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여전히 전연우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문손잡이가 내려가는 기척에 장소월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차가운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아직도 안 나갔다니!전연우는 세면대의 머리띠를 발견하고 눈 밑에는 폭풍우가 몰아친 것 같았지만, 그는 화를 꾹 삼켰다.“네 발로 나올래, 아니면 내가 끌고 나올까?”장소월은 화장실에서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약 먹어.”탁자 위에는 약 두 알과 따뜻한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기분이 안 좋을 때면 가끔 한 알을 더 먹곤 했다.확실히 약을 먹여야 할 시간이었다.“고마워.”장소월은 약을 집고 온도가 딱 맞는 물과 함께 삼켰다.“나가줘. 나 혼자 있고 싶어.”“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학교에도 안 가고 계속 이렇게 지낼 셈이야? 떠난다는 게 자신을 방안에 가두는 거였어?”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방에서 끌고 나왔다.“무슨 짓이야! 이거 놔! 전연우... 놓으라고!”장소월은 그에 의해 계단에서 끌려내려갔고, 몇 번이나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장소월은 조심하지 않아 발목을 삐었지만, 남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짜릿한 뼈의 통증에 장소월은 절뚝절뚝 걸었다. 거실에 도착하니 하인은 이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손을 놓자, 장소월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별장의 하인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멀리 피했다.장소월이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발목에서 느껴지는 심한 통증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전연우는 그제야 빨갛게 부어오른 여자의 발목을 보고 흠칫 놀랐다.남자가 손을 뻗자, 장소월은 도망치듯 일어서서 그를 밀쳐내고는 다친 발목으로 계단을 집고 절뚝거리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전연우는 은경애에게 약을 준비해서 위층으로 가져가라고 분부하고, 한 손은 허리에 집고, 다른 한 손은 눈을 가리며 탄식했다.‘내가 너무 몰아 부쳤나?’처음으로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강한 그룹.기획 1팀 책임자는 이미 대표 사
책상 위에 올려진 그림의 번호는 바로 장소월의 이름이었다.강영수는 손을 뻗어 그림을 만지며 말했다.“이번 대회 수상자야?”그녀에 관한 모든 것에 남자는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졌다.“이건 주최 측에서 보내온 겁니다. 대표님의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사실 진봉은 장소월이 이번 대회에 참가하리라는 것을 진작 예상하였다. 장소월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기량이 뛰어나 어느 전문 화가에게도 뒤지지 않았다.“소월이는 강한 그룹이 공동 주최한 대회라는 걸 알고 참가한 거야?”“아무도 모르니 소월 아가씨도 아마 모르고 계실 겁니다.”“일단 나가봐.”“네, 대표님.”진봉은 사무실 문을 닫고 떠났다. 강영수는 그림의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훑어보았다. 요즘 먼저 연락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구나...장소월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이성을 유지했다.가끔 강영수는 그녀가 억지를 부리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남자는 장소월이 그렇게 쉽게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에 화가 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영수는 주최 측에 전화를 걸었다.5일 후, 오후.“아주머니, 먹을 것 있어요? 저 배고파요.”장소월이 입은 옷은 며칠 동안 갈아입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이미 뭉쳐있고 기름이 떨어질 정도였고,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그녀의 지저분한 모습에 채소를 다듬고 있던 은경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가씨, 아직 식사 시간 안 됐어요. 제가 계란 볶음밥이라도 해줄까요?”“안돼요. 앞으로 배고프면 식사 시간에 내려오라고 하세요.”그녀가 방으로 가져간 간식은 이미 거덜이 났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래층 소파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다리 위에 노트북을 얹고 회사 일을 처리하는 듯 보였다.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자 전연우는 하던 일을 접었다.장소월은 그를 못 본 척하고 지나쳐 TV 캐비닛 아래를 열었더니, 평소 가
어차피 이 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혼자였으니,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장소월이 위층으로 올라가려 할 때, 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오 아주머니 차 사고 나서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하셨어.”장소월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그래. 잘 회복하시라고 해. 난 안 가.”아무리 깊은 애정이 있더라도 장소월은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10년 넘게 자신에게 약을 먹인 사람이 바로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겼던 유모라니.사실 장소월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써 외면했다.자신을 속이고 싶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빨리 고통 속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연연하지 않고 살고 싶었지만... 언제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자신도 몰랐다.어쩌면 평생을 이런 꼴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목적 없이, 영혼 없이...장소월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자신을 또 가두었다.예전보다 장소월의 상태는 이미 많이 호전되었다. 적어도 방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지금은 영혼 없이 몸만 있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장소월이 캄캄한 방에 들어서자 또 방 안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만 들렸다.“소월아, 엄마한테 할 말 있어?”