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낼 수 있겠는가?“전연우, 네가 뱉은 말 후회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성은이 깜짝 놀라며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린 뒤였다. 그녀는 이미 날카로운 과도를 전연우의 목에 찔러넣은 상태였다.살을 찢는 고통이 밀려왔다. 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져 손으로 만져보니 손톱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깟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더욱 아픈 건 바로 마음이었다.그녀는 정말 그를 죽이려 했다!“대표님!”기성은이 곧바로 장소월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 던져버렸다.전연우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작지도, 그리 깊지도 않은 상처였다.전연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장소월보다 훨씬 더 솟아오른 몸집에서 차가운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장소월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돌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장소월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여기로 도망 오면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난 너한테 그토록 많은 기회를 줬는데 넌 번번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고 있어. 이제는... 날 죽이려고까지 해?”“장소월... 너 정말 미쳤구나!”장소월이 곧바로 그의 말에 맞받아쳤다.“이 모든 것은 다 네가 날 궁지로 내몰았기 때문이야. 남원 별장에서 꺼지라고 네가 직접 말했잖아. 왜 또 날 찾아온 건데? 전연우, 우린 원수지간이야. 넌 강영수를 죽였고, 강씨 노부인을 죽였어. 그러면서 왜 난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야? 넌 그저 극악무도한 살인자일 뿐이잖아!”“너만 죽으면 아무도 날 강제로 네 그 역겨운 얼굴 보게 하지 않을 거야!”“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병에 걸려 죽는 게 나을 뻔했어. 다시 한번 죽는 거 별로 두렵지도 않아!”그녀가 마지막 글자를 내뱉은 순간, 전
“강지훈 손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도 북경 감옥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어. 생각 잘 해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해. 강지훈으로부터 소현아를 구해낼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장소월 또한 북경 감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형수들만 갇혀 있는 그곳에선 죽어 시체가 되는 것 외에 나올 방법이 없다.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발을 들이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곤 한다.전연우는 이미 자리에 앉았고, 도우미들은 두 세트의 그릇과 수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짓누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결국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장소월은 고작 몇 입만 깨작거렸다. 전연우가 집어준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서 말이다.어느덧 시간은 새벽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전연우가 식사를 마쳤을 때, 식탁 위 반찬도 거의 식어버렸다.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 순간 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약속한 대로 현아 무사히 집에 보내줘. 그러면 앞으로... 나도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얌전히 남원 별장에만 있을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은 강제로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어.”“난 성세 그룹 안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 너랑 결혼은 더더욱 싫고.”“마지막으로... 네가 누구와 결혼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짧은 자유를 끝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된 그녀는 또다시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버렸다.3층 복도, 별이는 아직 울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시체마냥 뚜벅뚜벅 걷고 있는 장소월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침실로 돌아온 뒤 다시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발견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고요한 서재 안, 전연우는 서랍 안에서 담배 한 대를 들고 돈뭉치를 꺼내놓았다.“아주머니가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이에요.”은경애는 돈을 보고서도 바로 받지 않고 걱
장소월이 조심스레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전연우가 경계심을 느끼는 범위 안까지 접근한다면 그는 분명 깨어날 것이다.그녀가 손을 뻗었다.“전... 전연우?”장소월이 낮게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때, 돌연 전연우가 눈을 번쩍 떴다. 이어 손이 강력한 힘에 잡혀 끌려가더니 몸 전체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전연우의 무거운 몸이 위에서 가녀린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깜짝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려있었다. 남자의 미세한 호흡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전연우, 나 아파. 빨리 일어나.”그는 역시 반응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의 체온이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떨구고 살펴보니 입고 있던 옅은 색 잠옷 치마가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장소월은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어제 전연우의 목에 생긴 상처가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설마 세균에 감염된 건가?