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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차라
장소월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자기 전 그녀는 따듯한 우유 한 잔을 마시곤 했는데 오랫동안 고치지 못한 습관이었다.

얇은 커튼 밖 어둠은 유난히 짙었다. 한줄기 라이트가 창문으로 비쳐들었다.

타이어가 땅에 마찰되면서 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청을 때렸다.

전연우의 아우디 A6은 장해진이 회사에서 그에게 상으로 준 새 차였다.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왔고 손에 든 차 키를 내려놓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훑었지만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항상 가냘픈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무미건조한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가 있었건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테이블도 평소처럼 간식이 널브러져 있지 않고 깨끗했다.

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줌마가 주방에서 나왔다.

“연우 도련님, 저녁 식사하셨나요?”

“소월이는?”

전연우가 묻는다.

“아가씨는 몸이 불편하시다면서 일찍 잠에 드셨어요.”

“올라가서 한번 볼게.”

전연우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계단을 세 개쯤 올라가더니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내일 점심에 윤이 돌아오니까 윤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개 더 하고.”

“네, 알겠습니다, 연우 도련님.”

아줌마가 답한다.

3층에 도착한 전연우, 손잡이를 돌렸지만 전처럼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잠군 것이다.

전연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와 장소월의 방은 모두 3층에 있었고 장해진의 방은 2층이었다. 2층은 평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4층은 윤이가 단독으로 쓰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장소월의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안에서 잠근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장소월이 진짜 그에게서 마음을 거둔 것일까?

전연우는 문을 두드렸다.

“소월아, 자?”

악마의 노크 소리에 정소월은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귀를 틀어막았다. 대꾸하기가 싫었다.

사실 아까 전연우가 차를 끌고 돌아올 때부터 그녀는 소리를 듣고 깨어있었다.

전연우는 밖에 집을 하나 샀다. 방 2개에 거실 2개, 화장실 2개에 주방 하나가 달린 집이었다.

전연우는 거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있어서였다.

그가 이 집에서 도망친 것도 장소월의 집착이 역겨워서였다.

지금 그가 집에 돌아온 것도 백윤서 때문일 것이다. 내일은 백윤서가 해외에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다.

백윤서는 어릴 때부터 선천적 천식을 앓고 있었다. 전연우는 국내의 의료수준이 딸린다고 생각했고 외국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전연우가 늦은 시간에 그녀를 찾아온 건 백윤서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다.

백윤서는 전연우의 소꿉친구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같이 지냈다. 듣기로는 밖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길거리를 떠돌며 들개들과 음식을 뺏으면서 겨우겨우 의지하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백윤서는 전연우가 장가에 온 이듬해에 전연우가 직접 데려왔다.

사람 한 명 더 데려와도 장해진은 뭐라 하지 않았다. 한사람 더 키워주는 것 뿐 장가의 재력으로는 충분했다.

장소월은 백윤서와 나이가 비슷했다. 하지만 백윤서는 어릴 때부터 생김새가 이쁘장했고 청순했다. 소년기의 모든 남학생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백윤서는 하얀 치마를 좋아했고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길러져 있었다. 눈빛은 순수하면서도 보호 욕구가 들게 했다. 장소월 자신도 그녀보다는 미모가 딸린다고 생각할 정도니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백윤서가 전연우랑 특별하다는 이유로 장소월은 늘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 뒤에서 백윤서를 괴롭히기 일쑤였고 가느다란 바늘로 그녀의 허리, 팔, 허벅지 등을 찔렀다.

하지만 백윤서는 감히 일러바치지 못했다. 백윤서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이 있었기에 장소월은 백윤서를 더 막무가내로 괴롭힐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백윤서는 죽어버렸다.

그때 백윤서는 고작 12살이었다...

손목을 그어서 자살했다...

장소월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전연우가 손에 피를 가득 묻힌 채로 그녀의 방에 쳐들어왔다. 손전등으로 비춰진 그의 얼굴은 음침했고 살기가 가득했다. 마치 목숨을 앗아가려고 저승에서 넘어온 저승사자 같았다. 전연우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왜? 왜... 왜 그렇게 애를 못살게 구는 거야?”

“장소월... 네가 죽었어야지!”

“장가 모두 다 죽일 놈들이야!”

그제야 장소월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전연우가 진짜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백윤서의 죽음은 그녀의 끝나지 않는 악몽이었다...

그녀 또한 백윤서를 죽게 만든 간접적인 범인이었다.

