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쟤 미쳤어? 감히 강용을 깨워?”“우리 재밌는 구경하겠네. 강용을 깨운 결과가 무엇인지 소월이가 똑똑히 체험하게 될 거야!”반에서 강용이 자는 것을 보면 아무도 감히 방해하지 못했다. 반에서 말하는 소리도 평소보다 조용했다.하지만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평소에 강용은 수업에 아예 안 오거나 오후에나 오는데, 오늘은 첫 번째로 교실에 도착했다.“강용? 강용?”장소월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여러 번 불렀다.백윤서는 막 서문정과 밖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소월아, 네가 웬일이야?”백윤서는 뒤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 또 말했다.“강용 찾으러 왔어? 몸이 좀 아픈 것 같던데. 무슨 일로 찾아왔어?”‘아프다고?’장소월은 입을 오므리고 대답했다.“그럼 됐어.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오늘은 일단 푹 쉬게 하자. 어제 확실히 추웠어.’강용은 그녀에게 외투를 주었고, 자신은 검은 반소매를 입고 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소월은 거의 한 시간 넘게 간접흡연을 했으니, 그 추운 날씨에 강용이 얼어 죽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사실 강용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장소월은 강용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었다.강용은 분명 장소월을 미치도록 싫어하면서...책상에 엎드린 강용은 갑자기 움직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일어나 앉았다. 검은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고, 몸을 뒤로 젖히며, 나른하고 긴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는 좀 잠겼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짜 몸살이 난 것 같았다.장소월은 자신의 노트를 그의 책상에 놓았다.“이건 지리와 역사 수업 노트야. 다음 주에 너 기말고사 보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전부 외우면 70-80점은 문제 없어.”강용은 노트를 넘겨보았다. 매 장마다 빼곡히 예쁜 글씨가 적혀있었다.“전부?”이 말을 들은 학급의 모든 학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강용이랑 장소월?이게 지금 실화?그들은 앙숙이었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를 미워했는데, 지금 강용이 장소월의 노트를 보고 있
백윤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래!”허철도 사실 농담이었다. 그의 성적은 이미 집에서도 포기한 상태고, 그가 성공할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집안의 어르신은, 졸업하면 허철을 부대에 집어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원래 염색한 골드 머리도 어르신에 의해 깎였다.허철은 백윤서가 준 노트를 받아 한 페이지를 넘겼다. 성경책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글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사실 허철은 그냥 한 말이었고 진짜 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준 성의가 있으니 낭비할 수 없었다.저녁 두 시간 남짓한 야간 자율학습은 선생님의 감독 없이 스스로 자율에 맡겨졌다.전에 아파서 나오지 않은 바람에 장소월은 이미 몇 교시의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그동안의 진도를 따라잡아야 했다.그런데 며칠 만에 시험지가 십여 장이나 있었다. 비록 양면 시험지였지만, 한 면은 책에 있는 지식이고, 다른 한 면은 요점을 초과하여 문제가 비교적 어려웠다.장소월은 시험지를 풀면서, 오늘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인시윤과 다른 여자아이들이 화장실에 갔다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하마터면 인시윤을 까먹을 뻔했다. 그녀는 오늘 한 번도 장소월을 찾아오지 않았다.‘어쩐지 오늘 조용하더라니.’아마도 저번에 인시윤에게 한 말 때문에 마음이 좀 불편했을 것이다.그래서 오늘 학교에 와서도 인시윤은 장소월을 상대하지 않았다.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장소월은 처음에 그녀와 전연우를 엮어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저녁 식사 후, 장소월은 인시윤이 더 이상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느꼈다.인시윤은 성격이 활발하고 쿨했다...든든한 집안 배경도 있으니, 더 이상 장소월의 앞에서 능청맞게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인시윤이 없으니 장소월은 좀 이상했다.“시윤아, 누구랑 메시지 하는 거야?”“누구긴 누구야! 고집불통 아저씨지.”인시윤은 두 번째 줄 세 번째 자리에 앉아 평소 목소리대로 말했다. 하지만 교실은
