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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차라
새벽 12시.

장소월이 악몽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마엔 땀이 맺혀있다.

순간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다.

장소월은 잠시 멍해졌다. 죽은 거 아니었나?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했던 병실이 밝아졌다. 눈부신 불빛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긴 다리로 침대 곁에 다가왔다. 큰 체구가 그녀의 왜소한 몸에 비친 빛을 막아주기엔 넉넉했다.

“전...전연우?”

장소월이 머리를 들어 뼈속까지 증오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다가오지 마!”

왜 또 이 악마의 곁으로 돌아온 걸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뒤로 물러선다.

장소월의 머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다. 전연우를 본 순간 크나큰 두려움과 절망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

전연우가 멈칫한다. 이내 가느다란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찬다. 불쾌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사 불러줄게.”

남자의 차가운 저음이 칼처럼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문이 쾅 하고 닫기고 나서야 장소월도 긴장이 풀렸다.

남자가 떠난 후 방안에 떠돌던 강렬한 압박감도 사라졌다. 장소월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째질듯한 아픔이 손목에 전해졌다.

손목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건가?

장소월은 아픔을 견디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구식 전화기를 들어 달력을 찾아보았다.

시간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무려 2000년, 그녀가 18살 되던 그해였다.

장소월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지금 입원 중이고 손목을 그어 전연우를 협박해 고백을 받아달라는 중인 것 같았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10살 되던 해에 장해진이 밖에서 데려온 양자였다.

장소월이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건 그녀가 15살 되던 해 집에서 키우던 티베탄 마스티프가 갑자기 실성해 그녀한테 달려들어 물고자 했을 때였다.

그녀를 구한 건 전연우였다. 팔을 단단히 물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녀를 몸 아래 숨겨 보호해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무서워하지 마. 눈 감아.”

장소월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눈에 전해진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따듯한 손길이었다.

전연우가 준 안전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고 미련으로 가득했다.

스무 살이 넘은 전연우는 이미 남자의 진중함이 있었고 얼굴도 너무나 준수했다. 진한 눈썹에 별과도 같은 눈,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와 잘빠진 골반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항상 차가웠고 잘 웃지 않을뿐더러 누구한테나 거리감을 두었다.

며칠 전 전연우의 생일에 그녀는 서프라이즈로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미 성인이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새벽에 돌아온 전연우가 침대에 누운 그녀를 발견하고는 역겨운 듯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냈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욕했다.

전연우가 이렇게 불같이 화낸 건 처음이었다.

그날 밤 전연우는 문을 박차고 나갔고 그녀를 피하기 위해 연달아 며칠이나 사라졌다.

장소월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전연우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이런 멍청한 방법을 쓴 거였다. 손목을 그어 그가 나타날 수밖에 없게 했다.

전연우와 함께한 후의 일들이 떠올라 무서워졌다.

몇 분 뒤, 여러 명의 의사가 들어왔다.

전연우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밖에 서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의 창백한 얼굴을 훑었다.

장소월이 갓 깨어났을 때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 찬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의사가 장소월의 상황을 살피고는 옆에 있는 동료와 토론 후 입을 열었다.

“환자분 열은 이미 내렸습니다. 내일 퇴원하셔도 됩니다. 손목에 상처는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 한주 뒤에 실 뽑으러 오세요.”

남자의 차가운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의사들은 몇 마디 더 당부하고는 바로 병실에서 나갔다.

의사들이 나가자 크지 않은 병실에 장소월과 전연우 두 사람만 남았다.

장소월은 불편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떠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전연우가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살짝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서 회사 가봐야 돼. 내일 8시에 데리러 올게. 퇴원 수속해야지.”

장소월이 입을 삐죽거렸다. 전연우는 늘 그랬다. 한 편으로는 거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정확하게는 전연우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보는 것조차 싫었다.

죽기 전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태연하게 전연우를 대할 순 없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전연우는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너 자신을 해치는 멍청한 짓 하지 마. 연애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 찾으면 되잖아. 너한테 나는 안 어울려.”

장소월의 마음이 세게 저려왔다. 전생에 전연우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전생에 이 말을 듣고 그녀가 얼마나 세게 울었는지 말이다. 심지어 확 뛰어내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도 전연우는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녀는 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다. 전연우에 대한 사랑도 무수히 많은 실망스러운 나날들에 소모되고 없었다.

장소월이 눈을 떴다. 창백함은 그대로지만 전연우를 바라보는 눈만은 평온했다.