백윤서가 죽은 뒤 몇 년 간, 장소월은 단 하루도 단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백윤서에게 빚진 건 이번 생에 잘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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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 디딜 틈 없는 방안에서 소년은 휠체어에 앉아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눈을 가리는 앞머리 아래로 바닥에 뿌려진 유리 조각들 사이 커터칼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머릿속에서 괴로운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뭘 망설이는 거야. 한 번에 그어버려. 한 번의 아픔으로 모든 고통은 사라질 거야! 너희 아빠 엄마 이혼하고 각자 재혼하셔서 아이도 있잖아. 넌 버려졌어.”‘빨리 죽어버려! 죽으면 벗어날 수 있어!’‘당신들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결혼 한 거야! 왜 나를 낳았어!’‘각자 가족이 생기면 나는 어떡하라고? 난 도대체 뭐냐고.’강영수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고 결의에 차 있었다. 손으로 휠체어를 짚고 일어나자 두 다리로 설 수 없어 바닥에 넘어졌다. 손바닥은 유리 파편들이 박혀 피가 흘렀고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파편 속으로 손을 뻗어 커터칼을 잡고 천천히 위로 올려 날카로운 칼날을 빼냈다. 살짝 손목을 긋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그가 커터칼을 손목에 가져다 댄 바로 그 순간 창밖에서 대추 한 알이 날아 들어와 그의 옆에 떨어졌다.한 알, 또 한 알...대추 알들은 하나같이 크고 마치 바닥에 물든 피처럼 붉었다.강영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대추 한 알이 그의 머리로 날라왔다.‘아파!’머리에 맞은 대추 알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석으로 굴러갔다.한 소녀의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그거 우리 집 대추야. 먹어봐.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지 말고 그러다 병나. 혹시 대추 더 먹고 싶으면 나 찾아와. 쑥스러워하지 말고. 너도 맛있는 거 있으면 나한테 던져 나눠 먹자. 맞다, 나는 장소월이라고 해. 내가 매일 찾아와서 놀아줄게, 좋지?”장소월의 목소리가 꽤 컸는지 별장에서 있던 가사도우미가 놀라서 달려 나왔다.“누구세요? 말소리가 정원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장소월은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조심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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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월은 주머니 안에 대추를 다 꺼내 씻어 거실 테이블에 두고 티브이를 켰다. 대추가 담긴 그릇을 품에 안고 맛있게 먹었다.아줌마는 주방을 청소하고 나오면서 꼬질꼬질한 채로 소파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보고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이런 말썽꾸러기를 봤나. 오늘 금방 새로 바꾼 소파 시트를 더럽게 하면 어떡해요. 어서 방에 가서 옷을 바꿔 입으세요.”장소월은 맨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아줌마 마을 듣지 않고 소파 뒤로 가서 숨으며 웃었다.“아줌마 조금 있다가 또 바꿔요! 나 지금 힘들어서 누워있고 싶단 말이에요.”“장난치지 말고요. 이렇게 체통 없는 모습 주인님께서 아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돌아오시면 또 혼나시려고. 아가씨 어서 말 들으세요. 방에 가서 옷 바꿔입으세요.”“이것만 다 보고요. 몇 분 남지 않았어요.”장소월은 아줌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안 돼요. 더 이상 협상은 없어요. 곧 시험인데 티브이만 보시면 어떡해요. 제가 끌 테니 올라가서 공부하세요.”마침 이때 장소월의 등 뒤에서 전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명월아. 아줌마 심장 안 좋으쇼. 화나게 하지 마!”장소월은 멈칫하더니 새침하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백윤서하고 같이 나가더니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지? 내가 같이 안 갔으니 바라던 대로 백윤서와 밖에서 지내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집에서 나 혼자 즐겁게 살면 되는데.’아줌마는 전연우를 맞이했다.“도련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전연우는 손에 들려 있던 키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회사에 긴급회의 때문에 자료 가지러 왔어요. 저녁쯤에 데리러 올 테니 윤이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하려고요.”장소월은 티브이에 집중한 척하며 그들의 대화를 무시했다.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전연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허리까지 오는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티브이 그만 보고 공부해. 곧 시험이잖아? 오늘 밤 돌아와서 검사할 거야!”장소월은 그가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 24시간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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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으로 돌아온 장소월은 더러워진 옷을 벗어 놓고 옷장 앞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옆방에서 전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마치고 금방 돌아올게!’백윤서는 사려 깊게 대답했다.“난 괜찮아요. 어서 가서 일 봐요. 난 여기서 오빠 기다릴게요.”“그래. 피곤하면 내 방에서 쉬어. 침대 시트 새 걸로 바꿨으니까.”“네, 알겠어요.”떠나가는 발소리를 듣고 장소월은 그가 나간 줄 알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벌컥 방문이 열렸다. 순간 장소월은 얼굴이 화르르 불타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으로 급하게 몸을 가렸다. 전연우는 그녀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뒷모습에 놀라 문고리를 잡았던 손은 얼어붙고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장소월은 18살밖에 안 됐지만 또래들보다 훨씬 몸매가 좋았다. 장소월의 눈동자가 떨렸다. 부부로 산 세월이 몇 년인데 그동안 잠자리도 수없이 가졌고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장소월은 마음이 복잡했다.처음 전연우를 만난 것처럼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가 방금 어디까지 봤는지 모르겠다. 장소월은 돌아서지 못하고 빨리 원피스를 입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무슨 일 있어요?”전연우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책상에 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백화점 문화 상품권인데 옷이나 액세서리 필요하면 사. 윤서랑 너 각각 한 장씩이야.”“네, 고마워요. 오빠.”전연우는 급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마치 짐승처럼 마구 요동쳤다. 그렇게 몇 초 후 전연우는 발걸음을 떼어 회의 자료를 갖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잡고 아까 소녀의 관능적인 허리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장소월?’그가 미치지 않고서야!전연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액셀을 밟아 장가네 대문을 신속하게 빠져나갔다.장소월은 방안에서 공부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머리를 식히려고 문을 열었는데 마침 위층으로 올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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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9화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8화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7화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6화

