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시윤은 이미 대단한 성적이었다. 평소 숙제를 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수업시간에 가끔 오지 않았다.그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시험을 이렇게 잘 볼 수 있다니, 역시나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다.인시윤은 오늘도 올림피아드 팀에 오지 않았고, 고건우도 익숙한 듯 수업을 시작했다.마지막 수업은 학급 회의였다.한결은 이번 주 토요일에 학부모 회의가 있으니 모든 학부모가 참가하여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 외에도 겨울 방학 캠프도 있으니 참가하려면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6반뿐만 아니라 제운고등학교 전체를 대상한 활동이었다.장소월은 서류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학부모회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장해진은 한 번도 학부모 회의에 참여한 적이 없었고, 예전에는 장소월이 전연우에게 학부모로 참석하라고 졸랐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겨울 방학 캠프는 생각해볼 만 했다. 캠프 마지막 날이 바로 설 전날이었다.설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든 말든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마지막 수업이 끝났지만, 다른 반처럼 일찍 수업을 마칠 수 있는 특권이 없었다.장소월은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향했다.장소월은 하얀색 롱패딩 점퍼를 입고, 예쁜 얼굴 전체가 추위에 붉게 물들여 모자 속에 숨어있었다.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모자를 벗겼고,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곁에 사람이 서 있었다.그를 본 장소월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뭐하러 가?”“밥 먹으러.”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학교 끝났는데 집에 안 가고?”강용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메고 있지 않았다. 설마 그도 식당으로 가는 길일까?장소월은 갑자기 식당에 가고 싶지 않았다.“이번 겨울 캠프 너 갈 거야?”‘나한테 이런 건 왜 묻는 거야?’장소월은 대충 둘러댔다.“몰라.”“모른다고? 대체 간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갈 줄 알고 가기 싫은 거야?”‘이 자식이 지금 잰말놀이 하는 거야?’장소월
“아가씨, 만족하세요?”“난 그런 뜻이 아니야.”장소월은 가득한 닭고기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다 먹지도 못할 양이었다.“줘도 싫다는 거야? 쯧쯧, 시중들기 정말 어렵네!”장소월은 단지 자신의 불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강용은 어디서 공부할 힘을 얻었는지 갑자기 과외를 해달라고 했다.평소 이 시간에 그는 술집에서 미녀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유흥을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동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6시가 되자 날씨는 이미 어두워졌다.그들은 강의동으로 걸어갔다.“그냥 내일 해. 아직 몸도 낫지 않았는데 하루 쉬어.”“10분 줄게. 안 내려오면 내가 직접 올라가서 널 잡아 올 거야.”장소월은 강용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장소월은 자리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책가방을 메고 떠나려 했다. 나가려는데 갑자기 인시윤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가려고? 나 방금 연우 오빠한테 전화했어, 나랑 같이 가.”“집이 아니라 도서관에 자료 찾으러 가는 거야.”인시윤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에이, 너희 오빠한테 이미 같이 저녁 식사하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내가 중간에서 두 사람 사이 갈등을 완화시켜 줄 테니까 걱정 마. 오늘 저녁 내가 너희 오빠 제대로 혼내 줄게. 앞으로 다시는 너 괴롭히지 못하게. 여자 혼자 밖에서 얼마나 위험해? 그냥 집으로 돌아가. 우리 오빠가 알면 얼마나 걱정하겠어?”‘두 사람 벌써 이 정도로 친해진 거야? 전연우가 그것까지 알려줬다고?’장소월과 전연우 사이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었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손을 빼고 말했다.“시윤아, 네가 오해했어. 나랑 오빠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어. 우리 집 아직 인테리어가 끝나지 않았고, 오빠 집에 사는 게 불편해서 따로 집을 잡은 거야. 그냥 며칠만 지낼 거야. 게다가 학교랑도 가까워서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오히려 편해. 이걸 너희 오빠가 아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어
“너 설마 우리 오빠와 강용을 모두 네 어장에 넣고 양다리를 걸치려는 거 아니지? 장소월...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차라리 속 시원히 말해보지 그래.”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거였어?그렇다면 어젯밤 그녀와 강용이 함께 있는 걸 보았던 강영수도 그렇게 생각한 걸까? 그녀가 한쪽에 발 하나씩 걸치고 두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말이다.장소월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네 그 질문에 대해 오늘 이 자리에서 똑똑히 말해줄게.”“내가 누구를 만나 뭘 하든 다 내 개인의 일이야.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네 오빠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는 거 알아. 