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서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길까 봐 크나큰 두려움이 엄습했다.가장 큰 감정은 바로 질투였다.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반면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심지어 역겨운 눈빛까지 참아내야 했다.장소월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문을 나섰다. 행여 그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그녀가 차에 타자 운전기사가 물건을 트렁크에 실었다.“아가씨, 물건은 모두 챙기셨나요?”“네. 얼른 가죠!”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테이프였다. 이곳에 있었으니 며칠 내내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강씨 저택.장소월이 돌아왔을 때, 저번 그 노부인이 또다시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노부인이 지팡이를 잡고 현관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동으로 만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두 개의 끈이 양쪽으로 드리워져 있었다.“할머니,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 몸이 늙어 또 길을 잃었네요. 집에 먹을 거 있어요? 너무 배고프네요.”장소월이 집안을 둘러보니 도우미들은 보이지 않았다.“제가 지금 차려드릴게요.”장소월이 목에 둘렀던 수건과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녀는 안에 입은 아이보리색 니트 소매를 거두며 주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가져와 노부인의 앞에 놓아주었다.“일단 물을 마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허기를 달래세요. 제가 최대한 빨리 만들게요.”장소월은 평소 항상 꺼져있던 텔레비전을 켜고 드라마 채널로 돌렸다.“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예전 할머니와 한동안 산 적 있는데 저희 할머니도 드라마를 좋아하셨어요.”노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소월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오늘도 혼자 있는 거예요? 도련님은요?”“출장 갔어요. 며칠 뒤에야 돌아올 거예요.”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식자재들을 가득 꺼냈다.노부인이 물었다.“도련님이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집에 데려온 건 처음 봤어요. 두 사람 사귀는 거예요?”장
장소월이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은 늘 그랬듯 밥은 먹었냐, 뭘 먹었냐 등 일상적인 대화였다. 강영수는 매일 시간을 보며 그녀의 일정을 체크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강영수가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면 장소월은 핸드폰을 별로 쓰지 않아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문자를 보냈다.7,8분 뒤 면이 거의 익자 장소월은 젓가락으로 냄비에서 면을 꺼내 그릇에 담았다.“강 대표님, 파티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열어 죄송해요. 저한테 함께 술 한 잔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부드러운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마 해성 명문가의 아가씨일 것이다.장소월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조심하지 않아 뜨거운 물에 손이 데었다.조금 전 파티장에서 걸어 나온 허이경은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입을 닫았다.강영수가 못마땅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자 허이경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가 설명하려고 할 때, 장소월이 말했다.“바쁜 것 같으니까 더 방해하지 않을게. 얼른 호텔에 돌아가 쉬어.”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분명 똑똑히 들었음에도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순간 강영수에게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의 눈동자엔 약간의 실망감도 스쳐 지나갔다.강영수가 핸드폰을 정장 호주머니에 넣고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으며 허이경을 무시해버린 채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통화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강영수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조심하세요. 당신은 아직 나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해요.”그때 밖에 나갔던 진봉이 핑크색 선물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소월 아가씨가 원하셨던 선물 사 왔습니다. 하지만 무슨 맛을 원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종류별로 모두 사 왔습니다.”강영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잘했어.”그날의 통화 이후 두
장소월의 존재가 강영수에게 구원이라면, 소현아는 장소월에게 치유 같은 존재였다.그녀는 소현아의 성적을 본 적이 있다. 2반에서 가장 마지막 등수였고 심지어 6반에서도 꼴등일 것이다.장소월은 성적이 가장 낮은 학생이 강용인 줄로 알았으나 알고 보니 소현아였다.소현아는 몸이 아파 저번 기말고사를 보지 못했다. 하여 공표란에 그녀의 성적이 없었던 것이다.이런 성적이라면 2반이 아니라 6반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 원인에 대해 장소월은 묻지 않았다.점심밥을 먹고 난 뒤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도서관에 갔다. 예전 그녀는 매일 강용에게 과외를 해주었지만 이젠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만 하기로 했다. 사실 지금 그의 성적으로도 충분히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다. 그는 저번 시험에서 2반 10등 안쪽에 진입하기도 했다.최근 며칠간 강용은 계속 여자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왔고 장소월은 마치 방해꾼과도 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었다.오늘 장소월은 먼저 도서관에 도착해 강용이 오기 전까지 소현아를 가르쳤다.소현아는 정말...