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대답했다.“네, 오늘 기사님께서 아가씨 데리러 가셨을 때 아가씨가 학교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가 평소에 다니시는 학원에도 연락을 다 돌려봤는데 역시 가지 않으셨대요. 방금 경찰서에 신고하긴 했는데... 어떡하죠, 연우도련님?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연우가 한편으로는 통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운전하며 말했다.“아마 괜찮을 겁니다. 조금 전에 소월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받지 못했었거든요. 우선... 제가 먼저 소월이가 자주 가는 곳에 가서 찾아볼게요. 찾으면 그때 다시 연락 드릴게요.”“좋아요, 알겠습니다!”아줌마가 먼저 통화를 끊자, 연우도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통화 소리를 엿들은 윤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소월이가 갑자기 사라져요? 정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 아니에요?”“아마 사람들 몰래 어디 놀러 나간 걸 거야. 걱정하지 마, 일단 너 먼저 데려다줄게.”“나도 오빠가 소월이 찾는 거 도와줄게요!”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 걔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것 같거든.”소월은 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습관이 되어있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연우에게 삐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소월이 이런 적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연우는 소월의 그런 행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런데도 연우는 매번 강하게 나서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현재 그녀의 갑작스러운 실종이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깊은 밤, 자동차가 천천히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고급 단독주택구 대문 앞에 들어섰다. 연우는 쇼핑백을 들고 내려 자동차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키 크고 늘씬한 몸매에 파란 꽃잎들이 수 놓인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축 늘어뜨린 백윤서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말했다.“얼른
소월은 연우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전신 중 어느 한 곳 안 아픈 데가 없었는데, 아프다 못해 뼛속 안이 아플 지경이었다.귓가에 희미하게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때에 오셔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골절되었던 갈비뼈는 다시 붙고 있으니, 이곳에 며칠 입원해 상황을 지켜보면서 당분간 환자가 침대에서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겁니다. ““...”“그리고 음식은 되도록 담백한 것 위주로 드리시고요.”“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사가 나간 후, 정장을 입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서 벨 소리가 울리자, 그는 재깍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사람은... 좀 어때?”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경호원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장소월의 상황을 전부 그에게 보고했다.“...대체적인 상황은 이러하고 현재 아가씨께서는 위험을 벗어나셨습니다.”“가서 조사해 봐,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3일 안에 반드시 찾아내... 그게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거니까.”“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걱정하지 마, 심하게는 안 할 테니.”“네, 도련님!”통화가 끝나고, 장소월은 어렴풋이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얼마 안 지나,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장소월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장소월이 다시금 눈을 뜬 건, 3일이 훌쩍 지나고였다.그녀는 갈비뼈 몇 대가 모두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발견될 당시, 손목에 난 큰 상처로 인해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머리 역시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거의 쇼크 상태였다. 사람에게 제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소월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 밤 10시쯤, 몽롱해 있던 그녀의 귀에 별안간 곁에서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불쌍한 우리 아가씨...”손가락을 조금씩 살짝 움직이자, 희미했던 눈앞이 갑자기 선명해졌고 소월은 입을 떼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나서야 소월은 잠에 들었다.새벽 세 시쯤, 불현듯 잠에서 깬 소월의 이마에는 식은땀은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숨이 차 호흡이 가빠 보였다. 침대에서 끙끙 앓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월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와 볼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차가워진 걸 보니 열이 이 정도면 많이 내린 것 같네.”물을 담으러 갔던 아줌마가 돌아오며 이 광경을 보았다.“이제 제가 아가씨 볼게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얼른 돌아가서 일찍 쉬세요, 도련님!”연우는 기어코 병원에 왔다. 그가 이런 좋은 마음을 베푸는 건 결코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좋은 동생으로 여기고 한다는 걸, 소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괜찮습니다. 진통제는 먹었나요?”“네, 10시쯤에 드셨어요.”“이 약은 많이 먹으면 안 돼요.”연우는 세숫대야에 담긴 수건을 쭉 짜서 그녀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들을 닦아주었다.“인제 그만 쉬세요, 아줌마! 저 오늘 반차 냈거든요.”아줌마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월을 한번, 또 연우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그... 그래요 그럼...”“안되요...”침대에서 나지막이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아줌마랑 있고 싶어요... 가지마요...”사실 소월은 일찍 깨어있었지만, 연우의 목소리를 듣자 그와 마주치기 싫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아줌마는 얼른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안가요... 저 어디 안 가요 아가씨.”그러고는 연우를 보며 말했다.“도련님, 아가씨가 저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니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돌보는 게 좋겠습니다.”“알겠습니다. 옆 칸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주세요.”“네, 도련님.”몸을 돌려 서자 연우는 다시금 예전의 차가운 표정을 하고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는밖으로 나갔다.소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연우의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전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
