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하루 종일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하지만 그런데도 전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장소월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다.해먹 소파는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장소월은 뒤에서 걸어오는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장소월은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나 혼자 있고 싶어.”전연우는 정장을 벗고 검은 셔츠만 입고 있었다.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고 건장하고 힘 있는 팔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녀의 흰 피부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시각적으로 힘 차이가 크게 나는 듯 보였다. 장소월의 힘없어 보이는 가녀린 팔은 그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이런 연약한 모습은 남자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전연우는 고개를 떨구고 장소월의 부드러운 손바닥을 만지다가 손등에 키스했다. 그녀가 오늘 몸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전연우는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욕망으로 인해 여기에서 바로 그녀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소월이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기 때문에 전연우는 욕망을 억눌렀다.“오늘 기 비서더러 파티에 등장하는 액세서리들을 전부 사라고 했어. 있다가 가지고 올 거야.”장소월은 전연우가 주는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만약 정말로 가지면 두 사람이 스폰 관계라는 것이 사실이 되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절대 그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애인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장소월은 그에게 뭐라고 말할지 몰랐다. 전연우는 그녀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안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난 앞으로 몇 년 동안 유럽에 사업 중점을 둘 생각이야. 그래서 당분간 돌아갈 계획이 없는데, 넌 어디 가고 싶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살자. 난 여기도 좋은데, 넌 어때? 마침 네 명의로 된 방을 구매할 계획이었어. 네가 전에 있던 곳은 기 비서더러 퇴실 처리하라고 했어.”장소월은 당황해했고 화도 난 듯했다.“오빠는 왜 항상 제멋
그녀의 아버지는 장소월이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전연우를 후계자로 들였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후계자가 있으니 장소월을 완전히 포기했다.전연우는 송시아의 도움으로 성세 그룹을 손에 쥐게 되었다.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는데, 오직 장소월만이 도망치지도, 피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돌아간다고 해도 곁에 아무 가족도 없고 혼자다.가슴이 막막하고, 답답했으며 괴롭고 질식할 것 같았다...장소월은 자신도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뒤돌아보면 집에서 가족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면 했다.전연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을 때리고 있는지 몰랐다. 사실 그는 이미 장씨 가문을 충분히 봐줬고 언제든지 원하면 장해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십여 년을 견뎌왔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연우는 여유로운 듯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오빠는 소월이가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그냥 오빠에게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장소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왔다.전연우는 아주 쉽게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번생엔 그의 새장에 갇혀지내야 했다.“오빠가 이렇게 하면 4년 전에 오빠가 나에게 했던 짓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그럴 수 없어. 난 오빠가 나한테 한 짓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난 오빠의 소유물이 아니야. 그리고 절대 오빠에게 의지하지도 않을 거야.”전연우... 송시아가 다시 태어나서도 말 안 했지? 전생에 당신은 날 죽도록 싫어했어. 심지어 나한테 눈길 한번도 주지 않았지. 그리고... 매번 날 힘들게 했고.나를 발밑에 짓밟고,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하찮게 생각했었지.이번 생에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모두 부드러운 함정 같은 거야. 날 그 깊은 심연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겠지.“전연우... 모든 게 곧 끝날 거야.”그러나
“그거 말고 너한테 또 무슨 얘기를 했어?”장소월은 거울 속에 비친 전연우를 보며 그의 표정을 통해 마음에 찔려하는지 보려고 했지만, 그는 포커페이스에 능숙하여 아주 침착해 보였다. 이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송시아가 장소월을 찾았을 때 이미 자신도 환생했다고 고백했다.송시아의 성격 상 전연우에게 모든 것을 말했을 게 뻔했다. 그에게 전생에 그가 어떻게 장소월을 포기하고, 어떻게 비밀리에 일을 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송시아와 함께 했는지 말이다.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 전연우는 전생처럼 이 이유만으로도 그녀와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다.“내가 뭘 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장소월은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백윤서와 송시아만이 오빠 마음속에서 중요한 존재야. 오빠는 그 두 사람만 신경 쓰면 돼. 나한테 이러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야. 난 사흘 뒤에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이미 예약했어. 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오빠가 날 지켜보는 것도 소용없어. 내 집이 사라졌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 혼자여도 괜찮아. 지금의 난 스스로도 모든 걸 할 수 있어. 누구한테 의지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전연우, 당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장씨 가문을 벗어났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 마.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여기서 끝인지 아닌지는 네가 정할 게 아니야. 받아들이기 싫어도 그냥 견뎌야 해. 네가 떠나고 싶어도 결정권은 나한테 있어.”전연우는 장소월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돌아세웠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협박했다.“제운으로 돌아가서 다시 강영수랑 만날 망상은 하지 마. 지금의 강씨 가문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너도 그렇잖아? 소월이 착하지? 오빠 말 잘 들어.”장소월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전연우, 영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꼬집고 악마 같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
