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고, 방안에는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곱슬머리에 숱까지 많아 말리고 손질하기 여간 어렵지 않았다. 매번 머리를 말리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대부분 장소월은 반건조 상태까지 말리고 수건을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머리를 말리고 나니 마침 12시였다.긴 밤을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몰랐다.전연우는 지저분한 방을 돌아보며 그녀를 안고 방에서 나왔다. 그가 무엇을 하려든, 장소월은 어차피 막을 수 없었으니 차라리 발버둥 치지 않은 것이 편했다.아래층으로 내려와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은경애와 마주쳤다.‘뭐야, 두 사람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차마 쳐다도 못 보겠어!’“도련님, 닭고기 수프 가져올까요? 내일이 지나면 맛이 없어져요.”전연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먹을 것 좀 많이 챙겨서 내 방으로 가져오세요.”“네... 알겠습니다.”은경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머,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야. 맙소사!’은경애는 지체하지 않고 급히 먹을 것을 챙겨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남자는 침대에서 장소월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마침 소매를 넣고 옷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은경애는 놀라서 하마터면 손에 든 물건을 제대로 잡지 못 할 뻔했다.‘아가씨의 몸을 다 본 거야?’“물건 내려놓고, 위층 방 깨끗이 청소해주세요.”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내일 제가 정리할게요. 시간이 늦었는데 아주머니는 가서 쉬세요.”“아... 네, 아가씨. 배곯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네.”그의 방 인테리어는 아주 심플했다. 전체적으로 그레이와 화이트색으로 이루어졌고, 책상에는 몇 개의 서류만 있을 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빈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전연우는 옆에 있는 닭고기 수프를 들어 그녀에게 먹였다.“먹고 좀 자. 내일 같이 나가자.”“나 신경 쓰지 말라고
전연우는 닭고기 수프를 그녀에게 강제로 먹였다. 잠시 후, 위에 경련이 일어난 장소월은 침대 옆에 엎드려 모두 토해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위가 텅 비었으니 마지막으로 토한 것은 모두 위산이었고 입에서는 쓴맛이 가득했다.이 역겨운 냄새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장소월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를 화장실로 안고 갔다.장소월은 변기 옆에 엎드려 위까지 전부 토해낼 기세였다. 위산이 식도 전체를 부식시키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남자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은 숨이 가빠지고 온몸이 나른해져 일어나지 못하고 눈이 벌겋게 되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지만, 장소월은 곧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소월아!”장소월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구부려 그녀를 안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서울강남병원, 응급실.장소월은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환자분 가족이세요?”“네.”간호사: “환자분 영양실조가 있어요. 먹고 싶어 하는 걸 많이 주시고 속이 불편하지 않도록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이시면 안 돼요. 요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하는 게 좋겠어요. 문제가 생기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네.”간호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철용이 들어와 입꼬리를 약간 올리더니 말했다.“천하의 전연우가 이런 꼴이라니? 동생을 좋아하게 된 기분이 어때?”특히 장해진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서철용은 만약 장소월이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되었다.지금보다 더 미치게 될까?“무슨 일이야?”전연우는 쌀쌀맞게 물었다.서철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앞으로 가더니, 여전히 의식을 잃은 장소월을 보았다. 보아하니 요 며칠 힘든 생활을 겪은 듯하다.“두 사람 유전자 검사라도 해
“아주머니 월급은 앞으로 제가 드릴게요.”은경애는 허벅지를 툭 치더니 말했다.“좋아요. 그럼 당장 처리할게요. 만약 도련님께서 저를 꾸짖으시면, 아가씨... 절 도와서 좀 설득해 주세요. 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정이 있어요.”“그래요.”두세 시간 후, 은경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병원으로 돌아왔다.“현관 열쇠는 교체했어요. 비밀번호도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설정했어요.”“수고하셨어요.”“휴,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마땅히 해야죠.”장소월은 환자복을 갈아입고 곧 퇴원 수속을 마쳤다. 병원비는 장해진이 준 카드로 결제했다. 장해진은 몇 달에 한 번 그녀에게 돈을 주었지만, 평소 돈을 쓰지 않았던지라 꽤 많이 모였다.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마침 백윤서가 오 아주머니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많이 초췌해진 오 아주머니는 흰머리도 꽤 났고, 감정이 격해지더니 장소월을 향해 걸어왔다.“소월 아가씨.”“아가씨... 병원에 저 보러 왔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아가씨 걱정을 많이 했다고요.”장소월은 차갑게 오 아주머니를 보더니 “잘 회복하세요.” 말 한마디만 던지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가장 믿었던 사람이지만 오히려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과 한시도 같이 있을 수 없었다.그녀의 행동을 용서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뒤에서 오 아주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아주머니!”“소월아, 아주머니 쓰러지셨어! 의사 선생님 여기 빨리 좀 와주세요!”장소월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섰고, 문이 닫히려던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손으로 문을 막더니 걸어들어왔다.“소월 씨? 마침 여기서 보네요? 어디 가는 길?”장소월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을 자격이 전혀 없었다. 의사 얼굴에 먹칠하는 인간이었으니.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하자 장소월은 걸음을 옮겨 병원 입구를 떠났다.남원 별장.이번에는 별장 문은 물론 현관문에도 자물쇠가 설