장소월은 종래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연우는 일찌감치 예상하였다.장해진은 향을 다 피운 다음 휙 돌아섰다.“소월이가 도대체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조사는 다 해왔나?”장해진은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급히 오는 바람에 옷조차 미처 갈아입지 못했다.그는 아주 크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손목에는 염주를 끼고 있었고 눈빛이 매서운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젊은 시절 장해진은 적지 않은 나쁜 짓을 도맡아 했는데, 한눈에 봐도 흉악한 생김새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푸근하고 자상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잔인한 수법으로 인해 사람들은 장해진을 두려워했다.일찍이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이었을까, 조금이나마 죄를 덜고자 장해진은 서재에 불상을 세워놓았고 매년 절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해왔다.“조사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강가네 사람들 역시 이 일을 조사하는 중이랍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사람을 시켜 범인을 잡으려 했는데 강가네 쪽 사람들이 한 발 더 빨리 그 사람을 데려갔습니다.”“강가네?”장해진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네.”강가네라... 이 서울바닥에 그만한 힘을 가진 강가네가 그 집안 빼고 또 누가 있을까!서울 4대 재벌세가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고, 서울의 상업경제명맥을 주름잡고 있는 강가네는 그야말로 재벌가 중의 재벌가, 진정한 상류사회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장가네는 그들에 비하면 발밑의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소월이가 언제 강가네 사람들하고 내통한 거지? 강용인가?”“아닙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강용이 사람을 시켜 소월이를 다치게 한거라면 그들이 소월이를 위해 나서는 일도 없겠죠.”강용은 강가네 집안의 사생아였다. 강용이 강가네 집안에 들어가기 한참 전에, 그는 장가네와 인연이 있었다.이렇게 소월의 일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강가네에서는 강용밖에 없었다.오랫동안 큰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지내다 보니 까
“도련님, 차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정말 강가네로 가실 생각입니까?”“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기라도 한가?”반듯한 셔츠에 외투를 걸친 남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뽐내며 휠체어에 앉아 있다. 옷소매 아래로는 푸르스름한 문신이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남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부인께서...”강영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이건 내 일이지, 그 사람이 관여할 게 아니야!””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지금 바로 차로 모시겠습니다.”강영수가 집 밖에 나와 햇빛을 볼 수 있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바깥세상은 그녀가 말한 것과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강영수는 곁눈질로 담 너머의 대추나무를 힐끗 보았다. 그곳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유유히 흔들고 눈을 찡긋하며 은은한 미소를 보내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했다.정작 눈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그 따뜻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뿐이었다.한 시간 후, 그를 태운 차가 호화로운 별장에 도착했다. 문 입구에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두줄로 나란히 서있었다. 검은색 카니발이 천천히 대문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앞으로 재빨리 다가와 조수석 뒷편의 문을 열어주었다.하인이 휠체어를 밀고와 강용수를 그곳에 앉혔다. 줄 서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말했다.“집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련님!”강영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가네 고택을 얼마 만에 와보는 것인지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아이고 우리 수 왔구나~”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걸걸한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환갑을 넘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강병준이 다급히 말했다.“어머니, 천천히 하세요.”강영수는 노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창백한 입술을 천천히 뗐다.“할머니.”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네가 드디어 할미를 보러 오는구나.”영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뒤에 서 있는 중년남
