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의사가 알려준 대로 뒤뜰에서 한 시간 넘게 약을 달이느라 바빴다.이때, 하인이 다가왔다.“아가씨, 저희가 할게요. 이런 일은 아랫것들이 해야죠, 어떻게 아가씨가 직접 나서요?”“전 괜찮으니까, 다들 가서 일 보세요.”또다른 하인이 다가오더니 장소월에게 말했다.“아가씨, 강 대표님 오셨습니다. 도련님께서 맞이하고 계세요.”“알겠어요. 바로 갈게요.”약을 다 달인 후, 장소월은 약을 들고 아래층이 아닌 위층으로 향했다. 하인을 불러 강영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방 탁자 위에는 그들이 약혼할 때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의 이젤은 흰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원래 강영수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날 약혼연회에 강영수가 없어서 장소월은 도로 가져왔다.강영수는 그녀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소월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장소월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여자의 체향을 맡았다.“미안해, 회사에 일이 있어서 너한테 못 갔어. 이번에는 언제 돌아갈 거야? 내가 곁에 있어 줄게.”장소월은 몸을 돌려 그의 품에서 나오더니,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앞으로 파리 못 갈 것 같아. 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에서 돌봐야 해. 의사 선생님이 3개월 안에 회복하실 거라 그랬어.”강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장씨 가문에 하인이 이렇게 많은데, 네가 왜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해? 그림 배우는 건 네가 늘 꿈꾸던 일이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아버님을 병원에 보내고, 강씨 가문 사람들이 돌봐도 돼.”장소월은 조용히 그를 보더니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당황함이 비쳤다.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왜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장소월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부탁할게.”“바보야, 우리는 이제 한 가족이야. 나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네 아버지는 곧 내 아버지니까, 내가 당연히 돌봐야지.”강영수는 곧 사람을 불러 장해진을 강씨 가문이 투자한
“조금 전에요. 지금 나가시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네, 감사합니다.”강영수는 의자 등받이의 양복을 집어 들고 곧바로 쫓아갔다.입구에는 오가는 차량만 있을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졌다는 알림음만 돌아왔다.강영수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사실, 강영수가 뒤돌아본다면, 장소월이 그의 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그는 장소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줘.」「진봉에게 파리로 가는 티켓 예약하라고 할게. 진봉이 널 공항으로 데려다줄 거야.」메시지를 보낸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에 올라 액셀을 밟고 떠났다.휴대폰을 들고 있는 장소월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더니 손끝이 하얗게 변했고, 가슴의 통증이 일파만파 퍼졌다.사실 강영수가 전화를 받으러 갔을 때, 장소월은 그를 몰래 따라갔고, 통화내용을 모두 들었다.지금 그와 약혼을 한 사이지만, 장소월은 자신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개입한 제삼자 같았다.김남주의 등장과, 그들 사이의 과거는 전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아이는?장소월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어쩐지, 전연우가 그녀가 끼고 있던 약혼반지를 버리더라니,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장소월은 마치 바늘에 찔린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고 초췌한 모습으로 떠났다.‘아버지가 깨어나면, 마지막으로 도와달라고 해야겠어. 그럼 앞으로... 영수와 인연을 끊을 수 있어.’장소월은 매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들고는 강가로 향했다.이 시간에 산책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장소월은 허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작업실에 있던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술기운이 섞인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이준아, 너 티켓 예매할 줄 알아?”그녀의 말투는 조금 이상했다.“무슨 일 있어?”“아니, 아버지는 이미 영수가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보살펴주고
봄바람이 불자, 소녀의 체향과 술 냄새가 뒤엉켜 스며들었다.남자는 강한 힘으로 땅바닥의 여자를 잡아당겼다. 장소월이 똑바로 서지 못하고 넘어지려 하자,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얇은 옷감 사이로 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전연우는 그녀가 들고 있는 맥주를 빼앗아 보더니 말했다.“한 캔 마시고 이렇게 취한 거야? 주량도 그대로고, 머리도 여전히 둔하네.”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마. 원한다면 줄게. 좋게 말하면 될 것을 왜 욕하고 난리야?”장소월은 술에 취해 그를 밀치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쪽 팔걸이를 짚으며 계단을 올랐고, 나무 의자에 앉아 두 발을 웅크리고는 치마를 정리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무슨 일이든 마음속에 담아두는 스타일이었다. 술에 취했어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가로등 아래, 짙은 색 캐주얼 차림의 전연우의 큰 그림자가 여자의 연약한 몸을 감쌌다.“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을 거야? 집에 안 가?”한참 후에야, 장소월의 우울한 목소리가 들렸다.“나 집이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절대 날 내버려 두지 않으실 텐데...”전연우는 그녀와 함께 의자에 앉았다. 보기 드물게 인내심이 강한 모습이었다. 장소월은 남은 맥주를 마시고 나니 제대로 취기가 올랐다.지금 벌써 11시가 되어가고 있으니, 공원 호수 주변은 이미 텅텅 비었다.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조수석에 앉혔다. 만취한 장소월은 절대 술주정을 부리지 않았고 조용히 잠을 잤다.예전의 장소월은 아무리 오만방자하게 굴었어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밖에서 취하는 일이 없었다. 두 번의 인생을 통틀어 밖에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전연우가 손을 빼려는데, 여자가 갑자기 그의 옷 소매를 잡았다. 장소월은 갑자기 고개를 돌
