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경계하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 틈 사이로 살펴보니 장소월이었다.그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소월 언니? 여긴 무슨 일이세요?”“뭐라고? 소월이? 소월이가 왔어?”소현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간식까지 내팽개쳐버린 채 급히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장소월을 와락 끌어안았다.“소월아, 정말 보고 싶었어. 왜 이제야 온 거야!”장소월은 그녀에게 안겨 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현아야,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잊어버렸어. 소월아, 나랑 같이 있자.”소현아가 팔을 잡아당겼지만 장소월은 거절했다.“아니야. 너한테 해줄 얘기가 있어서 왔어. 현아야, 너 지금 빨리 집에 가봐야 해. 네 어머니 아버지께서...”장소월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소현아가 무사히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는 듯한 소현아의 표정을 보니 강지훈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엄마아빠가 왜? 내가 강지훈 씨 집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서 화나신 거야? 하지만 강지훈 그 나쁜 놈이 엄마아빠한테 말씀드렸다고 했어. 그럼 걱정 안 하실 텐데...”장소월은 의아한 눈빛으로 소현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알아차리고 말했다.“현아야, 내가 예전에 말했었잖아.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고. 특히 강지훈을 보면 반드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뭐라고요? 강지훈? 언니를 데려간 사람이 강지훈이라고요? 그럼 대표님은 왜 언니를 이곳에 데려온 건데요? 병을 치료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에요?”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렸다. 소민아의 말을 들으니 일이 생각한 것만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장소월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현아야, 물 한 컵만 가져다줄래?”“응.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미지근한 물로 부탁해. 너무 차가워서도 안 되고 너무 뜨거워서도 안 돼.”소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조수석에 앉아 잠시 잠들었던 장소월은 차가 덜컥거리는 바람에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었다.“기사님, 여기 어디죠?”“여긴 남교시예요. 해성까지 가려면 아직 40분 정도 남았어요.”“여기에 세워주세요.”“해성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택시비까지 다 받았는데 다시 돌려주는 건 없어요!”“네. 괜찮아요.”택시 기사는 흔쾌히 장소월을 가장 북적이는 도시 중심에 내려주었다.전연우는 깨어나면 분명 그녀가 해성으로 갔을 거라 예상할 것이다. 때문에 잠시 다른 곳에 머무르며 그의 레이더를 피해 가는 것이 좋다.장소월은 차에서 내린 뒤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는 여관으로 가 하룻밤 묶기로 했다.“아가씨, 보아하니 혼자 남교에 온 것 같은데 일자리 찾으려고 왔어요? 그럼 내가 하나 소개해 줄게요. 본인만 성실히 노력하면 한 달에 8, 90만 원은 문제없어요.”장소월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방 키를 받은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어 문을 모두 잠그고 소파와 책상으로 단단히 막아놓았다.이곳 날씨는 습하고 더워 이불에서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다. 필경 몇천 원밖에 안 되는 여관이니 꾹 참고 하룻밤 자고 난 뒤 내일 다시 다른 집을 찾으면 될 것이다.카드에 넣어두었던 돈을 모두 현금으로 꺼내 보니 200만 원가량 되었다. 2006년의 200만 원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이제 밤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그녀는 전연우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깨어나길 바라고 또 바랐다.가장 좋은 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실은 장소월이 떠난 지 두 시간 이후부터 기성은은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상대방은 줄곧 묵묵부답이었다. 더욱이 종래로 문자라곤 보내본 적 없는 그가 메시지를 보내다니.다섯 시 반, 기성은은 남원 별장으로 전화를 걸었다.도우미는 침실에 들어가 전연우를 살펴본 뒤에야 그가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전연우는 구급대원들의 들것에
서철용은 전연우의 상처를 치료하고 약을 발라주었다.링거를 꽂고 체온을 떨어뜨리니 어느덧 저녁 열한 시 반이 되어 있었다.위층 직원 숙소에서 머물던 배은란이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전연우 씨 괜찮아?”서철용은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많이 괜찮아졌어. 오늘 밤 안엔 깨어날 거야. 난 이곳에서 지켜봐야 해. 시간이 늦었으니까 넌 얼른 들어가서 쉬어.”배은란이 의자에 손을 대자 서철용은 곧바로 그녀를 도와 의자를 옮겨 주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나도 같이 있다가 깨어나면 들어갈게.”서철용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그럼 30분만 함께 있어 줘.”배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기성은은 회사 일을 마치고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 역시나 소현아도 소민아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소민아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걸었으나 들려오는 건 텅 빈 신호음뿐이었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마지막 전화를 끊었다.남원 별장 상황도 이미 파악했다. 도우미의 말에 의하면 장소월은 오전에 급히 운전기사를 불러 나간 이후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차에 붙어있던 GPS는 줄곧 해성시만 가리키고 있었다.장소월 이 여자 또 도망친 것이 분명하다. 기성은은 곧바로 해성시 경찰서에 연락해 장소월을 발견하면 잡아두라고 일렀다. 그 후 어떻게 처리할지는 대표님이 깨어난 뒤 결정하면 될 것이다.만약 장소월이 순조롭게 해외로 도망친다면 대표님은 그 죄를 기성은에게 물을 것이다.이상한 건 해성시 쪽에서 인력을 모두 동원해 해성시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지키고 있음에도 5, 6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설마 연막작전을 쓰고 아예 떠나지도 않은 건가?기성은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장소월의 목적지가 어디일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그가 병원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그때 전연우는 의식을 되찾았다.남자는 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 환자