“괜찮습니다. 이곳에 제 자리는 없는 것 같아요. 돌아오면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될까 두렵기도 하고요.”조금은 냉랭한 말투였다.그 말을 들은 할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지셨다.“누가 그러더냐? 우리 강가네 손자라고는 오직 너밖에 없단다. 너는 커서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곳 사람이란 말이냐?”강영수는 모르고 있었다. 강병준이 심유를 아내로 맞이한 다음, 강용은 강가네 고택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했고 강가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을.“영수야, 말하는 태도에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이 여태 너를 이렇게 가르쳤니?”“저를 어떻게 교육해왔는지... 아버지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손안의 젓가락을 꽉 움켜쥔 영수의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히 돋아나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할머니에게 불편을 끼쳐드릴 전혀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해요, 할머니.”영수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손으로 그의 손등에 살며시 얹으며 물었다.“수야, 무슨 일이냐 도대체? 누가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거냐? 이 할미에게 다 말하렴...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그럴 필요 없으세요.”영수는 젓가락을 놓고는 티슈를 뽑아 입 주변을 닦고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사람은 도착했는가?”집사가 말했다.“이미 문밖에 계십니다.”영수는 손을 안쪽으로 휘휘 저었다.그 손짓을 본 집사는 문밖에 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두 명의 경호원들이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끌고 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강병준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용?”그의 얼굴 곳곳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두 손은 부러져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린채 엎드려 거의 반혼수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매서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할머니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재수 없는 놈. 수야, 이놈은 왜 데리고 왔느냐?”강병준은 당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퇴원했다. 이 시간 동안, 장소월은 마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몸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험지도 잊지 않고 몇 세트 풀었다.그 사이 전연우는 아무리 바빠도 꼭꼭 와서 장소월이 풀었던 시험지를 봐주곤 하였는데 틀린 곳을 발견하면 제때 알려줬고 차근차근 설명도 해주었다.쉬는 시간, 전연우는 평소에 장소월이 시간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게 하려고 그녀의 핸드폰에 몇몇 자신의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심심풀이용 게임을 다운로드해주었다.하지만 장소월은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였는데 몇 개월 남지 않은 중간고사가 장소월이 장가네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만 했었다.‘전연우와 장해진의 싸움에서 멀어져야 해...'전연우는 장소월의 퇴원 절차를 도와주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몸의 상처도 겉의 딱지가 거의 모두 벗겨지고 그 위에 새로운 피부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가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이번에 전연우가 장소월한테 그나마 시간을 투자한 것은 단지 장해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밖에서 모두가 말하기를 전연우는 그저 장해진이 옆에서 키운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하지만 장소월만이 알고 있었다. 사실 전연우는 한 마리의 호시탐탐 목표물을 노리고 있는, 어둠 속에서 배회하고 있는 야생 늑대라는 것을.언제든지 사람을 눈 깜빡 안 하고 죽일 수 있는 짐승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는 무엇을 하든지, 그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그의 친절은 여태껏 헛되이 준 적이 없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아우디 차 앞으로 갔다.이미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백윤서를 보자마자 장소월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백윤서에게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차 앞으로 돌아 운전석 문 앞에 서서 장소월을 바라보던 전연우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대뜸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네가 퇴원했잖아. 마침 윤이도 같이 데리고 가서
“소월아.”장소월은 비몽사몽 해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전연우의 예리하고도 어딘가 음침한 눈동자가 들어왔다. 장소월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반응이 다소 과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오빠... 왜... 왜 그래요?”전연우는 그녀를 차갑게 보면서 말했다. “집에 도착했어. 어서 내려.”“아... 네...” 전연우는 곧바로 차에서 나왔고 장소월이 안전벨트를 풀려던 찰나, 차 위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는 곧바로 뜯어버렸다.그리고 차 위에 놓인 물건들, 냄새를 제거하는 향수까지 모조리 깨끗이 치웠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자, 전연우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보았지만 모두 각자의 침묵을 지키며 서로 입을 열지 않았다.괜히 어떤 말을 꺼냈다가 자칫하면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였다.장소월이 현관문에 들어서자, 아줌마가 반겨주셨다. “오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 일단 먼저 손부터 씻고 나서 밥 드세요.”장소월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손님? 누구요?”“아가씨 담임 선생님이라던데요.”‘강만옥?’장소월은 순간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강만옥이 어떻게 여기에 왔지?’‘일부러 장해진인데 접근하려고 왔나?’‘아니면 전연우와의 계획이 앞당겨졌나?’장소월은 손이 덜덜 떨렸고 눈 밑에 어두운 빛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너무나도 빨라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그럼 강 선생님은요?”그녀는 지금 서재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듣자니 네가 학교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라고 한다.전생에 장소월에게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다시 태어나면서 원래의 운명이 흘러가야 하는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지금의 어떤 일도 함께 바뀐 것 같았다.전연우는 그녀를 지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백윤서의 곁으로 갔다.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소월에 관한 일은, 이후에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