나도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에 대한 영수의 마음...”때문은 아니야.“강용을 멀리해야 한다고? 그건 너희 집안일이지 나 같은 외인과는 전혀 상관없어. 만약 네가 나한테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내 결정은 오늘과 똑같을 거야.”지금은 그녀가 강용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다.설사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들에겐 간섭할 권리 따위 없다.사실 알고 보면 강용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강용은 학교에서 돌아다니는 불쌍한 야생 고양이한테도 먹이를 챙겨주고, 음식을 담아주는 식당 아주머니한테도 매번 감사 인사를 하곤 한다.또한 아침에 채소를 팔러 나가는 할머니의 수레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몰래 뒤에서 수레를 밀어 할머니를 돕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홀연히 사라진다...그는 절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하무인 사고뭉치 망나니가 아니다.“난 두렵지 않으니까 네 오빠한테 얘기해. 시윤아, 난 이미 내 인생의 계획을 세웠어. 그 누구도 내가 나아가는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없어. 서울대에 합격하는 거, 그거야말로 내가 목표로 삼고 해야 하는 일이야.”“난 아무한테도 마음을 주지 않아. 쓸데없는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네 오빠한텐 내가 분명히 얘기할게.”“밥은... 전연우랑 둘이서 먹어! 난 두 사람을 방해
도서관.장소월은 자신이 만든 수학 시험지 한 장을 꺼내 강용에게 건네주었다. 모두 기초적인 문제로 구성되어 있어 30분이면 풀 수 있는 반 장짜리 시험지였다.그녀는 강용이 문제를 푸는 동안 영어 단어를 외우고 논술 문제를 풀었다.강용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중도에 그의 곁으로 가지 않았다.30분이 지난 뒤, 그가 채 풀지 못한 것 같았지만 시험지를 가져와 살펴보았다. 가장 기초적인 공식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모양새였다.채점을 해보니 겨우 20점이었다. 그것도 답안지의 정연함을 높이 사 우정 점수를 준 것이었다.장소월은 점수를 시험지 오른쪽 위에 표기해놓고는 이해할 수 없음에 연속 한숨을 내쉬었다.“저기, 강용, 너 2년 동안 대체 뭘 한 거야?”강용은 펜을 툭 던지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놀았지!”“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하나도 모를 수가 있어? 너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내준 문제는 모두 수학 교과서 첫 페이지에 있는 문제야. 설마 책을 한 번도 펴보지 않은 거야?”“나랑 2년이나 같은 반에 다녔으면서 아직도 나에 대해 그렇게 몰라?”장소월은 당장에라도 그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애써 참으며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강용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왼손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톡톡 터치했다.“아직 반년이나 남았으니까 늦지 않았어. 네가 가르쳐줘. 난 최선을 다해 기억해볼게.”지난 2년은 그녀에게 있어 나쁜 기억만 가득할 뿐, 좋았던 기억은 이미 희미하게 사라져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숨겼다. 지금은 지난 일을 따질 때가 아니다.수능시험을 다 보고 나면 그들 사이엔 별다른 교류가 없을 것이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너 뭐 천재라도 돼? 지금 고작 이런 문제도 풀지 못하면서 서울대에 가겠다고? 네 성적으론 지방대도 과분해.”그에게 과외를 해주기 위해 그녀는 흥취반 수업도 빠졌다.장해진이 이 일을 안다면 또 욕
도서관에서 일렁이는 오싹함은 다름 아닌 전연우의 몸에서 풍겨 나온 것이었다.인시윤이 못마땅한 얼굴로 강용을 쳐다보았다.“과외는 무슨 과외야. 내가 보기엔 영락없이 연애를 하고 있는데. 소월아, 너 설마 정말 이 잡종을 좋아하게 되기라도 한 거야? 너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인시윤은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 발까지 동동 굴렀다.그녀는 이어 책상 위 시험지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20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강용, 넌 평생 우리 오빠 발아래에 밟혀 버러지로 살 거야.”강용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웃으며 말했다.“적어도 난 아부하며 머리를 조아리다가 도리어 처참히 배신당하진 않아.”“나쁜 놈!”인시윤이 돌연 손을 번쩍 들고 강용의 뺨을 내리쳤다.“철썩!”하는 소리가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도서관엔 아직 몇 사람이 남아있었는데 소리를 듣자마자 모두 그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고작 딴따라 자식놈이?”인시윤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강용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한없이 얕잡아보는 자세로 말이다.“강용도 똑같은 사람이야!”순간 장소월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강용을 자신의 등 뒤로 잡아당겼다.“이곳은 도서관이야. 너희들은 나한테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부도 방해했어. 지금 당장 나가!”인시윤이 말했다.“너 이렇게 두둔하며 나설 정도로 강용을 좋아하는 거야? 강용, 너 대체 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그래. 난 강용을 보호하고 싶어.”강용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장소월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당당히 한 사람을 지키는 순간이었다.인시윤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지금 네 행동이 나뿐만 아니라 강씨 집안까지도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다는 거 알아? 너희 장씨 집안은 전연우가 없었다면 일찌감치 몰락하고 말았을 거야. 그러고도 네 부잣집 아가씨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난 정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