손 밑에 깔린 또 다른 책은, 그가 베껴 쓴 노트였다. 장소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글씨체를 보았다. 네모반듯하고 필봉이 모두 적당했다. 그의 글씨가 주인처럼 야만적일 줄 알았는데, 그녀의 글씨보다 더 예쁠 줄은 몰랐다.사실 이 노트는 원래 강용에게 주려던 것이다. 강용이 베껴 쓰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아예 장소월이 적어서 준 것이다.기억이 더 잘 남을 수 있으니, 그가 한 번 베껴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곧 있으면 학교는 문을 잠글 것이니 장소월은 강용을 깨울 생각이었다.잠시 후에야, 강용이 아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강용의 책상 오른쪽 위에 분홍색 텀블러와 약이 있었지만, 그는 먹지 않은 듯했다.장소월은 몇 번 강용을 불렀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다. 장소월은 손을 뻗어 그의 이마 앞의 잔 머리를 헤쳐 온도를 확인했다.너무 뜨거웠다!순간, 자고 있던 강용은 갑자기 눈을 떴고, 장소월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분위기는 이상해졌고, 장소월은 손을 거두고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가는 길인데, 병원에 데려다줄까?”“왜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강용은 낮고 쉰 목소리로 인정 없이 말했다.장소월도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용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 장소월은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 곧 문 닫아. 일찍 돌아가.”장소월은 고개를 돌리고 교실을 떠났다...“젠장. 말썽이야.”강용도 장소월을 말하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말하는지 몰랐다.몇 분 후.강용은 가방끈을 잡고, 가방을 등 뒤로 메고, 교복은 단추 세 개를 풀었고 안에는 검은 반팔을 입었다. 예전의 의기양양함은 사라지고 전쟁에 패한 물개처럼 귀를 늘어뜨린 채 장소월의 뒤를 따랐다.지금 길가의 모든 학교 건물에는 불이 꺼지고 가로등만 켜져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고 가게도 모두 문을 닫아 늦은 밤의 학원로는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나 따라오지 말고 택시 타고 가!”“같이 병원에 가!”
학교 맞은편 길가에서 검은색 아우디 한 대가 서 있었고, 인시윤은 조수석에 앉아 화를 내며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빨리 따라가요. 둘이 대체 뭐하러 가는지 봐야겠어요!”전연우는 인시윤의 화를 못 이겨서인지. 아니면 자신도 궁금했는지, 액셀을 밟고 천천히 그들을 따라갔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인시윤은 휴대폰으로 증거를 남겼다.하지만 그들은 어두컴컴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길이 좁아 차가 들어갈 수 없었다.인시윤은 화를 내며 말했다.“우리 오빠가 소월이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어떻게 소월이는 저 인간이랑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어쩐지 저번에 강용의 편에 서서 말을 하더라니. 두 사람 분명 뭔가 있어요.”“아저씨 동생이잖아요? 어린 나이에 연애를 하는데 상관하지 않으세요?”인시윤이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몸에서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흑요석 같은 눈은 차갑고 날카로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밤을 걷는 맹수처럼 죽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인시윤은 지금까지 전연우의 이토록 어두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등골이 오싹했다.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전연우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건 집안일이니 시윤 씨는 나서지 않아도 돼요.”인시윤은 남자의 불쾌함을 알아차리고 화를 가라앉히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연우는 액셀을 밟고 곧 이 거리를 떠났다.두 사람은 캄캄한 골목을 지나갔다. 강용의 손에 있는 라이터의 불빛에 의지해 걸어가고 있었다.“전에는 가로등이 있었는데 고장 났나 봐.”장소월이 설명했다.강용이 라이터 불을 끄자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어두 컴컴한 곳에 성인 남성을 데리고 오다니, 장소월 나한테 딴 맘이 있다면 그냥 말해. 이런 수작 부릴 필요 없어.”“많이 아픈가 봐? 이젠 헛소리까지 하네?”장소월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바로 저기야. 아직 문 안 닫았으니 빨리 가자.”그들은 한 진료소로 들어갔다.“급한 대로 일단 여기서 진료받아
한 시간 반 후, 강용은 발을 튕기더니 말했다.“야, 그만 자. 가자고.”장소월은 편안하게 잠을 잤다.너무 깊이 잠들어서 깨어나 보니 강용은 이미 링거를 다 맞고 손등을 알코올 솜으로 누르고 있었다.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거의 1시가 되어갔다.그녀는 하품을 하고 말했다.“방금 기억하라고 한 거 다 기억했어?”“이 늦은 시간에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어? 내일 다시 얘기해.”강용은 가방을 메고 카운터로 가서 돈을 지불하고 약도 받았다.의사는 돋보기를 쓰고 강용을 보았다.“젊은 친구. 평소 허리와 콩팥을 잘 보양해요. 절대 농담 아니고 심하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요.”“쯧쯧, 영감탱이가 뭔 말이 이렇게 많아?”강용은 좀 사납게 말했다.“어른한테 버릇없게 왜 그래? 선생님, 알겠어요. 제가 약 잘 먹일게요.”“역시 아가씨가 철이 들었어.”장소월은 의사가 한 말이 거짓 같지 않았다.강용은 약봉지를 챙기고, 두 사람은 진료소를 나왔다.“방금 의사 선생님 말 들었지? 평소 담배랑 술을 적게 해. 