기성은이 말했다.“하지만 회사 쪽 업무는 대표님께서 처리하셔야 합니다!”“나가서 찾으라고 했어!”기성은의 입꼬리가 밑으로 말려내려 갔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회사도 필요 없는 거야? 전연우... 여태껏 뭐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장소월은 저녁밥을 먹지 않고 옷을 입은 채 얕은 잠이 들어있었다.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과 함께 여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있잖아요. 이 안에 있는 여자 이거예요.”여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여자는 뚱뚱한 몸매에 얼굴엔 싸구려 화장품을 발랐는지 파운데이션이 덕지덕지 떠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에 담배 한 대를 끼우고 남자 몇 명을 데리고 왔다.“내 마음에만 들면 마담한테 섭섭지 않게 보상할게요.”“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오죽하면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겠어요.”그 여자는 바로 이 여관의 여주인이었다.여자가 등 뒤 남자에게 신호를 보내자 남자는 곧바로 향을 하나 피운 뒤 문틈으로 집어넣었다.장소월의 코에 이상한 냄새가 파고 들어왔다. 점점 더 짙어가는 냄새에 그녀가 눈을 떴다. 문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그녀는 곧바로 코를 막고 창문을 열려 일어섰다. 하지만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남자가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말했다.“누님, 됐어요. 저 여자 쓰러졌어요.”“문 열고 들어가!”그는 열쇠를 열고 문을 밀어보았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경계심이 꽤 높은 여자인가 보네요. 소파로 문을 막은 것 같아요. 밀리지 않아요.”짙게 화장한 여자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부숴.”여관 주인이 한숨을 내쉬었다.“안 돼요! 새로 만든 지 얼마 안 된 문이란 말이에요.”“걱정 말아요. 그깟 돈은 충분히 보상해줄 수 있어요.”남자가 몇 번 발길질하니 안에 있던 가구가 이동하고 자그마한 틈이 생겨났다.장소월은 희미한 정신으로 애써 눈을 뜨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반항하고
어린 소녀들은 모두 희망을 포기한 채 고통 속에 찌들어 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완전히 미쳐버려 실실 웃기만 했다.장소월이 물었다.“돈이요? 어떻게 벌게 해줄 건데요?”유홍선은 그녀가 타협하려 하자 사람을 시켜 묶은 손과 발을 풀어주었다. 그녀를 놓아준다고 한들 자신의 영역 밖으로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의 표정은 아주 덤덤했다. 예전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광경이니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간신히 이리 굴에서 도망쳐 나오니 이번엔 또 호랑이 굴에 잡혀 들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유홍선이 허리를 굽히고 장소월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돈 버는 건 쉬워. 남자들의 환심을 사면... 돈은 자연히 들어오게 되어 있어!”...유홍선은 그녀가 더는 반항하지 않자 드디어 보물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수많은 여자들을 보았었기에 어떻게 하면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여 미모와 몸매를 이용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을 하곤 했다. 유홍선은 장소월을 아가씨 숙소에 데려다준 뒤 고급 브랜드 화장품과 옷, 그리고 가방들을 가득 안겨주었다.유홍선이 말했다.“오늘은 일단 푹 쉬어. 내일 저녁에 내가 손님 들여보내 줄 테니까.”유홍선은 핸드폰 카메라를 장소월에게 고정하고 5, 6초 길이의 영상을 찍었다. 영상 속 수려한 미모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부잣집 귀한 딸내미 같았다. 만약 그녀가 입었던 브랜드도 알 수 없는 옷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렇듯 쉽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그녀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고는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저 찍으면 안 돼요. 핸드폰 이리 내요!”등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곧바로 그녀를 막아 세웠다. 유홍선이 웃으며 말했다.“이봐, 어린 아가씨. 이 영상으로 사장님들과 거래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누가 널 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고분고분 내 말만 잘 들
서울부터 해성까지 길은 조금의 사각지대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뒤졌다.명령을 받은 경찰서에선 이 실종 사건에 모든 경찰을 출동시켰다. 또한 전연우는 회사의 경호원들까지 동원해 나라를 뒤집어엎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장소월을 찾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다음 날, 전연우는 밤새 잠에 들지 못하고 조용히 소식을 기다렸다.서철용은 그런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말했다.“소월 씨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약도 안 먹으면 소월 씨를 찾기도 전에 네가 먼저 쓰러져.”전연우는 못 들은 척 눈을 감고 반지를 꽉 말아쥐었다.서철용은 전연우가 한 사람을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계속 이렇게 지속하다간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고 말 것이다.서철용은 그에게 약효가 더 강한 링거로 바꿔주었다.그때, 기성은이 무언가 손에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소식이 왔습니다.”