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옥은 하이힐을 밟고 긴 곱슬머리를 어깨 뒤로 늘어뜨린 채 요염하게 걸어왔다.“소월아, 뭐해?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그녀가 손을 내밀자 장소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바닥에 있던 도시락통을 줍고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갔다,복도를 걷는 장소월은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가슴은 전혀 느껴보지 못한 숨 막힘을 느껴졌다.사실 잘 생각해 보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목적을 가지고 그녀를 접근했고 그 누구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첫 번째는 전연우다. 그녀의 사랑을 이용해 달콤한 속삭임으로 유언장을 훔쳐 갔고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그녀는 바로 버려졌다.두 번째는 강만옥이다. 학교에서 항상 따뜻하게 챙겨주고 속마음도 들어주며고 심리상담까지 해주며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 이유는 장해진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고, 장가로 들어가자 전연우와 연합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장해진을 살해했다.세 번째는 송시아다. 한때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거짓이었다!모든 것이 거짓이었다!장소월은 다른 강의실 건물로 가서 도시락통을 꺼내 깨끗이 닦았다. 쇳내에 비린내까지 섞인 그 냄새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고 손목에 있는 상처를 적셔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장소월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얼어붙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 듯 도시락통을 깨끗이 씻어내니 상처 부위는 하얗게 변했고 핏자국이 은은하게 퍼져 보기 흉하고 끔찍했다.모든 것을 마치고 떠나려던 중,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누군가가 검은 봉지로 그녀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거대한 힘으로 그녀를 밀쳤다. 머리가 벽에 부딪혀 심한 통증이 전해왔다.누군가 발로 그녀의 등을 찼고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치기도 했다. 주먹이 한대, 또 한대 날아왔고, 발길이 한 번 또 한번 내리쳤다. 통증이 온몸에 퍼졌고 그녀는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녀는 제대로 보지 못했고 도대체 몇
아줌마가 대답했다.“네, 오늘 기사님께서 아가씨 데리러 가셨을 때 아가씨가 학교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가 평소에 다니시는 학원에도 연락을 다 돌려봤는데 역시 가지 않으셨대요. 방금 경찰서에 신고하긴 했는데... 어떡하죠, 연우도련님?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연우가 한편으로는 통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운전하며 말했다.“아마 괜찮을 겁니다. 조금 전에 소월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받지 못했었거든요. 우선... 제가 먼저 소월이가 자주 가는 곳에 가서 찾아볼게요. 찾으면 그때 다시 연락 드릴게요.”“좋아요, 알겠습니다!”아줌마가 먼저 통화를 끊자, 연우도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통화 소리를 엿들은 윤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소월이가 갑자기 사라져요? 정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 아니에요?”“아마 사람들 몰래 어디 놀러 나간 걸 거야. 걱정하지 마, 일단 너 먼저 데려다줄게.”“나도 오빠가 소월이 찾는 거 도와줄게요!”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 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것 같거든.”소월은 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습관이 되어있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연우에게 삐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소월이 이런 적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연우는 소월의 그런 행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런데도 연우는 매번 강하게 나서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현재 그녀의 갑작스러운 실종이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깊은 밤, 자동차가 천천히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고급 단독주택구 대문 앞에 들어섰다. 연우는 쇼핑백을 들고 내려 자동차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키 크고 늘씬한 몸매에 파란 꽃잎들이 수 놓인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축 늘어뜨린 백윤서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말했다.“얼른
소월은 연우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전신 중 어느 한 곳 안 아픈 데가 없었는데, 아프다 못해 뼛속 안이 아플 지경이었다.귓가에 희미하게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때에 오셔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골절되었던 갈비뼈는 다시 붙고 있으니, 이곳에 며칠 입원해 상황을 지켜보면서 당분간 환자가 침대에서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겁니다. ““...”“그리고 음식은 되도록 담백한 것 위주로 드리시고요.”“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사가 나간 후, 정장을 입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서 벨 소리가 울리자, 그는 재깍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사람은... 좀 어때?”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경호원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장소월의 상황을 전부 그에게 보고했다.“...대체적인 상황은 이러하고 현재 아가씨께서는 위험을 벗어나셨습니다.”“가서 조사해 봐,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3일 안에 반드시 찾아내... 그게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거니까.”“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걱정하지 마, 심하게는 안 할 테니.”“네, 도련님!”통화가 끝나고, 장소월은 어렴풋이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얼마 안 지나,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장소월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장소월이 다시금 눈을 뜬 건, 3일이 훌쩍 지나고였다.