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존재는 그녀에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준 것 같았다.분명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비록 허황하고 거짓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장소월은 엄마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엄마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그리고 그 우유...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장소월의 눈시울이 붉어진 눈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담겨있었다.“하지만 우유 때문에 받은 트라우마가 너무 잔인해. 마주할 수도 없고 마주해본 적도 없어. 그저 말없이 결과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거든. 예전 일어났던 모든 일들, 나 다 기억해.”“전연우, 난 널 죽여버리고 싶어! 매번 널 볼 때마다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어.”장소월이 가감 없이 마음속의 말을 내뱉었지만 전연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눈곱만큼도 위협이 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잘 자.”그는 장소월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방으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성은이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숨이 막힐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기성은이 호흡을 가다듬고 들어가 보고했다.“인시윤 씨가 대표님의 귀국 소식을 아시고는 소월 아가씨를 위해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구와 인테리어 모두 예전 그대로 맞췄다고 합니다.”“그 집으로 보내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해. 나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서울에 도착하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오랜만에 돌아오다 보니 공항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녀가 떠났던 4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그들은 VIP 통로로 공항을 나갔다.서울에도 가을이 찾아와 밤이 되나 꽤나 쌀쌀했다. 차엔 에어컨을 틀고 있어 춥지 않았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본래의 아담했던 건축물은 모두 하늘 높이 솟은 고층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차에 타고 달린 지 어느덧 30분이 지나고 있었다.이 길... 남원 별장으로 가는 건가?
전연우는 가장 낮은 가격으로 회사를 매입했고, 그 필요한 자금은 인씨 가문에서 제공했다.당시 주식 시장은 급격히 요동쳤었다. 서울 제일 명문가인 강씨 가문도 위기를 맞아 휘청거렸으니 인씨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가까스로 연명해나가던 중소기업들은 파산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인씨 가문에도 크나큰 위기가 닥쳤다.2년 전.전연우는 인씨 저택에 가 인경아를 만났었다.인경아는 전연우가 상업계에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씨 집안이 남원 그룹을 지지하기 전에도 그는 아름다운 성과를 냈고 서울 업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했으나 장해진의 충실한 개로 살아온 그는 유혹적인 이익 앞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야심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전연우는 장씨 가문 전체를 집어삼키고 싶어 했다. 이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300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장해진의 양자라는 것을 떠나 솔직히 난 자네를 좋아하네. 인하 그룹에도 자네와 비슷한 출신의 사람들이 많네. 자네 같은 성과를 이루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야. 오늘 난 시윤이의 얼굴을 봐서 한 번 자네를 만나보기로 했네.”인경아가 손을 뻗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게.”그녀는 이어 인시윤을 노려보았다.“넌 네 방에 돌아가. 오늘 일은 이후 다시 따져 물을 거야.”인시윤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전연우를 두둔했다.“엄마... 연우 씨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요? 그 돈 인씨 가문에게도 적지 않은 액수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여기저기 모아보면 충분히 도울 수 있잖아요.”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인경아는 인시윤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어렸을 때부터 인시윤은 엄마의 손에서 애지중지 자랐다. 이렇게 뺨을 맞는 건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극히 드문 일이었다.“너 저놈한
전연우가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담배연기를 뿜어냈다.“과정은 중요하지 않아요.”본래 담배를 피우지 않던 전연우였지만, 그녀가 떠난 이후 니코틴 냄새에 중독되어 버렸다. 끊으려고 해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자네가 황준엽을 죽였나?”인경아의 말에 인시윤도 전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인시윤은 전연우와 처음 접촉했을 때부터 그에게 적잖은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바로 그런 신비로움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한 번 깊숙이 빠져버리니 그다음엔 발을 뺄 수가 없었다.전연우가 말했다.“사모님, 살인을 말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또한... 오늘 전 돈에 대해 논의하려고 온 겁니다.”이건 전연우가 쥐고 있는 최고의 패이기도 했다.인씨 가문은 각종 영역에 손을 뻗고 있다. 유독 석유 분야만 빼고, 말이다. 예전 인씨 가문은 황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했었지만 황준엽이 감옥에 간 탓에 무산되고 말았었다.오늘 전연우가 그 계약서를 자신의 눈앞에 들이밀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전연우는 이미 인경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그가 서울의 주인이 된다면, 그때의 서울에 어떤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그 유전은 가치가 무려 1조 달러를 넘어서는 황씨 가문이 탐내던 먹잇감이다.황씨 가문은 황준엽이 갖고 있던 이 유전을 찾으려다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그런 유전이 전연우의 손에 있었을 줄이야.인경아 또한 그 먹잇감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못해 망설이기 시작했다.장사꾼은 이익 앞에선 거리낄 게 없다는 말에 인경아도 예외는 아니었다.“사모님, 잘 생각해보세요.”인경아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그에게 방어막을 쳤다.“그 좋은 패를 가졌으면서 왜 우리 인씨 가문을 선택했는가? 아무 은행에나 찾아가 담보로 맡긴다면 3000억을 빌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그건 저에게 사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모님, 저와 도박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어요?”“이 일에 위험이
