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고, 방안에는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에 숱까지 많아 말리고 손질하기 여간 어렵지 않았다. 매번 머리를 말리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대부분 장소월은 반건조 상태까지 말리고 수건을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머리를 말리고 나니 마침 12시였다.긴 밤을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몰랐다.전연우는 지저분한 방을 돌아보며 그녀를 안고 방에서 나왔다. 그가 무엇을 하려든, 장소월은 어차피 막을 수 없었으니 차라리 발버둥 치지 않은 것이 편했다.아래층으로 내려와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은경애와 마주쳤다.‘뭐야, 두 사람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차마 쳐다도 못 보겠어!’“도련님, 닭고기 수프 가져올까요? 내일이 지나면 맛이 없어져요.”전연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먹을 것 좀 많이 챙겨서 내 방으로 가져오세요.”“네... 알겠습니다.”은경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머,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야. 맙소사!’은경애는 지체하지 않고 급히 먹을 것을 챙겨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남자는 침대에서 장소월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마침 소매를 넣고 옷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은경애는 놀라서 하마터면 손에 든 물건을 제대로 잡지 못 할 뻔했다.‘아가씨의 몸을 다 본 거야?’“물건 내려놓고, 위층 방 깨끗이 청소해주세요.”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내일 제가 정리할게요. 시간이 늦었는데 아주머니는 가서 쉬세요.”“아... 네, 아가씨. 배곯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네.”그의 방 인테리어는 아주 심플했다. 전체적으로 그레이와 화이트색으로 이루어졌고, 책상에는 몇 개의 서류만 있을 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빈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전연우는 옆에 있는 닭고기 수프를 들어 그녀에게 먹였다.“먹고 좀 자. 내일 같이 나가자.”“나 신경 쓰지 말라고
전연우는 닭고기 수프를 그녀에게 강제로 먹였다. 잠시 후, 위에 경련이 일어난 장소월은 침대 옆에 엎드려 모두 토해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위가 텅 비었으니 마지막으로 토한 것은 모두 위산이었고 입에서는 쓴맛이 가득했다.이 역겨운 냄새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장소월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를 화장실로 안고 갔다.장소월은 변기 옆에 엎드려 위까지 전부 토해낼 기세였다. 위산이 식도 전체를 부식시키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남자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은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나른해져 일어나지 못하고 눈이 벌겋게 되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지만, 장소월은 곧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소월아!”장소월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구부려 그녀를 안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서울강남병원, 응급실.장소월은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환자분 가족이세요?”“네.”간호사: “환자분 영양실조가 있어요. 먹고 싶어 하는 걸 많이 주시고 속이 불편하지 않도록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이시면 안 돼요. 요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하는 게 좋겠어요. 문제가 생기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네.”간호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철용이 들어와 입꼬리를 약간 올리더니 말했다.“천하의 전연우가 이런 꼴이라니? 동생을 좋아하게 된 기분이 어때?”특히 장해진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서철용은 만약 장소월이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되었다.지금보다 더 미치게 될까?“무슨 일이야?”전연우는 쌀쌀맞게 물었다.서철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앞으로 가더니, 여전히 의식을 잃은 장소월을 보았다. 보아하니 요 며칠 힘든 생활을 겪은 듯하다.“두 사람 유전자 검사라도 해
“아주머니 월급은 앞으로 제가 드릴게요.”은경애는 허벅지를 툭 치더니 말했다.“좋아요. 그럼 당장 처리할게요. 만약 도련님께서 저를 꾸짖으시면, 아가씨... 절 도와서 좀 설득해 주세요. 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정이 있어요.”“그래요.”두세 시간 후, 은경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병원으로 돌아왔다.“현관 열쇠는 교체했어요. 비밀번호도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설정했어요.”“수고하셨어요.”“휴,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마땅히 해야죠.”장소월은 환자복을 갈아입고 곧 퇴원 수속을 마쳤다. 병원비는 장해진이 준 카드로 결제했다. 장해진은 몇 달에 한 번 그녀에게 돈을 주었지만, 평소 돈을 쓰지 않았던지라 꽤 많이 모였다.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마침 백윤서가 오 아주머니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많이 초췌해진 오 아주머니는 흰머리도 꽤 났고, 감정이 격해지더니 장소월을 향해 걸어왔다.“소월 아가씨.”“아가씨... 병원에 저 보러 왔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아가씨 걱정을 많이 했다고요.”장소월은 차갑게 오 아주머니를 보더니 “잘 회복하세요.” 말 한마디만 던지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가장 믿었던 사람이지만 오히려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과 한시도 같이 있을 수 없었다.그녀의 행동을 용서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뒤에서 오 아주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아주머니!”“소월아, 아주머니 쓰러지셨어! 의사 선생님 여기 빨리 좀 와주세요!”장소월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고, 문이 닫히려던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손으로 문을 막더니 걸어들어왔다.“소월 씨? 마침 여기서 보네요? 어디 가는 길?”장소월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을 자격이 전혀 없었다. 의사 얼굴에 먹칠하는 인간이었으니.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하자 장소월은 걸음을 옮겨 병원 입구를 떠났다.남원 별장.이번에는 별장 문은 물론 현관문에도 자물쇠가 설