“아빠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절 혼자 두고 가버렸어요.”“소월이에게는 엄마가 있잖아...”“네.”장소월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아가씨, 음식 준비했으니 나와서 좀 드세요.”입구에서 대화 소리가 났지만, 방금 수면제를 먹은 장소월은 머리가 어지러워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흐리멍덩해서 잠들기 시작했다.손잡이가 돌아가더니 문이 열렸다. 새로 맞춘 열쇠였다.방 안의 공기는 탁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으며 여전히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전연우는 손을 뻗어 벽의 스위치를 만졌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장소월은 늘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그녀도 이런 자신이 싫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싫었다.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알려준 적이 없으니, 그녀는 겁에 질린 거북이 같았다.그래서 송시아는 물론, 전연우의 측근들도 모두 그녀를 무시했다.그녀가 살아온 환경이 이래서 장소월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원망했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는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베개를 안고 나가려는데 어두운 얼굴의 남자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바닥에 던지고 강제로 욕실로 끌고 갔다.장소월은 고통받는 고양이처럼, 줄곧 힘껏 그의 손길을 거부했지만, 몸에 있는 옷들은 모두 그에 의해 찢겼고, 가슴팍 피부도 겉으로 드러났다.“만지지 마!”장소월은 그의 얼굴을 긁고, 빗을 집어 들어 남자에게 던졌지만, 욕실 문은 잠겨졌고,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추위에 떨어야 했다.남자가 화를 내며 그녀의 몸에 손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장소월의 앞에 쪼그려 앉더니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오빠는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일단 샤워부터 할까?”처음으로 그는 묻는 투로 말했다.10분 후, 뜨거운 물을 받아놓은 남자는 장소월을 안고 욕조에 놓았다. 그녀의 옷은 강제로 벗겨졌고, 욕조에 앉아 있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농락당하는 인형 같았다.전연우는 외투를 벗어 벽에 걸고, 검은색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았다.“학교에서 너 언제 오냐고 전화 왔었어.”장소월의 눈빛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했다.“이 집에서 나가 줘.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여기 있으면 나한테 했던 짓들이 자꾸 떠올라. 만약 아직 내가 이용가치가 있다면, 내가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전연우를 마주하면 장소월은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런 내 모습을 보고 만족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 복수도 성공했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고, 방안에는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에 숱까지 많아 말리고 손질하기 여간 어렵지 않았다. 매번 머리를 말리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대부분 장소월은 반건조 상태까지 말리고 수건을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머리를 말리고 나니 마침 12시였다.긴 밤을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몰랐다.전연우는 지저분한 방을 돌아보며 그녀를 안고 방에서 나왔다. 그가 무엇을 하려든, 장소월은 어차피 막을 수 없었으니 차라리 발버둥 치지 않은 것이 편했다.아래층으로 내려와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은경애와 마주쳤다.‘뭐야, 두 사람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차마 쳐다도 못 보겠어!’“도련님, 닭고기 수프 가져올까요? 내일이 지나면 맛이 없어져요.”전연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먹을 것 좀 많이 챙겨서 내 방으로 가져오세요.”“네... 알겠습니다.”은경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머,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야. 맙소사!’은경애는 지체하지 않고 급히 먹을 것을 챙겨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남자는 침대에서 장소월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마침 소매를 넣고 옷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은경애는 놀라서 하마터면 손에 든 물건을 제대로 잡지 못 할 뻔했다.‘아가씨의 몸을 다 본 거야?’“물건 내려놓고, 위층 방 깨끗이 청소해주세요.”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내일 제가 정리할게요. 시간이 늦었는데 아주머니는 가서 쉬세요.”“아... 네, 아가씨. 배곯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네.”그의 방 인테리어는 아주 심플했다. 전체적으로 그레이와 화이트색으로 이루어졌고, 책상에는 몇 개의 서류만 있을 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빈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전연우는 옆에 있는 닭고기 수프를 들어 그녀에게 먹였다.“먹고 좀 자. 내일 같이 나가자.”“나 신경 쓰지 말라고