장소월은 몸을 비틀며 울음소리를 냈다.전연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쇠사슬에서 빠져나온 짐승처럼 하체의 금속 지퍼를 내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긴 다리를 들어 올려 미친 듯이 입을 맞추었다.장소월은 아랫도리에 뭔가가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순간 눈이 맑아지더니, 괴로워서 아랫배를 쭉 내밀었다.‘전연우? 왜 이 인간이?’“윽!”그 따끔거리는 느낌은 곧 사라졌고, 장소월은 숨 막히는 키스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알코올은 뇌를 마비시켰고, 그녀는 정신이 혼미했다. 온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가벼웠다.끈적끈적한 물소리, 거친 동작에 차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그만해!”장소월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헛수고였다. 마치 차가운 물 위에 뜬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익사할 것 같았다.마지막 물결이 밀려오자 장소월은 기절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낯선 환경이었다.그녀의 앞에는 남자의 잘생긴 옆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의 목에는 몇 가닥의 스크래치 자국이 있었고, 그는 주름진 옷을 입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잠을 설친 듯했다.장소월은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라 그를 밀쳐냈다.“어떻게...”그녀가 허전한 앞가슴을 만져보니 속옷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눈앞의 남자를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들어 전연우의 얼굴을 때렸다.“전연우 이 짐승 같은 놈. 변태!”“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해? 난 네 동생이잖아!”전연우는 옷 단추를 천천히 잠그며 말했다.“어젯밤에는 네가 원한 거야. 기억 안 나?”장소월은 미친 듯이 그의 멱살을 잡았고, 붉어진 눈가에는 눈물이 넘쳐 흘렀다. 눈앞의 사람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럴 리가... 분명 네가 강요한 거야.”“내가 어떻게...”전연우는 단추를 잠그고 나서, 그녀의 손을 잡고는 한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저기 카메라도 있어. 어젯밤에 누가 간절히 원했는지 한번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는 신발도 없이, 발바닥이 날카로운 돌에 찢겨도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가 있는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이곳은 남원별장 외곽에 있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위에 나무 외에 황량한 땅 밖에 없었고, 차가 지나갈 수 없는 넓은 도로가 있었다.산봉우리의 끝에 있는 절벽에는 울타리를 만들지 않아, 전연우는 차를 절벽 끝에 세워놓았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었다.아침 햇살이 장소월을 비추었지만, 그녀는 전혀 따듯함을 느끼지 못했고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발밑의 상처도 놀라울 정도였다.“이렇게 된 이상 그냥 받아들여. 소월아, 이제 오빠 곁에 있어.”언제부터인지, 전연우도 그녀의 뒤를 한발짝 한발짝 따라오고 있었다.“아니야. 틀렸어!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장소월은 머리를 움켜쥐고 멘탈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빨갛게 달아오른 두 눈으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우리는 이러면 안 돼.”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네 주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잖아. 네 복수의 발정 도구로 쓰이고 싶지 않아. 너랑 엮이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전생에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지만, 넌 그저 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로 여겼어. 그럼 이번 생에는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널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나한테 꼭 이래야만 했어? 대체 왜!”전연우는 그녀가 미친 듯이 내뱉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지만 조금은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지더니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현재로서는 두 사람 말고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누군가 뭐라고 하지 않았다면 장소월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장소월은 그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은 흐리멍덩해서 몇 번이나 깨어났고, 매번
“제발, 아이를 돌려줘...”장소월은 울면서 잠꼬대를 했다.남자는 그녀를 응시하면서 의아해서 물었다.“무슨 아이를 말하는 거야?”“제발, 송시아, 부탁이야... 전연우에게 내 아이를 돌려달라고 해줘. 아이는 죽으면 안 돼.”송시아?전연우는 묵묵히 그 이름을 기억했다.그는 새 회사 일을 처리하면서 의식을 잃은 장소월을 돌봤다.백윤서가 왔을 때, 그는 아주 초췌한 모습이었다.그녀는 어떻게 전연우를 상대해야 할지 몰랐고,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을 바라봤다.“계속 소월이 돌봐줄 생각이에요?”전연우는 손에 있는 서류들을 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많이 화가 나 있었다.“어젯밤에 어디 갔었어? 성은이가 너 어젯밤에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던데?”“오빠 마음에 아직도 제가 있기는 해요? 제가 어디 가서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잖아요.”“...”전연우는 하던 일을 멈추더니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심리치료가 너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 것 같군.”요즘 백윤서가 밖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제외하고, 상담소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었다.