학교에서는 시시때때로 별장에 전화해 장소월의 상황을 물었다.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싶었던 장소월은 집안 모든 전화선을 뽑고 핸드폰도 구석퉁 어딘가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켰다.매일매일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고...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화원에 나가 꽃에 물을 주기도 했다.남천 그룹.전연우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뒤에 기성은을 대동한 채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남원 별장 쪽 상황은 어때?”기성은이 보고했다.“소월 아가씨는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별장에만 머무르고 계십니다. 이미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어요.”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알았어.”사무실에 돌아온 뒤, 전연우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마우스를 움직였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건 별장 거실에서 무릎을 덮는 길이의 하얀색 꽃무늬 잠옷을 입고 손에 붓을 든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장소월이었다. 화면을 확대해보니 그녀의 매력적인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솟아오른 봉우리, 그리고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살짝 튀어나온 두 개의 점까지...전연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랫배에서 일어난 요동을 애써 가라앉혔다.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설사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전연우는 장소월을 평생 호의호식하며 편히 지내게 할 수 있다.전연우는 장소월을 손바닥 안에 넣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화면 속에 앉아있던 소녀가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하지만 빈혈 때문인지 몸이 기울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다행히 도우미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본 전연우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이어 전연우의 시선이 구석에 버려져 있는 우유로 향했다.그의 눈썹이 또 한 번 찌푸려졌다.전연우는 장소월의 습관을 알고 있다.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 항상 한 컵씩 마시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장 18년 동안이나 이어오던 습관을
은경애는 핸드폰을 꺼내 장소월에게 보여주었다.장소월이 어떻게 그 번호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만약 그가 마음속에서 답을 찾았다면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을 할 필요가 없다.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강영수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든 장소월은 그에게 마음을 다했기에 후회나 죄책감은 없었다.3일 후 오후 여섯 시, 장소월은 꾸미지 않은 검소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날이 추웠던지라 모자가 달린 검은색 외투와 연한 색 운동복 바지 안에 몇 겹 더 껴입었다. 다만 얼굴색은 밝게 보이려 옅게 립스틱을 발랐다.퇴원한 뒤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남원 별장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예약했던 택시가 문 앞에 도착하자 장소월은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시간이 있을 때 운전면허를 따 매일 혼자 차를 몰고 나가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때는 마침 퇴근 시간이라 만설 과학기술로 가는 길이 꽤나 막혔다.이번 시상식엔 만설 과학기술 임원들뿐만 아니라 몇몇 협력사 대표들도 참석한다.스파클 5성급 호텔.파티장 안, 강영수가 가장 앞줄 중앙 VIP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의 옆엔 빨간색 머리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는데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공격적으로 보였다.또한 목에서부터 시작해 가슴골까지 이어지는 문신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른쪽에 앉은 진행자가 강영수에게 말했다.“대표님, 이미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언제 시작할까요?”김남주가 시큰둥한 얼굴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이번 대회 1등 수상자가 장소월이라던데, 혹시 그 여자를 기다리는 거야?”강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워진 얼굴로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지금 시작하죠.”신생 회사인 만설 과학기술이 주최한 작은 시상식에 강한 그룹 대표가 친히 발걸음을 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만설 과학기술은 비록 설립된 지 얼마 되지
무대 위 LED 화면에 장소월이 그린 그림이 담긴 PPT가 뜨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색감과 선 하나하나, 3, 40년의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할 실력이었다.장소월은 심호흡을 하고는 무대에 올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중앙에 자리 잡고 앉은 무시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김남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에게선 강영수와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확실히...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이미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많이 겪었던 장소월인지라 더는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강영수를 바라보는 장소월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의연했다.그녀는 덤덤히 시선을 거두고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 조금 늦었네요.”