전연우, 지금 이 시간부로 더는 널 사랑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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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아가 말하는 사람은 아마 유월일 것이다. 혹시 그녀의 존재 때문에 강영수가 무언가를 기억해낸 것일까? 그렇다. 지금 강영수는 유월과 결혼한 상태다. 그녀가 계속 옆에 있는 것은 그들의 관계에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집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현아야, 오늘 밤엔 우선 여기서 자. 옷장 안에 옷도 좀 있으니까 샤워하고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저녁 준비할게.” 소현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찾고 있을 때, 강용이 들어왔다. “정말 저 바보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야?” “강용, 현아 그렇게 말하지 마. 어렸을 때 병을 앓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잖아.” 강용은 어깨를 위로 쭉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감싸는데 내가 어떻게 뭐라 하겠어. 하지만 소현아는 다시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아? 쟤랑 같이 있으면 너무 위험해. 자칫하면 우리 위치가 강지훈에게 노출될 수도 있어!” “너도 알다시피 전연우랑 강지훈은 한통속이나 다름없어. 전연우가 해외에 얼마나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재산 대부분을 해외로 넘긴 상태야. 국내 성세 그룹이 망하더라도 전연우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윗선에서 일찌감치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성세 그룹은 아마 성세 글로벌 그룹이 되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장소월은 채소를 썰다 멈추고 물었다. “그게 뭔데?” “전연우는 이미 회사를 팔아넘겼어!” “무슨 뜻이야?” “몰랐어? 전연우는 아주 오래전에 나라에 회사 지분을 넘겼어. 그래서 송시아가 아무리 서울을 헤집고 다녀도 전연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야. 그리고 전연우가 요구한다면, 언제든 지분과 회사 통제권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한낱 성세 그룹 따위는 해외에 두고 있는 재산의 백 분의 일도 안 돼. 지금까지 해외에서 수도 없이 많은 기업들을 인수했거든. 나중에 집안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8화

    장소월은 낙일 마을에 길을 잃은 친구가 있으니, 빨리 와서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 낙일 마을에 그녀의 친구가 있었던가?장소월은 강용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상황파악도 채 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 뛰어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소월아, 소월아, 소월아... 드디어 찾았어. 너무 좋아!” 익숙한 목소리에 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현아?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 바보 아가씨?”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그 광경이 강용의 눈앞에 펼쳐졌다. “강용...” 소현아는 배시시 웃으며 강용을 향해 뛰어갔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껴안으려 했지만, 그는 팔을 쭉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밀었다. 소현아는 키가 작은지라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겨우 강용의 옷자락만 잡을 수 있었다. “강용, 너도 보고 싶었어. 한 번 안아보자.” 강용은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난 순결한 몸이라서 말이야. 아무나 만지면 안 돼.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소월아, 얘 왜 그사이에 더 멍청해진 것 같냐?” 장소월은 강용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용, 현아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이어 고개를 돌려 경찰에게 말했다. “현아는 확실히 제 친구 맞아요.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이제 현아 데려갈게요.”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소현아는 장소월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소월아... 네 몸에서는 여전히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정말 보고 싶었어! 이렇게 멀리까지 놀러 왔으면서 왜 난 안 데리고 온 거야?” “현아야, 말해봐. 여긴 어떻게 왔어? 넌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소현아가 대답했다.“응! 근데 강지훈이 나 바보라고 싫다면서 치료받으라고 여기에 쫓아 보냈어. 날 감시하라고 도우미 두 명까지 보냈고. 나 겨우 도망쳐 나온 거야. 소월아,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그 사람들한테 다시 잡혀가면 끝이야. 나 밥도 못 먹게 하고, 밤마다 수갑으로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기까지 한단 말이야.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7화