    소민아도 고모의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뼈에 사무치게 경험해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기성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그와 함께하지 않을 수도 없다.예전 회사에서는 시끄럽게 다투기가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그에게 벌컥 화를 내며 영원히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미 자신의 모든 마음과 몸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을.그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앞으로 그 어떤 험난한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예전처럼 그의 옆에서 비서로 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엔 가장 싫어했던 일들을 지금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기성은 씨,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3년 뒤면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었잖아요. 기성은 씨는 날 속였어요.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잘 지내고 싶어요.명세진이 말했다. “요즘 서울은 너무 흉흉해. 앞으로 밖에 나갈 때 조심해야겠어. 하, 현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그 바보 같은 놈이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소민아는 명세진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신매매를 하던 암시장 유흥업소 세 곳이 경찰에 발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량의 금지된 마약 물품이 발견되었고, 면북으로 팔려갈 뻔한 백여 명의 여자들이 구조되었다고 한다.사진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운전기사는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지만, 결국 남운 국경 수비대에 붙잡혔다. 마지막으로 밝혀진 정보로는 약물에 완전히 중독되어 몰래 면북 지대로 넘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그 아래에는 한 소녀가 길거리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이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장기가 적출된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곧이어 휴대폰에 면북 범죄 조직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했고, 납치된 사람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5화

    명세진이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결혼인데, 결혼식을 안 하다니 말이 안 돼. 남들이 알면 비웃을 거야.”신이랑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그가 확연히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뭐든 민아 씨 뜻에 따를 거예요.”“이게...”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명세진 역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결혼식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양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는 빼놓을 수 없지.”소민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다음 달로 식사 약속을 잡아놨어요. 그때 아빠 엄마랑 같이 오세요.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죠.”“그래... 너랑 이랑이 둘 다 괜찮으면, 고모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참, 민아야, 혹시 현아한테 요즘 전화해 본 적 있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매일 집에 전화했을 텐데, 요즘 들어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게다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해 봐도 통화가 안 돼.”소민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이미 전화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명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현아 몸 상태가 걱정돼. 애가 혹시나 병이 더 악화되면 우리까지 못 알아보게 될까 봐.”소민아는 명세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든 현아 언니랑 연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그래, 오늘 쉬는 날이면 여기서 자고 가. 마침 빈방도 있잖아.”소민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명세진과 함께 뒷마당을 산책했고, 신이랑은 회사에서 돌아온 소정국과 거실에서 장기를 두었다.소민아가 명세진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넌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혹시 다퉜어?”“민아야, 결혼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4화

    “혹시 나한테 불평하는 거야?”강지훈은 돌연 발작이라도 하듯, 제 몸 위에 있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점점 더 기고만장해지는군!”천효연은 풀썩 주저앉았지만, 상처 입거나 괴로운 기색은 전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두 무릎으로 기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유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벌려 남자의 손가락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남자의 눈에서 분노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행동은 더더욱 과감해졌다. 혀를 움직여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강지훈은 허리 아래 매혹적인 자태의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효연 같은 여자는 전문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훈련을 받는다. 태생적으로도 요물과 같아서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고 사로잡는다.강지훈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채, 엄청난 크기의 물건을 그녀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천효연은 입을 벌려 온몸으로 받아들였다.몇 번이고 반복되는 거칠기 그지없는 행위...마침내 절정에 이르자, 천효연은 마치 처음 경험해본 황홀한 맛인 듯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혀를 내밀어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강지훈은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 바로......소민아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소현아는 전화벨이 울린 지 3초 안에 빠르게 받곤 했었는데 말이다.신이랑은 손에 선물을 든 채 그녀를 위로했다. “불안하면 나랑 같이 가봐요.”소민아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곳은 한 번 가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그녀는 지난번 북경 감옥에 갔을 때,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데다 깊은 산속을 뚫고 가야 하는 곳이라 일반적인 차는 전혀 드나들지 않는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끔찍한 소문들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3화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2화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 환생후 사랑따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1291화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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