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용 씨.”장 선생이 안으로 들어서자 서민용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엔 극도의 불안감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냥 일상적인 검사를 하러 왔습니다. 긴장하실 필요 없으세요.”그는 진찰 기구를 꺼내 검사를 시작했다.서민용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마치 억지로 힘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장 선생은 수년간 의사 생활을 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서민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반복해 굽혔다 폈다 하는 오른손 검지에 시선을 멈추었다.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장 선생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고 그의 손가락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가져갔다.서민용은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에 몇 글자를 끄적였다.[죽여주세요.]장 선생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서민용 씨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요.”서민용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서철용.]장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서 선생님도 결정할 수 없으세요.”그는 친절히 서민용에게 말해주었다. “서민용 씨, 현재 당신의 생사를 좌우하는 사람은 문 앞에 있는 저 여자분입니다. 저분이 환자분을 보내주지 않는 한, 그 누가 와도 소용없을 겁니다.”배은란의 한마디면 서철용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서민용의 목숨과 맞바꿀 것이다.서민용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거뭇하게 메마른 눈동자로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장 선생은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환자분 마음 이해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건 죽는 것보다도 못하겠죠. 하지만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서민용이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배은란의 눈에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서민용이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자 배은란은 그를 위해 간병인을 고용하고 자신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며칠 후, 간병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아왔다.“저기요. 환자분과 이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눈동자에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는 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사랑해.]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너무 울어서 이제 더 이상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알고 있었다고, 줄곧 알고 있었다고 표현할 뿐이었다.그녀는 서민용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서민용의 손가락이 멈추었다.현재 그의 몸 상태로는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로를 느꼈다.배은란의 호흡이 안정되자 그는 다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배은란은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가락 앞쪽에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하지만 서민용은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서민용의 눈빛에서 더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짙은 그 감정에 압도되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민용 씨...” 배은란의 마음에 극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서민용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다시 글자를 써 내려갔다.[나 보내줘.]배은란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신 고개를 저었다.“당신 나을 수 있어. 철용 씨가 분명 말했단 말이야, 심장 수술까지 마치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서민용은 잔잔하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의 결심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배은란은 더 이상 그를 마주하고 있을 수 없어 입을 가리고 복도로 뛰어나가 목 놓아 울었다.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병인이 서민용의 소변 주머니를 갈아주는 소리였다.배은란은 유리창을 통해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서민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마음도 함께 저려왔다.예전에도 그랬었다.서민용이 전신 마비로 침대에 누워 지내며 자신의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 배은란은 인내심을 갖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었지만, 돌연 어느 날 그에게 쫓겨났었다.그 후로는 도우미들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서민용은 그녀에게 자신
그가 전화를 걸기도 전에 장 선생으로부터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마지막 밸런타인데이 맘껏 즐기세요. 후회 남기지 말고.]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렇게 할 일이 없어?]상대방은 답장하지 않았다.배은란은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서철용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서민용 재주도 좋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널 이렇게 울리다니.”그는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배은란이 입술을 질근 깨물며 말했다.“그 사람 때문 아니야.”서철용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아니면 누구겠어? 배은란, 너 말고 누가 그 말에 속겠어?”배은란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철용이 입을 열었다.“배고프네. 뭐 좀 먹으러 가자.”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배은란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배은란이 담담하게 말했다. “혼자 가. 난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해.”서철용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서민용 살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안 했잖아. 밥 한 끼 같이 먹어주는 것도 싫어?”배은란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결국 그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다가왔다.“주문하시겠습니까? 저희 가게에서 새로 출시한 커플 세트가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배은란이 거절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그걸로 주세요.”그는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위해 죽음까지 결심했는데, 이 정도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또 무슨 꿍꿍이야?” 배은란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가득했다.서철용의 얼굴에 비웃음 섞인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여기까지 왔는데 뭘 먹든 무슨 의미가 있어? 나한테 다른 뜻이 있다고 해도 넌 앉아서 함께 밥을 먹어줄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아?”배은란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장소월, 31세, 암으로 사망.서울 강남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연우야, 오늘 의사선생님이 투석한다고 주사를 놓아주셨는데 너무 아팠어.」「나 곧 죽어. 보러 와 줄 거지?」「제발, 연우야...」장소월이 힘겹게 머리를 돌려 전화기의 메시지 창을 보고 있다. 메시지를 몇 개나 보냈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전연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의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두 눈은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사지는 이미 암 후유증으로 인해 썩어가고 있었다.