그리고...”“말해!”“방금 보니까, 허리랑 배에 흉터가 있던데 어디서 났어?”“날 걱정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고, 마치 아름다운 선율처럼 귓가에 맴돌았다.강용은 그녀를 향해 눈썹을 치켜 올렸고, 그 눈빛은 마치 주파수를 던지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이미 이런 눈빛에 면역력이 생겼고, 두 평생을 산 그녀의 나이를 더하면 강용의 엄마 나이었다.강용을 걱정한다고 해도 그건 모성애 같은 것이었다.“어떻게 돌아갈 거야?”“이 시간에 택시도 안 잡혀. 호텔에 묵을 거야. 넌?”“나 근처에 셋집을 구했어. 바로 앞이야.”강용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민증 안 챙겼어. 오늘은 너희 집에서 묵으면 안 될까?”장소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왠지 강용의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됐어, 좋은 일 하는 셈 치지 뭐.’장소월은 강용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선 후
장소월이 잠에서 깨어나니 7시였다. 아직 30분이 남았지만 장소월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포니테일을 하고, 방문을 나서 소파를 보니 이불은 개어져 있었다.사람이 없는 걸 보니 이미 떠난 모양이다.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검은 외투를 입은 강용이 모자를 쓰고, 어깨에 묻은 눈송이를 털고는 안으로 들어섰다.“깼어? 소월 아가씨?”“어디 갔다 왔어?”강용은 아침 식사 두 봉지를 들고 그녀에게 보여주었다.“밑에 가서 아침 사 왔어. 특별히 네 것까지 챙겨왔다고. 두유 아직 따뜻해.”“하지만 나 지금 나가야 해.”“그래, 그럼 버리지 뭐.”강용은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음식을 낭비하면 어떡해. 가서 씻고 와서 먹을 테니까 기다려.”“그래.”강용은 아침 식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죽 두 그릇, 만둣국, 비빔면 등, 장소월이 뭘 좋아할지 몰라 아예 종류별로 사 왔다.두 사람은 아침을 먹고 남은 절반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들은 함께 떠나지 않았고, 장소월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강용은 한약을 먹어야 하니 가스레인지 사용도 허락했다. 집에 돈도 없고, 값나가는 물건도 없으니 강용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가는 길에 장소월은 컨실러를 꺼내 손가락으로 눈 밑에 살짝 발랐다. 2, 3일 동안 잠을 잘 못 잤더니 다크서클이 나날이 짙어 졌다. 이러다가는 그녀의 생리가 끝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몸도 망가질 것이다.아침 자율학습은 감독하는 선생님도 없었고, 오늘 장소월은 이미 늦었기에, 더 늦어도 상관없었다.“대표님... 소월 아가씨 왔어요.”진봉은 멀지 않은 곳에서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는 것 같은 장소월을 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초췌한 듯했다.강영수는 그녀가 걸어오는 방향을 보고, 갈색 눈동자가 짙어지더니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아가씨를 부를까요?”강영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인시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강영수가 오늘 모처럼 인시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직까지 떠나지 않았으니, 진봉은 강영수의
집사가 장소월을 불렀다. 이 시간에 왜 강영수가 학교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뒷좌석 조수석에 앉았다.차 안은 에어컨을 켜 놓아 따뜻했다.차 안에 앉아 있는 강영수는 창백하고 허약한 얼굴이었고, 주먹을 반쯤 쥐고 입에 대고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호흡이 흐트러졌는지 좀 괴로운 듯했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잠시 후, 장소월이 먼저 적막한 분위기를 깼다.“여긴 어쩐 일이야? 아파 보이는데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장소월이 걱정스레 물었다.“날이 차서 그래, 별것 아니야.”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영수가 나지막이 물었다.“어제 시윤이가 학교 끝나고 널 기다렸는데 만나지 못했다고 했어. 어디 갔었어?”“날 기다렸다고?”강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늦게 끝나서 시윤이가 연우한테 전화했다던데, 못 만났어?”강영수는 장소월의 눈을 주시하며, 그녀에게서 뭔가를 알아채려는 듯했다.‘시윤이가 그렇게 말했구나!’장소월은 한 번도 전연우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한 적이 없었다.인시윤은 그저 장소월을 방패로 삼아, 강영수에게 핑계를 댄 것이다. 장소월에게는 별로 손해가 없는 일이니, 굳이 인시윤의 핑계를 까발릴 필요가 없었다.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어. 어제 학교 끝나고 친구가 아파서 같이 진료소에 갔어. 그래서 못 마주쳤나 봐.”‘나한테 이거 물어보려고 온 것일까? 이런 사소한 일로 영수가 직접 와서 물을 필요는 없을 텐데. 혹시 어제 강용이랑 함께 가는 걸 인시윤이 보고 영수에게 알려줬나? 영수도 그래서 아침부터 날 찾아왔을까?’“그래서 그 친구는 다 나았어?”“많이 나아졌어.”장소월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강영수는 빙빙 돌려서 용의자를 심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장소월은 자신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몰랐다. 갑자기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숨이 턱 막혔다.“걱정해줘서 고마워. 아, 참. 나 수업 시간이 거의 다 돼서
