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장소월은 전연우에게 꽁꽁 묶인 채 컴퓨터에 정보가 입력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사무소 직원은 혼인 증명 서류를 전연우에게 건넸다.“대표님, 혼인신고 절차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대표님과 장소월 씨는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를 찾아오십시오.”장소월은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니.혼인신고서에 적힌 내용들 상당수가 거짓이었다. “전연우, 이 비겁한 자식! 이건 다 가짜잖아.”“언젠가는 해야 할 결혼이었어.”전연우가 말했다.“너무 좋지 않아? 앞으로... 넌 명실상부 내 아내야.”“소월아, 너 드디어 나만의 여자가 됐어.”장소월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전연우는 그들의 혼인신고를 축하하기 위해 그녀에게 예쁜 원피스까지 선물했다.그는 또 둔탁한 순으로 그녀의 머리를 따주었다. 장소월은 거울로 종래로 이런 일은 해본 적 없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이토록 고도로 집중하는 건 회사 일을 할 때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그가 한 가지 일에 열중할 때마다 발산되는 매력은 항상 그녀를 매료시켰었다.하지만 이번엔...장소월 그녀 역시 이 느낌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그가 정말 변한 건가?전연우는 보석이 박힌 머리끈을 찾아 묶어주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색 원피스와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전연우는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씩 웃고는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피하며 그가 자신의 몸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나 지금 몸 전체에 두드러기가 돋아있어. 감염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그는 혼인신고 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프러포즈도, 결혼식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전연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별이가 장소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니, 별이는 들고 있던 우유를 다 먹고 더 달라는 듯 우유병을 흔들었다.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은경애를 쳐다보았다.은경애가 눈치를 채고 별이를 안자 전연우가 말했다.“저한테 주세요.”은경애는 흠칫 놀라고는 아이를 넘겨주었다.시끄럽게 버둥거리던 아이가 전연우의 무릎에 앉자마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해졌다.은경애는 간식거리를 찾아 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밥 먹어.”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 살을 발라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그러고는 선물 상자를 그녀의 눈앞에 밀어주었다.“저녁에 뜯어봐.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야.”장소월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식사가 끝나자 가족사진을 찍어줄 사진사가 시간 맞춰 도착했다.장소월은 얼굴에 자라난 붉은 두드러기가 신경 쓰였다.“왜 하필 오늘이야? 시간 바꾸면 안 돼?”전연우가 얼굴을 막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금 포토샵 기술이면 두드러기 지우는 건 식은 죽 먹기야. 몇 분이면 되니까 다 찍고 나서 약 먹어.”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빨리해. 나 어지러워.”사진사는 이미 배경을 설정해 놓았다. 장소월은 옷은 그대로 입고 간단히 메이크업을 받은 뒤 배경 앞 의자에 앉았다.사진사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촬영에 박차를 가했다.빠르게 촬영이 끝나고 사진사가 결과물을 장소월에게 건넸다.“사모님, 만족스러운지 봐주실래요?”장소월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리어 갑자기 몰려온 메슥거림에 가슴팍을 부여잡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구토했다.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전연우는 이미 이마를 찌푸리고 그녀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1층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장소월이 허리를 굽히고 변기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먹었던 죽까지 모두 토해낸 것 같았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말했다.“저 그냥 맛만 보면 돼요.”다시 태어난 뒤 첫 설날을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평소 좀처럼 하지 않았던 그녀의 부탁을 은경애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럼 제가 바로 해올게요. 바깥에서 드시는 것과 비슷할 거예요.”“그래요.”은경애는 다급히 꼬치구이 재료를 준비하러 자리를 떴다. 장소월이 매운 것을 잘 먹지 않기에 집에 고춧가루도 별로 없었다.아래층에 내려가니 주방에서 도우미들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은경애는 그때에야 집에 꼬치구이 도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급히 오 집사에게 부탁했다. 오 집사는 돈을 받은 뒤 바로 전연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별장 안 사람들은 은경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연우의 사람이다.장소월에 관련된 일은 반드시 그의 허락을 맡고 난 뒤에야 행할 수 있다.마늘 한 조각을 사는 사소한 일이라도 말이다.전연우는 종래로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주 자세한 일까지 알기를 원했다.전연우가 전화를 받고 장소월을 보러 가려 일어섰을 때, 마침 오 집사가 걸어왔다.“이게 먹고 싶대요?”