몸을 까딱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임 간호사도 거의 보름 너머 와보지 않았다.원인: 더 이상 치료해도 의미 없음.그녀는 사실 엄살이 많았고 아픈 걸 끔찍이 무서워했다. 암 말기라 그녀는 매일 고통에 시달렸고 전연우에 대한 사랑만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하지만 이 넘쳐나던 사랑이 메말라가자 그녀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몸뚱이였다.장소월은 전화기를 꺼버리고 조용히 죽기를 기다렸다.고통으로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씁쓸하게 느껴졌다. 안 깐 힘을 다해 전연우와 결혼했고 8년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좋은 아내가 되려 했다. 모든 걸 다 바쳐 그 사람 곁을 지켰는데 그녀가 얻은 건 무엇인가?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났고 가난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녀가 죽으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전연우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다. 더 이상 징그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전연우, 드디어 소원대로 송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8개월 전.전연우의 생일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테이블 위 그녀가 정성껏 차린 음식들도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기다리던 전연우는 오지 않고 비서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비서가 싱겁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사장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큰 전 씨 집안 산업을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되잖아요.”장
새벽 12시.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악몽이라도 꾼 거야?”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전...전연우?”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다가오지 마!”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의사 불러줄게.”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
장소월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전연우에게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미안해. 전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오빠를 궁지로 내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깨달았어. 앞으로도 꼭 기억할게. 오빠는 오빠일 뿐이라고.”난리를 피우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나머지 아무런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전연우의 어두운 눈동자가 빛나더니 얇은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수작인 건가?전연우가 입을 열었다.“알았다니 다행이네. 밤새우지 말고 얼른 쉬어. 내일 데리러 올게.”그러고는 어른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장소월은 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돌아선 전연우의 눈에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차가움만이 남아 있었다.병실에서 나온 전연우는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장소월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간 그는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던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연우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다.아우디 한 대가 라이트를 킨 채로 있다. 조수석에는 긴 파마머리를 한 여인이 앉아있다. 섹시한 옷차림에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야릇한 붉은 입술은 담배연기를 뿜어냈다.여자의 시선은 차에 타는 남자의 잘빠진 몸을 따라 움직였다.“잘 달래줬어?”전연우가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했다. 그의 눈에 역겨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여자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아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내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여자가 매혹적으로 웃어 보이더니 다리를 꼬았다.“안 피면 어린 아가씨 향수 냄새를 어떻게 덮어.”아이라인을 그린 예쁜 눈이 차 안에 놓인 핑크색 향수병으로 향한다. 거기엔 글자가 쓰여있는 스티커도 붙여져 있었다: 장소월 전용 좌석.그녀가 살짝 웃어 보이더니 말한다.“18살밖에 안되는 여자애가 점유 욕은 굉장히 강하단 말이야. 왜? 장가에 데릴 사위로 들어갈 생
택시에 탄 지 한 시간쯤 지나 장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장소월은 집으로 들어가 신발을 바꿔 신었다. 아줌마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인츰 다가왔다.“아가씨, 왜 혼자에요? 연우 도련님이랑 같이 들어오시는 거 아니었어요?”아줌마는 아직 많이 젊었고 주름이 많지는 않았다.장소월은 대뜸 아줌마를 꼭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친자식처럼 아껴준 사람은 아줌마뿐이었다.그러나 뒤에는 전연우가 강제로 전가에 남겨 그와 송시아를 모시게 했다.“아줌마, 너무 보고 싶었어.”“어... 저기... 아가씨, 왜 그래요? 혹시 아직 다 안 나으신 건가요?”아줌마가 장소월을 밀어내더니 걱정스레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괜찮은 거 같은데?아줌마는 오늘 장소월이 약간 이상해 보였지만 딱히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다.“아니 그냥 안아보고 싶었어.”“이제 막 들어왔는데 배 안 고파요? 죽 끓여놨는데 얼른 오세요.”“입맛 없어, 그냥 올라가서 좀 잘래. 점심때 다시 불러줘!”밤을 꼬박 새우고 차를 탔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아 맞다, 아가씨, 아까 회장님 전화 오셨는데 집 들어오시면 다시 전화 달라고 했어요. 아가씨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이건 회장님 출장 가시기 전에 아가씨께 전달하라고 하신 거예요.”장소월은 실버 쇼핑카드를 건네받고는 머리를 끄덕인다.“응”장해진이 전연우 대신 그녀에게 주는 보상인가?장해진이 무슨 말을 꺼낼지 장소월은 알고 있었고 담담하게 전화를 걸었다.장해진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좋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허울뿐이었다...그는 사실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장해진이 늘 가업을 물려받을 아들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을. 하여 많은 애인을 두고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아들이나 딸을 낳지는 못했다.그래서 결국 전연우를 입양한 거다.나날이 커가고 있는 딸은 장해진에게 정략결혼의 도구일 뿐이었다.이익을 위해서라면 장해진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자신의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
그가 전화를 걸기도 전에 장 선생으로부터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마지막 밸런타인데이 맘껏 즐기세요. 후회 남기지 말고.]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렇게 할 일이 없어?]상대방은 답장하지 않았다.배은란은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서철용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서민용 재주도 좋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널 이렇게 울리다니.”그는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배은란이 입술을 질근 깨물며 말했다.“그 사람 때문 아니야.”서철용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아니면 누구겠어? 배은란, 너 말고 누가 그 말에 속겠어?”배은란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철용이 입을 열었다.“배고프네. 뭐 좀 먹으러 가자.”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배은란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배은란이 담담하게 말했다. “혼자 가. 난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해.”서철용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서민용 살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안 했잖아. 