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반은 6층에 있고 학생전용 엘리베이터도 있다.제운고는 아침자습이 없고 첫 수업은 9시에 시작된다. 그래서 등교시간도 비교적 늦다.장소월은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친구들을 바라보았는데 그 중에 이름을 아는 친구가 몇 없었다.수업 종이 울리자 장소월은 기억하던 대로 신속히 자리에 앉았다.자리에 앉은 후, 아직 가방도 내려놓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겨졌다.몇몇 친구들의 수군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강용 자리 아냐? 미쳤어, 쟤 정말 저기에 앉은 거야?”“며칠 아프더니 멍청해진 거 아냐?”‘뭐? 강용?’장소월은 책 하나 없는 깨끗한 책상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이게 어떻게 강용의 자리야? 내가 항상 뒤로 둘째줄에 앉았는데? 이 자리가 아닌가?’때마침 강용은 교실문 앞에 서있었다. 그는 흘러내리듯이 입은 교복에 넥타이도 제대로 메지 않은 채 손에 가방을 들고 장소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혀끝으로 어금니를 꾹 누르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눈빛 하나만으로 장소월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강용의 뒤로 그의 따까리인 허철과 방서연이 따라들어왔다.강용과 장소월은 원수 사이와 다름 없었고 이 학교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일진이었다.강용은 학교에서 항상 제멋대로 행동했고 장소월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 만나더라도 거의 다 강용이 찾아와서 시비 걸고 따지는 정도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순히 장소월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장소월은 서문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창가에서 뒤로부터 두번째, 그제야 알았다. 아파서 학교에 못 왔던 사이에 자리배치가 바뀌었던 것이다.장소월은 숨을 헉 들이마시며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강용은 성질이 난폭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일진이다. 그는 자기 자리로 다가가 발로 책상을 걷어찼는데 의자도 함께 구석으로 날아가버렸다.철로 만든 의자인데도 의자의 한쪽 다리가 푹 패어 들어갔다.반에
45분간의 수업이 끝나자 장소월은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뒷줄로 걸어가 강용의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땅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장소월의 움직임을 보고 많은 사람이 의아해하며 의논이 분분했다.“헐, 뭐야! 장소월같은 공주병이 비굴하게 허리를 굽혀 강용의 책을 주워 준다고?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야?”“종일 말 한마디 없는 장소월이 원수의 책을 주워 준다고? 세상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면 귀신이 쓰인 것이 분명해!”누군가가 슬며시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몰래 찍어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장소월은 주변의 의논 소리를 무시하고 물건을 정리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성격이 좋아서 그나마 강용의 성질을 받아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이때 학교 뒤편의 쓰레기장에서 허철은 오늘 저녁에 어느 술집에 가는지를 묻고 있었다.방서연은 핸드폰을 하던 중에 무심결에 튀어나온 문자 한 통에 깜짝 놀랐다.‘장소월이 설마...’제목도 채 읽지 않고 장소월의 이름만 본 방서연이 바로 클릭해 보니 사진 한 장이 튀어나왔다. 장소월이 쪼그려 앉아 책들을 안고 있었다. 이 자리는...“헐! 헐! 형님, 이것 좀 봐요! 학교 홈페이지 봐요. 장소월이 책을 주워 줬던데요!”“뭐라고?”허철은 잘 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강용은 눈썹을 올리더니 방서연이 건넨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한 소녀가 쪼그려 앉아 치마가 바닥에 쓸렸다. 사진에는 장소월의 정교한 옆쪽 얼굴과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등에 비추고 있었다. 장소월은 한쪽 손에 책을 안고 다른 한쪽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줍고 있었다. 사진 한 장에 세월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장소월은 점심에 식당에 가지 않는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학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도시락을 싸 오는 편이다. 교실에는 장소월 혼자만 남아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말고는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장소월은 아줌마가 해
장소월은 전생에 공부하겠다는 의지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교실을 나서 도서관에서 자습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지금의 지식으로 그녀는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정도이다. 지방대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좀 더 노력해 보면 인서울도 노려볼 만했다.장소월은 문과는 잘하는데 이과 수학이 좀 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다른 과목을 공부할 여유가 없었다.방과 후에 요리 수업, 피아노 수업... 등 다른 수업을 들어야 했다.장소월은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우울함에 빠졌다...장소월은 고뇌에 빠진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간 낭비였고 그 시간에 차라리 단어나 몇 개 더 외우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머릿속의 잡생각을 집어치우고 장소월은 단어를 외우는 것에 집중했다.도서관에는 5반과 6반 학생 외에는 다른 반의 학생은 거의 오지 않는다.지금은 수업 시간이라 도서관에 관리인을 빼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장소월은 혼자 있는 것에 익숙했고, 지금 이 대로가 딱 좋다고 느껴졌다.이때 누군가가 행정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2층에 있던 사람은 장소월이 창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찍고 바로 홈페이지 게시물에 올려버렸다.“빨리 홈페이지 봐. 장소월이 강용을 피해 도서관으로 갔어.”1분도 안 돼서 바로 답글이 달렸다.「대박, 역시 강용 형님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쉽게 쫓아 버리다니! 더 이상 반에서 마주칠 일이 없겠지?」「두고 봐. 이틀도 안 돼서 돌아올 거라고 본다.」이 글에 또 답글이 달렸다.「그럴 리가 없어.」「왜?」「왜냐면, 강용 형님이 방금 장소월 책상이랑 의자를 모두 교실 밖으로 버렸고 청소하는 아줌마가 방금 끌고 나갔어. 아마 폐품으로 팔아 버렸을 거야.」그리고 사진 몇 장이 올라왔는데 장소월의 책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위에 무엇인지 모르겠는 구토 물질까지 있었다.장소월은 아직 자기가 제명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다.시험지 한 장을
