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었다. 그를 보면 볼수록 화가 치솟아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방에서 나가고는 화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아이를 안고 있던 은경애는 화들짝 놀랐다.장소월은 숨이 쉬어지지 않아 심장 쪽을 꽉 움켜쥐었다.은경애가 다급히 아이를 내려놓고 달려왔다.“아이고! 아가씨, 왜 그러세요? 심장이 불편하세요? 제가 바로 의사 선생님 모셔올게요.”장소월이 은경애의 옷을 잡았다.“조금 쉬면 괜찮을 거예요.”사실 장소월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전연우가 강제로 그녀와 타협하려 한다는 걸, 또 강제로 그녀와 결혼하려 한다는 걸.아래층에선 송시아가 식탁에 앉아 도우미가 만든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식탁에 놓은 반찬은 모두 장소월이 좋아하는 담백한 것들이었다.“여기 음식 솜씨 진짜 훌륭하네요.”송시아가 상석에 앉은 남자를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말아요. 소월 씨도 깊이 고민해봐야 해요. 계속 이렇게 오냐오냐해주면 더 엇나갈 거예요.”“연우 씨! 마음 약해지면 안 돼요.”전연우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도우미가 그릇과 수저를 전연우 앞에 놓아주었다.3초 뒤, 전연우가 돌연 폭발하며 그 그릇과 수저를 바닥에 엎어버렸다. 순식간에 유리그릇이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말았다.주방에서 일하던 도우미들은 이미 일찌감치 대표님의 불편한 안색을 눈치챘다. 하여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고 하던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송시아도 화들짝 놀랐다. 이어 전연우가 벌떡 일어나 위층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역시 장소월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송시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연우 씨! 지금 올라가면 소월 씨는 더 막 나갈 거예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인형으로 만들려면 내 충고대로 해야 한다고요.”전연우가 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그때, 은경애가 쪽파 하나를 들고 나왔다.“아가씨, 그 말은 틀렸어요. 요즘 세상에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디에 있어요. 남편이
송시아의 눈동자에서 흥분감이 일렁였다. 대체 뭘 증명하기 위해 이토록 연이어 질문한단 말인가?그녀가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걸 비웃기 위해?두 번의 삶을 사는 동안 그녀는 똑같이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쉽게 얻을 수 있다.하지만 이번 생에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평탄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강영수의 아이를 어떻게든 찾아내 키우며 그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생각이었다.그녀가 아니었다면 강영수에겐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생에서 송시아가 했던 말처럼 그녀는 재앙이다. 그녀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험을 맞닥뜨려 한 명씩 그녀를 떠나고 말았다.송시아가 장소월에게 전생의 기억 때문에 이토록 흥분하는지 알아보려 시험적인 질문을 했지만, 그녀는 차분히 맞받아쳤다.“전생이요? 송시아 씨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어젯밤엔 오빠를 집에 바래다줘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아이는 가짜예요. 오빠가 보육원 문 앞에서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고 가엾은 마음에 데려와 키운 것뿐이에요. 매체에서 흘러나온 기사들은 다 루머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장소월의 그 말에 송시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소월도 자신의 입에서 송시아와 전연우 사이를 응원한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송시아가 표정을 가다듬고 장소월을 향해 피식 웃고는 느긋하게 식탁 위에 놓인 반지를 들었다.“당연히 오해는 안 하죠. 연우 씨와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데 어떤 사람이 연우 씨 와이프 자리에 제일 잘 어울리는지 알고도 남죠.”보아하니 장소월은 전생의 기억을 찾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찾았다면, 지금 그녀의 행동은 장소월로 하여금 소리를 지르며 미쳐 날뛰게 하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그 입 다물어!”먼저 미쳐버린 사람은 장소월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전연우는 옆에 있던 의자를 잡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도우미가 재빨리 몸을 피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크게 다칠 뻔했다.장소월은 전연우를 등지고 있었
은경애는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로 보는 눈 없는 이 남자를 쳐다보았다.‘저런 간단한 이간계도 보아내지 못한다고? 저 여자 딱 봐도 악의를 갖고 도발한 거잖아?’은경애가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 아가씨는 안 그래도 대표님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죠. 그렇게 심한 말을 하셨으니 아가씨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건 아마 힘들 겁니다. 아가씨는 확실히 이 아이와의 접촉을 꺼립니다. 계속 시간을 보내다 정이 들면 이후 떠나기 힘들 테니까요. 이제 보니... 아가씨의 마음속에는 대표님에 대한 실망감밖에 없는 것 같네요. 그래서 더더욱 미련 없이 떠난 거고요.”부부가 다투면 결국 상처받는 건 아이뿐이다.아가씨는 겉으론 아이를 아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종래로 자신의 아이라 인정한 적이 없다.별이가 아무리 말을 잘 듣고, 엄마라고 부른다고 해도 절대 이 이상의 감정을 갖지 않았다. 떠날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은경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아이를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그럴 수 없다. 