“네. 아주머니가 돈을 주며 여기에 씌어있는 재료들을 사 오라고 했습니다.”오 집사는 종이를 전연우에게 보여주었다.살펴보니 모두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구였다.그의 기억력은 꽤나 뛰어났다...남자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얼굴로 말했다.“해달라는 대로 해요.”“네. 대표님.”전연우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이 돈으로 사고 나머지는 돌려줘요.”“네.”오 집사가 나간 뒤 전연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소월은 책 한 권을 옆에 두고 침대에 앉아 창밖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구름 사이를 뚫고 들어온 한 줄기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하얀 피부가 빛을 반사해 미세한 솜털까지 또렷이 보였다.예전 그녀가 이 집에 살 때 장해진의 모든 주의력은 전연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날 역시 지금처럼 눈이 내렸었다
장소월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본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는 장소월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네가 몸을 회복하면 해외에서 주문한 웨딩드레스도 도착해 있을 거야. 그때 한 번 입어 봐.”전연우가 장소월의 손을 잡자 그녀는 단번에 빼버렸다.“전연우,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내 동의도 없이 혼인신고까지 했으면 네 목적 다 달성한 거 아니야? 더는 내 앞에서 존재감 과시하지 마.”전연우는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했다.“얼마 후 우리 결혼 소식이 서울 전체에 전해질 거야. 넌 이제 성세 그룹 안주인이야.”“전연우! 사람들이 우리가 예전 무슨 관계였는지 알고 있다는 거 몰라? 넌 내 아버지의 양자였고, 내 오빠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가 결혼한다니...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전생에서 그들이 결혼했을 때, 장소월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연우의 아내임을 알리고 싶어 했으나 그가 원하지 않았다.그녀와의 결혼이 전연우에게 있어선 더없는 수치였으니까.이제...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완전히 마음을 접은 지금, 도리어 그가 미친 듯이 원하고 있다.“사람들 시선 신경 쓸 필요 없어. 웨딩 사진 찍고 나면 회사 연말 파티에 널 데리고 갈 거야.”장소월은 전연우가 그녀를 일부러 자극하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전연우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푹 쉬어.”그는 일어서 몸을 돌리고 몇 번 연이어 기침했다.장소월도 전연우의 몸이 아직 채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으니 말이다.전연우는 서재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엔 하얀색 약병 두 개가 놓여있었다.그건 서철용이 전연우에게 처방해준 분노를 제어하는 약물이었다.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전연우는 적잖은 정력을 소모했다.전연우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명 불빛이 천
전연우였다!장소월은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품 안은 그야말로 난로와도 같이 뜨거웠다.몸을 회복하지도 못했으면서 왜 그녀와 함께 집에 있는단 말인가?장소월은 고개를 들고 준수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 이런 다정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면 장소월은 아마 행복감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전연우... 전생엔 대체 왜 그렇게 날 미워했던 거야? 만약 백윤서 때문이라면... 난 이미 속죄했잖아.’‘그럼 이번 생은?’‘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거야?’...까마득한 높이의 펜트하우스 안, 샤워 가운을 입은 송시아가 책상 위 모든 물건을 쓸어내렸다.“전연우! 너 어떻게... 장소월과 결혼할 수가 있어!”송시아는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사에 실린 두 사람의 혼인신고서를 본 순간 손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녀는 정말이지 미치광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네 옆에서 성세 그룹을 세운 것도 나고, 널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 앉힌 것도 나야.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널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혔단 말이야. 전생에서 넌 날 선택했어. 이번에도... 응당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송시아는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어 머리를 쥐어뜯었다.“그게 이렇게 이성을 잃을 일이야?”중년 남자가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에선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송시아는 바로 감정을 가라앉혔지만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표독함은 감추지 못했다.“억울해서 그래요. 전연우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거 절대 인정 못 한다고요!”남자는 아직 성욕이 채 소진되지 않았는지 여자의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드러운 그곳을 뒤적거리다가 그녀를 번쩍 안아 의자에 앉혔다.“조급해하지마. 이제 시작이야...”송시아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그럼... 동의한 거예요?”“당연하지.”송시아는 씩 웃으며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의 행동에 협조했다.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음란한 기운이 방안에 만연했다...
