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은 빼곡한 일정으로 안배되어있어 그리 쉽지 않았다. 장소월은 매일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잠을 자는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어렵게 얻은 해외 연수 시간을 대부분 수업하는 데에 사용했다.학교를 마치고 나면 늘 강영수와 통화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허 교수님은 자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 경기에 참가하러 나가시는지라 평소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 외엔 만날 수 없었다.장소월은 호텔에 돌아오면 방안에만 박혀 있었다. 가끔씩 국내 소식을 찾아보기도 했다.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돌연 화면에 떠오른 기사가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천 그룹에 관한 내용이었다.기사를 열어보니 선명한 색감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에 인수되다.남천 그룹 대표였던 전연우는 능력 부족이란 이유로 해고당했고, 현재 강한 그룹 기업부 책임자 추강휘가 남천 그룹 지휘봉을 잡았다고 한다.강한 그룹 내부 정보에 따르면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에 합병된 원인은 전임 대표 전연우가 프로젝트 완공 시간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그 후과는 남천 그룹은 200억 원의 손해배상을 떠안았고 책임자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프로젝트를 제때에 완수하기 위해선 강한 그룹 산하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서울시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이 일은 여전히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장소월은 그 기사를 읽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전연우는 해고당했다. 직위를 박탈 당했다는 건 앞으로 장씨 집안 회사인 남천 그룹에 어떤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장소월은 순간 머릿속이 또렷해졌다. 전연우는 아버지가 키운 가장 믿어 의심치 않는 후계자이다.이번 일로 아버지가 받을 충격은 꽤나 클 것이다.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분명 그녀에게 연락해 강영수에게 부탁하라고 할 것이다.하여 연락을 받지 않기 위해 곧바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전연우의 능력이라면 남천 그룹이 아니라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
그녀와 전연우가 결혼식을 준비하던 그 날 말이다.차가 막혀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주시윤은 그녀를 데려다준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공항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서울에 도착하려면 8시간가량 걸린다. 때문에 빨라도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전연우도 장소월의 귀국 소식을 들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장해진이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VIP 전용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장박동은 정상이었으나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장해진의 치료를 맡은 주치의는 서철용이었다.서철용이 차분한 얼굴로 전연우에게 장해진의 상황을 알려주었다.이어 검사 보고서를 쓰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소월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한 거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어.”전연우가 물었다.“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려?”서철용이 웃으며 펜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꼬았다.“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이다. 장해진이 어떻게 되길 원해? 너한테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전연우가 몸을 돌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서철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내가 장씨 집안을 무너뜨리는 걸 너도 바라는 거지? 내 손을 빌려 장씨 집안을 해치우려고?”“하지만 내가 알기론 장씨 집안과 넌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던데.”두 사람 모두 서로를 떠보고 있었다. 다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라 자신의 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상대의 핸들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철용은 확실히 전연우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다.서철용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마. 난 장소월이 아니야.”그가 전연우의 옆을 지나쳐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너한테 진 빚만 청산하고 나면 내 도움을 받는 게 이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원한이 있든 없든 이것만 기억해. 장씨 집안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면
전연우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지만 장소월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은? 왜 혼자 온 거야?”장소월은 머뭇거리며 차에 올라타지 않았다.“장씨 집안의 심각한 일이야. 의부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외부에 새어나가게 해서는 안 돼. 또 너 한 명이 돌아오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와야겠어? 왜 그렇게 오빠를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침략적이고도 소유욕이 가득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본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연우가 직접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약혼식 후 장소월은 전연우와 마주친 적이 없다. 대표직을 박탈당했음에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타!”전연우의 태도가 급속도로 바뀌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에 경고의 눈빛이 번뜩였다.