만만치 않은 상담비용이었지만, 전연우는 그녀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내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한 번도 나랑 병원에 간 적 없잖아요.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오빠 때문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요.”“윤서야, 오빠는 너에게 뭐든 제일 좋은 것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물질적인 것 빼고, 오빠가 줄 수 있는 건 없어.”“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요. 소월이만 없으면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전연우는 노트를 덮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방에 가서 쉬어. 소월이 지금 아파.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집에 하인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오빠가 돌봐줘요? 그리고... 오빠... 소월이만 아픈 게 아니라 나도 아프잖아요...”전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방에서 끌어냈다.“너 일단 진정하고 다시 얘기해.”
악몽은 계속되었다. 꿈에서 그녀는 전생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시 한번 완전히 경험하게 되었다.온몸이 땀범벅이었고, 잠옷을 흠뻑 적셨다. 전연우는 해열용 알코올로 그녀의 몸을 계속 닦아줬고, 잠옷도 몇 벌이나 바꿨는지 모른다.서울에서 이보다 더 연약하고 보살피기 어려운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전연우는 한 번 또 한 번 장소월의 입에서 아이를 지운다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키워드를 종합해보면, 그녀가 꿈에서 그들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울면서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전연우는 차분히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웠지만, 마음속의 우울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장소월은 그렇게 아이를 원할까?하지만 전연우는 아무리 그녀의 몸을 탐해도, 심지어 그녀의 몸속에 자신의 씨앗을 남겨도, 장소월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설사 아이가 생겼다 해도, 전연우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이 아이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직접 심은 열매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법이다.메일함에서 알림음이 울리고, 도착한 메일을 확인해보니 장소월의 입에서 존재한 송시아라는 사람에 관한 정보였다.뒤이어 기성은이 전화를 걸어왔다.“구체적인 정보는 못 알아냈어요. 전국에 송시아라는 동명 인물만 300명 이상입니다. 그 사람들의 모든 자료는 이미 메일로 보냈습니다만 대표님께서 찾으시는 분이 그 안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전연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됐어. 급하지 않아. 새 회사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분부하신 대로 진행 중이고, 남천 그룹의 적지 않은 고참직원들도 합류하고 싶어 해요. 대표님만 돌아오시면 됩니다.”“알겠어.”전연우는 다른 일들을 분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그가 메일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지훈이 메시지를 보냈다.「윤서 씨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지금 병원에서 응급수술 중입니다.」메시지를 확인한 전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차를 몰고 별장을 떠났다.오귀화에게
“저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묵묵히 아가씨 곁에 있고 싶어요. 아가씨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지켜봐야, 제가 죽어도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아가씨 깨나면 바로 드시게 제가 가서 죽을 데워 올게요.”조용한 방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나자, 장소월은 눈을 떴다. 사실 전연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깨어났다. 장소월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버지의 악행을 들은 것이다.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사실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그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잘못하지 않았지만, 장씨 성을 가진 이상 그 보복들은 그녀에게도 가해질 것이다.그래서, 장해진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억울하게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다.남을 탓할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오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한 모든 행동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죽을 데워서 방으로 가져오려던 오 아주머니는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묵묵히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돌아서더니 다른 하인에게 죽을 방으로 들여보내도록 했다.“아가씨... 하루종일 아프셨는데 좀 드세요.”“주세요.”하인이 빈 그릇을 들고 방을 나오는 것을 보자, 오 아주머니는 흡족하게 방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밤새도록 생각했지만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몰래 짐을 싸서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갔다.경호원은 장소월을 보자마자 말했다.“아가씨, 큰 도련님께서 아가씨 전화를 받지 못하셔서 걱정하고 계세요.”장소월은 덤덤하게 대답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를 내보내고 아버지와 단둘이 병실에 남았다.장해진은 이미 깨어났지만 아직 말도 못 하고, 거동도 불편했다.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용기를 내어 말하려 했지만 모두 가슴에 막히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영수와 결혼 취소할 생각이라고 말하러 왔어요.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