장소월은 몇 명이 듣고 있든 전혀 개의치 않고 또박또박 말해나갔다.그녀는 강용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하지만 지금!이 순간만큼은... 강용의 편에 서고 싶었다.강용은 목숨까지 걸고 그녀를 구했으니, 용기를 내어 그를 보호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더욱이 그는 억울하게 인시윤에게 따귀까지 맞지 않았던가.장소월은 책을 가방에 넣고 강용과 함께 도서관을 나섰다.인시윤이 소리쳤다.“거기 서!”하지만 그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다 끝났어요?”전연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가웠다.깊은 눈동자 속에 살을 파고들 듯한 기세의 한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인시윤은 본래 따뜻했던 도서관의 온도가 확연히 차가워지고 있음을 느꼈다.그녀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오싹한 분위기였다.“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전연우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가 너무 빨리 걸어 인시윤은 뛰어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다.그녀는 그가 행여 먼저 가버릴까 봐 급히 조수석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하지만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시동도 걸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난 당신을 도우러 온 거예요. 장소월을 데리고 가지 못한 화를 왜 나한테 내는 거예요!”인시윤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잔뜩 섞여 있었다. 처음으로 한 사람에게 이런 말투와 방식으로 말하는 순간이었다.그동안의 부드러운 말투는 도저히 그의 앞에서 유지할 수가 없었다.“전연우 씨... 소월이가 조금 전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에요?”그녀가 전연우의 준수하고 조각 같은 옆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그 질문의 답을 알고 싶어요?”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순간 인시윤의 심장이 요동쳤다.그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깊은 눈동자에 빠져버린 것이다.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알고 싶지 않아요. 연우 씨 집안일이니 저랑은 상관없어요. 연우 씨... 시간이 늦었으니까 빨리 절 집에 데려다주세요. 너무 졸려요.”말을 마친 인시윤이 손으로 입을 막고 하품을 했다. 조금 전 인시
장소월이 물었다.“안 씻어?”강용이 몸을 일으키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너 뭐 하려고? 흑심은 버려! 네가 날 덮칠까 봐 겁나.”저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가운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새로 산 거야. 한 번도 입지 않았어.”강용이 가운을 받으며 말했다.“핑크색이네.”장소월이 먼저 세수를 하러 들어갔다. 어제 강용 때문에 제대로 씻지 못한 탓에 오늘 학교에서 샤워를 했었다.그녀는 얼른 씻고 난 뒤 화장실을 그에게 양보했다.그녀가 방으로 돌아가 문들 닫으려고 할 때.“나도 서울대에 갈 거야.”등 뒤에서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알았어. 이제 자. 잘 자.”“잘 자.”다음 날 아침.정리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장소월의 눈에 주방에 서 있는 남자의 건장한 몸집이 들어왔다. 한 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꺼내고 있었다.지금까지 강용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도련님인 줄로 여겼다.장소월은 처음으로 남자가 주방에서 밥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어떤 남자들은 뼛속 깊이 주방일은 여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그 사람 역시 단 한 번도 그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준 적이 없다.“빨리 와서 받아.”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장소월은 책가방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뺨에 난 손자국은 많이 옅어졌지만 다른 곳은 여전히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뭘 삶는 거야?”“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던데 내가 뭘 삶겠어!”마지막 남은 계란 하나도 어제 그가 먹어버렸다.하여 있는 거라곤 고추와 토마토밖에 없었다.장소월은 토마토의 붉은색 과즙과 어우러진 국수를 맛보았다. 조금 시긴 했지만 꽤나 맛있었다.그녀는 지금까지 토마토 고추 볶음으로 만든 국수 요리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괜찮네. 맛있어.”“한 그릇에 천 원이야.”장소월은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너 강도야? 됐어. 돌려줄게. 안 먹어.”강용은 앞치마를