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소현아는 펜을 잡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소월아, 나 진짜 멍청하지? 아무리 가르쳐줘도 모르잖아.”“나 여러 차례 반을 바꿨었어. 그때마다 친구들이 다 날 바보라고 놀리더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머리가 나빴던 건 아니었어. 예전엔 진짜 총명했거든. 하지만 어렸을 적 고열을 앓았을 때, 가정형편이 너무 가난해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했어. 그 바람에 뇌를 다쳤고 기억력이 퇴화한 거야. 소월아, 걱정하지 마. 난 꼭 너처럼 노력할 거야. 저번에 네가 가르쳐준 문제는 이제 풀 수 있어.”장소월이 물었다.“반을 바꿨다고?”소현아는 한껏 고개를 떨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친구들이 날 바보라고 놀리고 괴롭혀서 연속 반을 바꿨어. 2반에 오니까 별로 괴롭히지 않더라고. 선생님께서 다시 반을 바꾸면 퇴학시키겠다고 하셨어.”그런 거였구나.“걱정하지 마. 이젠 아무도 널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강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꽤 높은 성적을 받았으니 이제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그때 여학생 몇 명이 책을 안고 장소월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너 아까 봤어? 강용의 3점 슛 진짜 멋있었어!”“봤어. 정말 멋있더라!”“같이 있던 여학생은 2반 설채윤이지?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일 오래 사귄 여자친구지? 예전 만났던 퀸카들은 다 일주일도 넘기지 못했잖아.”장소월의 존재를 눈치챈 그중 한 명의 여학생이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친구는 깜짝 놀라며 입을 닫았다.장소월은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루고 집중적으로 소현아를 가르쳤다.한 번으로 알아듣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알아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반복했다. 가끔씩 화가 날 때에도 그녀의 순진한 눈빛을 보면 이내 사르르 녹아내렸다.소현아를 가르치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시간 동안 한 페이지의 연습 문제 중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소월아, 나 너무 멍청하지?”소현아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장소월을 쳐다보았다.“아니야. 넌 총명해. 그저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네 성적은 예전의 강용보다 훨씬 더 높아. 당시 강용의 성적은 몇 개 과목을 합쳐도 몇십 점밖에 되지 않았어.”“정말이야?”장소월의 말에 위안을 받은 소현아가 물었다.“응. 강용이 해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어. 오늘 내가 가르쳐줬던 것들 집에 가서 다시 한번 풀어봐. 먼저 풀이 방법을 구상한 다음 펜을 들어.”“앞으로 또 나랑 도서관에 와줄 수 있어?”장소월은 소현아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그래.”전생에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성장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소현아처럼 귀여운 모습이겠지.만약 이런 딸이 있다면 장소월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쥐여줄 것이다.30분 뒤면 다음 수업이 시작된다.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도서관에서 나왔다. 1미
“야, 장소월, 네가 뭔데 우리 2반 일에 참견이야?”허경아가 책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친구들의 편에 서서 장소월을 비난했다. 장소월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설채윤과 함께 몰려다니는 패거리였다.“그러니까! 우린 소현아에게 심부름을 시킨 거지 너한테 시킨 게 아니야! 당장 너희 반으로 꺼져.”소현아는 덜컥 겁이 나 장소월의 앞을 막아섰다.“소월이는 괴롭히지 마. 내가 지금 가서 사 올게.”그녀는 이어 조심스레 장소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소월아, 난 괜찮으니까 돌아가. 이미 너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 나 때문에 너한테 피해를 줄 순 없어.”그들과 맞서던 3, 5명의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장소월의 노트를 펼쳐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같은 바보가 이해할 수 있겠어?”“만지지 마. 그건 장소월의 노트야.”소현아가 빼앗으려고 손을 뻗자 그들은 원숭이를 놀리는 것처럼 노트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녀를 농락했다.“네가 만지지 말라고 하면 만지지 말아야 해? 난 찢기까지 할 건데?”소현아가다급히 말했다.“안 돼.”다른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상대가 도발적인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노트 위쪽을 살짝 찢었다.장소월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찢기 전에 첫 장을 펼쳐봐. 누구 이름이 쓰여 있을까?”“잘난 척하기는. 고작 누더기 노트일 뿐이면서.”첫 장을 펼쳐 본 허정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뭐 대단한 거라고.”허정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다시 노트를 내려놓고 돌아섰다.장소월이 말했다.“거기 서!”“너... 또 뭘 하려는 건데?”“현아한테 사과해.”“내가 왜 사과까지 해야 하는데?”“누구의 이름이 쓰여있는지 봤잖아.”장소월이 단호히 말했다.허정아는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소현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소현아.”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마음속으론 장소월을 인정하지 않았다. 몸을 팔며 남자에게 꼬리친 주제에 뭐가
