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이 분명 자기를 죽일 뻔했지만 주성현은 감히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헐떡이며 사과했다.“제 불찰입니다. 먼저 회의실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옷만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렇게 계략적인 사람이 어쩜 옷 한 벌 더 챙겨야 한다는 걸 잊었어요?”그 말에 주성현의 창백한 얼굴은 아예 회색빛이 감돌았다. ‘설마 내가 어제 일부러 주다현 씨를 민 사장한테 붙여준 걸 알아챘나?’공아름은 그에게 약을 탄 술만 권하라는 명령만 했지 상세한 속사정은 말해주지 않았었다. 때문에 그녀가 민도준과 권하윤을 시험하려고 한다는 걸 알지 못한 그는 당연히 공아름이 약을 써서 민도준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거로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거절당한 데다 민도준이 주다현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는 그걸 다른 기회로 생각했다.마음에 안 드는 공아름과 억지로 관계를 맺어 프로젝트를 성사하는 것보다는 마음에 드는 주다현과 관계를 맺는 게 안전할 테니까. 주다현이 복수를 당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민도준이 그의 모든 의도를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순간 오한이 느껴진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민 사장님…… 저…… 저는 그런 적…… 그게…….”“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제가 언제 주 매니저님을 말했나요? 옷을 말했지.”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주성현을 보는 순간 민도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이미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 옷 꼬락서니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냥 가죠.”말을 마친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주성현은 할 수 없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은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프로젝트의 기밀성 때문에 권하윤과 민지훈은 그들을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하윤 씨, 우리는 주위에서 좀 산책할까요? 형이 나오면 그때 같이 떠나요.”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하지만 어제의 교훈 덕에 민지훈은 산책할 때 권하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걸 잊지 않았다.그리고
잔뜩 긴장한 권하윤은 집사가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마치 초등학생처럼 똑바로 앉아 꼼짝도 하지 못했다.할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민도준은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한껏 신난 모습이었다.그는 권하윤이 간지럼을 잘 탄다는 걸 알고 일부러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살살 긁어댔다.하지만 권하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간지러움을 참으며 얼굴만 붉혔다. 심지어 동작이 너무 크면 집사가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권하윤은 이를 악문 채 속으로 민도준 욕해댔다.목덜미마저 미세하게 떨리는 권하윤의 모습을 보자 민도준은 끝내 자비를 베풀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그제야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음악도 틀지 않은 탓에 너무나도 조용한 나머지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했다.긴장한 탓에 한껏 움츠린 자세 때문에 권하윤의 쇄골은 더 선명해졌다. 그걸 보는 순간 민도준의 가슴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권하윤의 옷을 들추며 그녀의 등을 쓸어올렸다.살결이 맞닿은 촉감에 권하윤은 하마터면 펄쩍 뛸뻔했지만 애써 참으며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그러쥐었다.때마침 차가 검은 터널로 들어서자 권하윤은 민도준을 꼬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상대에게 닿기 전 커다란 손이 머리가 꽉 부여잡았다.어둠 속에서 권하윤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며 축소되었다.남자의 입맞춤에 그녀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올랐지만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민도준의 팔을 꼬집어 댔다.어두운 차 안에서 숨결이 뒤엉키기 시작했고 억압되고도 뜨거운 입맞춤에 권하윤의 온몸은 마치 불길에 뒤덮인 듯 뜨거워졌다.뜨거움과 공포가 뇌리와 몸을 감쌌지만 그녀가 아무리 힘 있게 민도준을 꼬집어 대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껏 그녀의 숨결을 빼앗더니 차가 터널을 나갈 때쯤에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었다.빛이 차 안을 비춰들자 권하윤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백안에서 거울을 꺼내 자기 상태를 살폈다.역시나 립스틱이 입 주위에 번져있었다.하지