학교에서는 시시때때로 별장에 전화해 장소월의 상황을 물었다.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싶었던 장소월은 집안 모든 전화선을 뽑고 핸드폰도 구석퉁 어딘가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켰다.매일매일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고...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화원에 나가 꽃에 물을 주기도 했다.남천 그룹.전연우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뒤에 기성은을 대동한 채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남원 별장 쪽 상황은 어때?”기성은이 보고했다.“소월 아가씨는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별장에만 머무르고 계십니다. 이미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어요.”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알았어.”사무실에 돌아온 뒤, 전연우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마우스를 움직였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건 별장 거실에서 무릎을 덮는 길이의 하얀색 꽃무늬 잠옷을 입고 손에 붓을 든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장소월이었다. 화면을 확대해보니 그녀의 매력적인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솟아오른 봉우리, 그리고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살짝 튀어나온 두 개의 점까지...전연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랫배에서 일어난 요동을 애써 가라앉혔다.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설사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전연우는 장소월을 평생 호의호식하며 편히 지내게 할 수 있다.전연우는 장소월을 손바닥 안에 넣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화면 속에 앉아있던 소녀가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하지만 빈혈 때문인지 몸이 기울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다행히 도우미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본 전연우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이어 전연우의 시선이 구석에 버려져 있는 우유로 향했다.그의 눈썹이 또 한 번 찌푸려졌다.전연우는 장소월의 습관을 알고 있다.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 항상 한 컵씩 마시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장 18년 동안이나 이어오던 습관을
은경애는 핸드폰을 꺼내 장소월에게 보여주었다.장소월이 어떻게 그 번호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만약 그가 마음속에서 답을 찾았다면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을 할 필요가 없다.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강영수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든 장소월은 그에게 마음을 다했기에 후회나 죄책감은 없었다.3일 후 오후 여섯 시, 장소월은 꾸미지 않은 검소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날이 추웠던지라 모자가 달린 검은색 외투와 연한 색 운동복 바지 안에 몇 겹 더 껴입었다. 다만 얼굴색은 밝게 보이려 옅게 립스틱을 발랐다.퇴원한 뒤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남원 별장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예약했던 택시가 문 앞에 도착하자 장소월은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시간이 있을 때 운전면허를 따 매일 혼자 차를 몰고 나가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때는 마침 퇴근 시간이라 만설 과학기술로 가는 길이 꽤나 막혔다.이번 시상식엔 만설 과학기술 임원들뿐만 아니라 몇몇 협력사 대표들도 참석한다.스파클 5성급 호텔.파티장 안, 강영수가 가장 앞줄 중앙 VIP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의 옆엔 빨간색 머리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는데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공격적으로 보였다.또한 목에서부터 시작해 가슴골까지 이어지는 문신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른쪽에 앉은 진행자가 강영수에게 말했다.“대표님, 이미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언제 시작할까요?”김남주가 시큰둥한 얼굴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이번 대회 1등 수상자가 장소월이라던데, 혹시 그 여자를 기다리는 거야?”강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워진 얼굴로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지금 시작하죠.”신생 회사인 만설 과학기술이 주최한 작은 시상식에 강한 그룹 대표가 친히 발걸음을 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만설 과학기술은 비록 설립된 지 얼마 되지
무대 위 LED 화면에 장소월이 그린 그림이 담긴 PPT가 뜨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색감과 선 하나하나, 3, 40년의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할 실력이었다.장소월은 심호흡을 하고는 무대에 올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중앙에 자리 잡고 앉은 무시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김남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에게선 강영수와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확실히...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이미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많이 겪었던 장소월인지라 더는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강영수를 바라보는 장소월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의연했다.그녀는 덤덤히 시선을 거두고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 조금 늦었네요.”