전연우와 인시윤의 약혼식은 그다지 성대하지 않았다.신문에 실리긴 했지만 많은 회사의 파산 소식에 묻히고 말았다. 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전연우는 그 돈으로 가장 낮은 가격으로 부동산과 금융 증권, 그리고 곧 무너질 기업들을 사들였다.경제 위기가 끝나자 모든 회사를 가동했고 성세 그룹을 창립했다. 3년도 채 되지 않아 성세 그룹의 주식 가치는 당시 최고의 기업인 강한 그룹을 뛰어넘었다.3000억... 전연우의 손에서 그 돈은 열 배로 불어났다.단번에 서울에 혜성같이 나타난 신귀족이 된 것이다....장소월은 인시윤이 프랑스에 나타났을 때부터 어딘가 찝찝함을 느꼈었다.참으로 웃기는 노릇이지 않은가!전연우는 인시윤과 약혼까지 했으면서 왜 또...장소월의 존재가 전생의 송시아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그럼 그녀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가정을 깨는 제삼자?또한 인시윤은 전생의 가엾은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장소월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 뒤 방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손발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경련했다.그는 여전히 전생의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장소월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를 듣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귀를 막아버렸다. 단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더러운 관계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역겹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했던 복도에서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은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잠가 버렸다. 이어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뒤 분노에 차올라 탁자 위 장식품을 힘껏 문으로 던졌다.“가! 날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란 말이야!”문 위쪽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그녀의 바람대로 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전연우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이제 더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거야. 우리 둘뿐이야.”장소월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네 말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너무 역겨워. 전연우!”전연우가 그런 방식으로 성세 그룹을 세웠을지는 생각지도 못했
도우미가 말했다.“사모님께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입니다. 모두 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전연우의 날카로운 눈빛에 도우미는 겁에 질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주방에 내려가 모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렸다.4명의 도우미가 바삐 돌아쳐 다시 한 상을 차려냈다.반 그릇 정도의 설탕물을 먹이니 장소월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또 어디 불편한 곳 있어?”장소월은 침묵하다가 30초가 지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네가 날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어.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야. 나 내일 이 집에서 나갈 거야.”전연우가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잖아. 그냥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면 안 돼? 이제 아무도 와서 널 귀찮게 하지 못 할거야. 날 제외하곤 그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할게.”장소월이 말했다.“날 미쳐버리게 하고 싶은 거야? 전연우, 난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어. 난 널 죽일 수도 있단 말이야!”전연우가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너 몸이 회복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줄게.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작업실을 만들어 줄게. 응?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해.”오늘 밤의 전연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평소의 그가 맞는지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아직도 모르겠어? 전연우, 난 죽을 때까지 널 받아들이지 못해! 생판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너와는 함께하지 않아. 남자라면 인시윤의 옆으로 돌아가 아껴주고 사랑해줘. 너에 대한 인시윤의 마음에 상처 주지 말고.”장소월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와 더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미 그녀의 앞날을 모두 결정해 놓았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정해놓은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그의 차가움, 그의 외면, 그의 배신!이 모든 것들은 이미 장소월의 마음속에 날카로운 비수로 꽂혔다.잊으려 노력해본 적도 있지만 익숙한 사람이나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전생에서 당했던 고통이 고스란히 떠