민씨 가문 산하의 개인 병원에서 오너인 민상철이 쓰러진 일은 국가행사보다도 더 큰 일이었다.응급실 밖에 모인 전문의만 해도 족히 7, 8명은 되었다.너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의 모습에 권하윤은 민상철이 정말로 위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민시영의 말을 들어보니 심장병이 재발한 거였다. 원래도 심장이 좋지 않은 민상철은 어제 친구의 생일 연회에서 술을 마신 뒤로부터 계속 불편함을 호소하다가 오늘 아침 쓰러진 거라고 했다.의사는 이미 위기를 벗어나 생명 위험이 없다고 했지만 민씨 집안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특히 민씨 집안의 첫째 숙부인 민용재는 의사에게 재차 확인해서 조금 뒤면 깨어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은 뒤에야 안심했다.“큰 숙부는 역시 효자시네요. 할아버지가 깨어나지 못 할까 봐 그렇게 걱정되세요?”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엄숙하고 조용한 병원에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들렸다.민용재는 반백 살의 나이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녀 화를 내지 않아도 엄숙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그는 벽에 기댄 채 건들거리는 민도준을 보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도 네 할아버지 아니니. 그 말을 들으면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하겠어?”“하.”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민용재 쪽으로 걸어갔다.190이 족히 되는 키 때문에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의 주위에는 상대를 짓누를 것만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심지어 민용재의 앞에서도 예외는 없었다.하지만 민상철을 대신해 다년간 회사를 경영해 오던 민용재는 다른 사람처럼 그의 앞에서 쉽게 겁을 먹지 않았다.오히려 어두운 눈빛으로 건방진 민도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그때 민도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식 웃었다.“할아버지도 제가 이렇다는 걸 알고 있는데 속상하긴요. 오히려 효심 있는 척하는 큰 숙부님이야말로 실은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깨어나지 못해 가문에 큰 변화가 올까 봐 걱정한다는 걸 들키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알면 상심이 크실텐
병원 앞 정원에 앉은 민시영의 얼굴에 마침 나무 그늘이 드리워 표정이 희미해졌다.“할아버지가 알아누웠으니 숙부님들도 뒤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거예요. 그러니 우리한테도 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 만약 이번에도 제가 회사 일에 참여하지 못하면 아마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지 몰라요.”권하윤은 손을 슬쩍 빼면서 되물었다.“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하윤 씨, 듣기로 이번에 리조트에서 도준 오빠와 공씨 가문 간부들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고 하던데 이 기회에 하윤 씨가 오빠를 부추기면 합작 건을 취소할지도 몰라요.”권하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민시영을 바라봤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혹시 공아름 씨한테 저와 민 사장님 사이를 흘려 공아름 씨가 저한테 손을 대게 해 민 사장님 화를 돋우겠다는 뜻인가요? 그러면 공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공아름 씨 편을 들게 될 테니 자연스레 합작 건이 무산될 수 있게요?”민시영은 싸늘해진 권하윤의 눈빛에 잠시 멈칫하더니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죄송해요. 아름이가 이번에 그런 계획을 세운 걸 사실 알고도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어요. 솔직히 도준 오빠가 어떻게까지 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런데 하윤 씨가 무사히 리조트를 빠져 나왔으니 오빠가 하윤 씨를 절대 위험하게 두지 않는다는 반증이잖아요.”솔직한 고백에 권하윤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민시영의 이번 행동은 솔직히 인정 없는 처사였지만 그녀와 민시영은 인정을 따질 사이는 아니다. 어쨌든 그녀도 민시영한테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은 건 아니니까.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에게는 공씨 가문 가주가 경성에 오는 걸 막아야 하는 공동 목표가 있다는 거다.하지만 민도준이 자기를 위해 도둑놈처럼 이리저리 창을 넘고 다녔던 걸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속은 이상한 물결이 일었다.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보고해주고 있는데 그녀는 뒤에서 잔꾀나 부리고 있으니, 만약 이 모든 걸 들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는