그들 사이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미 예정된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있는 장소월의 신분도 마찬가지였다.그 후 보름 동안 장소월은 송시아를 보지 못했고 그녀는... 이미 프랑스를 떠난 것 같았다.장소월은 결국 어머니의 기일도 놓쳤다.이 기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장소월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숨겼다. 어젯밤 전연우는 또 밤새도록 그녀를 원했고 깨어났을 때 창 밖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전연우가 그녀를 돌보기 위해 고용한 하인도 그녀를 안타까워했다.장소월은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여기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마리아는 가디건을 가져다가 장소월에게 걸쳐 주며 말했다.“오늘 호텔에서 분수쇼가 있으니 꼭 보러 가세요. 방에 계속 틀어박혀 있으면 병에 걸릴 거예요.”장소월은 기운 없이 어두운 밤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팠어요. 마리아, 돌아가셔도 돼요.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요.”“하지만 전 대표님은 제가 당신을 돌봐주길 원해요.”“괜찮아요. 당신을 탓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날 좀 내버려둬요.”“알았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요. 언제든지 연락 주면 올게요.”마리아가 떠난 후 장소월은 불이 켜지지 않은 발코니 소파에 앉아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어둠 속에서 장소월은 환각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는데... 엄마, 나중에 죽으면 나도 별이 될까요?”“소월아, 사람이 죽으면 바람도 될 수 있고 햇빛도 될 수 있는 거란다... 마음으로 원하면 그 사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지금처럼 소월이가 마음속으로 엄마를 그리워할 때면 엄마는 네 곁에 나타날 거야.”“만약 언젠가... 내가 못 버티면 엄마는 날 원망할 거예요?”“너에겐 자유가 있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전연우는 파티에서 돌아와 술냄새가 몸에 배어 있었고, 기성은은 옆에서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코니쪽으로 걸어가자 밖에 홀로 앉아 허공을 바라보
전연우가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을 입고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가까이 걸어왔다. 장소월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바람에 어깨에 둘렀던 카디건이 바닥에 흘러 떨어졌다.“너... 다 들었어?”“전연우, 난 미치지 않았어. 나 정말 엄마를 봤단 말이야.”전연우는 허리를 굽혀 카디건을 줍고는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소파에 걸쳐놓았다. 이어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는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품에 껴안았다.“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가자. 기성은에게 이미 내일 서울로 돌아갈 항공권을 끊으라고 했어.”장소월은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의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가 왜 갑자기 결정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그의 몸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향수 향을 맡았다. 역겨움이 꿈틀거렸지만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그저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침 8시, 전연우가 잠들어있는 그녀를 안고 전용 비행기에 타 있었으니 말이다.장소월은 아직 꿈나라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고 전연우의 다리에 누워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기성은이 말했다.“최고 실력의 심리상담사를 모셨습니다. 오늘 안에 서울에 도착할 겁니다.”“알았어.”무거운 전연우의 대답이 들려왔다.귀가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함에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왜 비행기 안에 있단 말인가.창밖을 바라보니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 송이도 볼 수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앞에 아침 식사를 놓아주었다.“출발한 지 얼마 안 됐고 저녁 6시 전엔 도착할 거야. 일단 아침밥 먹어.”장소월은 의자에 앉아 부드러운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고마워. 하지만 나 지금은 배 안 고파.”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말을 안 들으면 지금 당장 비행기를 착륙시킬 거야.”“알았어.”장소월은 정말이지 입맛이 없었지만 어쩔
엄마의 존재는 그녀에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준 것 같았다.분명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비록 허황하고 거짓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장소월은 엄마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엄마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그리고 그 우유...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장소월의 눈시울이 붉어진 눈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담겨있었다.“하지만 우유 때문에 받은 트라우마가 너무 잔인해. 마주할 수도 없고 마주해본 적도 없어. 그저 말없이 결과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거든. 예전 일어났던 모든 일들, 나 다 기억해.”“전연우, 난 널 죽여버리고 싶어! 매번 널 볼 때마다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어.”장소월이 가감 없이 마음속의 말을 내뱉었지만 전연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눈곱만큼도 위협이 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잘 자.”그는 장소월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방으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성은이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숨이 막힐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기성은이 호흡을 가다듬고 들어가 보고했다.“인시윤 씨가 대표님의 귀국 소식을 아시고는 소월 아가씨를 위해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구와 인테리어 모두 예전 그대로 맞췄다고 합니다.”“그 집으로 보내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해. 나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서울에 도착하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오랜만에 돌아오다 보니 공항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녀가 떠났던 4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그들은 VIP 통로로 공항을 나갔다.서울에도 가을이 찾아와 밤이 되나 꽤나 쌀쌀했다. 차엔 에어컨을 틀고 있어 춥지 않았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본래의 아담했던 건축물은 모두 하늘 높이 솟은 고층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차에 타고 달린 지 어느덧 30분이 지나고 있었다.이 길... 남원 별장으로 가는 건가?
