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전연우가 결혼식을 준비하던 그 날 말이다.차가 막혀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주시윤은 그녀를 데려다준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공항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서울에 도착하려면 8시간가량 걸린다. 때문에 빨라도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전연우도 장소월의 귀국 소식을 들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장해진이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VIP 전용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장박동은 정상이었으나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장해진의 치료를 맡은 주치의는 서철용이었다.서철용이 차분한 얼굴로 전연우에게 장해진의 상황을 알려주었다.이어 검사 보고서를 쓰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소월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한 거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어.”전연우가 물었다.“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려?”서철용이 웃으며 펜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꼬았다.“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이다. 장해진이 어떻게 되길 원해? 너한테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전연우가 몸을 돌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서철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내가 장씨 집안을 무너뜨리는 걸 너도 바라는 거지? 내 손을 빌려 장씨 집안을 해치우려고?”“하지만 내가 알기론 장씨 집안과 넌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던데.”두 사람 모두 서로를 떠보고 있었다. 다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라 자신의 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상대의 핸들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철용은 확실히 전연우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다.서철용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마. 난 장소월이 아니야.”그가 전연우의 옆을 지나쳐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너한테 진 빚만 청산하고 나면 내 도움을 받는 게 이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원한이 있든 없든 이것만 기억해. 장씨 집안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면
전연우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지만 장소월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은? 왜 혼자 온 거야?”장소월은 머뭇거리며 차에 올라타지 않았다.“장씨 집안의 심각한 일이야. 의부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외부에 새어나가게 해서는 안 돼. 또 너 한 명이 돌아오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와야겠어? 왜 그렇게 오빠를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침략적이고도 소유욕이 가득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본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연우가 직접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약혼식 후 장소월은 전연우와 마주친 적이 없다. 대표직을 박탈당했음에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타!”전연우의 태도가 급속도로 바뀌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에 경고의 눈빛이 번뜩였다.장소월은 조심스럽게 그를 경계하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전연우가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할 수 있어.”전연우의 입꼬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선을 그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머리 잘랐어?”장소월은 애써 덤덤한 척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무심히 말했다.“너무 길어서 잘랐어.”사실 그녀는 그저 건조한 날씨 때문에 머리끝이 갈라져 아주 조금 잘랐을 뿐이다. 전연우가 이토록 세심할 줄이야.그가 이럴수록 장소월은 더더욱 소름이 돋았다.“앞으론 자르지 마.”그가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장소월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간섭하는 거 아니야? 이건 내 머리카락이야. 운전이나 해.”“그래.”전연우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고요한 바다에 집채 같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마냥 그의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였다.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고 공항을 떠났다.이 시간 공항
“그 두 사람으로 부족해?”전연우는 곧 송시아까지 만날지도 모른다.그때도 장소월을 위해 한 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그는 늘 장소월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여기며 달콤한 말로 그녀를 속여왔다.전연우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지금 이 오빠는 소월이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장소월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그가 돌연 손을 뻗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안전벨트는 언제 풀었는지 몸을 기울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깜짝 놀라 당황하는 장소월을 보니 저번 호텔에서 처음 잠자리를 한 후 나른하고 가엾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건 전연우에게도 처음이었다.결계를 한 번 풀어헤치고 남녀 간의 뜨거운 뒤엉킴을 맛보고 나니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원하는 여자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조건은 권력과 부와 지위를 갖는 것이다. 