장소월이 강용에게 문 앞까지 끌려갔을 때, 선생님이 교실에 도착했다.“강용, 영어 수업 곧 시작하는데 교실에 안 들어올 거야?”“쓸데없는 일에 상관하지 말고 꺼지세요.”강용이 거칠게 쏘아붙였다.선생님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표출해내지 못하고 곧바로 교실에 들어갔다.강용은 학교에서 소문난 망나니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전보단 많이 나아지긴 했다.장소월이 말했다.“할 말 있으면 수업 끝나고 해. 나 수업 들어야 해.”강용의 힘에 짓눌린 장소월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장소월을 벽에 밀쳐넣고는 다른 한 손으로 벽을 집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아까 그 멍청이한테 한 말 무슨 뜻이야?”장소월이 예쁜 눈썹을 찌푸렸다.“걔한테도 이름이 있어. 존중해줘.”강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소현아!”그의 눈빛에 짜증스러움이 잔뜩 피어올랐다.“왜 걔한테 과외를 해주겠다는 거야!”장소월은 그와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도 이미 교실에 들어가셨고 지금 그들의 자세는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그녀는 그를 힘껏 밀어내고는 차갑게 말했다.“소현아는 내... 친구야.”장소월의 머릿속에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불러주던 소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난 네가 연애하는 거 반대하지 않아. 앞으로 난 매일 도서관에서 현아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거야. 넌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해. 지금의 네 성적으로도 충분히 서울대에 갈 수 있으니까. 설채윤을 데려오는 것도 반대 안 해. 하지만 난 너만 가르칠 거야. 내겐 설채윤까지 가르칠 의무는 없으니까. 차라리 네가 직접 가르쳐. 또한 난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난 그저 네가 서울대에 진학하는 걸 돕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야... 다른 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강용은 진지하고도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 본래 희미하게 빛나던 등불이 돌연 불어온 바람에 휙 꺼져버
장소월은 15분이 지난 다음에야 학교에서 나가 강씨 집안에서 보낸 차에 탔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강영수로부터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그녀가 답장을 하려는 순간, 돌연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아버지.”장해진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그녀에게 직접 걸어온 것이었다.“연우한테 들었는데 인씨 가문에서 파티에 너도 초대했다며?”핸드폰 너머의 그 사람은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네.”“강 대표는 아직 해성에서 돌아오지 않아 참석하지 못할 거야. 오늘 집에 돌아와 준비하고 내일 나랑 같이 가자. 너한테 소개시켜줄 사람들도 있어.”“하지만...”모기처럼 기어들어가는 세 글자를 내뱉은 뒤, 장소월은 이내 말을 바꾸었다.“네. 아버지. 알겠어요.”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이유로든,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다.장소월은 운전 기사에게 말해 방향을 돌려 장씨 가문 남원 별장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운전기사를 돌려보냈다.인씨 집안의 인맥이라면 아마 서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을 초대했을 것이다.장해진의 목적은 서울 상업계에 자신의 딸과 강영수의 관계를 공표하는 것이다.예전 강영수 또한 그녀와 함께 여러 차례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모두 그녀에게 거절당했다. 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강영수는 종래로 그녀에게 내키지 않은 일을 강제로 시킨 적이 없다.하지만 장해진은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강한 압박 속에서 자라온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남원 별장에 들어가자 장소월의 눈에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그녀를 기다리는 듯했다.전연우, 백윤서, 강만옥도 자리하고 있었다. 장해진이 그녀에게 말했다.“손 씻고 와서 밥 먹어.”“네. 아버지.”장소월이 책가방을 벗자 은경애가 받아안았다.강만옥이 일어나 그릇에 국을 담고는 장소월의 자리에 놓아주었다.“강씨 저택에서 잘 지냈어? 안
그 대답에 장해진의 찌푸렸던 이마가 스르르 풀렸다.“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야. 남녀 간의 일은 만옥 이모가 너한테 가르쳐줄 거야. 될수록 3년 안에 아이를 가져.”아, 아이...장소월은 때때로 자신이 정말 가여웠다.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그녀는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전생에도 없었고, 이번 생에도 없을 것이다. 두 번 모두...장소월에게 남은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강만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이다.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있을 때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그녀는 악마라도 만난 듯 잔뜩 경계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소월아, 자?”강만옥의 목소리에 장소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강만옥이 박스 하나를 안고 안으로 들어왔다.“이모, 무슨 일 있으세요?”“네 아버지가 이걸 가져다주라고 해서 왔어.”강만옥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장소월이 문을 닫고 상자를 열어보니 CD 하나가 들어있었다.“오늘 밤 이걸 봐.”CD에 붙어있는 그림을 본 순간 장소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위엔 알아볼 수 없는 일본어와 섹시한 차림의 여자들이 야릇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장소월은 황당함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강만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자로서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야. 미리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여자에겐 얼굴뿐만 아니라 침대 위에서의 스킬도 중요해. 소월아, 넌 이미 예쁜 얼굴을 타고났어. 절대 그 미모를 낭비하면 안 돼.”그녀의 말엔 다른 의미도 담겨 있는 듯했으나 장소월은 모르는 척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강만옥은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섰다.아버지는 그녀를 강만옥과 같은 여자로 만들려는 건가? 얼굴과 몸만으로 남자를 유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