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디딜 틈 없는 방안에서 소년은 휠체어에 앉아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눈을 가리는 앞머리 아래로 바닥에 뿌려진 유리 조각들 사이 커터칼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머릿속에서 괴로운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뭘 망설이는 거야. 한 번에 그어버려. 한 번의 아픔으로 모든 고통은 사라질 거야! 너희 아빠 엄마 이혼하고 각자 재혼하셔서 아이도 있잖아. 넌 버려졌어.”‘빨리 죽어버려! 죽으면 벗어날 수 있어!’‘당신들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결혼 한 거야! 왜 나를 낳았어!’‘각자 가족이 생기면 나는 어떡하라고? 난 도대체 뭐냐고.’강영수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고 결의에 차 있었다. 손으로 휠체어를 짚고 일어나자 두 다리로 설 수 없어 바닥에 넘어졌다. 손바닥은 유리 파편들이 박혀 피가 흘렀고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파편 속으로 손을 뻗어 커터칼을 잡고 천천히 위로 올려 날카로운 칼날을 빼냈다. 살짝 손목을 긋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그가 커터칼을 손목에 가져다 댄 바로 그 순간 창밖에서 대추 한 알이 날아 들어와 그의 옆에 떨어졌다.한 알, 또 한 알...대추 알들은 하나같이 크고 마치 바닥에 물든 피처럼 붉었다.강영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대추 한 알이 그의 머리로 날라왔다.‘아파!’머리에 맞은 대추 알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석으로 굴러갔다.한 소녀의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그거 우리 집 대추야. 먹어봐.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지 말고 그러다 병나. 혹시 대추 더 먹고 싶으면 나 찾아와. 쑥스러워하지 말고. 너도 맛있는 거 있으면 나한테 던져 나눠 먹자. 맞다, 나는 장소월이라고 해. 내가 매일 찾아와서 놀아줄게, 좋지?”장소월의 목소리가 꽤 컸는지 별장에서 있던 가사도우미가 놀라서 달려 나왔다.“누구세요? 말소리가 정원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장소월은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조심 벽
장소월은 주머니 안에 대추를 다 꺼내 씻어 거실 테이블에 두고 티브이를 켰다. 대추가 담긴 그릇을 품에 안고 맛있게 먹었다.아줌마는 주방을 청소하고 나오면서 꼬질꼬질한 채로 소파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보고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이런 말썽꾸러기를 봤나. 오늘 금방 새로 바꾼 소파 시트를 더럽게 하면 어떡해요. 어서 방에 가서 옷을 바꿔 입으세요.”장소월은 맨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아줌마 마을 듣지 않고 소파 뒤로 가서 숨으며 웃었다.“아줌마 조금 있다가 또 바꿔요! 나 지금 힘들어서 누워있고 싶단 말이에요.”“장난치지 말고요. 이렇게 체통 없는 모습 주인님께서 아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돌아오시면 또 혼나시려고. 아가씨 어서 말 들으세요. 방에 가서 옷 바꿔입으세요.”“이것만 다 보고요. 몇 분 남지 않았어요.”장소월은 아줌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안 돼요. 더 이상 협상은 없어요. 곧 시험인데 티브이만 보시면 어떡해요. 제가 끌 테니 올라가서 공부하세요.”마침 이때 장소월의 등 뒤에서 전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명월아. 아줌마 심장 안 좋으쇼. 화나게 하지 마!”장소월은 멈칫하더니 새침하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백윤서하고 같이 나가더니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지? 내가 같이 안 갔으니 바라던 대로 백윤서와 밖에서 지내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집에서 나 혼자 즐겁게 살면 되는데.’아줌마는 전연우를 맞이했다.“도련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전연우는 손에 들려 있던 키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회사에 긴급회의 때문에 자료 가지러 왔어요. 저녁쯤에 데리러 올 테니 윤이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하려고요.”장소월은 티브이에 집중한 척하며 그들의 대화를 무시했다.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전연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허리까지 오는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티브이 그만 보고 공부해. 곧 시험이잖아? 오늘 밤 돌아와서 검사할 거야!”장소월은 그가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 24시간 밥
