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박원근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어 주시윤도 맥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후배님이 왔는데 내가 빠져서야 되겠어?”장소월이 물었다.“야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술 마셔도 돼요?”주시윤이 박원근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요즘 나랑 원근이는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어. 의뢰인 쪽에서 연말에 게임을 출시해야 한다고 해서 힘들더라도 매일 야근하고 있어. 그럼 편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잖아. 지금 집값도 말도 안 되게 치솟아서 돈 없으면 장가도 못 가.”장소월은 종래로 경제적인 고민은 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재산에 남들은 평생 벌어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울시 중심 지대 집들을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장소월의 우월한 가정환경이 부러웠다.하지만 그저 그녀의 화려한 껍데기만 봤을 뿐, 속이 얼마나 아프게 곪아 터져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장소월은 그들과 함께 있으니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최소한... 그들에겐 자신만의 목표가 있으니까.장소월은 줄곧 흐릿한 정신으로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예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했던 꿈은 이루었다. 요즘은 그 어떤 것에도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허무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장소월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술을 마시지 않았다. 박원근과 주시윤은 술에 취해 해롱해롱한 상태로 사무실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요즘은 밤이 참 긴 계절이다. 돌연 사무실에 남겨두었던 머플러가 생각나 목에 두르고 아래로 내려갔다.작업실 아래는 크나큰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장소월은 베이지색 실 원피스를 입고 코트를 걸친 채 조명 아래 벤치에 앉았다.그녀가 손을 뻗어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았다. 눈송이는 손바닥에서 빠르게 녹아내렸다.“강영수, 눈이 오고 있어...”그는 전연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다.두 번의 인생에서 전연우로 인해 수많은 아픔을 겪은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도 아가씨는 여전히 강영수를 놓지 못하고 있다!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마음에 남는 법이니.장소월도 만만치 않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성은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어젯밤 송시아가 대표님과 함께 남원 별장에 들어갔으니 난리가 났겠지... 다만 쫓겨난 사람이 장소월일 거라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전연우는 빨간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보석 날카로운 부분이 전연우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닿아 붕대로 또다시 피가 스며들었다.기성은이 말했다.“대표님,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올까요?”그 순간 장소월의 다리에 담요를 덮어주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박원근이 장소월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난 네가 집에 돌아간 줄 알았어.”술에 취했던 박원근은 실은 그녀가 밖에 나가자마자 깨어나 3층에서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았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장소월은 차가워진 손을 말아쥐고 고개를 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저 이제 집 없어요. 유일한 가족이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셔서 저 혼자 남았거든요.”박원근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일부러 마음 아픈 일을 끄집어내려 했던 건 아니야. 정말 미안해.”장소월이 의연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미안해할 것 없어요. 사람은 언젠간 다 떠나가게 돼 있잖아요. 저 혼자서도... 나쁠 것 없어요.”사실 장소월은 주변 사람들에게 힘든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기분이 그들에게도 전해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다리에 덮여있는 담요를 들고 몸에 걸쳤다.“돌아가서 일해요. 처음으로 선배님들과 야근하는 건데 열심히 해야죠.”박원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때 강렬한 차 상향등이 박원근의 몸에
“송시아는 아직 쓸모가 있어서 옆에 두는 거야.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게.”장소월은 고개를 쳐들고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응시했다.“...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 여자를 해외로 보내든 집에 들이든 난 관심 없어.”“오늘 일은 이미 다 잊어버렸어. 이제 와 다시 거론하는 건 의미 없어.”“그 별장은 애초부터 네 소유고 난 그저 얹혀살았던 거뿐이잖아.”“내일 경애 아주머니한테 별장에 있는 내 물건 가져다 달라고 할게.”기성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고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아가씨, 대표님에겐 거부하기 힘든 자리라는 게 있습니다. 송시아 씨는 성세 그룹의 부대표이기 때문에 두 분이 함께 나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대표님의 위장병은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재발하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그랬고요. 아가씨께서 뛰쳐나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됐어요!”장소월이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귀를 찢을 듯한 마찰음이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눈을 내리뜨리고 서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이룬 건 다 네 능력 덕분이고,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그냥 재수 없는 운명 탓이라고 생각하겠지! 여자들이 집에 드나드는 거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개가 똥을 못 끊는 법이잖아. 