밥 한 끼 같이 먹어주는 것도 싫어?”배은란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결국 그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다가왔다.“주문하시겠습니까? 저희 가게에서 새로 출시한 커플 세트가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배은란이 거절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그걸로 주세요.”그는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위해 죽음까지 결심했는데, 이 정도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또 무슨 꿍꿍이야?” 배은란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가득했다.서철용의 얼굴에 비웃음 섞인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여기까지 왔는데 뭘 먹든 무슨 의미가 있어? 나한테 다른 뜻이 있다고 해도 넌 앉아서 함께 밥을 먹어줄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아?”배은란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눈동자에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는 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사랑해.]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너무 울어서 이제 더 이상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알고 있었다고, 줄곧 알고 있었다고 표현할 뿐이었다.그녀는 서민용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서민용의 손가락이 멈추었다.현재 그의 몸 상태로는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로를 느꼈다.배은란의 호흡이 안정되자 그는 다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배은란은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가락 앞쪽에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하지만 서민용은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서민용의 눈빛에서 더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짙은 그 감정에 압도되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민용 씨...” 배은란의 마음에 극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서민용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다시 글자를 써 내려갔다.[나 보내줘.]배은란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신 고개를 저었다.“당신 나을 수 있어. 철용 씨가 분명 말했단 말이야, 심장 수술까지 마치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서민용은 잔잔하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의 결심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배은란은 더 이상 그를 마주하고 있을 수 없어 입을 가리고 복도로 뛰어나가 목 놓아 울었다.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병인이 서민용의 소변 주머니를 갈아주는 소리였다.배은란은 유리창을 통해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서민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마음도 함께 저려왔다.예전에도 그랬었다.서민용이 전신 마비로 침대에 누워 지내며 자신의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 배은란은 인내심을 갖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었지만, 돌연 어느 날 그에게 쫓겨났었다.그 후로는 도우미들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서민용은 그녀에게 자신
“서민용 씨.”장 선생이 안으로 들어서자 서민용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엔 극도의 불안감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냥 일상적인 검사를 하러 왔습니다. 긴장하실 필요 없으세요.”그는 진찰 기구를 꺼내 검사를 시작했다.서민용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마치 억지로 힘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장 선생은 수년간 의사 생활을 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서민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반복해 굽혔다 폈다 하는 오른손 검지에 시선을 멈추었다.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장 선생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고 그의 손가락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가져갔다.서민용은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에 몇 글자를 끄적였다.[죽여주세요.]장 선생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서민용 씨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요.”서민용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서철용.]장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서 선생님도 결정할 수 없으세요.”그는 친절히 서민용에게 말해주었다. “서민용 씨, 현재 당신의 생사를 좌우하는 사람은 문 앞에 있는 저 여자분입니다. 저분이 환자분을 보내주지 않는 한, 그 누가 와도 소용없을 겁니다.”배은란의 한마디면 서철용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서민용의 목숨과 맞바꿀 것이다.서민용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거뭇하게 메마른 눈동자로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장 선생은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환자분 마음 이해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건 죽는 것보다도 못하겠죠. 하지만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서민용이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배은란의 눈에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서민용이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자 배은란은 그를 위해 간병인을 고용하고 자신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며칠 후, 간병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아왔다.“저기요. 환자분과 이
두 꼬마는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아쉬운 듯 계속 뒤돌아 서철용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사무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서철용은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한편.배은란은 아이들을 데리고 서민용에게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무슨 일 있으면 아줌마에게 말해서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해. 그럼 엄마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그녀는 몇 마디 당부한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서민용은 두 눈을 뜬 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배은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아이들은 찾아서 집에 데려다줬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저 너무 오랫동안 못 본 탓에 낯설게 느껴서 그런 것뿐이야. 당신 수술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질 거고.”서민용은 눈을 감고 그녀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배은란이 상처 입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았다.“미안해.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그는 그녀를 더럽다며 싫어했었다.“내가 만지는 게 싫으면 간병인 구해줄게. 난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배은란은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서민용은 여전히 눈을 감고 그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었다.배은란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난 이만 나가 있을게. 당신은... 푹 쉬어.”그녀가 떠나자 서민용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스러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장 선생은 서철용의 사무실로 불려갔다. 서철용은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서류 내용을 훑어본 장 선생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서민용의 현재 몸 상태로는 수술 못 해. 한시라도 빨리 회복시켜. 수술에 어떤 변수도 생겨선 안 돼.”서철용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했다.장 선생이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 선생님, 정말 이 정도까지 하셔야 합니까? 이거 배은란 씨도 알고 있습니까?”서철용은 못마땅한 듯