“의사 선생님... 선생님...” 송시아는 가득 흥분한 채 의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전연우를 진찰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환자분 상처는 아주 잘 아물고 있습니다. 아까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반응이 있었다면, 신경이 스스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곧, 혹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송시아는 환희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좋은 소식이었다. 송시아는 전연우의 침대에 앉아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조금 묻히고는 그의 옷을 걷고 이미 아문 상처에 발랐다. “연우 씨, 이 팔찌 장소월이 준 거 맞지? 서철용이 당신에게 한 말 전부 다 들은 거야?” “당신도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장소월을 보고 싶겠지?” “당신들은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당신의 흉터... 없어지지 않도록 몸에 남겨둬야겠어. 이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잊지 못하게 말이야.” 송시아가 그에게 쓰는 연고는 최고급이라 시중에서 개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흉터 제거뿐 아니라 상처 회복도 빠르게 해준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연고를 닦아냈다. 그때 송시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송 대표님, 그 팔찌는 비슷한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서 파는 팔찌는 거의 다 흡사한 유형이거든요. 완전히 똑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연결되었다. 송시아가 말했다. “전연우는 곧 깨어날 거예요. 이직 준비는 다 됐어요? 이랑 씨 마음만 굳건하다면, 내가 꼭 민아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이 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신씨 집안은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신이랑이 물었다. “성세 그룹 주식은 왜 팔았어요? 뭘 하려는 거죠?” 송시아는 한쪽 팔을 가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전 나중에 갈 거예요. 거긴 아주 안전한 곳이에요.” 도우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모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군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배은란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민용 씨, 나 혼자 가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 응?” 서철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끝나면 금방 너한테 갈게. 네가 가는 곳은 내 스승님과 사모님의 댁이야. 그분들은 평생을 의학에 헌신하셨고, 자녀가 없어서 날 친아들처럼 여기셨어. 너에게도 잘해주실 테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분들은 분명 너 좋아하실 거야.” 배은란은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 “그럼 꼭 빨리 나한테 와야 해.” “그래.” 점차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서철용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배은란, 이건 내가 너한테 진 빚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땐 진짜 서민용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게. 완전한... 서민용을 너에게 돌려줄게!’ 그날 밤, 서민용은 분명히 죽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서철용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 다만, 그의 상황은 아직도 좋지 않다. 여전히 스승님의 병원에 누워 연명 치료만 받고 있을 뿐이다. 전연우 외에, 지금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바로 서민용이다...배은란이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서철용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배은란은 정신과 약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기억도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반산 별장. 송시아는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쯧,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서 형수를 얻
전연우가 어떻게 성세 그룹 주식 매각을 허락할 수 있지? 혹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파도가 넘실거리며 해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해초와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머리를 질근 묶고는 조개껍데기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손에 들고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장소월 앞으로 걸어와 유창한 러시아어를 말했다. 이곳은 외딴곳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예쁜 언니, 이 목걸이 선물로 줄게요.” 전설에 따르면, 예전 이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는데, 신의 딸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찾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바다가 되어 이 해역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에선 조개껍데기와 소라를 신의 은총을 받은 물건이라고 믿고 있다. 이걸로 만든 장신구를 선물하면 상대방이 신의 축복과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외에 남녀가 서로에게 프러포즈 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휴대폰에 서철용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번에 보낸 팔찌, 전연우가 아주 좋아하네요. 수고했어요.] 장소월은 그의 상황을 묻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 메시지를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시간이 꽤 오래 흘렀는데도 전연우에 대한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유일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유튜브 계정에서 올린 결혼식 다음 날 그녀와 전연우가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영상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이곳에 머무른 이후로 그녀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산장 신혼 방에서 칼날을 전연우의 가슴에 꽂아 넣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시뻘건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었다. 그날 밤 손바닥에 스며든 붉은 피는 아무리 씻어도 도저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장소월은 한참을 갈등하다가 휴대폰을 들어 한마디 물었다. [그 사람은 괜찮나요?] 어린 소녀가 말했다. “언니, 나랑 같이 놀러