받은 돈이 있으니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해야 한다.이제 거실엔 송시아와 전연우 두 사람만 남았다.“연우 씨, 설마 정말 장소월에게 마음을 주기라도 한 거예요?”송시아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것을 손에 넣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이상을 잃다니.“정말이에요? 하... 연우 씨, 난 그냥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줄 알았어요!”“연우 씨와 장소월은 혈연관계 남매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연우가 분노로 새빨개진 눈으로 노려보며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는 몇 미터 뒤에 있는 벽에 밀쳐버렸다.그 순간 전연우는 마치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 갇혀있다가 뛰쳐나온 공포스러운 맹수와도 같았다...“죽고 싶으면 계속 말해!”...장소월은 곧바로 터미널로 향했다.매표소 직원이 말했다.“죄송합니다, 아가씨. 표를 사려면 주민등록증이
장소월이 작업실에 나타나다니, 박원근에게도 참으로 의외인 일이었다.작업실 직원들은 모두 넋을 잃고 갑자기 등장한 여자의 미모를 감상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듯 천성적으로 고급스러움을 타고난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게 만들곤 한다.박원근과 주시윤이 회의실에서 걸어 나올 때, 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막으려 일어섰다. 박원근이 얼른 그를 막아 세웠다.“괜찮아. 내가 아는 사람이야.”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자 주시윤이 물 한 컵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난 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박원근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장소월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저 스승님의 제자잖아요. 선배님들도 있는데 제가 왜 못 오겠어요. 스승님은요?”박원근이 안경을 슥 올리며 말했다.“허 교수님께선 여전히 예전처럼 학교에서 수업하고 계셔. 오랫동안 오지 않았으니 넌 지금 이 작업실을 맡은 새로운 책임자가 누구인지 모를 테고 예상도 하지 못할 거야.”장소월은 유리창 밖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포착한 주시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으로 커튼을 닫았다.“작업실에서 2, 3년 정도 일한 후배들이야. 어떤 후배들은 졸업한 지 1년밖에 안 됐어.”장소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지날 줄 몰랐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4년이 지나다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일 어린 후배가 저였는데... 사무실이 많이 성장했나 봐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선배님들의 부담도 줄어들겠어요.”박원근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저 애들이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대부분 너한테 의지하는 거지 뭐. 네가 줄곧 도와주지 않았다면 골치 아픈 의뢰인들의 요구를 만족해주지 못해 속 꽤나 태웠을 거야.”주시윤도 말을 보탰다.“맞아! 처음엔 3, 4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팀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스튜디오가 됐네. 솔직히 좀... 감동이긴 해!”장소월이 물었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박원근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어 주시윤도 맥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후배님이 왔는데 내가 빠져서야 되겠어?”장소월이 물었다.“야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술 마셔도 돼요?”주시윤이 박원근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요즘 나랑 원근이는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어. 의뢰인 쪽에서 연말에 게임을 출시해야 한다고 해서 힘들더라도 매일 야근하고 있어. 그럼 편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잖아. 지금 집값도 말도 안 되게 치솟아서 돈 없으면 장가도 못 가.”장소월은 종래로 경제적인 고민은 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재산에 남들은 평생 벌어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울시 중심 지대 집들을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장소월의 우월한 가정환경이 부러웠다.하지만 그저 그녀의 화려한 껍데기만 봤을 뿐, 속이 얼마나 아프게 곪아 터져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장소월은 그들과 함께 있으니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최소한... 그들에겐 자신만의 목표가 있으니까.장소월은 줄곧 흐릿한 정신으로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예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했던 꿈은 이루었다. 요즘은 그 어떤 것에도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허무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장소월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술을 마시지 않았다. 박원근과 주시윤은 술에 취해 해롱해롱한 상태로 사무실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요즘은 밤이 참 긴 계절이다. 돌연 사무실에 남겨두었던 머플러가 생각나 목에 두르고 아래로 내려갔다.작업실 아래는 크나큰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장소월은 베이지색 실 원피스를 입고 코트를 걸친 채 조명 아래 벤치에 앉았다.그녀가 손을 뻗어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았다. 눈송이는 손바닥에서 빠르게 녹아내렸다.“강영수, 눈이 오고 있어...”그는 전연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다.두 번의 인생에서 전연우로 인해 수많은 아픔을 겪은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도 아가씨는 여전히 강영수를 놓지 못하고 있다!