방으로 돌아온 장소월은 더러워진 옷을 벗어 놓고 옷장 앞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옆방에서 전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마치고 금방 돌아올게!’백윤서는 사려 깊게 대답했다.“난 괜찮아요. 어서 가서 일 봐요. 난 여기서 오빠 기다릴게요.”“그래. 피곤하면 내 방에서 쉬어. 침대 시트 새 걸로 바꿨으니까.”“네, 알겠어요.”떠나가는 발소리를 듣고 장소월은 그가 나간 줄 알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벌컥 방문이 열렸다. 순간 장소월은 얼굴이 화르르 불타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옷으로 급하게 몸을 가렸다. 전연우는 그녀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뒷모습에 놀라 문고리를 잡았던 손은 얼어붙고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장소월은 18살밖에 안 됐지만 또래들보다 훨씬 몸매가 좋았다. 장소월의 눈동자가 떨렸다. 부부로 산 세월이 몇 년인데 그동안 잠자리도 수없이 가졌고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장소월은 마음이 복잡했다.처음 전연우를 만난 것처럼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가 방금 어디까지 봤는지 모르겠다. 장소월은 돌아서지 못하고 빨리 원피스를 입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무슨 일 있어요?”전연우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책상에 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백화점 문화 상품권인데 옷이나 액세서리 필요하면 사. 윤서랑 너 각각 한 장씩이야.”“네, 고마워요. 오빠.”전연우는 급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마치 짐승처럼 마구 요동쳤다. 그렇게 몇 초 후 전연우는 발걸음을 떼어 회의 자료를 갖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잡고 아까 소녀의 관능적인 허리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장소월?’그가 미치지 않고서야!전연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액셀을 밟아 장가네 대문을 신속하게 빠져나갔다.장소월은 방안에서 공부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머리를 식히려고 문을 열었는데 마침 위층으로 올라오
산산한 저녁 바람이 창밖에서 불어왔다. 복도에서 나는 다급한 발소리에 장소월은 잠에서 깼다. 앞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순간 그녀는 더 자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백윤서가 끊임없이 사과하는 소리에 장소월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잠이 덜 깬 눈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눈을 가늘게 뜬 장소월은 문 앞에 서 있는 뒷모습에 깜짝 놀랐다.“오빠, 회사 일 끝났어요?”장소월이 잠든 지 1시간쯤 전연우가 돌아와 백윤서를 데리고 쇼핑하러 갔었다.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전연우는 방에 무언가 빈자리가 느껴져 살펴보니 장소월이 생일선물로 준 인형이 사라진 것이다.백윤서는 눈시울이 붉어져 불쌍하게 장소월을 쳐다보았다.“소월아...”전연우는 몸을 살짝 앞으로 해 백윤서를 막아섰다. 그의 표정은 애써 침착한 듯 보였지만 눈가에 희미하게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명월아, 미안해. 네가 선물해 준 인형 내가 조심하지 않아 조금 망가졌었는데 윤서가 모르고 안 쓰는 물건인 줄 알고 버린 거야!”아줌마도 나서서 말했다.“제 잘못이에요. 제때 윤서 아가씨한테 알려줬어야 했는데.”모두가 장소월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 예상하였다. 하지만 장소월은 그저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그랬어요? 근데 좀 아깝다. 그거 한정판 인형인데.”이 세상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이 주어졌다. 그녀의 잘못도 아닌데 백윤서가 우니 용서하지 않은 그녀의 잘못 같았다. 전생에서 그녀가 싫어한 이유도 백윤서가 전연우의 마음을 차지한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나약한 척 울고불고 연기하는 것이 제일 싫었다.이번 생에도 여전히 그런 모습이 싫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전연우는 장소월의 싸늘한 표정을 지켜보고 입을 열려는데 장소월이 먼저 말했다.“오빠가 그렇게 좋아하면 올해 생일에도 하나 선물해 줄게요. 그러면 선물 고를 걱정도 덜고”백윤서가 나서서 말했다.“소월아 내가 진짜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장소월은 눈을 깜빡이