    민선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지금처럼 변한 유월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대문이 굳게 닫혔다. 해이는 문밖에 서서 힘겹게 말했다.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모든 걸 똑똑히 알고 난 뒤 다시 올게. 만약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너한테 다 얘기할게.” 소현아는 바닥에 떨어진 닭 다리를 주웠다. 방금 전 유월이 던진 의자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떨어진 지 3초 안 지났으니까 먹어도 괜찮아.”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유월은 문을 열었다. 텅 비어버린 마당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갔어... 정말 가버렸어!”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유월의 모습에 민선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말했다. “유월아, 왜 그래? 유월아...” “유월아, 엄마 무섭게 이러지 마!” “유월아, 제발 말 좀 해 봐!” “언니... 왜 그래요.” 민선화가 유월에게 손을 뻗은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그녀에게 달려갔다.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비추던 달빛이 사라졌다. 달님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했고, 짙은 먹물 같은 하늘에는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지만, 강영수에게는 절대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오늘 밤엔 일단 여기서 자요. 내가 내일... 장소월 씨한테 데려다줄게요.” “네, 강영수 씨.” 소현아는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 몸을 뉘운 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깊이 잠들었다. 강영수는 문밖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이 집은 그가 유월과 함께 살려고 지어놓은 신혼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유월을 향한 그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규영과 미경은 밤새도록 낙일 마을에서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6화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해이야, 이 사람 도대체 누구야? 이 여자가 한 말이 정말 사실이야? 송 선생님이 아니라 장소월이였다고? 그리고 오늘 친정으로 돌아오는 날인데 왜 너 혼자 돌아온 거야? 유월이는 어쩌고?” 소현아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닭 다리 두 개를 집어 들고 해이 뒤로 몸을 숨겼다. “너무 무서워.” 소현아의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진흙탕에 넘어져 울먹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들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찾으려는 사람에 대해 설명하자, 경찰은 곧바로 이곳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이곳에서 해이를 본 소현아는 분명 소월이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쫓아내려 했지만, 소현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다행히 낙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순박했고, 치안도 좋은 편이었기에 소현아는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해이는 뛰쳐나간 유월을 쫓아가지 못하고 먼저 처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현아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님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그 답을 찾고 있어요. 유월이는 괜찮을 거예요.”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잖아.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나가서 찾아봐.” “찾을 필요 없어요!” 돌연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유월은 문턱을 넘어 들어와 벽에 걸려있던 그림을 집어 던졌다. “장소월은 네 약혼녀고 저 여자도 널 아는 친구라잖아. 다들 널 찾아왔는데 우리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그리고 우리 결혼은 오늘부터 없던 일로 해. 나 양유월,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남이 버린 걸 주워서 같이 살진 않아.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한 남자는 더더욱 싫어.” “나가! 다 나가라고!” “너무 무서워! 소월이 그림...” 소현아는 내던져진 그림을 보고 재빨리 뛰어나갔다. 액자 유리는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5화

    규영과 미경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사모님, 어디 아프세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요!” “혹시 여기가 아픈 거예요?” 규영이 소현아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행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주인님은 그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현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응가 마려워요.” 미경은 곧바로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사모님, 이 근처에는 화장실이 없어요. 정 급하시면 저쪽 구석에서 볼일 보세요. 저희가 망봐드릴게요.” 소현아는 휴지를 받아들고 나무 뒤로 달려갔다. “잘 지켜봐야 해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 안 그러면 나 화낼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소현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입을 가린 채 큭큭 웃어댔다. “내가 바보라고? 너희들이야말로 바보야.” 소현아는 재빨리 시내로 돌아가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손에 든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 못 봤어요? 제 언니인데, 언니가 사라졌어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요, 본 적 없어요.” 소현아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밤이 되었고, 그곳 지리에 익숙지 않은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헤매고 있었다. 10분 뒤, 규영과 미경도 소현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을 다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미경이 울먹이며 말했다. “사모님이 사라지셨어. 이제 어떻게 해!” “주인님이 아시면 분명 우릴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우리 그냥 주인님께 얘기하자” “안 돼... 안 돼. 절대 주인님이 알게 해선 안 돼.” “노부인께선 사모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라셔. 만약 주인님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아이를 없애려 하실 거야. 노부인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어. 사모님은 복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이와 함께 무사히 계실 거야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4화

    “저를 아세요?” 소현아는 눈앞의 남자가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알죠! 예전 소월이가 괴롭힘을 당하고 쓰러졌을 때, 제가 병원에 데려다줬었잖아요. 당신은 저한테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꼭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요. 그리고 학교에서 소월이를 잘 챙겨주라고 부탁도 했잖아요. 저 당신 말대로 잘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소월이 괴롭히려고 하면 제가 다 막아줬다니까요. 그런데 소월이랑 결혼식 앞두고 어디에 가셨던 거예요? 그 후로 소월이도 사라져 버렸어요.”“저 소월이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됐어요! 그만 해요!” 유월이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쳤다.해이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격렬한 두통을 유발했다.규영과 미경은 눈앞의 남자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두려워 서둘러 변명했다.“선생님,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사모님께서 머리를 좀 다치셔서 가끔 헛소리를 할 때가 있어요.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이제 가시죠. 밖에 비도 그쳤어요.”두 사람은 소현아를 반강제로 끌고 나갔다. 하지만 소현아의 입술은 멈출 줄을 몰랐다. “헛소리 아니에요. 다 사실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한텐 이제 기회가 없을 거예요, 소월이는 이미 다른 놈이랑 결혼했거든요.”규영은 재빨리 소현아의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났다.유월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해이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불안한 마음에 돌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너 지금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는 거야?”해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해이의 눈빛이 변해버렸다. 그의 눈동자엔 더이상 예전의 부드러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변하고 있다. 그 여자가 낙일 마을에 온 이후부터 그의 마음은 점점 예전과 달라지고 있었다.해이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3화

