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덤덤히 말했다.“기성은, 눈앞의 것보단 먼 미래의 이익이 더 중요한 거야. 지금 이 결정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야.”“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내 지시대로 해.”전연우가 서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그의 앞으로 밀었다.“네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이겁니까?”봉투를 열어본 기성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회사 설립 신청서요?”전연우가 말했다.“맞아. 남천이 내 손에 있으면 언젠가는 망가지고 말아. 누군가 날 대신해 해줬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야. 넌 해고된 남천 그룹 직원을 다시 모아.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돌아오길 원하는 직원한테는 원래 월급의 20퍼센트를 인상해줘.”기성은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하지만 자금은 어떻게 해결합니까?”“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네.”전연우는 이미 황준엽의 손에서 제2의 남천을 일으킬 자금을 확보했다.예전 전연우는 확실히 걱정했었다. 남천이 그의 손에서 무너진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걸고 그에게 맞설 테니 말이다. 전연우도 그녀에게 강제적인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다.이제 그의 목표는 명확하다. 어떤 일은 그가 직접 할 필요가 없다.기성은은 서재에서 나간 뒤 복도에서 장소월과 마주쳤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물 한 잔을 들고 안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장해진이 잠들자 그녀는 옆에 앉아 중풍 환자를 간호하는 법에 대한 서적을 읽었다.그의 현재 상태로 보아 빠른 시일 내에 파리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그녀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방치하고 떠난다면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만약 장해진마저 떠난다면 그녀는 정말 엄마, 아빠가 없는 고아가 된다.허이준은 교수님으로부터 그녀의 귀국 사실을 들었다. 그는 장소월에게 장해진과 비슷한 환자를 치료하는 한의사를 알고 있으니 연락을 해보라는 문자를 보냈다.장소월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고마워. 수고해줘.」「고맙
강혁은 수술을 마치고 의식을 되찾은 뒤 곧바로 강씨 저택에 옮겨졌다.아이는 깨어나자마자 울며불며 엄마를 찾아댔다. 태어났을 때부터 김남주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도우미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약은 물론이고 먹은 음식물까지 모두 토해냈고 어느 날 밤엔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이 일을 알게 된 노부인은 강영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남주를 데려왔다.그제야 아이는 안정을 되찾았다.강씨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이가 괴로워하니, 노부인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의사가 집에 와 살펴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저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울어 입안에 염증이 생겨 피가 난 탓에 피를 토했다고 오해한 것이다.아이의 회복능력은 아주 빨랐다. 며칠이 지나니 침대에서도 내려올 수 있었다. 김남주도 최근 며칠 동안은 편안히 강씨 저택에서 아이를 보살폈다.강혁은 잔뜩 신나 거실에서 비행기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고 김남주는 약 그릇을 든 채 그의 엉덩이를 따라다니고 있었다.도우미가 과일을 썰어놓은 접시를 들고 소파로 다가왔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발견했고 언뜻 보니 아직 통화 중이었다. 도우미가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웠을 땐 이미 전화가 꺼져 있었다. 하지만 도우미는 상대방의 이름을 보았다.“도련님, 핸드폰이 떨어졌어요. 제가 보니...”“아!”김남주가 소리를 지르며 도우미의 말을 끊어버렸다.강영수는 바닥에 넘어진 강혁을 살피고 있었다. 김남주는 아이를 안고 잔소리를 했다.“엄마가 말했잖아. 바닥이 미끄러우니 뛰지 말라고.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치면 어쩌려고.”“어디 봐. 아픈 곳 없어?”김남주는 넘어지는 바람에 벌겋게 부어오른 강혁의 손바닥을 호호 불어주었다.“혁이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그가 배시시 웃으며 강영수에게로 달려가 무릎에 앉았다.“아빠, 뭘 보시는 거예요?”강영수는 조금 전 도우미가 주워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듯했다.그때 오부연이 들어왔다
그들 사이의 일은 이제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만약 강영수가 장소월을 선택한다면, 두 사람 사이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만약 아이를 선택한다면, 장소월이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감남주는 당연히 장소월이 자발적으로 물러서기를 원했다. 강영수와 장소월 사이에 아무리 깊은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녀가 낳은 아이보다 못할 것이다.강영수가 다시 전화를 걸자, 통화는 이내 연결되었다.하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영수야? 무슨 일 있어?”장소월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낌새가 없었고, 강영수는 그제야 머뭇거리며 떠보듯 입을 열었다.“방금 실수로 너한테 전화를 걸었어...”“알아.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나서 그냥 끊었어. 안 그래도 너한테 다시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나 서울로 돌아왔어. 아버지가 아프셔서, 내가 집에서 며칠 돌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너한테 미리 얘기 못했어!”강영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내가 지금 너한테 갈게. 아버님 많이 아프셔? 내가 의사 불러줄게.”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아직은 잘 몰라. 이미 한의사 불렀어, 내일 오기로 했으니까 괜찮아. 나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그래, 내일 봐.”휴대폰 속에서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장소월은 비로소 대답했다.“응.”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장소월은 하루 종일 장해진의 곁을 지키며,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보살폈다. 오늘 방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의 옷장 서랍 아래에서 사진첩을 발견했다.그녀가 사진첩을 열어보니 낯이 익지만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전부 자애로운 면상을 가졌지만, 사실 모두 한때 조직원이었던 지하 세계 거물들이었다. 평소에 외톨이처럼 보이던 장해진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툼한 사진첩 속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장소월은 조금 실망했다.이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소월 아가씨... 저녁 식사 하세요.”장소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오 아주머니를