하지만 인시윤은 이미 대단한 성적이었다. 평소 숙제를 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수업시간에 가끔 오지 않았다.그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시험을 이렇게 잘 볼 수 있다니, 역시나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다.인시윤은 오늘도 올림피아드 팀에 오지 않았고, 고건우도 익숙한 듯 수업을 시작했다.마지막 수업은 학급 회의였다.한결은 이번 주 토요일에 학부모 회의가 있으니 모든 학부모가 참가하여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 외에도 겨울 방학 캠프도 있으니 참가하려면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6반뿐만 아니라 제운고등학교 전체를 대상한 활동이었다.장소월은 서류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학부모회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장해진은 한 번도 학부모 회의에 참여한 적이 없었고, 예전에는 장소월이 전연우에게 학부모로 참석하라고 졸랐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겨울 방학 캠프는 생각해볼 만 했다. 캠프 마지막 날이 바로 설 전날이었다.설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든 말든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마지막 수업이 끝났지만, 다른 반처럼 일찍 수업을 마칠 수 있는 특권이 없었다.장소월은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향했다.장소월은 하얀색 롱패딩 점퍼를 입고, 예쁜 얼굴 전체가 추위에 붉게 물들여 모자 속에 숨어있었다.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모자를 벗겼고,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곁에 사람이 서 있었다.그를 본 장소월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뭐하러 가?”“밥 먹으러.”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학교 끝났는데 집에 안 가고?”강용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메고 있지 않았다. 설마 그도 식당으로 가는 길일까?장소월은 갑자기 식당에 가고 싶지 않았다.“이번 겨울 캠프 너 갈 거야?”‘나한테 이런 건 왜 묻는 거야?’장소월은 대충 둘러댔다.“몰라.”“모른다고? 대체 간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갈 줄 알고 가기 싫은 거야?”‘이 자식이 지금 잰말놀이 하는 거야?’장소월
향기로운 갈비찜 냄새에 소민아는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보고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신이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슬리퍼를 신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갈비를 들고 입에 넣기 시작했다.신이랑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씩 웃으며 다가갔다.“천천히 먹어요. 다 민아 씨 것이에요. 아무도 빼어가지 않아요.”“이랑 씨, 저 밥 먹고 싶어요.”“그래요. 내가 밥 가져다줄게요.”신이랑은 그녀에게 밥이 가득 담긴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그는 소민아의 습관까지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세 그릇을 먹어서야 공허했던 배를 채웠다.마지막으로 국 한 그릇까지 마시고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했다.신이랑이 그녀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더 먹을래요?”“이제 배불러요.”“너무 고마워요. 이랑 씨가 없었다면, 쓰러져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을 거예요.”“어젯밤 내가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어디에 갔었어요?”“병원에 갔었어요. 대표님께서 수술을 하셨는데 가족 사인이 필요해서요. 참, 집에 돌아왔을 때 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신이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민아 씨 기다리고 싶었어요. 밤새 안 들어오길래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어요.”소민아는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다시 침묵했다.자신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다시 삼켜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내면 미안함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신이랑이 해준 밥도 먹었고, 쓰러졌을 때 신이랑의 보살핌도 받았으니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참, 송시아 최근 뭐 하고 있는지 알아요? 대표님에게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왜 병원에 안 나타난 거예요?”신이랑이 말했다.“나도 민아 씨한테 그 얘기 하고 싶었어요. 송시아는 독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대요.”소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독약이라고요? 누가 감