큰비가 내리던 날, 그녀는 4,5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였었다.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은 거의 모두 찢겨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사진 속 얼굴은 영락없이 장소월이었다.그녀는 이 사진이 어디에서 온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소문은 빠르게 퍼져 이제 학교 모든 학생들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가 강간을 당한 줄로 여겼다.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지나가던 학생이 바이러스라도 만난 듯 그녀를 멀리 피했다.“어쩐지 학교를 3개월이나 나오지 않더라니... 더러워!”장소월은 분노를 꾹 참으며 교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결이 그녀를 교무실로 불렀다.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들까지도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단독 상담실.한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지금 학교에 떠돌고 있는 얘기 너도 들었지? 나한테 설명해줄 거 있어?”장소월은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모두 다 사실이야?”“제가 이제 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고 한들 소용 있나요?”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다. 때문에 그 어떤 설명도 그들에겐 아무 소용도 없다.한결은 한동안 침묵하고는 말했다.“너 요즘 시끄러운 일들이 너무 많았어. 학교 윗선에서 이번 루머가 해결하기 전까지 널 휴학시키기로 결정했어. 올림피아드 팀 쪽은 고 선생님이 한 명을 더 모집할 거야. 이 결정에 반대 의견 있어?”“없습니다.”“그래. 그럼 부모님한테 연락해 데리러 오시라고 해.”“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게요.”장소월은 교실에 돌아와 짐을 챙겼다. 그녀는 시험지를 풀고 있는 학생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용히 행동했다.오늘 인시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떠나갈 때, 모든 반들은 한창 수업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1반 앞을 지나가니 1반 모든 학생들이 걸어 나왔다.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선생님이 계셨음에도 말이다.“너희들 뭐 하는 거야, 얼른 자리에 돌아와 앉아!”선생님의 호통에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몇 명의 남자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강용, 말조심해. 애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강용이 말했다.“안 그래도 수상쩍었어. 자기 자식도 제대로 보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게다가 사방팔방 아무 데나 뛰어다니게 놔두고... 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잖아.”“아가씨,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장소월이 말했다. “강용, 몇 번이나 확인했잖아. 그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야.” “별이도 아니야. 내가 별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저번에 살펴봤는데 팔에 검은 몽고반점도 없었어. 강용, 네가 나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야.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지금 장소월의 눈에는 오직 아이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물었다. “밥 먹었어? 월아?” “아!” 아이가 소리쳤다. 장소월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만약... 그녀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현아는 밥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강용, 왜 안 먹어! 내 배 속 아기는 벌써 많이 먹었지롱. 안 먹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릴 거야.” 강용은 한숨을 푹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불러. 입맛 없어.” “강용!” 장소월이 그를 불렀다. 소현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강용 왜 저래?”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며 말했다.“괜찮아, 이따가 내가 강용한테 밥 가져다줄게. 현아는 먼저 먹어.” “괜찮아, 내가 하면 돼.” 소현아는 밥을 몇 숟가락 급하게 퍼먹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 강용의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았다. “강용 이 속 좁은 놈, 내가 닭 다리 뺏어 먹을까 봐 심통이 났나 보네. 닭 다리 먹고 싶으면 말하면 되지.”장소월이 당부했다. “조심해서 올라가, 넘어지지 않게. 이따가 내가 다시 보러 갈게.”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소현아가 그릇을 들고 올라가는 동안 장소월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늘 덜렁거리기만 하는
장소월은 근심 걱정 없이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서울에서 벗어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 없이... 계속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소월에겐 너무나도 얻기 힘든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됐어. 우선 밥부터 먹자. 이따가 놀러 가기로 했잖아.”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나 팔짝팔짝 뛰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얼른 밥 먹자. 아니... 누가 먼저 다 먹는지 시합할까?” 강용은 장소월 옆에 앉아 그녀에게 국을 떠주었다. “너 시끄러운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날씨가 너무 더워서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몸 그렇게까지 허약하지 않아.”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으로 향했다. 