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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차라
새벽 12시.

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

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

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

“전...전연우?”

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다가오지 마!”

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

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

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사 불러줄게.”

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

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

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

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

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

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

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고자 했을 때였다.

그녀를 구한 건 전연우였다. 팔을 단단히 물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녀를 몸 아래 숨겨 보호해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무서워하지 마. 눈 감아.”

장소월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눈에 전해진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따듯한 손길이었다.

전연우가 준 안전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고 미련으로 가득했다.

스무 살이 넘은 전연우는 이미 남자의 진중함이 있었고 얼굴도 너무나 준수했다. 진한 눈썹에 별과도 같은 눈,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와 잘빠진 골반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항상 차가웠고 잘 웃지 않을뿐더러 누구한테나 거리감을 두었다.

며칠 전 전연우의 생일에 그녀는 서프라이즈로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미 성인이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새벽에 돌아온 전연우가 침대에 누운 그녀를 발견하고는 역겨운 듯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냈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욕했다.

전연우가 이렇게 불같이 화낸 건 처음이었다.

그날 밤 전연우는 문을 박차고 나갔고 그녀를 피하기 위해 연달아 며칠이나 사라졌다.

장소월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전연우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이런 멍청한 방법을 쓴 거였다. 손목을 그어 그가 나타날 수밖에 없게 했다.

전연우와 함께한 후의 일들이 떠올라 무서워졌다.

몇 분 뒤, 여러 명의 의사가 들어왔다.

전연우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밖에 서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의 창백한 얼굴을 훑었다.

장소월이 갓 깨어났을 때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 찬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의사가 장소월의 상황을 살피고는 옆에 있는 동료와 토론 후 입을 열었다.

“환자분 열은 이미 내렸습니다. 내일 퇴원하셔도 됩니다. 손목에 상처는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 한주 뒤에 실 뽑으러 오세요.”

남자의 차가운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의사들은 몇 마디 더 당부하고는 바로 병실에서 나갔다.

의사들이 나가자 크지 않은 병실에 장소월과 전연우 두 사람만 남았다.

장소월은 불편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떠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전연우가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살짝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서 회사 가봐야 돼. 내일 8시에 데리러 올게. 퇴원 수속해야지.”

장소월이 입을 삐죽거렸다. 전연우는 늘 그랬다. 한 편으로는 거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정확하게는 전연우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보는 것조차 싫었다.

죽기 전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태연하게 전연우를 대할 순 없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전연우는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너 자신을 해치는 멍청한 짓 하지 마. 연애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 찾으면 되잖아. 너한테 나는 안 어울려.”

장소월의 마음이 세게 저려왔다. 전생에 전연우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전생에 이 말을 듣고 그녀가 얼마나 세게 울었는지 말이다. 심지어 확 뛰어내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도 전연우는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녀는 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다. 전연우에 대한 사랑도 무수히 많은 실망스러운 나날들에 소모되고 없었다.

장소월이 눈을 떴다. 창백함은 그대로지만 전연우를 바라보는 눈만은 평온했다.

전연우, 지금 이 시간부로 더는 널 사랑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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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결정했어.”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건한 눈빛으로 배은란을 바라봤다.배은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럼 지켜보겠어.” 배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그때도 네 옆자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서철용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오직 서철용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의학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그가 진짜 좋아하는 분야는 컴퓨터공학이었다.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하지만 배은란 앞에서는 그 어떤 꿈도 뒷전이었다.배은란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하고 큰 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뭐?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한의준은 서철용의 결정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들짝 놀랐다.그가 과외해준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의대에 도전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네.”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는 한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서철용 또한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하면 한의준이 많이 놀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이상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하지만 시도한다면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배은란 곁에 머물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교나 다른 전공에 지원해도 되잖아.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서철용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는 알지만, 한의준은 그를 말리고 싶었다.그가 어찌 서철용에 대해 모르겠는가.정확히 말하면 그는 의학 분야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평소 병원에 가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가 매일 의학 관련 일에 파묻혀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더 이상 말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의대에 붙을 수 있도록 과외만 잘해주면 돼요.” 서철용은 한의준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그가 자신을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41화