기성은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했다면, 전연우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잔혹한 그의 출신이 늘 발목을 잡았다. 모든 사람의 출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은도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만의 아픈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는 그저 과거라는 단어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소민아가 정말로 기성은과 함께하려 한다면,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그들 손으로 직접 극복해야 할 것이다. 소민아는 이 난관을 스스로 떨쳐내고 성장해야 한다. 그녀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전혀 몰랐다. 송시아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대표 사무실. 소민아는 결국 송시아와 직접 대면하여 분명히 따져 묻기로 했다. 송시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회사 경영이 좀 힘들어서 누군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뭐 문제 있어?”소민아가 말했다. “전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예요. 지금 이 행동은 회사를 망치는 거예요.”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팔려고 내놓은 주식은 내가 갖고 있던 거야. 문제 있어?” “혹시 다른 일 없으면, 언니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당신을 보면, 입맛이 뚝 떨어져요.” 소민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송시아가 한 말은 단 한 글자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대체 왜 주식을 팔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중, 마케팅팀 직원 몇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민아는 구석에 서 있었던지라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다음 주부터 연차 시작이에요. 외국에 다녀올 생각인데, 지유 씨는요? 연차 다 썼어요?” “아직이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너무 짜증 나요!” 그 순간 소민아의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은 하지 말고 내가 지시한 일이나 해요.”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송시아는 회사 대부분의 주식을 던져버렸다. 성세 그룹이 설립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호시탐탐 주식이 시장에 풀리기를 노렸다. 하지만 주식은 줄곧 전연우와 송시아의 수중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었다. 다들 그들의 주식은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절대 한 푼도 빼내 오기 힘들다며 혀를 내둘렀다.지금 팔려나가는 10%만으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주식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이다. 소민아도 이 소식을 듣고 서철용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성세 그룹이 주식을 처분한다는 소식은 30분도 안 되어 이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서철용은 발코니에 있는 등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코웃음을 쳤다. “전연우, 송시아가 정말 네 성세 그룹을 완전히 거덜 내려고 하고 있어.”“너와 송시아가 갖고 있는 주식 지분율은 똑같고, 인씨 가문이 3% 지분을 갖고 있어. 만약 인씨 가문이 그 3%를 양도한다면, 네 성세 그룹 대표 자리는 언제든지 빼앗길 수도 있겠어.” “송시아가 하는 꼴을 보니 너를 완전히 새장 속에 가둘 모양이야.” 서철용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연우, 다 자업자득이야. 배은란은 도우미의 부축을 받으며 서철용 앞으로 걸어와 휴대폰을 건넸다. “민용 씨, 전화 왔어.” 서철용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서두르지 않고 일어서 배은란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익숙한 전화번호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안 끝났어요?”소민아는 미안한 듯 말했다. “서 선생님,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서 선생님이 제 전화번호를 차단해서 와이프분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서 연락드린 거예요. 뉴스 보셨죠? 송시아가 성세 그룹 주식을 매도하고 있어요. 서 선생님, 송시아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서철용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앞에 있는 여자를 보고는 애써 감정을