강만옥은 하이힐을 밟고 긴 곱슬머리를 어깨 뒤로 늘어뜨린 채 요염하게 걸어왔다.“소월아, 뭐해?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그녀가 손을 내밀자 장소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바닥에 있던 도시락통을 줍고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갔다,복도를 걷는 장소월은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가슴은 전혀 느껴보지 못한 숨 막힘을 느껴졌다.사실 잘 생각해 보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목적을 가지고 그녀를 접근했고 그 누구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첫 번째는 전연우다. 그녀의 사랑을 이용해 달콤한 속삭임으로 유언장을 훔쳐 갔고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그녀는 바로 버려졌다.두 번째는 강만옥이다. 학교에서 항상 따뜻하게 챙겨주고 속마음도 들어주며고 심리상담까지 해주며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 이유는 장해진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고, 장가로 들어가자 전연우와 연합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장해진을 살해했다.세 번째는 송시아다. 한때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거짓이었다!모든 것이 거짓이었다!장소월은 다른 강의실 건물로 가서 도시락통을 꺼내 깨끗이 닦았다. 쇳내에 비린내까지 섞인 그 냄새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고 손목에 있는 상처를 적셔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장소월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얼어붙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 듯 도시락통을 깨끗이 씻어내니 상처 부위는 하얗게 변했고 핏자국이 은은하게 퍼져 보기 흉하고 끔찍했다.모든 것을 마치고 떠나려던 중,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누군가가 검은 봉지로 그녀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거대한 힘으로 그녀를 밀쳤다. 머리가 벽에 부딪혀 심한 통증이 전해왔다.누군가 발로 그녀의 등을 찼고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치기도 했다. 주먹이 한대, 또 한대 날아왔고, 발길이 한 번 또 한번 내리쳤다. 통증이 온몸에 퍼졌고 그녀는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녀는 제대로 보지 못했고 도대체 몇
아줌마가 대답했다.“네, 오늘 기사님께서 아가씨 데리러 가셨을 때 아가씨가 학교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가 평소에 다니시는 학원에도 연락을 다 돌려봤는데 역시 가지 않으셨대요. 방금 경찰서에 신고하긴 했는데... 어떡하죠, 연우도련님?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연우가 한편으로는 통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운전하며 말했다.“아마 괜찮을 겁니다. 조금 전에 소월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받지 못했었거든요. 우선... 제가 먼저 소월이가 자주 가는 곳에 가서 찾아볼게요. 찾으면 그때 다시 연락 드릴게요.”“좋아요, 알겠습니다!”아줌마가 먼저 통화를 끊자, 연우도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통화 소리를 엿들은 윤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소월이가 갑자기 사라져요? 정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 아니에요?”“아마 사람들 몰래 어디 놀러 나간 걸 거야. 걱정하지 마, 일단 너 먼저 데려다줄게.”“나도 오빠가 소월이 찾는 거 도와줄게요!”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 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것 같거든.”소월은 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습관이 되어있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연우에게 삐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소월이 이런 적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연우는 소월의 그런 행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런데도 연우는 매번 강하게 나서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현재 그녀의 갑작스러운 실종이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깊은 밤, 자동차가 천천히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고급 단독주택구 대문 앞에 들어섰다. 연우는 쇼핑백을 들고 내려 자동차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키 크고 늘씬한 몸매에 파란 꽃잎들이 수 놓인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축 늘어뜨린 백윤서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말했다.“얼른