“윤서 넌 일단 나가 있어.”장소월도 차갑게 입을 열었다.“모두 나가세요. 아버지 휴식하셔야 하니 여기서 방해하지 마세요.”장소월은 몸을 돌려 외면했고, 그들의 연기를 지켜볼 기분도 아니었다.“소월 아가씨!”오 아주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애틋한 눈빛에는 슬픔이 잠겼다. 마치 장소월이 그녀에게 잘못하여, 자신이 악랄한 악당으로 변한 듯이 말이다.“나가요!”장소월은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백윤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아주머니, 일단 나가세요.”오 아주머니는 백윤서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갔고, 전연우가 문을 닫았다. 백윤서는 장소월과 오 아주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줄곧 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던 두 사람은 이제 원수에 가까웠다.“오빠, 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백윤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남자는 차갑고 음산한 눈빛으로 오 아주머니를 주시했다.“앞으로 제 허락 없이 함부로 소월이 찾아오지 마세요. 이 집안에 계속 남고 싶다면 아주머니가 해야 할 일만 하세요.”오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전 남은 평생 소월 아가씨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장씨 가문에 남을 거예요.”백윤서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아주머니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오빠, 소월이랑 아주머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오 아주머니가 입원해서부터 백윤서는 이상함을 느꼈다. 오 아주머니가 그렇게 오랫동안 입원해있으면서 장소월은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고, 그날 병원 복도에서도 장소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아주머니를 외면하고 떠났다.“윤서야, 이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시간이 늦었어. 내가 아파트로 데려다줄게.”“나 안 가요. 오빠가 여기 있으면 나도 여기 있을래요. 오빠... 나 혼자 두지 마요.”백윤서는 가련한 얼굴로 전연우의 팔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단호한 전연우였다.“지금 상황에서 네가 여기
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시종일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볼 일이 남았어?”“장씨 가문에는 하인이 많아. 너만 아버지를 돌봐줄 수 있는 건 아니야.”“맞아, 모두 네 사람이잖아. 아버지가 왜 이렇게 됐는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 이 상황에서 내가 널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장소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이번에 아버지가 버틸 수 있든 없든 간에,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할 거야. 아무도 너랑 장씨 가문 안 뺏어, 곧 네 것이 되겠지.”장소월은 힘껏 그의 손에서 벗어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장해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 발짝 들어서자 장소월의 허리춤에 그의 손이 나타났다.손에 들고 있던 물건은 모두 땅에 떨어졌고, 전연우는 그녀를 메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전연우의 동작은 거칠었고 또 신속했다.“그러니 이제 소월이는 오빠 말 더 잘 들어야겠지?”장소월은 그에 의해 벽에 밀쳐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맹수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의 몸에서는 강한 호르몬 냄새가 났다. 장소월은 뜨거운 불길이 자신을 태우려고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전연우의 입술이 다가오자, 장소월은 고개를 홱 돌렸다.“너 미워하게 만들지 마.”“오빠가 동생 몸을 탐했다는 소문이 나면 서울에서 계속 얼굴 들고 살 수 있겠어?”“난 영수의 여자라는 거 잊지 마.”전연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이제 오빠를 협박할 줄도 아네?”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는 파도가 일렁였다.“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장소월은 언제나 기가 죽었고, 목소리도 떨렸다.남자는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더니,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소월이는 아직 오빠를 몰라.”그는 갑자기 포악해지더니,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조르고 눈빛도 무서워졌다.“난 내가