송시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목적을 달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경호원에게 말했다.“퇴원 준비해요.”경호원이 말했다.“송 대표님, 간호사가 대표님은 상처가 아물기 전엔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송시아는 아랫배를 만지며 빙그레 웃었다.“이 고비만 넘기면 나도 한동안 푹 쉬어야겠어요.”“알겠습니다.”저녁 12시 커다란 승합차 안, 송시아는 누워있는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어떤 곳에 도착했다. 핸드폰 신호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천 명은 족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이 커다랗고, 쥐 죽은 듯 고요한 그곳 별장 안은 의료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 주치의 또한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주위엔 높디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전연우를 가두기 위해 만든 새장 같았다.안방은 수영장 하나도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연우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의사는 그의 손등에 다시 링거 바늘을 꽂고 있었다.하루 종일 바삐 돌아친 탓에 송시아도 많이 피곤했던지라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옷을 벗고는 반신욕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우유를 마시며 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얼마 후,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다가왔다.송시아는 매끄러운 긴 다리를 뻗어 눈앞의 남자를 도발했다.“여기 찾지 못할 줄 알았어요.”“나한테 누군가를 찾는 건 아주 간단한 거라고 했잖아.”송시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내가 알아봐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건 알려줄 수 없어. 너희들 사이 일엔 끼어들지 않을 거야. 난 그냥 네 뱃속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내 대를 잇게만 하면 돼.”송시아는 씁쓸한 얼굴로 컵 안
송시아는 전연우의 손을 잡고 그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팔찌에 손을 댄 순간, 행동을 멈추고 느긋하게 그의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팔찌 사진을 찍고는 저장되지 않은 누군가의 번호에 전송했다.[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봐 줘요.]이어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전연우 씨, 지금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연우 씨가 깨어났을 땐 성세 그룹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전생에서 당신은 날 망가뜨렸어요. 이번엔 내가 당신의 모든 걸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 거예요. 그래야 내가 더 쉽게 당신을 통제할 수 있잖아요.”“당신은 권력을 너무 욕심낸 탓에 제일 중요한 걸 잃은 거예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간 뒤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서 선생님이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라고 했어요. 기성은 씨도 이제 돌아오는 거 맞죠?]쨍그랑.컵이 깨지는 소리에 소민아가 고개를 돌렸다. 신이랑이 일어나 유리 조각을 주우려하자 그녀는 급히 다가갔다.“움직이지 말아요. 다쳐요.”하지만 신이랑의 손가락은 이미 유리 조각에 찢어져 있었다. 소민아는 휴지로 그의 손가락을 감쌌다.“왜 그래요? 집에 돌아온 뒤로 쭉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어요.”신이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한 손은 소민아에게 잡혀 있었다.“난 괜찮아요. 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래요.”소민아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신이랑이 결혼 때문에 복잡해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솔직히 이게 더 좋은 상황 아니에요? 이랑 씨는 내 상사고, 우린 친구잖아요. 이랑 씨... 난 무슨 이유로든 지금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은 자신의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바람 좀 쐬러 나갈게요.”급히 나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 같았다.늘 차분했던 신이랑은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발코니에서 주먹을 꽉 말아쥐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으스러지는 듯한 두통이 또다시 밀려오기
“됐어. 너 같은 냉혈한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호주머니에서 조개껍질 팔찌를 꺼냈다.“너 지금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알아.”“전연우, 기억해. 깨어나면 소월 씨한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예전 네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해.”“소월 씨는 줄곧 강영수의 죽음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해, 소월 씨는 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는 거. 소월 씨에겐 감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금 강영수는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어.”“네가 계속 고집부리면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한텐 영원히 소월 씨를 잃어야 하는 처벌이 내려질 거야.”“소월 씨가 성까지 바꾸고 강영수와 결혼하면 넌 어떻게 할까!”서철용은 전연우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반지를 끼고 있는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서철용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이제야 조급해졌어? 지금까지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소민아가 일정을 말하기 시작한 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자 소민아는 바로 일어섰다.“서 선생님, 대표님은 어떻게 됐어요?”“뭐 어떻겠어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죠. 하지만 이번 달 안엔 깨어날 거예요.”소민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정말 잘됐네요.”서철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신이랑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언제 결혼해요?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는 거 잊지 말아요.”그 말에 신이랑과 소민아의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소민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서 선생님, 오해예요.”서철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 발로 왔네요?”송시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민아와 이랑 씨 결혼 청첩장은 내가 직접 보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