장소월은 조심스럽게 그를 경계하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전연우가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할 수 있어.”전연우의 입꼬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선을 그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머리 잘랐어?”장소월은 애써 덤덤한 척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무심히 말했다.“너무 길어서 잘랐어.”사실 그녀는 그저 건조한 날씨 때문에 머리끝이 갈라져 아주 조금 잘랐을 뿐이다. 전연우가 이토록 세심할 줄이야.그가 이럴수록 장소월은 더더욱 소름이 돋았다.“앞으론 자르지 마.”그가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장소월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간섭하는 거 아니야? 이건 내 머리카락이야. 운전이나 해.”“그래.”전연우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고요한 바다에 집채 같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마냥 그의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였다.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고 공항을 떠났다.이 시간 공항
“그 두 사람으로 부족해?”전연우는 곧 송시아까지 만날지도 모른다.그때도 장소월을 위해 한 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그는 늘 장소월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여기며 달콤한 말로 그녀를 속여왔다.전연우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지금 이 오빠는 소월이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장소월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그가 돌연 손을 뻗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안전벨트는 언제 풀었는지 몸을 기울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깜짝 놀라 당황하는 장소월을 보니 저번 호텔에서 처음 잠자리를 한 후 나른하고 가엾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건 전연우에게도 처음이었다.결계를 한 번 풀어헤치고 남녀 간의 뜨거운 뒤엉킴을 맛보고 나니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원하는 여자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조건은 권력과 부와 지위를 갖는 것이다. 서울에서 높은 자리 하나 꿰차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데에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알아둬. 난 돌아오기 전 이미 영수에게 연락했어. 감히 내 몸에 손을 댄다면 영수가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전연우는 장소월의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또 다른 욕심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예전엔 장소월의 몸을 소유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그럼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안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싫다고 발버둥 치는 그녀를 억지로 눕히는 것보단, 눈앞 이 소녀가 예전처럼 기꺼이 자신에게 마음을 바쳐주길 바랐다.“그럼 어디 한 번 해봐. 나도 어떻게 날 가만히 놔두지 않을지 궁금하니까.”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전연우가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장소월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손에서 반지
장소월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남원 별장에 돌아갔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말이다.집에 도착한 뒤 전연우는 곧바로 문을 잠갔다.강만옥은 거실 소파에 앉아 유유자적 과일 말랭이를 먹고 있었다.“왔어?”그녀가 인기척을 듣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 앞 경호원에게 막혀버리고 말았다.강만옥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 두 사람 싸웠어? 연우 도련님, 오빠로서 동생을 보듬어줘야죠. 소월아, 넌 동생이니 오빠한테 양보해야 해.”장소월은 도망칠 수 있는 가망이 보이지 않자 포기하며 눈물을 닦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전 아버지 보러 위층에 올라갈게요.”강만옥의 눈빛은 냉담하고도 낯설었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네 아버지는 아직 의식은 있으시니 반응을 하지는 못할 뿐 네 말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되도록 얘기 많이 해. 그럼 빨리 회복하실지도 모르니.”장소월은 고개도 들리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등 뒤에서 강만옥의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느라 수고했어. 내가 삼계탕 만들어놨어. 내가 먹여줄까?”“아이가 뱃속에서 귀찮게 하는 바람에 만드는데 오래 걸렸어.”급히 올라가는 장소월을 보는 강만옥의 얼굴에 장난기가 피어올랐다.“재밌어?”전연우가 그녀를 밀쳤다.“장소월이 돌아오니 정신이 온통 장소월에게 팔려버렸네. 너 계속 이러면 나 질투나.”강만옥이 유혹적인 눈빛으로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또다시 가까이 다가갔다.장소월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도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강만옥이 자신 앞에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장소월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강만옥 배 속의 아이가 아버지의 아이는 맞는지까지 의심되었다.설마... 전연우의 아이는 아니겠지?말도 안 되는 소리다.그들이 아버지 몰래 침대에서 그 짓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드니 뱃속 깊은 곳에서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2층 침