장소월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보통 학교처럼 넓고 촌스러운 것이 아닌영국식 스타일의 블랙으로 돼 있어 매우 격식이 있어 보였다. 신발도 통일된 구두였고 가방도 학교에서 특수 재료로 특별 제작한 것이다.제운고등학교의 맞은편에는 공립 중학교인 서울 제2중학교가 있었는데 공립 학교 중에서는 명문 학교였다. 여기서 공부할 수 있는 학생들은 모두 지능이 뛰어나고 똑똑하며 미래의 나랏일에 도움이 되는 엘리트들이다.제운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가족의 배경과 재력이 상당하다.서울 제2중학교의 학생들은 가난한 집안의 자제였는데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신분 계층의 다름이 달라 두 학교의 학생들은 수년간 서로 무시하며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장소월이 잘못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검은색 승용차 중에서 그녀는 전연우의 아우디를 보았다. 그녀는 차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지만 의외로 차는 맞은 켠 학교에 멈춰 섰다.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전연우와 백윤서가 차에서 내렸다.‘설마 전연우가 백윤서를 서울 제2중학교에 보내는 것은 아니겠지?’등 뒤의 시선을 느낀 전연우가 뒤돌아보니 검은 교복에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얌전하게 서 있는 장소월과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는데 키가 커서 사람 중에서 매우 눈에 띄었다.그가 뒤돌아볼 줄 몰랐던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소월아—”장소월은 눈길을 돌려, 양 갈래 머리에 검은 스타킹을 신고 통통한 안경을 쓴 통통한 여학생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서문정은 거센 숨을 내쉬며 손에 책을 든 채 물었다.“소월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아프다고 휴가를 냈다고 들었는데 이젠 괜찮은 거야?”서문정은 교육청 청장의 딸이고 소월이와 같은 반이다.제운고를 다니는 학생들의 신원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응, 많이 좋아졌어.”“어라? 오늘 화장 안 했어? 오늘 되게 차분해 보여. 평소에는 항상 화가 난 표정이었는데 사람이 확 바뀐 것 같다?”예전에 장소월
1반은 6층에 있고 학생전용 엘리베이터도 있다.제운고는 아침자습이 없고 첫 수업은 9시에 시작된다. 그래서 등교시간도 비교적 늦다.장소월은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친구들을 바라보았는데 그 중에 이름을 아는 친구가 몇 없었다.수업 종이 울리자 장소월은 기억하던 대로 신속히 자리에 앉았다.자리에 앉은 후, 아직 가방도 내려놓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겨졌다.몇몇 친구들의 수군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강용 자리 아냐? 미쳤어, 쟤 정말 저기에 앉은 거야?”“며칠 아프더니 멍청해진 거 아냐?”‘뭐? 강용?’장소월은 책 하나 없는 깨끗한 책상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이게 어떻게 강용의 자리야? 내가 항상 뒤로 둘째줄에 앉았는데? 이 자리가 아닌가?’때마침 강용은 교실문 앞에 서있었다. 그는 흘러내리듯이 입은 교복에 넥타이도 제대로 메지 않은 채 손에 가방을 들고 장소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혀끝으로 어금니를 꾹 누르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눈빛 하나만으로 장소월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강용의 뒤로 그의 따까리인 허철과 방서연이 따라들어왔다.강용과 장소월은 원수 사이와 다름 없었고 이 학교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일진이었다.강용은 학교에서 항상 제멋대로 행동했고 장소월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 만나더라도 거의 다 강용이 찾아와서 시비 걸고 따지는 정도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순히 장소월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장소월은 서문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창가에서 뒤로부터 두번째, 그제야 알았다. 아파서 학교에 못 왔던 사이에 자리배치가 바뀌었던 것이다.장소월은 숨을 헉 들이마시며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강용은 성질이 난폭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일진이다. 그는 자기 자리로 다가가 발로 책상을 걷어찼는데 의자도 함께 구석으로 날아가버렸다.철로 만든 의자인데도 의자의 한쪽 다리가 푹 패어 들어갔다.반에