장 내 모든 사람들은 장소월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처음엔 그녀의 어린 나이에 놀랐다. 벌써 미술 대학원생과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매해 대학원에 지원하는 학생은 몇백만 명에 달하지만 입학 허가를 받는 학생은 고작 몇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두 번째로 놀란 건 그녀의 외모였다. 검소하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그 얼굴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려한 미모였다.사람들은 얼마 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잡지 표면에 실린 장소월의 옆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를 직접 보니 훨씬 더 아름다웠다.무대 아래 6,7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안경을 낀 뒤 마이크를 잡았다.“시상 전 한 가지 질문을 할게요. 이 그림을 그릴 때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요?”사회자가 마이크를 장소월에게 넘겨주었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려니 긴장되어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 조용해지자 장소월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실은... 이 그림은 다시 한번 일어서보자는 각오로 그린 거예요. 당시 저는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어요. 제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장소월은 파티가 진행되는 중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고 곧장 파티장을 나섰다.장소월에게서 뭐라도 알아내려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기회가 사라져버렸다.5층 식당 외부에 위치한 전망대에 들어선 장소월은 종업원에게 뜨거운 물 한 잔을 부탁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언제 학교에 돌아올 거야? 전교 2등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라.”허이준은 문제를 설명하는 것 외에 별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장소월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올림피아드 시합 성적 나왔어? 어떻게 됐어?”허이준이 덤덤히 말했다.“1등. 여러 명이 서울대에 입학하게 됐어. 백윤서도 포함이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예상했던 바야.”하지만 왜 굳이 백윤서를 언급한 걸까?“네 처지가 아무리 딱해도 난 절대 1등 자리를 너에게 양보하지 않아.”장소월이 평소 같지 않은 편안함을 느끼며 말했다.“양보할 필요 없어. 내 힘으로도 1등 할 수 있거든. 너한테도 2등 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줘야지.”“날 넘어서면 네가 전국 1등이야. 너에겐...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어.”허이준은 이미 그녀가 언젠가는 학교에 돌아올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니 말이다.저녁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장소월이 먼 곳에서 빛나는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연하지. 그나저나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허이준이 서슴없이 말했다.“난 만설 과학기술 회사를 설립한 사람이야.”“뭐라고?”쌍꺼풀이 없는 준수한 두 눈을 깜빡일 때마다 허이준에게선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묻어나왔다.“아는 사람은 몇 안 돼. 평소 시간이 없어 경영은 주로 친구가 해.”“너 정말 대단하구나.”“우리 만설에 온 걸 환영해. 장소월.”“나 아직 고민하고 있어.”“그래. 시간을 갖고 천천히 생각해 봐.”말을 마친 뒤 허이준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떴다.장소월이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셔보니 물은 이미
장소월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거리감이 느껴지도록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너무 고마운데 괜찮아. 이미 찬 것 같으니 우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탈게.”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듯 단호히 거절하니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장소월과 강영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나 깜빡하고 룸에 물건을 두고 왔어. 금방 다녀올게.”허이준이 말했다.“내가 기다리고 있을게.”“그래.”장소월이 몸을 돌려 룸으로 향하자 엘리베이터 문도 서서히 닫혔다. 사실 강영수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물건을 두고 오지 않았다. 그저 이 불편한 상황에서 도망친 것뿐이다.장소월은 룸에서 몇 분 기다리다가 종업원이 청소하러 들어온 뒤에야 문을 나섰다.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장소월이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고는 말했다.“됐어. 가자.”“잠깐만.”“왜?”허이준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장소월의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장소월은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할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하지만 허이준은 가볍게 여자에게 손대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안전벨트에 걸린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머리카락.”장소월이 경계심을 풀며 말했다.“고마워.”허이준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액셀을 밟고 주차장에서 나갔다.한편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벤츠 차 앞엔 담배꽁초 몇 개가 쌓여가고 있었다.김남주가 강영수의 손에서 절반가량 피운 담배를 빼앗아갔다. 다리를 꼬고 앉으니 찢어진 치마 옆으로 가는 다리가 드러났다. 그녀가 빨간 입술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영수야, 그렇게 장소월을 쳐다보면 나 질투해.”그녀가 가까이 다가가 습관적으로 담배 연기를 그의 얼굴에 내뱉었다.“이제 내가 돌아왔어. 난 네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자리 잡는 걸 용납할 수 없어. 우리 두 사람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커플이잖아, 안 그래?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넌 한 번도 날 놓은 적이 없다는 거 알아. 우리에겐 수많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