    ‘분명 먼저 널 만난 사람은 나였어!’‘배은란!’...“배은란, 어느 대학에 갈 거야?” 서철용은 배은란에게 다가가 능글맞게 물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최근 그의 성적이 급격하게 향상되어 점점 배은란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것을.조금만 더 노력하면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가 왜 이토록 열심히 노력하는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배은란은 콧방귀를 뀌며 오만하게 말했다.서철용은 바로 배은란의 이런 오만한 모습을 좋아했다.“알려주면 안 돼?” 서철용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쓴다면 그는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하여 그는 배은란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가 어느 대학에 지원할지 알려달라고 애원했다.“반장이 가는 곳으로 가려고. 난 반장 따라갈 거야.” 배은란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배은란이 서민용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물론 서철용 또한 마찬가지였다.서철용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서민용을 따라갈 것이라는 걸 일찌감치 예상했어야 했다. “야, 어느 대학에 갈지 정했어?” 서철용이 서민용에게 다가가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배은란 때문이 아니었다면 서민용에게 이런 질문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의대에 가려고.” 서민용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나 무관심했다. 바로 그 모습 때문에 배은란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서민용의 대답을 들은 서철용은 그야말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서민용이 하필이면 의대를 선택할 줄이야.그는 의대 경쟁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서민용은 배은란과 함께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서철용은 돌연 허탈함과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서민용과 자신은 비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비교할 생각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40화

    회사는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흔쾌히 휴가를 승인해 주었다.배은란은 1층 욕실에서 씻은 뒤 다시 서민용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현재 서민용과 한 침대에서 자지 않고 있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실수로 누를 수 있기에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권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 말을 기억하고 줄곧 한 방에 있었지만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았다.달빛이 서민용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배은란은 달빛을 빌려서야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배은란은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용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다음 날 아침, 배은란이 일어났을 때 서민용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바깥 새소리 때문에 깼어? 어제 자기 전에 커튼 치는 거 깜빡했네. 다음부터는 잊지 않을게. 안 졸려? 조금 더 잘래?”서민용은 눈을 깜빡이며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배은란은 얼른 일어나 그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잠시 뒤면 두 아이가 서민용을 보러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배은란이 오늘 휴가를 냈기에 아침 식사는 서민용의 방에서 네 가족이 함께 먹었다. 서민용은 배은란이 계속 집에 머무르며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의아한 마음에 눈을 반복해 깜빡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배은란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덮으며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어 그녀는 입술을 서민용의 눈에 가져갔다. 그는 배은란의 입맞춤을 느끼고 눈까풀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서민용의 꿈속에서 그는 한 손에 아이 하나씩 안고 있었고, 석양의 노을이 그와 배은란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두 아이를 안고 놀이공원에 갈 수 없기에 진짜일 리가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은란은 뜻밖에도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들어와서 좀 앉았다가 가.”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서철용은 몸을 돌렸다.“얼굴이 좀 탔네.”“응. 지나가다가 두 사람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39화

    그는 말없이 조용히 혼자 떠났고, 배은란은 알지 못했다.배은란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그의 방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우미에게 물어보니 그가 짐을 챙겨 떠났다고 한다.배은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텅 빈 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님, 서 선생님 다시 돌아오실까요? 이 방은 그대로 남겨둬야 할까요?”“모르겠어요. 그냥 둬요. 비워두세요.”배은란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아이들보다는 병원에 있는 서민용이었다.그녀는 줄곧 병원에서 예전처럼 그를 간호했다.눈앞의 서민용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녀는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킬 것이다. 배은란은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서민용을 마사지해주었다. 그는 배은란의 손길을 느끼고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배은란은 단번에 알아챘다.그녀는 힘껏 서민용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방금 손가락 움직인 거야? 나 느꼈어. 지금 당신 손바닥에 내 손 넣었는데 느껴져?”서민용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초 후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지금은 깍지를 꼈는데, 느껴져?”서민용의 감각이 전보다 확연히 빨라졌다. 이번엔 배은란이 말을 마치자마자 거의 바로 눈을 찡긋거렸다.배은란은 그의 손을 마사지하고 다시 그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서민용은 지금 눈과 손만 약간씩 움직일 수 상태였다. 입으로는 밥을 먹고 씹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그녀와 소통했다. 다행히 머리는 깨어있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아니었다면 배은란은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을 것이다.서민용은 다리에선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배은란의 손에 잡혀 있는 앙상한 다리는 그녀의 다리보다도 훨씬 더 가늘어 보였다. 그녀는 순간 슬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민용이 보지 못하기에 눈물을 글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서민용의 다리에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그의 다리에 감각이 없다는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38화

    이후 서민용도 보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불러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녀를 기다려주지도 않았다.배은란은 서민용이 떠나가는 방향과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을 갈등하다가 결국엔 서민용을 쫓아갔다.드디어 서민용이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배은란은 또다시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눈빛과 똑같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화려하게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 속,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지 못했다. 서철용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민용과의 만남은 허황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두 아이 잘 돌봐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떠날 생각인 거야? 아이들 버리려고?”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아이들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버려두고 떠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불길한 생각이 서철용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서민용의 묘비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과 함께 말이다.서철용이 분노가 차올라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설마 서민용한테 가려는 거야? 말해봐, 정말 그럴 생각이야?”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서민용을 위해 아이들을 버리고, 심지어 네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거야? 이 세상에 널 붙잡아둘 수 있는 사람이 서민용밖에 없어? 서민용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도 않은 거야?”“말해봐! 정말이냐고 묻고 있잖아!”“맞아! 난 네가 나한테 했던 일들을 탓하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난 그저 민용 씨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그 사람이 어디로 가든 따라가고 싶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이야!”“네 말이 맞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하겠어. 너한테 난 벌레보다 못한 존재잖아.”“나 너무 힘들어. 제발 나 좀 놔줘. 나 민용 씨가 정말 보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37화