간호사가 소리쳤다.“됐어요. 됐어요. 서 선생님, 환자 심장이 다시 뛰고 있어요.”서철용은 아직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그저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전연우! 전연우!넌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장소월을 놓지 못하는구나.서철용이 말했다.“조각은 이미 꺼냈으니까 마지막 봉합 수술만 하면 돼. 마지막까지 집중해야 해.”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네.”수술은 장장 6, 7시간이 걸려 오전 9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수술실 밖.부관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말했다.“소장님, 현아 아가씨가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지금 돌아갈까요?”소현아의 이름이 들리니 옅은 잠을 자고 있던 소민아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강지훈이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도 급히 일어섰다.“강지훈 씨, 아니, 형부, 혹시 송시아 잡고 있어요? 송시아는 지금... 어떻게 됐어요?”강지훈은 음산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안 죽어.”그 짧은 세 글자에 소민아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송시아를 잡아둘 사람은 강지훈 말고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강지훈은 잠시 눈을 붙이며 북경 감옥으로 돌아갔다. 도착했을 때, 부관이 병원으로부터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보고했다.“전연우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고 합니다. 의식도 곧 회복할 거라고 했습니다.”강지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실력 쓸만하긴 하네.”전연우는 중환자실에서 한동안 치료받아야 했다. 서철용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수술실에서 걸어 나왔다. 장시간 고강도의 수술을 마친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소민아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철용이 말했다.“전연우를 계속 여기에 둘 순 없어요.”소민아는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는 걱정스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서 선생님, 송시아가 대표님이 깨어나시는 걸 방해할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송시아의 야망은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 송시아는 전연우뿐만 아니라 성세 그룹의 주인 자리까지 탐내고 있어요.”“신씨
엘리베이터를 나선 뒤 서철용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송시아가 저렇게 날뛰는 것도 한때일 뿐이에요. 전연우의 개인적인 일일 뿐이니 부디 송시아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라요.”강지훈이 말했다.“그런 거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냥 전연우의 목숨만 살리면 돼요.”“당연하죠.”서철용은 익숙한 길을 따라 수술준비실로 향했다. 이미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심장외과 과장이 서철용을 보고는 구세주라도 발견한 듯 달려나갔다.“서 원장님!”서철용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어요. 시간이 급박해서 수술 끝나면 바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해요. 들어와서 어시스턴트 해요.”“네.”서철용은 무균 수술복을 입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흡기 단 채 수술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 그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오랜만이야, 전연우!”전연우의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소민아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조금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수술실 앞에 가보니 한 사람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소민아는 바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이... 이런 우연이! 형부도... 여기 계셨어요?”강지훈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강지훈은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소민아는 강지훈이 앞에 있으니 사나운 호랑이 앞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토끼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들고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서 선생님이 대표님의 수술을 하고 계세요. 대표님 곧 깨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기성은 씨도 돌아오는 거 맞죠!]소민아는 이번에도 기성은의 답장을 받지 못했다.그녀는 송시아와 임정희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대표님의 수술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나타나지 않다니.시간이 점차 흐르고 다섯 시간 뒤, 바깥에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수술 어시스턴트가 땀을 훔쳤다.“서 선생님, 호흡 가다듬으세요. 모든 수치 이상 없습니다.”그때, 상처를 잡고 있던 다른 어시스턴트가