어쩐지 반응이 없더라니.“전연우, 빨리 깨어나. 나 아프단 말이야!”“...”“나쁜 놈아! 일어나라고!”장소월이 아무리 소리쳐도 전연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선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영수야, 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그 말에 전연우가 돌연 눈을 뜨고는 고개까지 들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니 몸에 찌든 니코틴 냄새가 더더욱 농후해졌다.“가면 안 돼!”그는 괴로움을 애써 참으며 힘겹게 짧은 네 글자를 내뱉었다.그가 키스하려 다가오자 장소월은 어디에서 힘이 솟아올랐는지 바로 그를 옆쪽으로 밀어버렸다. 그가 몸을 누르지 않으니 드디어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 전연우는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빼내려 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용지물이었다. 하여 그녀는 전연우가 일부러 아픈 척하는 게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몇
기성은은 이상했지만 묻지 않고 바로 소현아의 위치를 보냈다.몇 초 뒤 장소월은 답장을 받았다.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뻔뻔한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로즈 가든에 있는 소현아를 왜 북경 감옥에 있다고 거짓말한단 말인가. 나쁜 자식!장소월은 신분증과 여권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섰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깊게 잠들어 있는 남자를 쏘아보고는 이 기회를 틈타 그의 따귀를 두 대 내리쳤다.그러고는 물건을 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별장에서 뛰어나가 오 집사가 운전하는 차에 앉아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소현아는 와구와구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옆에선 소민아가 무료한 얼굴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언니,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좀 쉬면 안 돼? 더 먹으면 정말 다시 살 못 빼.”소현아는 다른 건 몰라도 행복하게 사는 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단순한 성격에 머리엔 음식으로만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입맛이 하루하루 더 도는 모양이다.“민아야,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 엄마아빠가 많이 먹으면 복이 온다고 하셨어. 복 많이 가져야 앞으로 아무한테도 괴롭힘당하지 않지.”소민아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계속 이렇게 먹다가 시집도 못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시집을 왜 가? 혼자 사는 게 이렇게 즐거운데.”소민아는 사촌 언니가 왜 이렇게 많이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일 나가는 쓰레기만으로도 쓰레기 공장 하나는 거뜬히 차릴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였다.소현아는 또 귤을 하나 까고 마구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소민아도 하나 가져와 맛을 본 순간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언니, 이 귤 너무 시지 않아요? 이렇게 신 걸 어떻게 먹은 거예요?”소현아는 너무 맛있어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뭐가 시다는 거야? 하나도 안 신데?”소현아는 연속으로 몇 개 더 입에 넣고 냠냠 씹으며 말했다. 소민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소민아는 경계하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 틈 사이로 살펴보니 장소월이었다.그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소월 언니? 여긴 무슨 일이세요?”“뭐라고? 소월이? 소월이가 왔어?”소현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간식까지 내팽개쳐버린 채 급히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장소월을 와락 끌어안았다.“소월아, 정말 보고 싶었어. 왜 이제야 온 거야!”장소월은 그녀에게 안겨 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현아야,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잊어버렸어. 소월아, 나랑 같이 있자.”소현아가 팔을 잡아당겼지만 장소월은 거절했다.“아니야. 너한테 해줄 얘기가 있어서 왔어. 현아야, 너 지금 빨리 집에 가봐야 해. 네 어머니 아버지께서...”장소월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소현아가 무사히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는 듯한 소현아의 표정을 보니 강지훈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엄마아빠가 왜? 내가 강지훈 씨 집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서 화나신 거야? 하지만 강지훈 그 나쁜 놈이 엄마아빠한테 말씀드렸다고 했어. 그럼 걱정 안 하실 텐데...”장소월은 의아한 눈빛으로 소현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알아차리고 말했다.“현아야, 내가 예전에 말했었잖아.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고. 특히 강지훈을 보면 반드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뭐라고요? 강지훈? 언니를 데려간 사람이 강지훈이라고요? 그럼 대표님은 왜 언니를 이곳에 데려온 건데요? 병을 치료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에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렸다. 소민아의 말을 들으니 일이 생각한 것만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장소월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현아야, 물 한 컵만 가져다줄래?”“응.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미지근한 물로 부탁해. 너무 차가워서도 안 되고 너무 뜨거워서도 안 돼.”소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조수석에 앉아 잠시 잠들었던 장소월은 차가 덜컥거리는 바람에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었다.“기사님, 여기 어디죠?”“여긴 남교시예요. 해성까지 가려면 아직 40분 정도 남았어요.”“여기에 세워주세요.”“해성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택시비까지 다 받았는데 다시 돌려주는 건 없어요!”