45분간의 수업이 끝나자 장소월은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뒷줄로 걸어가 강용의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땅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장소월의 움직임을 보고 많은 사람이 의아해하며 의논이 분분했다.“헐, 뭐야! 장소월같은 공주병이 비굴하게 허리를 굽혀 강용의 책을 주워 준다고?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야?”“종일 말 한마디 없는 장소월이 원수의 책을 주워 준다고? 세상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면 귀신이 쓰인 것이 분명해!”누군가가 슬며시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몰래 찍어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장소월은 주변의 의논 소리를 무시하고 물건을 정리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성격이 좋아서 그나마 강용의 성질을 받아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이때 학교 뒤편의 쓰레기장에서 허철은 오늘 저녁에 어느 술집에 가는지를 묻고 있었다.방서연은 핸드폰을 하던 중에 무심결에 튀어나온 문자 한 통에 깜짝 놀랐다.‘장소월이 설마...’제목도 채 읽지 않고 장소월의 이름만 본 방서연이 바로 클릭해 보니 사진 한 장이 튀어나왔다. 장소월이 쪼그려 앉아 책들을 안고 있었다. 이 자리는...“헐! 헐! 형님, 이것 좀 봐요! 학교 홈페이지 봐요. 장소월이 책을 주워 줬던데요!”“뭐라고?”허철은 잘 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강용은 눈썹을 올리더니 방서연이 건넨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한 소녀가 쪼그려 앉아 치마가 바닥에 쓸렸다. 사진에는 장소월의 정교한 옆쪽 얼굴과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등에 비추고 있었다. 장소월은 한쪽 손에 책을 안고 다른 한쪽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줍고 있었다. 사진 한 장에 세월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장소월은 점심에 식당에 가지 않는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학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도시락을 싸 오는 편이다. 교실에는 장소월 혼자만 남아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말고는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장소월은 아줌마가 해
장소월은 전생에 공부하겠다는 의지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교실을 나서 도서관에서 자습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지금의 지식으로 그녀는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정도이다. 지방대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좀 더 노력해 보면 인서울도 노려볼 만했다.장소월은 문과는 잘하는데 이과 수학이 좀 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다른 과목을 공부할 여유가 없었다.방과 후에 요리 수업, 피아노 수업... 등 다른 수업을 들어야 했다.장소월은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우울함에 빠졌다...장소월은 고뇌에 빠진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간 낭비였고 그 시간에 차라리 단어나 몇 개 더 외우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머릿속의 잡생각을 집어치우고 장소월은 단어를 외우는 것에 집중했다.도서관에는 5반과 6반 학생 외에는 다른 반의 학생은 거의 오지 않는다.지금은 수업 시간이라 도서관에 관리인을 빼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장소월은 혼자 있는 것에 익숙했고, 지금 이 대로가 딱 좋다고 느껴졌다.이때 누군가가 행정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2층에 있던 사람은 장소월이 창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찍고 바로 홈페이지 게시물에 올려버렸다.“빨리 홈페이지 봐. 장소월이 강용을 피해 도서관으로 갔어.”1분도 안 돼서 바로 답글이 달렸다.「대박, 역시 강용 형님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쉽게 쫓아 버리다니! 더 이상 반에서 마주칠 일이 없겠지?」「두고 봐. 이틀도 안 돼서 돌아올 거라고 본다.」이 글에 또 답글이 달렸다.「그럴 리가 없어.」「왜?」「왜냐면, 강용 형님이 방금 장소월 책상이랑 의자를 모두 교실 밖으로 버렸고 청소하는 아줌마가 방금 끌고 나갔어. 아마 폐품으로 팔아 버렸을 거야.」그리고 사진 몇 장이 올라왔는데 장소월의 책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위에 무엇인지 모르겠는 구토 물질까지 있었다.장소월은 아직 자기가 제명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다.시험지 한 장을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