소월은 연우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전신 중 어느 한 곳 안 아픈 데가 없었는데, 아프다 못해 뼛속 안이 아플 지경이었다.귓가에 희미하게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때에 오셔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골절되었던 갈비뼈는 다시 붙고 있으니, 이곳에 며칠 입원해 상황을 지켜보면서 당분간 환자가 침대에서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겁니다. ““...”“그리고 음식은 되도록 담백한 것 위주로 드리시고요.”“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사가 나간 후, 정장을 입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서 벨 소리가 울리자, 그는 재깍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사람은... 좀 어때?”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경호원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장소월의 상황을 전부 그에게 보고했다.“...대체적인 상황은 이러하고 현재 아가씨께서는 위험을 벗어나셨습니다.”“가서 조사해 봐,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3일 안에 반드시 찾아내... 그게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거니까.”“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걱정하지 마, 심하게는 안 할 테니.”“네, 도련님!”통화가 끝나고, 장소월은 어렴풋이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얼마 안 지나,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장소월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장소월이 다시금 눈을 뜬 건, 3일이 훌쩍 지나고였다.그녀는 갈비뼈 몇 대가 모두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발견될 당시, 손목에 난 큰 상처로 인해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머리 역시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거의 쇼크 상태였다. 사람에게 제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소월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밤 10시쯤, 몽롱해 있던 그녀의 귀에 별안간 곁에서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불쌍한 우리 아가씨...”손가락을 조금씩 살짝 움직이자, 희미했던 눈앞이 갑자기 선명해졌고 소월은 입을 떼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나서야 소월은 잠에 들었다.새벽 세 시쯤, 불현듯 잠에서 깬 소월의 이마에는 식은땀은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숨이 차 호흡이 가빠 보였다. 침대에서 끙끙 앓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와 볼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차가워진 걸 보니 열이 이 정도면 많이 내린 것 같네.”물을 담으러 갔던 아줌마가 돌아오며 이 광경을 보았다.“이제 제가 아가씨 볼게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얼른 돌아가서 일찍 쉬세요, 도련님!”연우는 기어코 병원에 왔다. 그가 이런 좋은 마음을 베푸는 건 결코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좋은 동생으로 여기고 한다는 걸, 소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괜찮습니다. 진통제는 먹었나요?”“네, 10시쯤에 드셨어요.”“이 약은 많이 먹으면 안 돼요.”연우는 세숫대야에 담긴 수건을 쭉 짜서 그녀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들을 닦아주었다.“인제 그만 쉬세요, 아줌마! 저 오늘 반차 냈거든요.”아줌마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월을 한번, 또 연우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그... 그래요 그럼...”“안되요...”침대에서 나지막이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아줌마랑 있고 싶어요... 가지마요...”사실 소월은 일찍 깨어있었지만, 연우의 목소리를 듣자 그와 마주치기 싫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아줌마는 얼른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안가요... 저 어디 안 가요 아가씨.”그러고는 연우를 보며 말했다.“도련님, 아가씨가 저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니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돌보는 게 좋겠습니다.”“알겠습니다. 옆 칸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주세요.”“네, 도련님.”몸을 돌려 서자 연우는 다시금 예전의 차가운 표정을 하고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는밖으로 나갔다.소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연우의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전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
장소월은 종래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연우는 일찌감치 예상하였다.장해진은 향을 다 피운 다음 휙 돌아섰다.“소월이가 도대체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조사는 다 해왔나?”장해진은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급히 오는 바람에 옷조차 미처 갈아입지 못했다.그는 아주 크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손목에는 염주를 끼고 있었고 눈빛이 매서운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젊은 시절 장해진은 적지 않은 나쁜 짓을 도맡아 했는데, 한눈에 봐도 흉악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잔인한 수법으로 인해 사람들은 장해진을 두려워했다.일찍이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이었을까, 조금이나마 죄를 덜고자 장해진은 서재에 불상을 세워놓았고 매년 절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해왔다.“조사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강가네 사람들 역시 이 일을 조사하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사람을 시켜 범인을 잡으려 했는데 강가네 쪽 사람들이 한 발 더 빨리 그 사람을 데려갔습니다.”“강가네?”장해진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네.”강가네라... 이 서울바닥에 그만한 힘을 가진 강가네가 그 집안 빼고 또 누가 있을까!서울 4대 재벌세가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고, 서울의 상업경제명맥을 주름잡고 있는 강가네는 그야말로 재벌가 중의 재벌가, 진정한 상류사회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장가네는 그들에 비하면 발밑의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소월이가 언제 강가네 사람들하고 내통한 거지? 강용인가?”“아닙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강용이 사람을 시켜 소월이를 다치게 한거라면 그들이 소월이를 위해 나서는 일도 없겠죠.”강용은 강가네 집안의 사생아였다. 강용이 강가네 집안에 들어가기 한참 전에, 그는 장가네와 인연이 있었다.이렇게 소월의 일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강가네에서는 강용밖에 없었다.오랫동안 큰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지내다 보니 까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