인터넷에선 강한 그룹에 대한 어떠한 소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장 최근 기사도 4년 전의 것이었다.장소월의 의구심은 더 깊어져만 갔다.그녀는 핸드폰을 꼭 잡은 채 불안감에 떨었다. 그저 헛된 불안감이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와 강씨 집안이 인연을 끊고 지낸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길에서 그와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낯선 사람처럼 못 본 척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장소월이 걱정하는 이유는 전연우가 강한 그룹을 해쳤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 당시 강영수가 그의 손에서 남원 그룹을 빼앗고 대표 자리까지 해임했으니, 전연우라면 일찌감치 배로 돌려줬을 것이다.그녀는 전연우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강영수 역시 아무 죄 없는 사람이니 말이다.다시 태어난 송시아와 물불 가리지 않는 전연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울을 완전히 뒤집어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다.전연우는 무엇이든 삼킨면 완벽히 소화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그는 아이패드로 방안 장소월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도우미에게 저녁 식사를 올리라고 분부했다.장소월은 조금 먹고 음식을 치웠다.이곳의 도우미는 그녀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행여 그녀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장소월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복도에서 소리가 흘러들어왔다.“저 여자 대체 누구예요? 사모님같이 성격 좋으신 분이 엄청 크게 화를 냈잖아요.”“저도 몰라요. 대표님이 밖에서 데려온 여자인가 보죠. 아니면 사모님께서도 화내지 않으셨을 거예요.”“대표님도 참, 평소 사모님께서 힘들게 이곳을 관리하고 가구까지 힘들게 하나하나 갖췄는데 모두 다른 여자 좋은 노릇을 하고 말았어요.”“쉿, 조용히 말해요. 아직 안 자요. 들으면 안 되잖아요.”“빨리 내려가죠.”급히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장소월은 멍하니 누워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베개를 흥건히 적셨다.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사모님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다행히도 그림들은 소각되지 않았다. 그 그림 중 일부는 어머니가 그녀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장소월은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2층 안방에 들어갔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녀는 또다시 전연우의 방으로 갔는데 마침내... 그녀는 그 그림들을 찾아냈다. 모두 흰 천으로 덮여 있어 잘 보존되어 있었다.장소월은 손을 떨면서 그림을 만졌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녀가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다.그녀는 이 그림들을 다시 자기 방으로 옮겼고 이 역시 원래 그녀의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문을 나서자마자 하인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이보세요, 이 물건들은 절대 움직이면 안 됩니다.”장소월은 싸늘하게 말했다.“저도 방금 이 물건들은 원래 제 것이라고 말했어요. 제가 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다른 하인도 장소월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제가 보기에 이 사람은 망상증에 걸려서 미친 거 같아요!”“일단 그림을 가져와야 해요.”하인이 앞으로 나서자 검은 슈트를 입은 경호원 두 명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와서 그 하인 두 명을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장소월에게 말했다.“대표님께서 여기 있는 물건은 아가씨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하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아래층으로 끌려갔다.무슨 일인지 물으려고 했는데 이미 해고되었다고 통지받았다.“왜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우리를 해고해요?”경호원 한 명이 차갑게 말했다.“이건 사장님의 결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지만 이 별장은 장가네 것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장가네 아가씨입니다. 앞으로 누가 감히 무례하게 큰 아가씨에게 무례하게 굴면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내에서도... 여러분의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나머지 하인들은 겁에 질려 말하지 못했다.그들은 여기서 몇 년간 일한 하인들이어서 장가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그들이
인정아는 우아한 자태로 비서가 가져온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자네가 장소월이 돌아오자마자 시윤이를 남원별장에서 쫓아냈다고 들었네. 내가 시윤이를 자네한테 맡겼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자네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힘으로 된 것인지 잊으면 안 되지.”전연우는 책상 앞으로 곧장 걸어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사모님께서 한 말씀은 제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배은망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여기에 온 것도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전연우는 자리에 앉아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였다.인정아가 냉소했다.“계속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인씨네 데릴사위로서 이렇게 예의를 몰라서 되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장모님이라고 불러야지!”인정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전연우 앞으로 걸어가 붉은 청첩장을 꺼냈다.“이것은 내가 짠 한 달 뒤 연회 손님 초대 명단이야.”전연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 명단을 집어 들어 펼쳐보니 첫 번째 이름은 장소월이었다.그는 청첩장을 탁 닫았다.“저는 사모님께서 똑똑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인정아의 얼굴빛이 순간 어둡게 변하였다.“자네는 이미 4년 동안이나 질질 끌었어. 지금이라도 그때 한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가 계약을 맺은 것을 잊지 마.”“지금 와서 옛날얘기를 하면 소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계약서가 저에게 아직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인정아는 테이블을 툭 쳤다.“지금 시윤이와 결혼 안 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시윤이 마음은 7년째 자네에게 있어. 개를 키워도 지금이면 주인 말을 잘 따를거야. 어떤 사람이 한 사람에게 7년을 허비하겠는가. 자네가 어떻게 내 귀한 딸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가!”전연우는 다리를 꼬아 담배 하나를 꺼내 피고 흰 안개를 뱉으며 물었다.“사모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인정아는 눈 밑에 한기가 서리며 그를 협박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