장 내 모든 사람들은 장소월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처음엔 그녀의 어린 나이에 놀랐다. 벌써 미술 대학원생과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매해 대학원에 지원하는 학생은 몇백만 명에 달하지만 입학 허가를 받는 학생은 고작 몇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두 번째로 놀란 건 그녀의 외모였다. 검소하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그 얼굴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려한 미모였다.사람들은 얼마 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잡지 표면에 실린 장소월의 옆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를 직접 보니 훨씬 더 아름다웠다.무대 아래 6,7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안경을 낀 뒤 마이크를 잡았다.“시상 전 한 가지 질문을 할게요. 이 그림을 그릴 때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요?”사회자가 마이크를 장소월에게 넘겨주었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려니 긴장되어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 조용해지자 장소월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실은... 이 그림은 다시 한번 일어서보자는 각오로 그린 거예요. 당시 저는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어요. 제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장소월은 파티가 진행되는 중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고 곧장 파티장을 나섰다.장소월에게서 뭐라도 알아내려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기회가 사라져버렸다.5층 식당 외부에 위치한 전망대에 들어선 장소월은 종업원에게 뜨거운 물 한 잔을 부탁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언제 학교에 돌아올 거야? 전교 2등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라.”허이준은 문제를 설명하는 것 외에 별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장소월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올림피아드 시합 성적 나왔어? 어떻게 됐어?”허이준이 덤덤히 말했다.“1등. 여러 명이 서울대에 입학하게 됐어. 백윤서도 포함이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예상했던 바야.”하지만 왜 굳이 백윤서를 언급한 걸까?“네 처지가 아무리 딱해도 난 절대 1등 자리를 너에게 양보하지 않아.”장소월이 평소 같지 않은 편안함을 느끼며 말했다.“양보할 필요 없어. 내 힘으로도 1등 할 수 있거든. 너한테도 2등 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줘야지.”“날 넘어서면 네가 전국 1등이야. 너에겐...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어.”허이준은 이미 그녀가 언젠가는 학교에 돌아올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니 말이다.저녁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장소월이 먼 곳에서 빛나는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연하지. 그나저나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허이준이 서슴없이 말했다.“난 만설 과학기술 회사를 설립한 사람이야.”“뭐라고?”쌍꺼풀이 없는 준수한 두 눈을 깜빡일 때마다 허이준에게선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묻어나왔다.“아는 사람은 몇 안 돼. 평소 시간이 없어 경영은 주로 친구가 해.”“너 정말 대단하구나.”“우리 만설에 온 걸 환영해. 장소월.”“나 아직 고민하고 있어.”“그래. 시간을 갖고 천천히 생각해 봐.”말을 마친 뒤 허이준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떴다.장소월이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셔보니 물은 이미
장소월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거리감이 느껴지도록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너무 고마운데 괜찮아. 이미 찬 것 같으니 우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탈게.”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듯 단호히 거절하니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장소월과 강영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나 깜빡하고 룸에 물건을 두고 왔어. 금방 다녀올게.”허이준이 말했다.“내가 기다리고 있을게.”“그래.”장소월이 몸을 돌려 룸으로 향하자 엘리베이터 문도 서서히 닫혔다. 사실 강영수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물건을 두고 오지 않았다. 그저 이 불편한 상황에서 도망친 것뿐이다.장소월은 룸에서 몇 분 기다리다가 종업원이 청소하러 들어온 뒤에야 문을 나섰다.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장소월이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고는 말했다.“됐어. 가자.”“잠깐만.”“왜?”허이준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장소월의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장소월은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할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하지만 허이준은 가볍게 여자에게 손대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안전벨트에 걸린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머리카락.”장소월이 경계심을 풀며 말했다.“고마워.”허이준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액셀을 밟고 주차장에서 나갔다.한편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벤츠 차 앞엔 담배꽁초 몇 개가 쌓여가고 있었다.김남주가 강영수의 손에서 절반가량 피운 담배를 빼앗아갔다. 다리를 꼬고 앉으니 찢어진 치마 옆으로 가는 다리가 드러났다. 그녀가 빨간 입술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영수야, 그렇게 장소월을 쳐다보면 나 질투해.”그녀가 가까이 다가가 습관적으로 담배 연기를 그의 얼굴에 내뱉었다.“이제 내가 돌아왔어. 난 네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자리 잡는 걸 용납할 수 없어. 우리 두 사람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커플이잖아, 안 그래?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넌 한 번도 날 놓은 적이 없다는 거 알아. 우리에겐 수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