어린아이 한 명이 손에 빵 조각을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장소월의 다리를 잡고 철퍼덕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 “월아, 네 아빠는 어디 계셔? 왜 같이 안 왔어?” 장소월은 한 손으로 아이를 힘겹게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월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강용은 바닥에 떨어진 빵 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세상에, 어떻게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아빠는 뭐 하는 거야, 아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강용은 일어나 아이를 안아 들려 했다.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장소월은 망설이다 말했다.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볼살도 통통하니 귀엽고, 현아 어렸을 때랑 많이 닮았어. 머리 예쁘게 땋고 나비 머리핀도 꽂았네.”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날 그녀가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전연우는 그녀를 남원 별장에 가두는 족쇄로 별이를 이
그녀는... 여전히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전연우는 불이 꺼진 어두운 방에 외로이 홀로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수면제 덕분인지 점심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오늘의 거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 매일 길가에서 채소를 팔던 노점상들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장소월이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강용은 국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소현아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강용을 졸졸 따라다니며 뜨거울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릇 아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강용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바보야! 국 쏟아지면 어쩌려고 그래. 저리 비켜, 귀찮게 하지 말고.”소현아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네가 넘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국 몸에 쏟으면 엄청 뜨겁단 말이야.” 그녀는 계속하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향해 부채질을 했다. “조심해! 국 쏟으면 안 돼. 빨리 내려놔.”강용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못마땅한 듯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장소월을 발견한 강용이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깼어? 웬일로 늦잠까지 잤네. 내려와서 내가 만든 생선국 먹어봐.” 장소월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수고했어. 오늘 딱히 할 일 없으니까 이따가 오아시스에 놀러 가자.”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좋아, 좋아!” 강용이 장소월에게 그릇과 젓가락을 건네주자 소현아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거는? 강용, 내 것도 줘.” “너 손 없어? 임신한 거지, 손발이 잘린 건 아니잖아. 직접 가져와.”장소월이 말했다. “내가 가져다줄게.” 장소월이 일어나려 하자 강용은 그녀를 눌러 앉혔다. “됐어, 둘 다 아주 상전이시구먼. 노비인 내가 모셔야지 어쩌겠어!” “그게 아니라... 다음에는 내가 가져다줄게.” 소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소월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현아야, 강용은 철없는 어린아
거리에는 아직 적잖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때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소월에게는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전생에서 그녀는 이 종소리와 함께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지나는 순간, ‘펑’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어 연이어 폭죽들이 터지며 찬란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깜빡 잊고 있었다. 오늘은 불꽃 축제를 하는 날이라는 걸. 보아하니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복도에서 잔뜩 들뜬 소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월아, 소월아, 빨리 봐, 불꽃 놀이한다.” “정말 예뻐!” “와, 강용, 빨리 봐. 여기 불꽃놀이 서울에서 하던 거랑 비슷하게 예뻐.” “우리 밖에 나가서 놀면 안 돼?” 강용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는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잠들었나? 장소월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수면제를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 들었다. 평소에는 두 알을 먹었지만, 지금은 네 알을 먹어야 한다. 이미 내성이 생겨 두 알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약을 삼키자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얇은 커튼 밖으로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질 줄 알았던 불꽃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렇게 거리는 이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거야. 