    서철용은 잠에서 깨어나 대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그는 급히 위층에 있는 배은란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그녀는 그 안에 없었다.그는 덜컥 겁이 났다. 순간 온갖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다행히 이후 냉정을 되찾고 차를 몰고 서씨 집안 묘지로 향했다.배은란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울었던지라 눈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 올라 그녀의 몸에 햇살을 비추었지만, 그녀는 조금의 따뜻함도 느끼지 못했다.서철용이 도착했을 때, 배은란은 서민용의 묘비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장에도 배은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 주변 감각에 둔감해져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상태가 걱정되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집에서 나온 거야? 언제 나온 거야?”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서민용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사진 속 그의 어깨에 닿은 순간, 더는 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야?”귓가에 들려오는 거라곤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철용의 목소리만이 묘지에 울려 퍼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은란의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 해는 이미 머리 위까지 떠올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어느새 배은란의 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그 모습을 본 서철용이 끝내 입을 열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자. 계속 이렇게 서 있으면 몸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어.”하지만 배은란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어쩔 수 없이 도우미를 시켜 두 아이를 묘지로 데려오게 했다. 아이들이 있으면 그녀가 마음을 바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아이도 배은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잠시 동요와 갈등이 떠올랐지만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36화

    배은란은 매번 출근할 때마다 서민용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지 못했다.서민용을 다시 만난 것은 3년 뒤였다. 배은란은 뒷모습만 보고 단번에 알아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그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그녀도 급히 따라갔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 그의 뒷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배은란이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서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저를 따라오는 이유가 뭐죠?”그 순간 배은란은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한번 그의 부드럽고 맑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네? 왜 말이 없어요?”서민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배은란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서민용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거 떨어뜨리지 않으셨어요?”서민용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데요.”배은란이 반응하기도 전에 서민용의 모습은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배은란은 자신의 손에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민용이 왜 웃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의 거짓말이 그에게 들통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얼마 후, 그녀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었다. 하지만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마침 서민용도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민용이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그녀가 혼자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민용은 그녀를 자신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배은란은 어색한 마음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배은란은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의 배려 덕분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밥을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35화

    배은란은 서철용의 맞은편에 비스듬히 앉았다. 옆자리도 아니고 정면도 아닌 자리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에 서철용은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그는 도우미를 불러 배은란이 위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일렀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철용은 곧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은란의 몸이 회복되기만 하면 다시는 그녀의 삶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서민용의 일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배은란의 몸이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두 사람의 저녁 식사 역시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배은란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더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표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방 아주머니를 불러 닭죽을 데워 그녀가 배고플 때 가져다주라고 말했다.배은란이 자리를 뜨자 서철용도 입맛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답답한 기분을 달래고자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갔다.그녀와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 그녀가 곁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서철용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배은란은 마당에 멍하니 서 있는 외로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 그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지만, 위로해줄 수는 없었다.그녀는 줄곧 형제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뒷모습이 그랬다. 하여 뒷모습만 보고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일로 서민용에게 불평까지 한 적이 있다.그 말에 서민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서민용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동자가 흐려졌다.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보니, 그중 딸 아이는 서민용과 판에 박은 듯 똑 닮아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혹시라도 감정이 북받쳐 아이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434화

    배은란은 더는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기에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돌연 모든 것이 떠올랐다.그때 서철용은 마당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창가로 걸어가 세 사람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머릿속에 그동안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여기며 지내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배은란은 자신을 속이고 곁에 가두어둔 그를 원망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묵묵히 대체자를 자처했던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그녀는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방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얼마 후, 서철용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위층으로 그녀를 찾아 올라갔다.“일어났으면서 왜 안 내려왔어?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거야?”“미안해.”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서철용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 사과하는 거야?”“미안해.”“오늘은 날 서민용으로 착각하지 않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 기억해냈구나.”“다행이야.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야.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지금에야 기억을 되찾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서철용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배은란의 눈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것을 본 순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는 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서민용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가족들에게 소개해주었던 날 밤이 아니다. 사실 그날 밤은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하지만 배은란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서민용만이 존재했기에, 그 기억은 오로지 서철용만의 것이었다.그가 첫눈에 반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알고 보니 형의 여자친구였다. 배은란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그녀와 서민용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순간, 서민용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최고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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