 떨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석 달 동안 끼니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이제 며칠 안 남았어.”박연준은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말했다.마지막 3일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앞으로 내가 어떤 고통을 감당해야 할지, 네가 알기나 해?”이유영은 박연준을 향해 물었다.보이지 않았지만 이유영의 그 텅 빈 눈동자에서 박연준은 고통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수술이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무슨 의미일까? 너무도 많았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다.하지만 어떤 고통이든, 그녀는 빛을 되찾아야 했다. 마음속의 증오가 아무리 크더라도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후에 그 감정을 표출하기로 했다.잘못에 대한 사과나 돈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걸, 박연준은 처음 깨달았다.그는 자신의 잘못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몰랐고 이제야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어떤 고통이든, 내가 함께 견딜게.”오랜 침묵 끝에, 박연준이 말했다.이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이유영이 반응할 틈도 없이 박연준은 그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며 쓴 약을 삼키게 했다.한 모금, 또 한 모금.이유영은 자신을 꽉 잡고 있는 박연준의 떨리는 손을 느꼈다.박연준 역시 이유영이 그 쓴맛을 들이킬 때의 고통스러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박연준에게는 약의 쓴맛보다 이유영이 느낄 고통이 훨씬 더 쓰라렸다.약 한 그릇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약 한 그릇이 사람을 얼마나 무너뜨릴 수 있는지, 박연준은 뼈저리게 깨달았다.단순히 한 모금 맛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한 그릇의 약은 세상에서 가장 쓴 맛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을 꼭 안고 그녀의 작은 코끝에 입술을 부드럽게 댔다.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고 박연준은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박연준은 손끝이 허전해지는 순간, 마음까지 텅 빈 듯 가라앉았다.“네 말이 맞아. 우리는 자격이 없어.”“포기해!”“뭐?”“저녁 약은 가져오지 마.”“유영아.”이유영이 약을 거부하자 박연준의 가슴이 더욱 세차게 조여왔다.이제 모든 희망은 염 선생에게 걸려 있었다. 그는 오전에 염 선생을 찾아가 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약이 바뀌었고 마지막 3일 치는 이전과 달랐다.박연준은 약이 바뀌었으니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유영이 저녁 약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대로 포기하려는 건가?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유영아, 포기하지 마!”박연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침묵했고 박연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이유영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침묵 속에 결연함을 읽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오랫동안 한약을 먹어서 그런지 이유영의 몸은 항상 차가웠다.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차가운 마음까지 덥힐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손을 빼내려 하자 박연준은 더욱 세게 잡았다.“유영아...”박연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이유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침묵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안 돼!”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허무함이 스며 있었다.그는 절대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과거에 그가 이유영에게 저지른 일들을 떠올리면, 안 된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저녁.우지와 우현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결국 박연준의 말을 따라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쓴 약을 가져왔다.3일!마지막 3일이었다.사실 그들도 약이 이유영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마지막 3일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약을 먹였다.“아가씨?”우지가 이유영 앞으로 다가와 약을 가져다 놓았다.“치워요.”박연준은 말없이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후에 이유영에게 했던 말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을까? 그녀는 듣
이유영은 처마 밑 긴 의자에 누워 밖에서 스며드는 대나무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었다.빗방울이 대나무잎에 부딪치는 소리, 그 울림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들어가. 춥잖아.”“서주는 지금 어때?”오전에 신지수에게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요즘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대체 누가 그의 것을 박연준에게 넘긴 걸까?신지수의 조사 결과,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의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박연준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강이한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아직도 못 잊는 거야?”박연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억눌린 고통을 삼켰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못 잊는다고? 박연준은 분명 강이한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주는 이유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눈이 보였다면, 박연준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원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는 깊고도 거셌다.“못 잊는다고?”이유영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차가웠다. 한겨울의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미소였다.토끼털로 장식된 옥색 한복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옷을 입은 이유영은 차가웠다.그녀의 평온함은 한때 그의 다정함 속에 묻혀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했던 모습은 언제였던가.강이한에게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그녀는 완벽한 전업주부,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단지 대역일 뿐이었다니.“이유영.”“박연준, 너와 강이한은 한 번이라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독립적인 존재? 그렇다. 이유영은 살아있
그는 덜컥 겁이 났다.더 큰 대가가 두려웠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키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강이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염 선생의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정도였고 문제는 운명, 아니 그 대가가 이유영에게 재앙처럼 닥친 것이다.석 달의 고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만약 이 모든 고난의 대가를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강이한은 기꺼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의 빛을 되찾아주고 이유영에게 고요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우천시.마지막 3일째가 되자 박연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늘 평정심을 지키던 그도 이유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문기원이 돌아왔다.“선생님.”박연준은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남은 3일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 되었다.박연준은 연서의 죽음이 회장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그날부터 그의 밤은 끝없는 불면으로 채워졌다.그와 강이한은 모두 함정에 빠졌고 이제 와서 강이한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걸 볼 수는 없었다.점심 식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박연준은 남은 이틀 동안, 이유영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방울의 약이라도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처럼.“펑!”이유영은 빈 그릇을 세게 내려놓았다.박연준은 텅 비어 있는 그릇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물었다.“다른 느낌은 없어?”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이유영의 말 한마디에 박연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한 그릇 더 마셔야 해?”박연준은 말없이 침묵했고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이미 체념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영은 이미 약이 소용없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이해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거라니?소은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넌 한지음과의 관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거야?”소은지는 강이한의 뻔뻔한 대답에 또다시 놀랐다.이유영을 위해 희생하는 강이한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소은지, 넌 몰라.”“그래, 모르겠어.”소은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고 강이한을 향한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내뱉었다.“한지음을 돌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굳이 곁에 두어서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어?”“...”“강이한, 이유영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네 응보야!”만약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아마 강이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소은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았다.강이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응보라고? 그래, 강이한도 그것이 응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이 한지음을 곁에 둘 거야?”한지음은 이유영 비극의 시작이었다. 소은지는 지금까지도 강이한이 그 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이런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소은지의 물음에 강이한은 눈을 크게 뜨고 깊은 고통이 서린 눈빛으로 답했다.“물론이지.”“...”소은지는 한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강이한의 얼굴에 뿌렸다.예전에 우천시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았을 때, 강이한이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우스웠다.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소은지는 분노에 찬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씁쓸한 고통이 가득했다.후회할까? 물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강이한은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운명은 바꾸려고 한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