전연우는 닭고기 수프를 그녀에게 강제로 먹였다. 잠시 후, 위에 경련이 일어난 장소월은 침대 옆에 엎드려 모두 토해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위가 텅 비었으니 마지막으로 토한 것은 모두 위산이었고 입에서는 쓴맛이 가득했다.이 역겨운 냄새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장소월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를 화장실로 안고 갔다.장소월은 변기 옆에 엎드려 위까지 전부 토해낼 기세였다. 위산이 식도 전체를 부식시키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남자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은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나른해져 일어나지 못하고 눈이 벌겋게 되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지만, 장소월은 곧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소월아!”장소월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구부려 그녀를 안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서울강남병원, 응급실.장소월은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환자분 가족이세요?”“네.”간호사: “환자분 영양실조가 있어요. 먹고 싶어 하는 걸 많이 주시고 속이 불편하지 않도록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이시면 안 돼요. 요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하는 게 좋겠어요. 문제가 생기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네.”간호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철용이 들어와 입꼬리를 약간 올리더니 말했다.“천하의 전연우가 이런 꼴이라니? 동생을 좋아하게 된 기분이 어때?”특히 장해진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서철용은 만약 장소월이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되었다.지금보다 더 미치게 될까?“무슨 일이야?”전연우는 쌀쌀맞게 물었다.서철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앞으로 가더니, 여전히 의식을 잃은 장소월을 보았다. 보아하니 요 며칠 힘든 생활을 겪은 듯하다.“두 사람 유전자 검사라도 해
“아주머니 월급은 앞으로 제가 드릴게요.”은경애는 허벅지를 툭 치더니 말했다.“좋아요. 그럼 당장 처리할게요. 만약 도련님께서 저를 꾸짖으시면, 아가씨... 절 도와서 좀 설득해 주세요. 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정이 있어요.”“그래요.”두세 시간 후, 은경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병원으로 돌아왔다.“현관 열쇠는 교체했어요. 비밀번호도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설정했어요.”“수고하셨어요.”“휴,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마땅히 해야죠.”장소월은 환자복을 갈아입고 곧 퇴원 수속을 마쳤다. 병원비는 장해진이 준 카드로 결제했다. 장해진은 몇 달에 한 번 그녀에게 돈을 주었지만, 평소 돈을 쓰지 않았던지라 꽤 많이 모였다.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마침 백윤서가 오 아주머니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많이 초췌해진 오 아주머니는 흰머리도 꽤 났고, 감정이 격해지더니 장소월을 향해 걸어왔다.“소월 아가씨.”“아가씨... 병원에 저 보러 왔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아가씨 걱정을 많이 했다고요.”장소월은 차갑게 오 아주머니를 보더니 “잘 회복하세요.” 말 한마디만 던지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가장 믿었던 사람이지만 오히려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과 한시도 같이 있을 수 없었다.그녀의 행동을 용서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뒤에서 오 아주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아주머니!”“소월아, 아주머니 쓰러지셨어! 의사 선생님 여기 빨리 좀 와주세요!”장소월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고, 문이 닫히려던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손으로 문을 막더니 걸어들어왔다.“소월 씨? 마침 여기서 보네요? 어디 가는 길?”장소월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을 자격이 전혀 없었다. 의사 얼굴에 먹칠하는 인간이었으니.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하자 장소월은 걸음을 옮겨 병원 입구를 떠났다.남원 별장.이번에는 별장 문은 물론 현관문에도 자물쇠가 설
학교에서는 시시때때로 별장에 전화해 장소월의 상황을 물었다.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싶었던 장소월은 집안 모든 전화선을 뽑고 핸드폰도 구석퉁 어딘가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켰다.매일매일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고...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화원에 나가 꽃에 물을 주기도 했다.남천 그룹.전연우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뒤에 기성은을 대동한 채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남원 별장 쪽 상황은 어때?”기성은이 보고했다.“소월 아가씨는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별장에만 머무르고 계십니다. 이미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어요.”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알았어.”사무실에 돌아온 뒤, 전연우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마우스를 움직였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건 별장 거실에서 무릎을 덮는 길이의 하얀색 꽃무늬 잠옷을 입고 손에 붓을 든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장소월이었다. 화면을 확대해보니 그녀의 매력적인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솟아오른 봉우리, 그리고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살짝 튀어나온 두 개의 점까지...전연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랫배에서 일어난 요동을 애써 가라앉혔다.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설사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전연우는 장소월을 평생 호의호식하며 편히 지내게 할 수 있다.전연우는 장소월을 손바닥 안에 넣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화면 속에 앉아있던 소녀가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하지만 빈혈 때문인지 몸이 기울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다행히 도우미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본 전연우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이어 전연우의 시선이 구석에 버려져 있는 우유로 향했다.그의 눈썹이 또 한 번 찌푸려졌다.전연우는 장소월의 습관을 알고 있다.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 항상 한 컵씩 마시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장 18년 동안이나 이어오던 습관을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