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마음에 남는 법이니.장소월도 만만치 않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성은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어젯밤 송시아가 대표님과 함께 남원 별장에 들어갔으니 난리가 났겠지... 다만 쫓겨난 사람이 장소월일 거라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전연우는 빨간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보석 날카로운 부분이 전연우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닿아 붕대로 또다시 피가 스며들었다.기성은이 말했다.“대표님,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올까요?”그 순간 장소월의 다리에 담요를 덮어주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박원근이 장소월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난 네가 집에 돌아간 줄 알았어.”술에 취했던 박원근은 실은 그녀가 밖에 나가자마자 깨어나 3층에서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았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장소월은 차가워진 손을 말아쥐고 고개를 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저 이제 집 없어요. 유일한 가족이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셔서 저 혼자 남았거든요.”박원근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일부러 마음 아픈 일을 끄집어내려 했던 건 아니야. 정말 미안해.”장소월이 의연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미안해할 것 없어요. 사람은 언젠간 다 떠나가게 돼 있잖아요. 저 혼자서도... 나쁠 것 없어요.”사실 장소월은 주변 사람들에게 힘든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기분이 그들에게도 전해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다리에 덮여있는 담요를 들고 몸에 걸쳤다.“돌아가서 일해요. 처음으로 선배님들과 야근하는 건데 열심히 해야죠.”박원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때 강렬한 차 상향등이 박원근의 몸에
“송시아는 아직 쓸모가 있어서 옆에 두는 거야.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게.”장소월은 고개를 쳐들고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응시했다.“...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 여자를 해외로 보내든 집에 들이든 난 관심 없어.”“오늘 일은 이미 다 잊어버렸어. 이제 와 다시 거론하는 건 의미 없어.”“그 별장은 애초부터 네 소유고 난 그저 얹혀살았던 거뿐이잖아.”“내일 경애 아주머니한테 별장에 있는 내 물건 가져다 달라고 할게.”기성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고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아가씨, 대표님에겐 거부하기 힘든 자리라는 게 있습니다. 송시아 씨는 성세 그룹의 부대표이기 때문에 두 분이 함께 나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대표님의 위장병은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재발하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그랬고요. 아가씨께서 뛰쳐나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됐어요!”장소월이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귀를 찢을 듯한 마찰음이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눈을 내리뜨리고 서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이룬 건 다 네 능력 덕분이고,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그냥 재수 없는 운명 탓이라고 생각하겠지! 여자들이 집에 드나드는 거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개가 똥을 못 끊는 법이잖아. 넌 종래로 너한테 오는 여자 막지 않으니까.”“너한테서 쫓겨난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떠난 이유는 너같이 역겨운 사람과 단 한순간도 함께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거든.”“오늘 또 강제로 날 데려가려고 왔다는 거 알아. 날 협박하는 것 외에 네가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뭐야?”“전연우, 네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가든 영원히 그 사람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해.”“네가 외부에 온갖 위선을 다 떨어서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네가 얼마나 더러운 쓰레기인지 절대 잊지 못해!”전연우가 말했다.“욕 다 했어?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다른 방법 써도 돼. 화 다 풀리면 나랑 집에 가자.”장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낼 수 있겠는가?“전연우, 네가 뱉은 말 후회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성은이 깜짝 놀라며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린 뒤였다. 그녀는 이미 날카로운 과도를 전연우의 목에 찔러넣은 상태였다.살을 찢는 고통이 밀려왔다. 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져 손으로 만져보니 손톱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깟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더욱 아픈 건 바로 마음이었다.그녀는 정말 그를 죽이려 했다!“대표님!”기성은이 곧바로 장소월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 던져버렸다.전연우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작지도, 그리 깊지도 않은 상처였다.