하나도 안 예뻤어. 이제 잘 거야.” “강용, 잘 자.” 강용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바보.” 이어 그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냉담한 태도에도 소현아는 신나는 듯 폴짝폴짝 뛰며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강용이 그녀에게 웃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소현아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임신 4개월 된 둥그런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 태어나면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두 명이나 있어
별이는 몸을 기울여 장소월에게 팔을 뻗으며 옹알거렸다.“엄마... 안아...”“저 아이 참 신기해요. 낯도 안 가리고 저한테 엄마라고 부르네요”가짜 손이준 행세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연우였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어렸을 때 병을 앓아서 뇌 손상이 좀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장소월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는 휴지로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었다. “다시 엄마를 찾아줄 생각은 안 해봤어요? 지금은 너무 어려서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야 아빠도 덜 힘들 텐데요.” “그 사람 돌아올 겁니다.” 국수를 먹고 있던 강용은 그 말에 사레가 들려 연이어 재채기를 했다. 장소월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자 소현아도 그녀를 따라 강용의 등을 두드렸다. 장소월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소현아도 똑같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강용은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한 사랑이네요.”장소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강용.”“알았어. 입 다물게.” 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었지? 시간이 늦었어. 이만 돌아가자.” “만둣국 잘 먹었습니다. 강용, 식삿값 드려.” 다른 두 사람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강용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더 얹어 주었다. “힘내세요, 형님.” 그들이 떠난 후, 전연우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신이 나 방긋방긋 웃던 별이는 곧바로 서러운 표정으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엄마...” 전연우가 말했다. “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녀는 국수엔 거의 손대지 않고 만두만 모두 비웠다. 전연우는 그녀가 남긴 국수를 남김없이 모두 먹어치웠다. 장소월은 집에 돌아온 뒤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강용, 차표 예매해. 여긴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돼.” 소현아는 졸린 듯 눈을 비볐다.“우리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데?” 장소월이 대답했다. “난 어디든 좋아.
“와, 이 아이 정말 귀여워. 소월아, 빨리 봐봐. 나도 나중에 딸 낳고 싶어. 매일 예쁘게 꾸며주고... 우리 세 명이서 같이 쇼핑도 다니자. 강용은 아빠, 나는 엄마, 소월이도 아기 엄마가 되는 거야.” 거의 정리가 끝나갈 무렵, 강용이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꿈이 아주 야무지네.” 장소월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우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아직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만지지 말아요.” 장소월은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그가 부엌에서 국수 네 그릇을 들고 나와 탁자 위에 놓았다.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소현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왠지 소월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하던데.” “참,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그가 대답했다. “손이준이에요.” 강용이 물었다. “한국인이에요?” “사정이 있어 한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어요.” 소현아가 또 물었다. “그럼 아기 엄마는 어디 갔어요?” 고개를 젓는 장소월을 본 소현아는 맹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소월아, 왜 그래? 아, 알겠다. 이런 걸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거지!” “아저씨,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예의가 없었어요.” 강용이 손을 들어 소현아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쳤다. “너 정말 바보구나.” 그는 아이를 안아 올리고 숨김없이 대답했다. “아내가 돈 들고 도망갔어요.” 강용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소현아는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정말 딱하시네요!” “아기도 너무 불쌍해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다니.” 손이준이 말했다. “미안함의 의미로 국수를 끓였어요.” 장소월이 바로 말했다.“괜찮습니다.”하지만 소현아는 잔뜩 들뜬 얼굴로 손뼉을 쳤다. “좋아요, 좋아요.” 강용이 삐딱하게 물었다. “그렇게 좋아?