다가오는 여자를 거절하지 않는 전연우가, 장소월의 몸에 손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여자와 침대에 올랐는지는 모르는 일이다.그런 전연우을 하찮게 여기면서, 장소월은 자기 자신도 더럽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애초에 모르는 사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래층에서도 인기척이 들렸어. 연우 또 소월이 괴롭히는 거야?”강만옥의 하늘하늘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웃으며 전연우 곁으로 걸어갔다.“왜 어린 애를 이 지경까지 몰아세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찾아오지.”남자를 바라보는 강만옥의 눈빛에는 애틋함과 끈적함이 가득했다. 바보라도 둘 사이에 은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나가! 미안하지만 여기는 내 방이야.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든 이 방에서 나가줘.”장소월은 손에 있던 커터칼을 내려놓았지만 하얀 목에는 안타깝게도 상처가 났고, 피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눈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이미 극도로 뒤틀린 관계들은 불분명하고 서로 얽혀 있었다. 이 집은 이미 썩어빠진 늪지였다. 모두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지.“소월아, 이 칼 함부로 갖고 놀면 안 돼.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강만옥은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는 듯,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두 사람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 이 방에서 둘이 뭘 하든 마음대로 해.”두 사람만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장소월은 어디에 있든 상관없었다.장소월이 전연우의 곁을 지날 때, 남자가 손을 뻗어 잡으려 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칼로 방어했다. 장소월이 진짜 자신을 공격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전연우는 손등을 긁히고 말았다.장소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진짜 내 몸에 손대면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이었다.전연우는 눈빛이 차가워졌고, 이미 멀리 도망친 장소월을 보며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그리고, 강만옥의 뺨을 짝 때렸다!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장소월은 아침 8시 30분에 일어났고, 경호원들은 밖에서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실에서 하인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쳤다. 장소월이 현관에 들어갔을 때, 위층에서 쨍그랑하고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전연우는 소파에 앉아 경제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거기 서, 아침 먹고 올라가.”부엌에서 바삐 돌아치던 오 아주머니도 장소월이 온 것을 눈치챘다. 식탁의 음식들은 확실히 풍부했다. 모두 장소월이 전에 즐겨 먹던 음식들이었다.“고맙지만, 난 이미 옆집에서 국수 먹고 왔어.”탁하는 소리와 함께, 전연우는 신문을 덮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강한 기세를 풍기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앞으로 저녁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장소월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복도의 손잡이를 잡고 걸어 올라가더니 다시 멈춰 서서 말했다.“앞으로 음식은 제가 직접 할 테니 따로 준비하지 말아 주세요. 음식에 더러운 약이라도 있을까 봐 무서워요.”쨍그랑, 주방에서 식판을 준비하던 오귀화는 실수로 손에 쥔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30분 후, 예약한 한의사가 제시간에 별장에 도착했다.장소월은 전화를 받고 직접 내려갔다.상대방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80대 노인이었다. 손에 의료 상자를 들고 있었고, 장소월이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자, 노인은 거절했다.“이 약상자는 십 킬로가 넘어요. 젊은 아가씨가 들기 어려워요. 어서 환자분에게 안내해주시죠.”“네.”장소월은 의사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의사가 장해진에게 진맥을 보고, 또 침을 놓아주니, 손발 경련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선생님, 아버지 어떠세요? 언제쯤 좋아지실까요?”“기혈이 약하고, 간과 신장도 많이 쇠약해요. 이건 평소 식습관 때문이에요. 게다가 경맥폐색 증상도 있어 방금 침을 놓았어요. 제 처방에 따라 약을 마시는 것 외에, 따로 제가 혈자리 지도를 드리죠. 환자의 몇몇 혈자리를
장소월은 의사가 알려준 대로 뒤뜰에서 한 시간 넘게 약을 달이느라 바빴다.이때, 하인이 다가왔다.“아가씨, 저희가 할게요. 이런 일은 아랫것들이 해야죠, 어떻게 아가씨가 직접 나서요?”“전 괜찮으니까, 다들 가서 일 보세요.”또다른 하인이 다가오더니 장소월에게 말했다.“아가씨, 강 대표님 오셨습니다. 도련님께서 맞이하고 계세요.”“알겠어요. 바로 갈게요.”약을 다 달인 후, 장소월은 약을 들고 아래층이 아닌 위층으로 향했다. 하인을 불러 강영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방 탁자 위에는 그들이 약혼할 때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의 이젤은 흰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원래 강영수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날 약혼연회에 강영수가 없어서 장소월은 도로 가져왔다.강영수는 그녀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소월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장소월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여자의 체향을 맡았다.“미안해, 회사에 일이 있어서 너한테 못 갔어. 이번에는 언제 돌아갈 거야? 내가 곁에 있어 줄게.”장소월은 몸을 돌려 그의 품에서 나오더니,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앞으로 파리 못 갈 것 같아. 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에서 돌봐야 해. 의사 선생님이 3개월 안에 회복하실 거라 그랬어.”강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장씨 가문에 하인이 이렇게 많은데, 네가 왜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해? 그림 배우는 건 네가 늘 꿈꾸던 일이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아버님을 병원에 보내고, 강씨 가문 사람들이 돌봐도 돼.”장소월은 조용히 그를 보더니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당황함이 비쳤다.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왜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장소월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부탁할게.”“바보야, 우리는 이제 한 가족이야. 나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네 아버지는 곧 내 아버지니까, 내가 당연히 돌봐야지.”강영수는 곧 사람을 불러 장해진을 강씨 가문이 투자한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