그녀는 갈비뼈 몇 대가 모두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발견될 당시, 손목에 난 큰 상처로 인해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머리 역시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거의 쇼크 상태였다. 사람에게 제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소월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밤 10시쯤, 몽롱해 있던 그녀의 귀에 별안간 곁에서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불쌍한 우리 아가씨...”손가락을 조금씩 살짝 움직이자, 희미했던 눈앞이 갑자기 선명해졌고 소월은 입을 떼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나서야 소월은 잠에 들었다.새벽 세 시쯤, 불현듯 잠에서 깬 소월의 이마에는 식은땀은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숨이 차 호흡이 가빠 보였다. 침대에서 끙끙 앓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와 볼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차가워진 걸 보니 열이 이 정도면 많이 내린 것 같네.”물을 담으러 갔던 아줌마가 돌아오며 이 광경을 보았다.“이제 제가 아가씨 볼게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얼른 돌아가서 일찍 쉬세요, 도련님!”연우는 기어코 병원에 왔다. 그가 이런 좋은 마음을 베푸는 건 결코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좋은 동생으로 여기고 한다는 걸, 소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괜찮습니다. 진통제는 먹었나요?”“네, 10시쯤에 드셨어요.”“이 약은 많이 먹으면 안 돼요.”연우는 세숫대야에 담긴 수건을 쭉 짜서 그녀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들을 닦아주었다.“인제 그만 쉬세요, 아줌마! 저 오늘 반차 냈거든요.”아줌마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월을 한번, 또 연우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그... 그래요 그럼...”“안되요...”침대에서 나지막이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아줌마랑 있고 싶어요... 가지마요...”사실 소월은 일찍 깨어있었지만, 연우의 목소리를 듣자 그와 마주치기 싫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아줌마는 얼른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안가요... 저 어디 안 가요 아가씨.”그러고는 연우를 보며 말했다.“도련님, 아가씨가 저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니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돌보는 게 좋겠습니다.”“알겠습니다. 옆 칸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주세요.”“네, 도련님.”몸을 돌려 서자 연우는 다시금 예전의 차가운 표정을 하고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는밖으로 나갔다.소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연우의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전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
장소월은 종래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연우는 일찌감치 예상하였다.장해진은 향을 다 피운 다음 휙 돌아섰다.“소월이가 도대체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조사는 다 해왔나?”장해진은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급히 오는 바람에 옷조차 미처 갈아입지 못했다.그는 아주 크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손목에는 염주를 끼고 있었고 눈빛이 매서운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젊은 시절 장해진은 적지 않은 나쁜 짓을 도맡아 했는데, 한눈에 봐도 흉악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잔인한 수법으로 인해 사람들은 장해진을 두려워했다.일찍이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이었을까, 조금이나마 죄를 덜고자 장해진은 서재에 불상을 세워놓았고 매년 절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해왔다.“조사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강가네 사람들 역시 이 일을 조사하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사람을 시켜 범인을 잡으려 했는데 강가네 쪽 사람들이 한 발 더 빨리 그 사람을 데려갔습니다.”“강가네?”장해진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네.”강가네라... 이 서울바닥에 그만한 힘을 가진 강가네가 그 집안 빼고 또 누가 있을까!서울 4대 재벌세가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고, 서울의 상업경제명맥을 주름잡고 있는 강가네는 그야말로 재벌가 중의 재벌가, 진정한 상류사회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장가네는 그들에 비하면 발밑의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소월이가 언제 강가네 사람들하고 내통한 거지? 강용인가?”“아닙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강용이 사람을 시켜 소월이를 다치게 한거라면 그들이 소월이를 위해 나서는 일도 없겠죠.”강용은 강가네 집안의 사생아였다. 강용이 강가네 집안에 들어가기 한참 전에, 그는 장가네와 인연이 있었다.이렇게 소월의 일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강가네에서는 강용밖에 없었다.오랫동안 큰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지내다 보니 까
“도련님, 차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정말 강가네로 가실 생각입니까?”“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기라도 한가?”반듯한 셔츠에 외투를 걸친 남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뽐내며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옷소매 아래로는 푸르스름한 문신이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남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부인께서...”강영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이건 내 일이지, 그 사람이 관여할 게 아니야!””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지금 바로 차로 모시겠습니다.”강영수가 집 밖에 나와 햇빛을 볼 수 있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바깥세상은 그녀가 말한 것과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강영수는 곁눈질로 담 너머의 대추나무를 힐끗 보았다. 그곳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유유히 흔들고 눈을 찡긋하며 은은한 미소를 보내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했다.