넌 종래로 너한테 오는 여자 막지 않으니까.”“너한테서 쫓겨난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떠난 이유는 너같이 역겨운 사람과 단 한순간도 함께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거든.”“오늘 또 강제로 날 데려가려고 왔다는 거 알아. 날 협박하는 것 외에 네가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뭐야?”“전연우, 네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가든 영원히 그 사람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해.”“네가 외부에 온갖 위선을 다 떨어서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네가 얼마나 더러운 쓰레기인지 절대 잊지 못해!”전연우가 말했다.“욕 다 했어?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다른 방법 써도 돼. 화 다 풀리면 나랑 집에 가자.”장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낼 수 있겠는가?“전연우, 네가 뱉은 말 후회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성은이 깜짝 놀라며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린 뒤였다. 그녀는 이미 날카로운 과도를 전연우의 목에 찔러넣은 상태였다.살을 찢는 고통이 밀려왔다. 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져 손으로 만져보니 손톱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깟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더욱 아픈 건 바로 마음이었다.그녀는 정말 그를 죽이려 했다!“대표님!”기성은이 곧바로 장소월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 던져버렸다.전연우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작지도, 그리 깊지도 않은 상처였다.전연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장소월보다 훨씬 더 솟아오른 몸집에서 차가운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장소월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돌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장소월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여기로 도망 오면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난 너한테 그토록 많은 기회를 줬는데 넌 번번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고 있어. 이제는... 날 죽이려고까지 해?”“장소월... 너 정말 미쳤구나!”장소월이 곧바로 그의 말에 맞받아쳤다.“이 모든 것은 다 네가 날 궁지로 내몰았기 때문이야. 남원 별장에서 꺼지라고 네가 직접 말했잖아. 왜 또 날 찾아온 건데? 전연우, 우린 원수지간이야. 넌 강영수를 죽였고, 강씨 노부인을 죽였어. 그러면서 왜 난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야? 넌 그저 극악무도한 살인자일 뿐이잖아!”“너만 죽으면 아무도 날 강제로 네 그 역겨운 얼굴 보게 하지 않을 거야!”“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병에 걸려 죽는 게 나을 뻔했어. 다시 한번 죽는 거 별로 두렵지도 않아!”그녀가 마지막 글자를 내뱉은 순간, 전
“강지훈 손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도 북경 감옥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어. 생각 잘 해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해. 강지훈으로부터 소현아를 구해낼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장소월 또한 북경 감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형수들만 갇혀 있는 그곳에선 죽어 시체가 되는 것 외에 나올 방법이 없다.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발을 들이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곤 한다.전연우는 이미 자리에 앉았고, 도우미들은 두 세트의 그릇과 수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짓누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결국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장소월은 고작 몇 입만 깨작거렸다. 전연우가 집어준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서 말이다.어느덧 시간은 새벽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전연우가 식사를 마쳤을 때, 식탁 위 반찬도 거의 식어버렸다.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 순간 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약속한 대로 현아 무사히 집에 보내줘. 그러면 앞으로... 나도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얌전히 남원 별장에만 있을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은 강제로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어.”“난 성세 그룹 안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 너랑 결혼은 더더욱 싫고.”“마지막으로... 네가 누구와 결혼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짧은 자유를 끝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된 그녀는 또다시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버렸다.3층 복도, 별이는 아직 울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시체마냥 뚜벅뚜벅 걷고 있는 장소월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침실로 돌아온 뒤 다시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발견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고요한 서재 안, 전연우는 서랍 안에서 담배 한 대를 들고 돈뭉치를 꺼내놓았다.“아주머니가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이에요.”은경애는 돈을 보고서도 바로 받지 않고 걱