서울에서 높은 자리 하나 꿰차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데에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알아둬. 난 돌아오기 전 이미 영수에게 연락했어. 감히 내 몸에 손을 댄다면 영수가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전연우는 장소월의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또 다른 욕심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예전엔 장소월의 몸을 소유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그럼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안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싫다고 발버둥 치는 그녀를 억지로 눕히는 것보단, 눈앞 이 소녀가 예전처럼 기꺼이 자신에게 마음을 바쳐주길 바랐다.“그럼 어디 한 번 해봐. 나도 어떻게 날 가만히 놔두지 않을지 궁금하니까.”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장소월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손에서 반지
장소월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남원 별장에 돌아갔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말이다.집에 도착한 뒤 전연우는 곧바로 문을 잠갔다.강만옥은 거실 소파에 앉아 유유자적 과일 말랭이를 먹고 있었다.“왔어?”그녀가 인기척을 듣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 앞 경호원에게 막혀버리고 말았다.강만옥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 두 사람 싸웠어? 연우 도련님, 오빠로서 동생을 보듬어줘야죠. 소월아, 넌 동생이니 오빠한테 양보해야 해.”장소월은 도망칠 수 있는 가망이 보이지 않자 포기하며 눈물을 닦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전 아버지 보러 위층에 올라갈게요.”강만옥의 눈빛은 냉담하고도 낯설었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네 아버지는 아직 의식은 있으시니 반응을 하지는 못할 뿐 네 말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되도록 얘기 많이 해. 그럼 빨리 회복하실지도 모르니.”장소월은 고개도 들리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등 뒤에서 강만옥의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느라 수고했어. 내가 삼계탕 만들어놨어. 내가 먹여줄까?”“아이가 뱃속에서 귀찮게 하는 바람에 만드는데 오래 걸렸어.”급히 올라가는 장소월을 보는 강만옥의 얼굴에 장난기가 피어올랐다.“재밌어?”전연우가 그녀를 밀쳤다.“장소월이 돌아오니 정신이 온통 장소월에게 팔려버렸네. 너 계속 이러면 나 질투나.”강만옥이 유혹적인 눈빛으로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또다시 가까이 다가갔다.장소월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도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강만옥이 자신 앞에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장소월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강만옥 배 속의 아이가 아버지의 아이는 맞는지까지 의심되었다.설마... 전연우의 아이는 아니겠지?말도 안 되는 소리다.그들이 아버지 몰래 침대에서 그 짓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드니 뱃속 깊은 곳에서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2층 침
전연우가 성큼 앞으로 걸어가 강제로 그녀를 어깨에 메고 3층으로 올라갔다.“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마!”전연우는 그녀가 소리치든 말든 발로 문을 열어젖히고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고 그녀를 침대에 던져버렸다. 이 침대는 예전 것보다 더 부드럽고 탄성이 있어 몸이 높이 다시 튀어 올랐다. 그녀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져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전원이 꺼져버렸다.새로 산 이 핸드폰은 몇 번을 떨어뜨려도, 물에 들어갔어도 멀쩡히 쓸 수 있었다.전연우가 바닥에서 핸드폰을 줍고는 전원을 켰다.“넌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니 장씨 집안 사람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또다시 다른 사람 집에 간다거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어. 그 중엔 네 파리행도 포함이야.”“전연우, 이 나쁜 자식. 그럼 난 신고할 거야.”장소월은 손쉽게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신고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우습기 그지없었다.전연우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소월이가 말만 잘 들으면 오빤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고는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일찍 자.”“꺼져!”장소월이 그가 키스했던 곳을 힘껏 문지르고는 그를 방에서 밀어낸 뒤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그가 밤중에 몰래 기어들어 와 파렴치한 일을 저지를까 봐 화장대를 옮겨 문을 단단히 막아두었다.전연우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강만옥에겐 심장을 파고드는 가시와도 같았다.“장소월이 돌아온 게 그렇게 좋아?”강만옥은 전연우의 그런 모습을 종래로 본 적이 없다.“내가 장소월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렵지도 않아?”장소월과 강만옥을 대할 때 전연우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전연우는 줄곧 그녀를 더러운 쓰레기 취급하며 조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반면 원수의 자식인 장소월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바꾸었다. 심지어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돌아오게까지 만들었다