    “제 과거에 대해선 여전히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거죠? 그리고 아까 옆에 있던 그 사람 저랑 많이 닮았던데, 혹시 저 그 사람과도 아는 사이인가요?” “지나간 일은 그냥 과거에 묻어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 네 옆에는 이제 유월 씨가 있잖아. 나는 네가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아. 네가 무사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야. 그 사람이 너에게 빚진 것들은 앞으로 내가 모두 갚아줄게.” 정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널 원래의 강영수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내 목숨도 내던질 거야. 내가 너한테 큰 빚을 졌어... “소월아!” 강용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우산을 든 강용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고 있었다. 강영수와 가까워지자 강용은 애써 마음속 두려움을 누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과거 강영수는 그에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았었다. 다리를 분질러 놓았을 때엔 2주가 넘도록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아주 잠깐 눈을 뗐는데, 고새를 못 참고 사라져?” 장소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하고 물기부터 닦아. 그리고 얼른 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야 해.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강용은 우산을 든 채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가 닦아줘!” 한 번 던져본 농담이었지만, 장소월은 정말로 휴지로 그의 이마에 묻은 빗물을 닦아주었다. “기분 좋아?” 강용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무 좋아.” “만족해?”“만족하지, 그럼 만족하고말고.” “이제 가자.” 장소월은 옆에 서 있는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네.” 강용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대부분 장소월에게 치우쳐 있었기에, 강용의 어깨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차에 탄 뒤 강용이 그녀에게 깨끗한 담요를 건네주었다.“우선 이걸로 닦아, 감기 걸리지 않게.” “혹시 괜찮다면, 깨끗한 옷이 있으니까 여기서 갈아입어. 내가 차에서 내려줄 테니까.” 장소월은 담담하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2화

    두 명의 익숙한 시선이 장소월에게 고정되었다. “...아가씨, 내가 뭘 사 왔는지 봐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선글라스를 낀 강용이 탕후루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강용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디에서 산 거야?” 강용은 유월의 곁에 있는 남자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 탕후루를 장소월에게 건네준 뒤 홱 뒤돌아 가 버렸다. 장소월은 그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 어떤 모순이 있었든, 어쨌든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길에서 마주친 그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장소월이 멀어진 뒤, 유월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해이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뭘 봐. 왜 아직도 보고 있어. 이미 저 멀리 갔잖아. 도대체 누가 네 와이프야? 차라리 그냥 저 여자한테 가 버리지 그래!” “그 여자가 아니라, 옆에 있던 남자. 익숙한 얼굴이었어. 전에...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아.” “됐어. 더이상 생각하지 마. 오늘은 친정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부모님께 무슨 선물을 사드릴지나 생각해.” 유월은 무언가 두려웠는지 급히 그의 생각을 끊어놓았다. 강용은 자연스럽게 장소월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영수가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야. 핏줄이 짓누른다고 해야 하나.” 장소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 괜찮네.” “내가 형을 구해 낙일 마을에 데려오고 난 뒤 며칠 후, 형은 혼자서 몰래 병원을 뛰쳐나갔어. 그러다 다행히 저 집안사람들을 만나서 잘 지내게 된 거야.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더라고” “유월 씨네 가족 말하는 거야?” 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쩌다 보니 저 둘을 맺어준 꼴이 됐네.” “차라리 잘 됐지 뭐. 형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니까 난 당분간 편히 살 수 있겠어. 형이 뭐라도 기억해내면 나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 담담하게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걸 보니, 강용은 과거의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351화

    온웅정은 그녀를 살펴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사람을 치료할 때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네. 자네 혼자 들어오고, 저 버릇 없는 녀석은 밖에서 기다리게 하게.” “어이, 늙은이, 내가 누군지 알아요?” 장소월이 소리쳤다. “강용!” 강용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알았어.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저 영감이 널 속이려고 하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망둥이 같은 놈.” 장소월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용, 어른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밖에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있어.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알았어.” 장소월은 그를 따라 내당으로 들어갔다. “앉게. 손은 이쪽에 올려놓고.” 장소월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온웅정은 그녀의 맥을 30초 정도 짚고 난 뒤 손을 내려놓았다. “...심장 박동이 좀 불규칙하네. 이곳 환경이 몸에 안 맞는 건가?” “몸에 큰 이상은 없으니, 돌아가서 푹 쉬고, 일찍 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금방 나을 걸세.”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자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난 그런 건 봐줄 수 없네. 자네가 마음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계속 이 상태로 살아간다면, 누구도 자네를 구할 수 없네. 자네의 가슴엔 기가 꽉 막혀 있어...” “오랫동안 억누르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제대로 쉬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전에 내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도 효과를 보지 못했나?”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아직 기회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걸세. 자네처럼 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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