세면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해 살펴보니 신이랑이 보내온 문자였다.[며칠 집에서 쉬어요.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소민아의 머릿속에 신이랑과 결혼하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던 송시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소월 언니 집안에 관한 일은 고모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장씨 집안의 지위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들조차도 장씨 집안에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수많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한 사람의 목숨은 단 한마디 말로 가볍게 좌지우지되는 것이었다. 소씨 집안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서울에서 난다긴다하는 명문가 집안도 장해진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송시아가 저지른 범죄도 그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갑자기 밀려온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세면대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낯설고도 생생한 기억이 펼쳐졌다.울음소리 가득한 어두운 지하실...남자 한 명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만두 하나를 쥐여주었다. 6, 7세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는 허겁지겁 만두를 입에 구겨 넣었다...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고통을 견디며 30초 정도 지내 보내니 그제야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왜 그녀 기억 속엔 없었던 걸까...그 남자는 누구지?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도우미가 깨끗이 세척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가 이상한 모습의 소민아를 보고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소민아는 어렸을 때 자주 두통을 앓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병하지 않았다.도우미가 얼른 약을 꺼내 소민아에게 가져다주었다.약을 입에 넣고 물로 삼키니 두통이 많아 가라앉았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계속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세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녀가 신이랑과 결혼만 하면 송시아는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네?”소민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 신이랑과 거리를 넓혔다.“난 괜찮으니까 먼저 돌아가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요.”“그래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회사와 내가 가려는 곳은 반대 방향이에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이랑 씨 일에 영향 줄 수는 없어요.”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그 변화를 느낀 신이랑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어렸다.“민아 씨,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송시아가 또 기성은 씨로 협박한 거예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신이랑 씨,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이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잖아요! 그보단... 다른 관계...’소민아는 그에게 똑똑히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랑 씨, 여긴 불편하니까 차에 가서 얘기할까요?”“그래요. 내가 캐리어 들어줄게요.”신이랑은 소민아의 짐을 들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그가 물었다.“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이랑 씨, 우린 친한 친구 맞죠? 이랑 씨도 송시아처럼 나쁜 사람으로 변하진 않을 거죠?”신이랑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아 씨, 나쁘게 변하든 아니든 절대 민아 씨를 해치진 않을 거예요!”신이랑이 그녀에게 하는 약속이었다.“민아 씨 생각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아요?”소민아는 그를 믿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송시아의 말로는 신이랑은 앞으로 정계에 입성할 것이고 기성은의 위협이 될 거라고 한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기성은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에 돌아가면 그 누구의 말도 믿으면 안 돼요.”“이랑 씨는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소민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목구멍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당신 생각이에요, 아니면 이랑 씨 생각이에요?”송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민아야, 그 말을 이랑 씨가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줄곧 신이랑은 나랑 다르다고 말해왔으면서, 지금 신이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했던 말 잊었어?”“신이랑은 널 위해 본가에까지 들어갔어!”송시아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신이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만을 위해 살았어!”“핸드폰 확인해봐. 신이랑이 너한테 문자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성은의 문자 외에 다른 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송시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일단 씻고 내려와서 밥 먹어. 저녁에 서울로 돌아갈 거야.”소민아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베터리가 없어 꺼진 상태였다. 