전연우가 성큼 앞으로 걸어가 강제로 그녀를 어깨에 메고 3층으로 올라갔다.“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마!”전연우는 그녀가 소리치든 말든 발로 문을 열어젖히고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고 그녀를 침대에 던져버렸다. 이 침대는 예전 것보다 더 부드럽고 탄성이 있어 몸이 높이 다시 튀어 올랐다. 그녀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져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전원이 꺼져버렸다.새로 산 이 핸드폰은 몇 번을 떨어뜨려도, 물에 들어갔어도 멀쩡히 쓸 수 있었다.전연우가 바닥에서 핸드폰을 줍고는 전원을 켰다.“넌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니 장씨 집안 사람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또다시 다른 사람 집에 간다거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어. 그 중엔 네 파리행도 포함이야.”“전연우, 이 나쁜 자식. 그럼 난 신고할 거야.”장소월은 손쉽게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신고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우습기 그지없었다.전연우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소월이가 말만 잘 들으면 오빤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고는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일찍 자.”“꺼져!”장소월이 그가 키스했던 곳을 힘껏 문지르고는 그를 방에서 밀어낸 뒤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그가 밤중에 몰래 기어들어 와 파렴치한 일을 저지를까 봐 화장대를 옮겨 문을 단단히 막아두었다.전연우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강만옥에겐 심장을 파고드는 가시와도 같았다.“장소월이 돌아온 게 그렇게 좋아?”강만옥은 전연우의 그런 모습을 종래로 본 적이 없다.“내가 장소월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렵지도 않아?”장소월과 강만옥을 대할 때 전연우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전연우는 줄곧 그녀를 더러운 쓰레기 취급하며 조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반면 원수의 자식인 장소월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바꾸었다. 심지어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돌아오게까지 만들었다
장소월은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하고 6시에 깨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몸을 일으키니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요즘 일교차가 큰 데다 어젯밤 창문을 열고 잔 탓에 감기에 걸린 듯하다.거실에 내려가 보니 도우미들이 주방을 청소하고 있었다.금방 청소하기 시작했는지 바닥엔 온통 깨진 유리 조각들로 가득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아가씨.”도우미가 설명했다.“어젯밤 쥐가 휘젓고 간 것 같아요. 연우 도련님께서 세균에 감염될 위험이 있으니 그릇과 접시 모두를 새로 바꾸라고 하셨어요.”장소월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은경애 아주머니는요?”“후원 쪽으로 갔습니다. 아마 지금은 채소를 씻고 있는 중일 겁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불러올까요?”“괜찮아요.”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선반 안에서 약상자를 찾아 두통약 두 알을 먹었다.그녀가 냉장고를 열고 들여다보고는 말했다.“예전 제가 마시던 주스는요?”도우미가 말했다.“도련님께서 주스엔 색소가 첨가되어 있으니 자주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모두 우유로 바꿨어요. 어떤 주스를 마시고 싶으세요? 제가 지금 바로 만들어드릴게요.”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컵에 따뜻한 물을 따랐다. 회사에서 잘리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이런 것까지 관여하는 건가?정말 오지랖도 넓다.아침 8시 반, 장소월은 위층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어 혼자 아침밥을 먹으며 색채 이론에 관한 책을 읽었다.그때, 문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전연우가 들어오고 있었다. 백윤서와 오랜만에 보는 오 아주머니도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장소월의 낯빛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계속 아침을 먹었다.오 아주머니를 장씨 저택에 돌아오게 한 건 아마 전연우의 결정일 것이다. 아버지가 앓아누우셨으니 집안 대소사 모두 전연우 뜻대로 진행된다. 장씨 집안 큰딸은 그저 허울뿐인 이름에 불과하다.장소월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
장소월이 장해진의 방으로 가보니 간병인이 장해진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뭘 드시게 하는 거예요?”도우미가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중풍을 치료하는 약입니다.”장해진은 잠에서 깨어난 듯 보였으나 눈만 뜬 채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그때 돌연 온몸에 경련이 일더니 먹었던 약을 전부 토해냈다.도우미가 급히 약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손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장소월의 눈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나온 도우미의 얼굴 표정이 들어왔다. 약만 토해낸 것이 아니라 전에 먹었던 토사물까지 있었다. 머지않은 거리에 있었던 장소월의 코에도 악취가 흘러들어왔다. 그녀가 손을 뻗어 이불을 거둬보니 침대 시트에 선명한 오줌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도우미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아가씨는 나가 계세요. 제가 어르신에게 옷을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제가 할게요. 아주머니는 가서 한약 한 그릇 더 달여오세요. 약자재 목록도 제게 주시고요.”추미연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 이건 도련님께서 저에게 시키신 일입니다. 아가씨의 말씀에 따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장소월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여긴 전씨의 집이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지금부터 해고예요.”“아가씨에겐 절 해고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계약서에 따르면 마음대로 절 해고시킨다면 3배의 위약금을 지급하셔야 합니다.”“이곳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 돈은 아주머니가 일한 시간을 체크해 이체해 줄게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추미연은 갑작스러운 해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아가씨, 전 도련님께서 데려온 사람이에요. 그분을 제외하곤 아무도 절 쫓아내지 못해요.”“그럼 내가 오빠한테 얘기할게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오빠가 쫓아내면 한 푼도 받지 못할 거예요.”추미연이 씩씩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장소월은 추미연이 전문 간병인이 아닐 거라는 걸 어제 한눈에 알아챘다.전연우가 데려온 사람은 절대 안심하고 둘 수 없다.장소월은 안방 창문을 열고 환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