전연우는 가장 낮은 가격으로 회사를 매입했고, 그 필요한 자금은 인씨 가문에서 제공했다.당시 주식 시장은 급격히 요동쳤었다. 서울 제일 명문가인 강씨 가문도 위기를 맞아 휘청거렸으니 인씨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가까스로 연명해나가던 중소기업들은 파산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인씨 가문에도 크나큰 위기가 닥쳤다.2년 전.전연우는 인씨 저택에 가 인경아를 만났었다.인경아는 전연우가 상업계에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씨 집안이 남원 그룹을 지지하기 전에도 그는 아름다운 성과를 냈고 서울 업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했으나 장해진의 충실한 개로 살아온 그는 유혹적인 이익 앞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야심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전연우는 장씨 가문 전체를 집어삼키고 싶어 했다. 이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300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장해진의 양자라는 것을 떠나 솔직히 난 자네를 좋아하네. 인하 그룹에도 자네와 비슷한 출신의 사람들이 많네. 자네 같은 성과를 이루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야. 오늘 난 시윤이의 얼굴을 봐서 한 번 자네를 만나보기로 했네.”인경아가 손을 뻗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게.”그녀는 이어 인시윤을 노려보았다.“넌 네 방에 돌아가. 오늘 일은 이후 다시 따져 물을 거야.”인시윤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전연우를 두둔했다.“엄마... 연우 씨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요? 그 돈 인씨 가문에게도 적지 않은 액수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여기저기 모아보면 충분히 도울 수 있잖아요.”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인경아는 인시윤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어렸을 때부터 인시윤은 엄마의 손에서 애지중지 자랐다. 이렇게 뺨을 맞는 건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극히 드문 일이었다.“너 저놈한
전연우가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담배연기를 뿜어냈다.“과정은 중요하지 않아요.”본래 담배를 피우지 않던 전연우였지만, 그녀가 떠난 이후 니코틴 냄새에 중독되어 버렸다. 끊으려고 해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자네가 황준엽을 죽였나?”인경아의 말에 인시윤도 전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인시윤은 전연우와 처음 접촉했을 때부터 그에게 적잖은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바로 그런 신비로움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한 번 깊숙이 빠져버리니 그다음엔 발을 뺄 수가 없었다.전연우가 말했다.“사모님, 살인을 말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또한... 오늘 전 돈에 대해 논의하려고 온 겁니다.”이건 전연우가 쥐고 있는 최고의 패이기도 했다.인씨 가문은 각종 영역에 손을 뻗고 있다. 유독 석유 분야만 빼고, 말이다. 예전 인씨 가문은 황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했었지만 황준엽이 감옥에 간 탓에 무산되고 말았었다.오늘 전연우가 그 계약서를 자신의 눈앞에 들이밀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전연우는 이미 인경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그가 서울의 주인이 된다면, 그때의 서울에 어떤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그 유전은 가치가 무려 1조 달러를 넘어서는 황씨 가문이 탐내던 먹잇감이다.황씨 가문은 황준엽이 갖고 있던 이 유전을 찾으려다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그런 유전이 전연우의 손에 있었을 줄이야.인경아 또한 그 먹잇감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못해 망설이기 시작했다.장사꾼은 이익 앞에선 거리낄 게 없다는 말에 인경아도 예외는 아니었다.“사모님, 잘 생각해보세요.”인경아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그에게 방어막을 쳤다.“그 좋은 패를 가졌으면서 왜 우리 인씨 가문을 선택했는가? 아무 은행에나 찾아가 담보로 맡긴다면 3000억을 빌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그건 저에게 사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모님, 저와 도박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어요?”“이 일에 위험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