“네. 괜찮아요.”택시 기사는 흔쾌히 장소월을 가장 북적이는 도시 중심에 내려주었다.전연우는 깨어나면 분명 그녀가 해성으로 갔을 거라 예상할 것이다. 때문에 잠시 다른 곳에 머무르며 그의 레이더를 피해 가는 것이 좋다.장소월은 차에서 내린 뒤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는 여관으로 가 하룻밤 묶기로 했다.“아가씨, 보아하니 혼자 남교에 온 것 같은데 일자리 찾으려고 왔어요? 그럼 내가 하나 소개해 줄게요. 본인만 성실히 노력하면 한 달에 8, 90만 원은 문제없어요.”장소월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방 키를 받은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어 문을 모두 잠그고 소파와 책상으로 단단히 막아놓았다.이곳 날씨는 습하고 더워 이불에서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다. 필경 몇천 원밖에 안 되는 여관이니 꾹 참고 하룻밤 자고 난 뒤 내일 다시 다른 집을 찾으면 될 것이다.카드에 넣어두었던 돈을 모두 현금으로 꺼내 보니 200만 원가량 되었다. 2006년의 200만 원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이제 밤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그녀는 전연우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깨어나길 바라고 또 바랐다.가장 좋은 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실은 장소월이 떠난 지 두 시간 이후부터 기성은은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상대방은 줄곧 묵묵부답이었다. 더욱이 종래로 문자라곤 보내본 적 없는 그가 메시지를 보내다니.다섯 시 반, 기성은은 남원 별장으로 전화를 걸었다.도우미는 침실에 들어가 전연우를 살펴본 뒤에야 그가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전연우는 구급대원들의 들것에
서철용은 전연우의 상처를 치료하고 약을 발라주었다.링거를 꽂고 체온을 떨어뜨리니 어느덧 저녁 열한 시 반이 되어 있었다.위층 직원 숙소에서 머물던 배은란이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전연우 씨 괜찮아?”서철용은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많이 괜찮아졌어. 오늘 밤 안엔 깨어날 거야. 난 이곳에서 지켜봐야 해. 시간이 늦었으니까 넌 얼른 들어가서 쉬어.”배은란이 의자에 손을 대자 서철용은 곧바로 그녀를 도와 의자를 옮겨 주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나도 같이 있다가 깨어나면 들어갈게.”서철용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그럼 30분만 함께 있어 줘.”배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기성은은 회사 일을 마치고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 역시나 소현아도 소민아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소민아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걸었으나 들려오는 건 텅 빈 신호음뿐이었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마지막 전화를 끊었다.남원 별장 상황도 이미 파악했다. 도우미의 말에 의하면 장소월은 오전에 급히 운전기사를 불러 나간 이후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차에 붙어있던 GPS는 줄곧 해성시만 가리키고 있었다.장소월 이 여자 또 도망친 것이 분명하다. 기성은은 곧바로 해성시 경찰서에 연락해 장소월을 발견하면 잡아두라고 일렀다. 그 후 어떻게 처리할지는 대표님이 깨어난 뒤 결정하면 될 것이다.만약 장소월이 순조롭게 해외로 도망친다면 대표님은 그 죄를 기성은에게 물을 것이다.이상한 건 해성시 쪽에서 인력을 모두 동원해 해성시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지키고 있음에도 5, 6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설마 연막작전을 쓰고 아예 떠나지도 않은 건가?기성은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장소월의 목적지가 어디일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그가 병원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그때 전연우는 의식을 되찾았다.남자는 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 환자
기성은이 말했다.“하지만 회사 쪽 업무는 대표님께서 처리하셔야 합니다!”“나가서 찾으라고 했어!”기성은의 입꼬리가 밑으로 말려내려 갔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회사도 필요 없는 거야? 전연우... 여태껏 뭐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장소월은 저녁밥을 먹지 않고 옷을 입은 채 얕은 잠이 들어있었다.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과 함께 여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있잖아요. 이 안에 있는 여자 이거예요.”여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여자는 뚱뚱한 몸매에 얼굴엔 싸구려 화장품을 발랐는지 파운데이션이 덕지덕지 떠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에 담배 한 대를 끼우고 남자 몇 명을 데리고 왔다.“내 마음에만 들면 마담한테 섭섭지 않게 보상할게요.”“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오죽하면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겠어요.”그 여자는 바로 이 여관의 여주인이었다.여자가 등 뒤 남자에게 신호를 보내자 남자는 곧바로 향을 하나 피운 뒤 문틈으로 집어넣었다.장소월의 코에 이상한 냄새가 파고 들어왔다. 점점 더 짙어가는 냄새에 그녀가 눈을 떴다. 문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그녀는 곧바로 코를 막고 창문을 열려 일어섰다. 하지만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남자가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말했다.“누님, 됐어요. 저 여자 쓰러졌어요.”“문 열고 들어가!”그는 열쇠를 열고 문을 밀어보았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경계심이 꽤 높은 여자인가 보네요. 소파로 문을 막은 것 같아요. 밀리지 않아요.”짙게 화장한 여자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부숴.”여관 주인이 한숨을 내쉬었다.“안 돼요! 새로 만든 지 얼마 안 된 문이란 말이에요.”“걱정 말아요. 그깟 돈은 충분히 보상해줄 수 있어요.”남자가 몇 번 발길질하니 안에 있던 가구가 이동하고 자그마한 틈이 생겨났다.장소월은 희미한 정신으로 애써 눈을 뜨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반항하고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