충전선을 꼽고 전원을 켜니 송시아의 말처럼 신이랑으로부터 적잖은 문자가 와 있었다.40개가 넘는 문자 중 대부분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말투에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이럴수록 소민아는 그에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감이 더해갔다.오후 3시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소민아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송시아가 그녀 옆에 앉아 눈을 감고는 말했다.“보지 마. 아무리 봐도 기성은은 너랑 같이 여길 떠나지 않아.”“기성은은 애초부터 이 더러운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아무리 애써도 뼛속 깊이 새겨진 비천함은 변하지 않아.”소민아가 말했다.“당신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도 예전엔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거 잊지 말아요.”송시아가 들뜬 말투로 말했다.“이 세상 사람들에겐 모두 등급이 있어. 전연우가 아니었다면 기성은은 아직도 여기에서 굴러다녔을 거야. 참, 내가 알려줬었나? 기성은의 아버지는 지독
“그때가 되면 소씨 가문도, 그리고 언니도... 기성은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 수 있어.”송시아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사람의 가장 여린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몇 마디 말에 소민아는 패닉에 빠져버렸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기성은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신이랑 씨도 당신 말처럼 기성은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요. 당신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글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송시아가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민아야,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아. 장씨 가문은 서울 지하조직 수장이었다고. 그 인간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기나 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해진이 죽길 바랐을까. 전연우가 없었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거야.”“그동안 장씨 집안, 남원 별장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장씨 집안은 전연우와 기성은이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장소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에 불과해.”“장씨 집안이 끝나버린 지금, 기성은은 장씨 집안의 뒤처리를 해주려고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야.”“장씨 집안이 저지른 죄를 모아 신고하면 목숨이 몇백 개라도 모자라거든.”소민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됐어요. 그만 해요. 소월 언니를 벌레 보듯 하고 있는데... 소월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모든 잘못을 소월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소월 언니는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진 않았으니까요!”“만약 내가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날 해치우려고 했어요? 난 저번 하마터면 당신 손에 철저히 망가질 뻔했어요.”송시아는 화가 나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이 착하다고? 그래! 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나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귀한 집 아가씨였어. 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민아야... 우리한테 제일 필요 없는 게 바로 착함이야. 장소월처럼 살았다면 난 이미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네
기성은은 그녀를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소민아가 돌아가 보니 송시아는 밤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송시아가 어디에 갔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베개를 등에 받히고 침대에 누웠다.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소민아에겐 더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송시아가 돌아왔을 때, 소민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선 베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 옷깃에 묻은 자국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송시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버렸다고?신이랑이 기성은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배경도, 돈도 없는 기성은을 좋아하게 된 걸까.송시아도 밤새 바쁘게 보냈던 지라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소민아의 옆에 누웠다.소민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본 순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가 피어올랐다.그 움직임에 송시아도 깨어났다.소민아가 말했다.“방이 두 개나 있는데 왜 하필 내 침대에 누운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예전엔 언니랑 딱 붙어 자는 거 좋아했잖아.”소민아는 그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아이가 있든 없든 난 끝까지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소민아는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 송시아에게 물었다.“우리 언제 돌아가요?”“어젯밤 기성은 만났어? 기성은도 너한테 꽤 마음이 있나 보네.”“묻고 싶었던 건 물어봤어?”“안 물어봤어요.”송시아는 화장대에 앉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귀걸이를 걸며 말했다.“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줄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기성은을 선택하면서 신이랑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봤어? 신이랑은 널 위해 제일 돌아가고 싫어하던 본가로 들어갔어.