전연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장소월보다 훨씬 더 솟아오른 몸집에서 차가운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장소월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돌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장소월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여기로 도망 오면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난 너한테 그토록 많은 기회를 줬는데 넌 번번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고 있어. 이제는... 날 죽이려고까지 해?”“장소월... 너 정말 미쳤구나!”장소월이 곧바로 그의 말에 맞받아쳤다.“이 모든 것은 다 네가 날 궁지로 내몰았기 때문이야. 남원 별장에서 꺼지라고 네가 직접 말했잖아. 왜 또 날 찾아온 건데? 전연우, 우린 원수지간이야. 넌 강영수를 죽였고, 강씨 노부인을 죽였어. 그러면서 왜 난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야? 넌 그저 극악무도한 살인자일 뿐이잖아!”“너만 죽으면 아무도 날 강제로 네 그 역겨운 얼굴 보게 하지 않을 거야!”“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병에 걸려 죽는 게 나을 뻔했어. 다시 한번 죽는 거 별로 두렵지도 않아!”그녀가 마지막 글자를 내뱉은 순간, 전
“회사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편집장님을 탐내는지 알기나 해요?”“게다가 기 비서님은... 이미...” 백혜진은 어젯밤 다른 여자와 다정히 떠나던 기성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백혜진은 몰래 소민아의 눈치를 살폈다. 소민아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듯 멍하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백혜진은 혹시라도 그녀가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소민아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만약 남들의 몇 마디 말로 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인생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백혜진은 소민아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두 사람이 함께 보기로 약속했던 영화를 틀었다.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는 여전히 울적해 보였다.“민아 씨, 아직 밥 안 먹었죠? 내가 가서 음식 데울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절대 혼자 몰래 간식 먹으면 안 돼요.”백혜진이 부엌으로 간 후, 소민아는 혼자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그렇게 3, 4일이 지났지만, 그녀의 축 늘어진 기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그러던 어느 날 바깥에서 쇼핑을 하던 중, 쇼핑몰 대형 스크린에서 연예 뉴스가 방송되기 시작했다.“서울시 시장 주가은 씨가 한 남자와 열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의 제보에 따르면 그 남자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인 기성은 씨라고 합니다.”옷가게 문 앞에 서 있던 소민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등 뒤 대형 LED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영상에는 높은 권력과 지위를 상징하는 고급 세단에서 내리고 있는 기성은이 찍혀 있었다. 또한 그의 옆에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죽... 죽지 않았어!”“민아 씨, 이 옷 어때요? 민아 씨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백혜진이 옷을 들고 와 보니, 소민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LED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
“민아 씨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그냥 민아 씨가 너무 걱정돼서 여기 있었던 거예요. 날 보는 게 그렇게 괴롭다면... 갈게요.”소민아는 손을 들어 올려 퉁퉁 부어올라 있는 눈을 가렸다. 그녀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랑 씨, 미안해요. 난 우리가 그냥 가짜 부부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이에 어젯밤과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이 말이 그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소민아는 결국 내뱉고 말았다.“민아 씨,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예요. 어젯밤 민아 씨가 날 그 사람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내가 자제했어야 했는데 못 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말했죠, 민아 씨가 나랑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놓아줄 수 있다고. 그 말, 지금도 유효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봐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결혼식 취소하고 이혼해요.”신이랑은 담담하게 말하고 난 뒤 뒤돌아섰다.차에 올라타 회사로 향하던 신이랑은 불안한 마음에 백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신이랑이 전화를 걸어오다니, 너무나도 뜻밖이었다.전화가 끊어지려는 순간, 백혜진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신 편집장님,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신이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기 불편하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민아 씨 잘 부탁할게요.”백혜진은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편집장님, 어젯밤 바에서 기 비서님을 봤어요. 오랫동안 떠나있었던 기 비서님이 돌아온 것 같았어요.”신이랑이 대답했다. “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백혜진이 말했다.“천만에요, 편집장님. 그럼 계속 일 보세요. 방해하지 않을게요.”한낱 평범한 비서팀 직원일 뿐인 그녀에게 이토록 겸손한 태도로 말해주다니.백혜진은 신이랑처럼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가 소민아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다만, 소민아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만약 소민아에게 기성은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