엘리트 개인 병원.새벽 12시, 담당 간호사가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전연우의 심장 박동 수치가 현저히 내려가기 시작해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당직 의사가 다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에요? 환자 상태는 어때요?”간호사가 급히 말했다.“환자분의 상처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물지 않습니다. 약을 발라주려고 보니까 상처에서 대량의 출혈이 발견되었어요. 다른 간호사한테 혈액을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지금 당장 임정희 선생님한테 수술을 해야 한다고 알려요.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어요.”“하지만 저번 회의에서 임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이 환자분 심장에 박힌 조각은 제거하기가 너무 힘들다고요. 조금만 빗나가면 심장 혈관을 건드릴 수도 있어요. 지금은 서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수술 못 해요.”“병원에서도 서 선생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요. 이렇게 해요! 일단 환자분의 가족한테 연락해 병원에 나오라고 해요. 어찌 됐든 이 수술은 반드시 해야 해요.”간호사가 말했다.“아까 이미 연락해봤어요. 하지만 송시아 씨는 연락 두절이에요.”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뭐라고요?”그때 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돌연 걸려온 병원의 전화를 받고 소식을 들은 뒤,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고 서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서철용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장소월이었다.핸드폰 너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이 물었다.“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배은란과 깨어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전연우의 상태가 엄청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어요.”“소월 씨, 지금은 전연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핸드폰 너머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전화가 끊겼다.이어 핸드폰에 소민아의 이
“하지만 서 선생님, 지금 당장 병원에 가시면 송시아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겁나요. 또한... 송시아라면 일찌감치 사람을 시켜 선생님을 감시하도록 했을 거예요. 연구원을 나서는 순간 위험해져요.”서철용은 들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재를 툭툭 털어냈다. 확실히 니코틴은 머리를 맑게 해주는 데에 효능이 있었다.“송시아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서울에 머리가 달린 사람이 송시아밖에 없는 줄 알아요?”“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다른 사람한테 기생해서 사는 기생충일 뿐이에요. 한 번 맞춰봐요... 송시아는 왜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 앉은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권한은 없는 걸까요?”소민아가 되물었다.“그 이유가 뭔데요?”서철용이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답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찾아야죠. 그런데... 기성은이 처음에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저한테 많은 걸 숨기고 있어요.”서철용이 웃으며 말했다.“몸에 손발도 붙어있고, 입도 있는데 알아보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모르겠으면 많이 질문하고 조사해봐요. 그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거예요. 그 누구보다 치밀해야 해요. 이래서야 송시아랑 싸울 수 있겠어요?”소민아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전 송시아와 싸우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단지 나쁜 짓을 하는 걸 막고 싶을 뿐이에요. 언니는... 송시아는 예전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제 눈엔 정말 그 누구보다 좋은 언니였거든요. 대체 뭐가 송시아를 이렇게까지 바뀌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목표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부적절한 일이라도 전혀 서슴지 않아요. 계속 이렇게 그릇된 길로 가게 놔둘 순 없어요. 일이 아직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간 건 아니니까 기회는 있어요.”서철용이 시선을 떼고 창밖을 쳐다보았다.“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있긴 있었네요.”“성세 그룹이 여