정작 눈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그 따뜻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뿐이었다.한 시간 후, 그를 태운 차가 호화로운 별장에 도착했다. 문 입구에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두줄로 나란히 서있었다. 검은색 카니발이 천천히 대문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앞으로 재빨리 다가와 조수석 뒷편의 문을 열어주었다.하인이 휠체어를 밀고와 강용수를 그곳에 앉혔다. 줄 서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말했다.“집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련님!”강영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가네 고택을 얼마 만에 와보는 것인지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아이고 우리 수 왔구나~”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걸걸한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환갑을 넘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강병준이 다급히 말했다.“어머니, 천천히 하세요.”강영수는 노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창백한 입술을 천천히 뗐다.“할머니.”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네가 드디어 할미를 보러 오는구나.”영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뒤에 서 있는 중년남
“괜찮습니다. 이곳에 제 자리는 없는 것 같아요. 돌아오면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될까 두렵기도 하고요.”조금은 냉랭한 말투였다.그 말을 들은 할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지셨다.“누가 그러더냐? 우리 강가네 손자라고는 오직 너밖에 없단다. 너는 커서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곳 사람이란 말이냐?”강영수는 모르고 있었다. 강병준이 심유를 아내로 맞이한 다음, 강용은 강가네 고택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했고 강가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을.“영수야, 말하는 태도에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이 여태 너를 이렇게 가르쳤니?”“저를 어떻게 교육해왔는지... 아버지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손안의 젓가락을 꽉 움켜쥔 영수의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히 돋아나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할머니에게 불편을 끼쳐드릴 전혀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해요, 할머니.”영수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손으로 그의 손등에 살며시 얹으며 물었다.“수야, 무슨 일이냐 도대체? 누가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거냐? 이 할미에게 다 말하렴...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그럴 필요 없으세요.”영수는 젓가락을 놓고는 티슈를 뽑아 입 주변을 닦고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사람은 도착했는가?”집사가 말했다.“이미 문밖에 계십니다.”영수는 손을 안쪽으로 휘휘 저었다.그 손짓을 본 집사는 문밖에 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두 명의 경호원들이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끌고 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강병준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용?”그의 얼굴 곳곳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두 손은 부러져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린채 엎드려 거의 반혼수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매서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할머니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재수 없는 놈. 수야, 이놈은 왜 데리고 왔느냐?”강병준은 당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퇴원했다. 이 시간 동안, 장소월은 마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몸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험지도 잊지 않고 몇 세트 풀었다.그 사이 전연우는 아무리 바빠도 꼭꼭 와서 장소월이 풀었던 시험지를 봐주곤 하였는데 틀린 곳을 발견하면 제때 알려줬고 차근차근 설명도 해주었다.쉬는 시간, 전연우는 평소에 장소월이 시간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게 하려고 그녀의 핸드폰에 몇몇 자신의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심심풀이용 게임을 다운로드해주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였는데 몇 개월 남지 않은 중간고사가 장소월이 장가네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만 했었다.‘전연우와 장해진의 싸움에서 멀어져야 해...'전연우는 장소월의 퇴원 절차를 도와주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몸의 상처도 겉의 딱지가 거의 모두 벗겨지고 그 위에 새로운 피부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가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이번에 전연우가 장소월한테 그나마 시간을 투자한 것은 단지 장해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밖에서 모두가 말하기를 전연우는 그저 장해진이 옆에서 키운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하지만 장소월만이 알고 있었다. 사실 전연우는 한 마리의 호시탐탐 목표물을 노리고 있는, 어둠 속에서 배회하고 있는 야생 늑대라는 것을.언제든지 사람을 눈 깜빡 안 하고 죽일 수 있는 짐승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는 무엇을 하든지, 그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그의 친절은 여태껏 헛되이 준 적이 없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아우디 차 앞으로 갔다.이미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백윤서를 보자마자 장소월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백윤서에게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차 앞으로 돌아 운전석 문 앞에 서서 장소월을 바라보던 전연우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대뜸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네가 퇴원했잖아. 마침 윤이도 같이 데리고 가서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