“삼촌도 아빠고, 그분도 아빠예요.”옆에서 줄곧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소원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 작은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서철용은 꼬마 녀석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이 말을 배은란이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그는 속으로 상상해 보고는 혼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엄마 앞에선 그런 말 하면 안 돼. 엄마가 너희 엉덩이를 때릴지도 몰라.”소원이는 의아한 듯 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소원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아빠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눈앞의 이 사람을 진정한 아빠로 여기고 있었다.그는 오랫동안 그들의 곁에서 사라졌었다. 하지만 소망이가 아팠을 때 달려온 사람은 엄마도, 병상에 누워 있던 아빠도 아닌, 바로 그였다.서철용은 어린아이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는 두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배은란의 마음은 얻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서민용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서철용의 가슴에 흐뭇함이 깃들었다.그들이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그가 잠시 이기적으로 행동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그는 이미 두 사람의 삶에서 빠져주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두 아이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서철용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돌아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가자.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 아이 한 명씩을 잡았다.두 아이는 바로 배시시 웃으며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서철용은 아이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그들을 데리고 주변 맛집들을 섭렵하고 장난감도 많이 사주었다.날이 점점 어두워져서야 그는 병원으로 돌아왔다.사무실에 들어서고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서철용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서철용,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줘...”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배은란은 감히 장 선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그 누구의 헌신도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장 선생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그분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두 분은 단순한 의사와 보호자 관계여야 합니다. 서민용 환자분의 주치의는 저이니,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와 소통하시면 됩니다. 더 이상 그분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장 선생의 그 말 때문에 배은란은 한동안 서철용을 찾아가지 않았다.그저 서민용의 수술이 끝날 때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서철용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서철용 또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서로를 대했다.몇 번의 수술 끝에 서민용은 드디어 깨어났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온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나 있었다.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려와 서민용을 만나게 해주었다.그동안 그녀는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서민용의 건강 상태가 걱정된다며 캐물었다.너무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인지 아이들은 조금 어색해하는 듯했다.너무나 핼쑥해진 서민용의 모습에 소망이는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소망아, 소원아, 아빠라고 불러야지.”배은란은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서민용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소원이는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간신히 아빠라는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소망이는 온몸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아니에요. 저 사람은 우리 아빠 아니에요...”배은란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민용의 반응을 살폈다.서민용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여 그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소망아!” 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했다.소망이는 엄마의 말투에 겁을 먹고 계속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진 배은란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설명했다.“소망아, 아빠는 지금 아프셔서 그래. 네가 그러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야.
서민용은 여러 차례 대수술을 거쳐 신체 기관들을 하나하나 교체했다.하지만 적합한 심장을 구하는 일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오늘도 서민용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배은란은 방금 수술을 집도하고 나온 서철용을 찾아갔다.“철용 씨, 나...”그녀는 서민용의 병실에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서철용에게 부탁하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창백해진 입술과 눈 밑에 뚜렷하게 드리운 피로감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웠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철용이 얼마나 큰 부담감과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무슨 일인데?”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에 서철용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배은란은 말을 바꾸었다.“아이들 보러 집에 다녀오고 싶어. 아이들한테 밥도 좀 해주고...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서 가져다줄게.”서철용이 그녀의 건강과 서민용의 목숨을 묶어 놓은 덕분에 배은란은 몸에 다시 살이 붙었고 전체적으로 훨씬 건강해 보였다.서철용은 한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했다.“서민용 병실에 들어가는 건 아직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한테 굳이 잘 보이려 할 필요 없어.”배은란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래도 서철용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민용 씨가 괜찮다는 거 알았으면 됐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모르겠으면 안 해도 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서민용이 깨어나서 속상해하지 않지.”서철용은 조롱 섞인 그 말을 내뱉고 난 뒤 배은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배은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한참이 지났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그때 뒤에서 장 선생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서 선생님!”배은란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서철용이 걷다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