강용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연하게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네요!” “손님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죠? 아까 싸움을 벌였던 놈들은 이 지역 갱단이에요. 그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부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벌어놓고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벌어진 거더라고요. 이곳 밤은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고를 꺼내 등에 나 있는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강용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귀로 들었죠.” 그의 등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 두 군데가 더 있었다. 장소월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 아까는 제가 신세를 졌어요.” 그는 차갑게 거절했다. “됐어요. 당신들 같은 외지인들은 알아서 몸조심이나 하세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다. 조금 전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이미 경찰차에 태워져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경찰들과 현지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아는 무서움에 딸꾹질을 하며 장소월의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월아, 저 사람들 뭐라고 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묻는 것 같아. 저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설명해 주고 있어.” 바깥에 있던 가게 사장도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시끄러움이 가라앉은 뒤 문밖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했고, 아까 총을 맞은 사람의 허연 뇌수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경찰들이 떠나자 그가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돼요.” 이어 그는 부엌에서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핏자국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그의 분주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느낌이 틀린 걸까? 그래.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연우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분명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정말로 전연우라면 저토록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밤 8시 30분, 강용은 갑자기 확인하려는 충동이 생겼는지 야식을 먹으러 건너편 국숫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대에는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막 근처라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녔지만, 밤에는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장소월은 니트 롱스커트와 옅은 색 코트 차림에, 목에 두른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여행 온 한국인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년 이상 머무른 주민들이었다. 가게 밖에선 손님들이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야식을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장이 기타를 들고 이곳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장소월은 거의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간신히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꼬치구이를 만들 때 피어오른 짙은 연기가 매캐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아는 임신 중이라 이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따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주었다. 장소월은 또다시 낮에 주문했던 만둣국을 시켰다. 가게에는 종업원이 한 명, 요리사가 두 명 있었다. 만둣국이 나오자 장소월은 만두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강용이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럼 말해 봐. 내가 만든 거랑 이것 중에 뭐가 더 맛있어? 말 잘해. 아니면 다신 안 해줄 거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 “그래야지.” “다 못 먹겠으면 나한테 줘. 먹던 거라도 상관없어.” 이 만두의 맛, 그리고 안에 들어간 속 재료까지, 전생에 그녀가 만들었던 만두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갑자기 앞 테이블에 있던 술 취한 남자 두 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먹까지 오가기 시작하자 사장이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 결국 두 사람 싸움은 패싸움으로 번졌고,
장소월이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간단히 대답을 마치고 차갑게 몸을 돌렸다. 강용이 탁자 위에 국수를 올려놓았다.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국수 위에 떠 있는 파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용은 재빨리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너 많이 못 먹잖아. 남은 건 내가 처리해줄게.” 소현아가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위층에서 내려와 킁킁거리며 말했다.“음! 맛있는 냄새! 소월아, 뭐 먹고 있어? 나도 먹을래.” “바보야, 정신 차려! 겨우 국수 한 그릇인데, 세 명이서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소현아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조금만 먹을게.” 소현아는 얼른 달려가 젓가락을 가져왔고,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장소월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강용이 말했다. “국물만 좀 남겨줘.” 소현아가 말했다. “나도 국물.” “파 싫으면 나한테 줘.” “파 싫으면 나한테 줘.” “바보야, 남의 말은 왜 따라해!”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얘 나한테 욕했어. 그러니까 얘한테 면 좀 조금만 주고 나한테 많이 줘.”장소월이 말했다. “그래. 내 국수 나눠줄게.” “역시 소월이가 최고야!” 건너편 국숫집 안,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별이는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아이 변장을 하고 있어 본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딸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넌 계속 이런 모습으로 지내.” 별이는 손으로 유리를 긁으며 작은 얼굴 전체를 유리에 바짝 붙인 채 조용히 맞은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눌한 발음으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엄마...”“괜찮아, 곧 만나게 될 거야.” “소월아...” 장소월은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줄곧 지워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최근 예민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걸까. 세 사람은 국수 한 그릇을 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