서철용이 들고 있던 서류를 한쪽에 툭 던져놓았다.“전연우 정도의 치유 능력이라면 별문제 없을 거예요. 지금은 말 그대로 식물인간이에요.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놈 운명에 달렸겠죠.”전연우처럼 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이 과연 깨어날 수 있을지는 그야말로 미지수다.소민아에겐 그리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녀가 문득 무언가 떠올라 말했다.“참, 대표님의 주치의는 송시아가 데려온 임정희라는 의사예요. 이 자료도 그 사람이 준 거고요. 여기에 오기 전 서 선생님한테 전해주라고 했어요. 두 분의 길고 짧음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기회가 생기면 서 선생님과 다시 한번 겨뤄보고 싶다고요. 제가 이해하기로 그분은 서 선생님이 돌아가 함께 전 대표님을 치료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그 익숙한 이름을 서철용이 어떻게 잊겠는가.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갓 아이를 낳고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흥미 없다고 전해줘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기회가 되면 그 말 전해드릴게요.”“시간이 늦었어요. 더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가볼게요.”소민아가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근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녀가 문을 나선 순간 병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배은란이 물었다.“민용 씨, 그 임정희라는 사람과 무슨 사이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서철용이 그녀에게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주었다.“학교 후배야. 신경 쓸 필요 없어.”소민아는 걸음을 늦추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배은란이 서철용을 부르는 호칭을 들은 순간,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말 민용 씨라고 한 거야?소민아는 길옆에서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은란은 대체 무슨 이유로 서민용의 이름을 부른 걸까,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서철용임에도 말이다.미친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하지만 배은란은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만약 지금 기성은이 옆에 있었다면
그때, 송시아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아직 혼수상태에 있는 전연우였다.어젯밤 한의준은 완전히 미쳐버렸는지 전연우의 앞에서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밤새 시달린 탓에 그녀는 이제야 간신히 몸을 회복했다. “정말 네 말이 맞았어. 그 사람들 한시라도 빨리 전연우를 깨우려 하고 있어. 송시아, 전연우가 의식을 되찾으면 첫 공격 대상이 네가 될 거라는 거 생각해본 적 없어?”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임정희, 넌 아직 전연우에 대해 잘 몰라.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이 의식불명 상태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보살피고 회사 관리까지 도왔어. 전연우도... 누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 만약 정말 날 건드릴 생각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똑똑히 보라지 뭐, 지금 성세 그룹에서 자신의 발언권이 어느 정도인지.”“전연우를 깨어나게 할 가능성이 제일 큰 사람은 서철용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송시아는 전화를 끊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썹부터 입술까지... 여자의 눈동자엔 미친듯한 집착이 가득 차 있었다.“당신은 결국 내 것이 될 거라고 말했잖아요. 당신이 의식을 회복하면 나한테 복종할 때까지 방에 가둬놓고 나만 볼 거예요.”그날을 떠올린 송시아는 돌연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그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지금의 송시아는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소민아는 바로 급히 군의원으로 달려갔다.하지만 통행증이 없어 문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그녀는 서철용의 전화번호를 받았던 것이 생각나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전화벨이 울려서야 통화가 연결되었다.핸드폰 너머로 아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배은란이 출산한 건가?“무슨 일이에요. 말해요!”소민아가 말했다.“대표님의 검사 결과지 가져왔어요. 저 지금 병원 문 앞에 있는데, 혹시 얘기할 시간 있으세요?”서철용이 병실 창문