장소월은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하고 6시에 깨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몸을 일으키니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요즘 일교차가 큰 데다 어젯밤 창문을 열고 잔 탓에 감기에 걸린 듯하다.거실에 내려가 보니 도우미들이 주방을 청소하고 있었다.금방 청소하기 시작했는지 바닥엔 온통 깨진 유리 조각들로 가득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아가씨.”도우미가 설명했다.“어젯밤 쥐가 휘젓고 간 것 같아요. 연우 도련님께서 세균에 감염될 위험이 있으니 그릇과 접시 모두를 새로 바꾸라고 하셨어요.”장소월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은경애 아주머니는요?”“후원 쪽으로 갔습니다. 아마 지금은 채소를 씻고 있는 중일 겁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불러올까요?”“괜찮아요.”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선반 안에서 약상자를 찾아 두통약 두 알을 먹었다.그녀가 냉장고를 열고 들여다보고는 말했다.“예전 제가 마시던 주스는요?”도우미가 말했다.“도련님께서 주스엔 색소가 첨가되어 있으니 자주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모두 우유로 바꿨어요. 어떤 주스를 마시고 싶으세요? 제가 지금 바로 만들어드릴게요.”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컵에 따뜻한 물을 따랐다. 회사에서 잘리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이런 것까지 관여하는 건가?정말 오지랖도 넓다.아침 8시 반, 장소월은 위층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어 혼자 아침밥을 먹으며 색채 이론에 관한 책을 읽었다.그때, 문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전연우가 들어오고 있었다. 백윤서와 오랜만에 보는 오 아주머니도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장소월의 낯빛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계속 아침을 먹었다.오 아주머니를 장씨 저택에 돌아오게 한 건 아마 전연우의 결정일 것이다. 아버지가 앓아누우셨으니 집안 대소사 모두 전연우 뜻대로 진행된다. 장씨 집안 큰딸은 그저 허울뿐인 이름에 불과하다.장소월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
장소월이 장해진의 방으로 가보니 간병인이 장해진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뭘 드시게 하는 거예요?”도우미가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중풍을 치료하는 약입니다.”장해진은 잠에서 깨어난 듯 보였으나 눈만 뜬 채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그때 돌연 온몸에 경련이 일더니 먹었던 약을 전부 토해냈다.도우미가 급히 약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손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장소월의 눈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나온 도우미의 얼굴 표정이 들어왔다. 약만 토해낸 것이 아니라 전에 먹었던 토사물까지 있었다. 머지않은 거리에 있었던 장소월의 코에도 악취가 흘러들어왔다. 그녀가 손을 뻗어 이불을 거둬보니 침대 시트에 선명한 오줌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도우미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아가씨는 나가 계세요. 제가 어르신에게 옷을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제가 할게요. 아주머니는 가서 한약 한 그릇 더 달여오세요. 약자재 목록도 제게 주시고요.”추미연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 이건 도련님께서 저에게 시키신 일입니다. 아가씨의 말씀에 따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장소월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여긴 전씨의 집이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지금부터 해고예요.”“아가씨에겐 절 해고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계약서에 따르면 마음대로 절 해고시킨다면 3배의 위약금을 지급하셔야 합니다.”“이곳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 돈은 아주머니가 일한 시간을 체크해 이체해 줄게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추미연은 갑작스러운 해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아가씨, 전 도련님께서 데려온 사람이에요. 그분을 제외하곤 아무도 절 쫓아내지 못해요.”“그럼 내가 오빠한테 얘기할게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오빠가 쫓아내면 한 푼도 받지 못할 거예요.”추미연이 씩씩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장소월은 추미연이 전문 간병인이 아닐 거라는 걸 어제 한눈에 알아챘다.전연우가 데려온 사람은 절대 안심하고 둘 수 없다.장소월은 안방 창문을 열고 환
전연우는 위층으로 올라가 안방 문을 열었다.장소월이 샤워를 마친 장해진을 부축해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장해진을 휠체어에 앉힌 뒤 드라이기로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바닥엔 그가 입었던 더럽혀진 옷과 침대 시트가 놓여있었다.머리카락이 다 마르자 장소월은 빗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오늘 날씨가 화창해 아버지에게 햇볕 쪼임을 해드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어느새 문 앞에 전연우가 와있었다. 장소월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장롱에서 담요 하나를 꺼내 아버지의 다리에 덮어주었다.어찌 됐든 그녀는 장해진이 물려준 피가 흐르고 있는 그의 딸이다. 이 점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비록 줄곧 그녀를 계약 결혼의 도구로만 생각했지만 적어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이 가문은 이미 풍비박산해 두 부녀만 남아 서로 의지하고 살고 있다.만약 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신다면 전연우의 타깃은 그녀가 될 것이다.중풍이 좋아졌는지 악화되었는지, 담요 속에 놓여있는 손과 발이 약간 경련했다. 장소월은 바닥에 널브러진 빨랫감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잠시 후 도우미가 가져가 세척할 것이다.전연우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타입이었다. 빨랫감을 치운 뒤 다른 곳을 청소하고 침대 시트를 갈았다. 그녀의 행동은 몇십 차례 반복했던 것처럼 능숙했다.전연우가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너한텐 귀한 집 아가씨보다 도우미가 더 어울리는 것 같네. 소월아, 집엔 도우미가 있어.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하지 않아도 돼.”장소월이 침대를 정리하고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난 어디에서 왔는지 출신도 불분명한 도우미는 믿지 못하겠어. 이제 아버지 간호는 내가 맡을 테니 오빤 신경 쓸 필요 없어.”전연우의 야심과 검은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장소월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또 현혹하려 하다니.“소월이가 효심이 깊구나. 오빠가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전연우는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