장소월이 조심스레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전연우가 경계심을 느끼는 범위 안까지 접근한다면 그는 분명 깨어날 것이다.그녀가 손을 뻗었다.“전... 전연우?”장소월이 낮게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때, 돌연 전연우가 눈을 번쩍 떴다. 이어 손이 강력한 힘에 잡혀 끌려가더니 몸 전체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전연우의 무거운 몸이 위에서 가녀린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깜짝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려있었다. 남자의 미세한 호흡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전연우, 나 아파. 빨리 일어나.”그는 역시 반응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의 체온이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떨구고 살펴보니 입고 있던 옅은 색 잠옷 치마가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장소월은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어제 전연우의 목에 생긴 상처가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설마 세균에 감염된 건가?어쩐지 반응이 없더라니.“전연우, 빨리 깨어나. 나 아프단 말이야!”“...”“나쁜 놈아! 일어나라고!”장소월이 아무리 소리쳐도 전연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선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영수야, 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그 말에 전연우가 돌연 눈을 뜨고는 고개까지 들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니 몸에 찌든 니코틴 냄새가 더더욱 농후해졌다.“가면 안 돼!”그는 괴로움을 애써 참으며 힘겹게 짧은 네 글자를 내뱉었다.그가 키스하려 다가오자 장소월은 어디에서 힘이 솟아올랐는지 바로 그를 옆쪽으로 밀어버렸다. 그가 몸을 누르지 않으니 드디어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 전연우는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빼내려 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용지물이었다. 하여 그녀는 전연우가 일부러 아픈 척하는 게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몇
기성은은 이상했지만 묻지 않고 바로 소현아의 위치를 보냈다.몇 초 뒤 장소월은 답장을 받았다.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뻔뻔한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로즈 가든에 있는 소현아를 왜 북경 감옥에 있다고 거짓말한단 말인가. 나쁜 자식!장소월은 신분증과 여권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섰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깊게 잠들어 있는 남자를 쏘아보고는 이 기회를 틈타 그의 따귀를 두 대 내리쳤다.그러고는 물건을 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별장에서 뛰어나가 오 집사가 운전하는 차에 앉아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소현아는 와구와구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옆에선 소민아가 무료한 얼굴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언니,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좀 쉬면 안 돼? 더 먹으면 정말 다시 살 못 빼.”소현아는 다른 건 몰라도 행복하게 사는 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단순한 성격에 머리엔 음식으로만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입맛이 하루하루 더 도는 모양이다.“민아야,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 엄마아빠가 많이 먹으면 복이 온다고 하셨어. 복 많이 가져야 앞으로 아무한테도 괴롭힘당하지 않지.”소민아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계속 이렇게 먹다가 시집도 못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시집을 왜 가? 혼자 사는 게 이렇게 즐거운데.”소민아는 사촌 언니가 왜 이렇게 많이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일 나가는 쓰레기만으로도 쓰레기 공장 하나는 거뜬히 차릴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였다.소현아는 또 귤을 하나 까고 마구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소민아도 하나 가져와 맛을 본 순간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언니, 이 귤 너무 시지 않아요? 이렇게 신 걸 어떻게 먹은 거예요?”소현아는 너무 맛있어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뭐가 시다는 거야? 하나도 안 신데?”소현아는 연속으로 몇 개 더 입에 넣고 냠냠 씹으며 말했다. 소민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소민아는 경계하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 틈 사이로 살펴보니 장소월이었다.그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소월 언니? 여긴 무슨 일이세요?”“뭐라고? 소월이? 소월이가 왔어?”소현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간식까지 내팽개쳐버린 채 급히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장소월을 와락 끌어안았다.“소월아, 정말 보고 싶었어. 왜 이제야 온 거야!”장소월은 그녀에게 안겨 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현아야,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잊어버렸어. 소월아, 나랑 같이 있자.”소현아가 팔을 잡아당겼지만 장소월은 거절했다.“아니야. 너한테 해줄 얘기가 있어서 왔어. 현아야, 너 지금 빨리 집에 가봐야 해. 네 어머니 아버지께서...”장소월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소현아가 무사히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는 듯한 소현아의 표정을 보니 강지훈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엄마아빠가 왜? 내가 강지훈 씨 집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서 화나신 거야? 하지만 강지훈 그 나쁜 놈이 엄마아빠한테 말씀드렸다고 했어. 그럼 걱정 안 하실 텐데...”장소월은 의아한 눈빛으로 소현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알아차리고 말했다.“현아야, 내가 예전에 말했었잖아.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고. 특히 강지훈을 보면 반드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뭐라고요? 강지훈? 언니를 데려간 사람이 강지훈이라고요? 그럼 대표님은 왜 언니를 이곳에 데려온 건데요? 병을 치료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에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렸다. 소민아의 말을 들으니 일이 생각한 것만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장소월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현아야, 물 한 컵만 가져다줄래?”“응.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미지근한 물로 부탁해. 너무 차가워서도 안 되고 너무 뜨거워서도 안 돼.”소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