신이랑이 차를 몰고 소민아를 회사에 데려다주는 길, 그녀가 노트북을 접고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지하철역에 내려줘요. 따로 들를 데가 있어서요.”신이랑이 물었다.“어디에 가는데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뭐 좀 사고 바로 회사에 갈 거예요.”“그래요.”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앞쪽 지하철역에서 차를 세웠다. 소민아는 차에서 내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갔다. 믿음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상처받은 슬픈 신이랑의 눈동자도 보지 못한 채 말이다.엘리트 병원은 전부 송시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소민아가 프런트에 걸어가 말했다.“안녕하세요. 전 성세 그룹 직원인데요,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 이건 제 사원증이에요.”프런트 직원 두 명은 서로 마주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예약은 하셨나요? 송 대표님의 전화가 없으면 올라가실 수 없어요. 현재 15층 VIP 병동은 완전히 봉쇄된 상태거든요.”소민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의 집착이 이렇게까지 심각했다니.“그럼 전연우 씨의 검사 결과서만 볼 수 있을까요?”간호사가 말했다.“저흰 잘 몰라요. 새로 오신 임정희 과장님께 물어보는 게 좋을 거예요. 거의 모든 일은 그분 승인이 있어야 할 수 있거든요.”소민아는 명함 하나를 받고는 임정희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얼마 후, 복도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환자 상태가 많이 안정됐어. 이제부턴 자극 치료법을 쓸 거야. 매일 침으로 환자 혈 자리를 자극해 의식을 찾게 할 생각이야.”“네, 과장님.”임정희는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는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누구세요?”“안녕하세요. 전 소민아라고 합니다. 대표님에 관해 궁금한 게 있는데, 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임정희는 옆에 있던 어시스턴트들을 보내고는 그녀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민아 씨를 도울 다른 방법 찾아볼게요.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해줄 거예요... 오늘 백화점에 갔을 때 반지도 하나 봤어요. 민아 씨가 좋아할지 모르겠네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검은색 실크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여니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민아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요한 방 안엔 그녀의 고른 호흡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신이랑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았다. 그는 조용히 반지를 꺼낸 뒤 진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았다.“내가 좀 성급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민아 씨...”“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민아 씨가 쉽게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이건 신이랑의 욕심이다. 그렇다... 소민아가 처음으로 결혼을 입에 올린 그 순간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이혼을 고려해본 적이 없다.신이랑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자를 안아 침실에 눕히고는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소민아는 이불 속에 들어가 꼼지락거리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다음 날 날이 밝아올 때까지 여자는 깊이 꿈나라에 빠졌다.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이랑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놀란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는 머리카락을 잡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소민아는 목이 말라 컵에 물을 따르고는 몇 모금 마셨다. 그녀가 창가에 서서 잠을 깨고 있을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신이랑이 줄무늬 잠옷을 입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이즈가 맞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헐렁했다. 소민아가 기성은이 이 집에 왔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잠옷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기성은은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리고 신이랑이 신고 있는 슬리퍼까지...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좋은 아침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