그때, 대표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긴 생머리에 정장 치마를 입은 25세 정도의 여자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기... 기 비서님... 커피...”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거기 놔요.”이름은 소피아, 소민아가 떠난 뒤 잠시 고용한 기성은의 새 비서였다. 소피아가 불안하게 커피를 내려놓았다.“기 비서님, 다른 시키실 것 있으세요? 없으면 서류 프린트할 게 남아서 가보겠습니다.”기성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그래요. 가봐요.”기성은은 대표님을 제외하면 가장 대면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고위급 인사들까지도 그의 낯빛을 살펴야 할 정도였다.일하는 과정에서 조그마한 착오라도 생길 시엔 반죽음으로 욕설을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바로 해고될지도 모른다.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나서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또다시 기성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 씨 아직도 연락 안 돼요?”“기 비서님께서 소민아 씨를 출장 보내신 거 아닌가요? 저희도 오랫동안 소민아 씨 보지 못했어요. 전화해도 연결되지 않더라고요.”“그래요. 알겠어요.”사무실 문이 닫힌 뒤, 기성은은 사인펜을 내려놓고 옆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표님과 약속을 잡은 몇몇 다른 회사 대표, 그리고 사무적으로 연결된 임원들과 주고받은 메시지만 가득했다. 소민아와 나눈 메시지는 며칠 전에 멈춰있었다.기성은은 일을 함에 있어 효율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소민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그녀가 맡았던 일들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그는 다시 문자를 작성해 그녀에게 보냈다.[두 시간 안에 회사로 와요. 아니면 다시는 성세 그룹에 발 들일 생각하지 말아요.]멀고 먼 곳에서 소민아는 선글라스를 걸고 선텐하며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돌연 도착한 기성은의 문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연락처를 악마라고 저장해 놓았다.문자 내용을 본 순간 피식 웃으며 욕설을 퍼부었다.“뻔뻔한 인간 같으니라고. 해고하려면 하라지. 내가 무서워할 줄 알
소민아 역시 강지훈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흉악했으니 말이다.그럼에도 소민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녀들 앞을 막아 나섰다.“경... 경고하는데 또 우리 언니 때릴 생각하지 말아요.”엄마의 등 뒤에 서 있던 소현아가 저도 모르게 소민아를 칭찬했다. 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민아는 정말 대단해.”강지훈은 소현아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강지훈은 날카롭게 이마를 찌푸리며 소현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현아야, 이쪽으로 와!”소현아는 깜짝 놀라 부들부들 떨다가 급기야 울음까지 터뜨렸다.“난 가기 싫어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잖아요. 엄마한테도 말했어요. 당신은 많고 많은 여자들과 아이를 낳았다고요. 엄마가 다시는 당신과 놀지 말래요. 소월이도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어요. 다시는 당신 보고 싶지 않아요!”저번 강지훈에게 맞은 뒤 이마에 커다란 혹까지 튀어나왔다.그는 노원우처럼 나쁜 사람이다.말을 마친 뒤, 소현아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인형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강지훈은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겨우 그녀를 찾아냈다. 서울에서부터 강주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건 결코 그런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명세진이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선생님, 제가 이렇게 무릎 꿇고 빌게요. 제발 제 딸을 놔주세요. 머리에 문제가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제발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현아만 아니면 원하시는 것 모두 드리겠습니다.”소민아가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하지만 강지훈은 강압적으로 소리쳤다.“난 소현아를 데려가고 싶어. 아무도 못 막아.”“오늘 이 집안을 불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고 소현아는 데려가야겠어.”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소장님.”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소민아가 야구방망이를 쳐들었다.“내가 있는 한 절대 언니 데려갈 수 없어요!”하지만 1초도 채 되지 않아 소민아는 바
강지훈의 부하들이 올라가고 몇 초 뒤, 소현아의 비명소리가 무언가 깨지고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연이어 울려 퍼졌다.소현아가 조심하지 않아 방 안의 꽃병을 깨뜨린 것이다. 안에 꽂혀 있던 꽃들은 전에 장소월이 병문안을 왔을 때 선물해준 것이었다.지금까지 마르지 않도록 정성껏 가꿔왔던 꽃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소현아는 처참히 꺾여버린 장미꽃을 손에 들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경호원은 그 틈을 타 소현아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소현아는 그 시간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살려주세요! 민아야... 얼른 경찰 아저씨 불러...”“나 당신들 신고할 거예요. 흑흑흑... 내 꽃을 짓밟았어.”소민아는 어이가 없었다.“언니! 지금 상황에 꽃이 대수야?”소현아는 아래층에 내려가 강지훈을 본 순간 꽃이 망가졌던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다.“나쁜 놈... 민아야... 나 살려줘! 나 저 나쁜 놈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명세진은 자신의 딸이 잡혀가는 걸 막으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섰으나 이내 경호원에게 밀쳐져 쓰러져버렸다.소현아가 울부짖었다.“엄마... 우리 엄마 밀지 말아요... 흑흑흑...”소현아가 강제로 강지훈의 앞에 놓였다. 그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엄마한테 가려고 발을 내디뎠다.“어디 가려고!”강지훈이 차갑게 소리치며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소현아는 몸을 돌려 나쁜 놈을 확 밀치고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이 나쁜 놈, 우리 엄마 밀면 안 돼요! 난 당신이 미치도록 싫다고요! 어서 내 집에서 나가요. 얼굴도 보기 싫어요!”강지훈은 그녀에게 밀렸음에도 전혀 아프지도, 심지어 가렵지도 않았다. 그저 육중한 산처럼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다만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 얼굴을 보니 정말 공포감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당신이에요. 아니... 소월이 오빠와 똑같이 싫어요.”소현아는 울먹거리며 명세진에게 달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