차가운 밤바람에 체온이 떨어지자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은밀한 위치에 멈춰선 차에 올라타고는 히터를 틀었다.소민아는 바로 그의 몸에 올라타고 키스를 퍼부었다. 마음껏 키스한 다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기성은 씨, 3년 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3년 안에 서울로 돌아와요. 그동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냥 3년 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하나만 해줘요.”“기성은 씨만 원한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기성은 씨를 대신해 총괄 비서 자리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전 대표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요.”기성은에게 있어 모든 것이 미지수다. 3년이라...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3년이 있을 수 있을까.“이곳을 떠나면 동의할게요.”소민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힘들게 왔는데 허탕을 치면 안 되죠. 날이 밝기 전엔 갈 생각하지 말아요.”소민아가 그의 옷 단추를 풀었다.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 소민아는 거칠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기성은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성은도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송시아도 왔어요. 저 곧 가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기성은 씨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기성은이 바깥을 쳐다보니 날은 이미 밝아있었다.“내가 송시아의 동생이라면, 나 미워할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그건 알고 있었어요.”“그럴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소민아는 다시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평온한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심어 주었다.“그럼 기성은 씨 생각은 어때요? 제가 그 여자를 언니로 인정해야 할까요? 제 머릿속엔 조각조각 찢어진
“여긴 민아 씨가 올 곳이 아니에요.”“누구랑 같이 왔어요? 지금 당장 그 사람과 함께 돌아가요.”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이제야 내가 걱정되는 건가? 그동안 수도 없이 문자를 보냈을 때는 줄곧 감감무소식이었다가.’그는 예전과 같이 짧게 몇 글자만 보내왔지만 소민아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내가 갈게요.”기성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였다.소민아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놈, 이제야 올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대체 뭘 한 건데!”그녀는 거울 속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빠르게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간단히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립스틱까지 바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생기진 않았네.그녀가 옷을 갈아입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면북의 밤공기는 조금 쌀쌀했기에 그녀는 목도리를 둘렀다.그녀가 문을 나서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아가씨, 이곳의 밤은 위험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시키시고 방에만 계십시오. 어디에도 나가면 안 됩니다.”소민아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는 말했다.“그렇군요! 그럼 귤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저 귤이 먹고 싶어요.”“알겠습니다.”다른 경호원들도 한 명씩 그녀에게 속아 자리를 비웠다.소민아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뛰어나갔다. 1층 문밖에도 총을 소지한 두 명이 경호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걸어 나가도 막아서지 않았다.소민아는 핸드폰을 들고 5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기성은이 말했던 강가로 한달음에 뛰어갔다.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강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꾸르륵거리는 물고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소민아는 다급한 마음에 강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라도 기성은을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휘청이던 몸의 중심을 잡고 살펴보니 눈앞에 건장한
바깥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그들을 둘러쌌다.송시아는 태연한 얼굴로 소민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이어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문 대표님, 앞으로는 손 간수 잘하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손이 무사할 수 있을지 저도 장담 못 해요.”송시아는 발을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늦었네요. 저와 동생은 이만 쉬어야 하니 가볼게요. 식사 계속하세요.”오늘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면북을 관리하는 4대 명문가 가주들이었다. 하지만 처참하게 당하는 문지강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그들에게 송시아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람이다.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문밖까지 걸어갔을 때, 송시아가 걸음을 멈추었다.“언니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너 먼저 돌아가 쉬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경호원한테 얘기하면 돼.”“언니를 위해 나서줘서 정말 기뻤어.”소민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권력을 얻기 위해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좀 봐요.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왜 저런 나쁜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거예요?”“지금 갖고 있는 권력과 재산들 다 몸을 팔아서 손에 넣은 거예요? 더럽지도 않아요?”송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안 돼? 예로부터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 쾌락을 누리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어. 남자가 여자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탐하는데 난 왜 안 돼?”“민아야, 언니도 아무 남자와 접촉하는 게 아니야. 됐어. 이제 이 일은 더는 언급하지 마. 알겠어? 언니...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어.”송시아가 등 뒤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안전하게 데려다줘.”소민아가 말했다.“기성은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잖아요.”“며칠 뒤면 만날 수 있을 거야.”소민아는 그녀가 검은색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차 안에 남자 한 명이 있는 것 같았지만 너무 어두운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