전연우가 실핏줄이 가득 서려 있는 눈을 뜨고는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말해.”“이건 소월 아가씨의 가방입니다. 어제 아가씨께선 택시를 타고 남교시에 도착한 뒤 10만 원을 택시기사에게 지불했습니다. 그곳은 해성시에서 100킬로, 즉 차로 한 시간 달리면 도착할만한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가방도 남교시 청소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경찰서에 제출한 거라고 합니다. 지문을 떠보니 아가씨의 지문과 일치했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지문도 있는 거로 보아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거로 보입니다.”전연우의 눈동자에서 순식간에 살기가 일렁였다.“지금 어디에 있어?”기성은이 대답했다.“지금 경찰서에서 CCTV를 확인하고 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한 시간 내에 알아내야 할 거야.”전연우는 격렬히 흥분하는 바람에 상처에 또 무리가 와 연거푸 기침했다. 서철용은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움직이지 마. 상처 조심해야 해.”그때 기성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가 문자메시지를 살펴보고 나서 곧바로 전연우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어젯밤 소월
경찰은 그녀에게 알려줘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성세 그룹 안주인이에요. 최근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 같은데 혹시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으면 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아. 네. 알겠습니다.”경찰서에서 나온 뒤 여관 주인은 곧장 집으로 간 뒤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성세 그룹 안주인이었다니, 들키면 그녀는 끝장이다.수년 동안 무사히 이 일을 해왔는데 한순간에 똥물을 뒤집어쓰다니.경찰은 이곳에서 단서가 끊기자 그 길을 지나간 모든 차량들의 조사에 착수했다.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화려한 장식으로 감춰진 뼛속까지 썩어 문드러진 더러운 곳.“나한테 손대지 말아요!”장소월이 강제로 차에 올라탔다.“날 어디에 데려가려는 거예요.”남자 두 명이 그녀를 밧줄로 묶고 그녀 몸을 더듬고 있었다.“넌 운도 참 좋아. 해성시 거물급 인사 눈에 들었으니 말이야. 지금 그분한테 가는 길이야. 도착하면 절대 그분 심기를 건드리면 안 돼. 그때가 되면 아무도 널 구해내지 못한다는 거 명심해.”“됐어. 당장 몸에서 손 떼. 옷 다 찢어지겠어.”유홍선의 한마디 말에 두 남자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차는 한 시간 반을 달려 7시에 한 낯선 곳에 도착했다.정장을 입은 매니저가 음침한 눈빛으로 장소월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그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탄 뒤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장소월의 목, 팔, 그리고 다리에 수상한 기계를 채웠다.“저 여자가 무대에 오르면 원래 가격대로 보너스 줄게요.”장소월은 유홍선이 자신을 이곳에 팔아넘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유홍선이 떠난 뒤, 장소월은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의 무리에 던져졌다.이후, 문이 닫혔다.미모가 출중한 여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다들 야한 옷차림을 하고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다. 또 앳돼 보이는 몇몇 어린 여자아이들은 이상한 물건을 몸에 달고 구석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장소월은 그들에게 접근해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 이 낯선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저히
장소월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림 그렸었어요. 다른 일 없으면 미안하지만... 비켜주실래요.”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너...”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장소월의 모습을 본 주지연은 단단히 혼내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잡으려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위로하는 장소월이 들어왔다.장소월은 몇 마디 나누고 난 뒤에야 아이는 부모님에 의해 이곳 해상시 천상인 업소에 팔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 몸에 단 기계는 시간을 기록하는 용도였다. 손님이 여자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시간을 기록해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손님이 무엇을 요구하든 절대 반항할 수 없고, 그 룰을 어긴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그녀 몸에 나 있는 상처가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얼마 후, 빠르게 그녀 차례가 되었다.“설마 이곳에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죠?”“소용없어요. 아무도 우릴 구하지 못해요. 해성시 경찰들까지 이곳 사람들과 한통속이니까요. 도망친다고 해도 그들에게 잡혀 돌아올 거예요. 언니.. 저 또 팔려가고 싶지 않아요.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장소월은 따뜻한 말로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걱정하지 마. 곧 괜찮아질 거야.”그녀는 전연우가 인맥과 권력을 총동원해 자신을 찾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어린 소녀의 양부모는 고작 열여덟 살밖에 안 되는 아이를 이곳에 팔아버렸다. 오직 남동생을 잘 키우기 위해 말이다.천상인 업소 VIP 룸 안, 남자가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강 소장님, 최상급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바로 데려올게요.”주지연은 천상인에서 미모가 가장 출중한 에이스였다. 하여 그녀는 자연스럽게 강지훈의 옆에 앉아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오랫동안 이 업계에서 뒹굴며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보았었다. 뚱뚱하고 기름이 번지르르한 아저씨부터 시작해 딱딱하고 준수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