병원 계단에서 한참을 기다린 민승현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에야 권하윤은 겨우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왜 이제야 오는 거야?”“걸어오느라 늦었어!”“너!”버럭 소리쳤던 민승현은 이내 언성을 낮추며 으르렁댔다.“너 언제부터 도준 형과 지훈 형하고 붙어 다녔어? 설마 형들하고도 붙어먹었냐?”그의 말에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민승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공아름 씨네 리조트에 남자 둘을 끼고 뒹굴러 갔다는 거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너처럼 약혼자를 배신한 년이 어떤 더러운 짓 하고 다니는지 알 게 뭐야!”권하윤은 아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나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나? 약혼녀 배신한 남자가 내 앞에 있는데 직접 물어보지 그래!”“너 다시 한 번 말해 봐!”가치도 없는 사람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거기 서!”하지만 민승현이 갑자기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벽에 밀어붙이며 목을 졸라댔다.“너 다시 한 번만 그딴 식으로 말해 봐!”권하윤은 가족이 밖에 있는데도 민승현이 이렇게 소란을 피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역시 이래서 무식한 사람이 가끔은 똑똑한 사람보다 더 무섭다고 하나? 무식하니 소란 피운 결과가 어떨지는 생각지도 않겠지.’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민승현의 때문에 권하윤은 숨 쉬기가 곤란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곁눈질로 민승현의 아래쪽을 확인하고는 이내 발로 차버렸다.“씨발!”그와 동시에 민승현은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구겼다.“이 씨발년! 네가 감히…….”하지만 그때.“끼익-”비상 계단의 문이 열리더니 손에 담배를 든 민도준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난감한 부위를 손으로 잡고 있는 민승현은 다른 한 손으로 금방 거두어들인 권하윤의 다리 옆 벽을 잡고 있었다.“화끈하게 노네?”이상야릇한 자세에 잠시 멈칫한 민도준은 이내 장난기 섞인 눈
그 시각, 다시 병실 앞 의자에 앉은 권하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비상 계단 쪽을 힐끗거렸다.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방금 있었던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 민도준에게 보내고는 또 한마디를 보충했다.[아까 샌드위치를 잘못 전해줬어요. 그건 제가 먹던 거예요. 새건 저한테 있거든요.]하지만 반나절이나 기다렸지만 민도준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그 때문에 한참 동안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비상 계단 쪽 문이 열렸다.그 순간 권하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눈길이 민도준에게 쏠렸다.식구들은 하나같이 민상철이 민도준에게 무슨 얘기를 했을지, 후계 문제와 관련이 있을지 생각하기 바빴다.하지만 묻고 싶은 사람들은 민도준과 친분이 없어 감히 묻지 못했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그와 말도 섞기 싫어 피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았다.민도준은 그런 시선에 익숙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들을 지나쳐 권하윤 앞에 멈춰 섰다.갑자기 자기 쪽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권하윤은 머리가 찌근거려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그의 뜬금없는 행동 때문에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자기한테 쏠리자 권하윤은 쓰러진 척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를 불렀다.“제수씨.”“네, 민 사장님.”권하윤은 표정이 굳은 채로 벌떡 일어서며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옅은 화장은 창백해진 그녀의 낯빛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 촉촉하게 젖어 든 눈망울을 들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가엾었다.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권하윤의 반응에 민도준은 턱을 슬쩍 들며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명령했다.“먹을 것 좀 줘 봐.”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민도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권하윤은 그제야 채 나눠주지 못한 도시락이 모두 그녀의 뒤에 있는 창틀 위에 놓여있다는 걸 발견했다.반쯤 날아갔던 영혼을 다시 잡아들인 권하윤은 얼른 일어나 도시락이 담긴 주머니를 들추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물었다.“뭘 드실래요?”“샌드위치.”“
병실.문 앞에 서 있던 집사는 밖에서 오가는 대화를 모두 들은 뒤 병상 쪽으로 걸어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어르신, 민 사장님께서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민상철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응.”그의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집사가 다시 적막을 깨트렸다.“어르신께서 민 사장님을 불러들여 한 시간 동안이나 차를 마신 것도 모르고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민상철은 집사의 말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다들 계승권 때문에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만약 도준이가 저들을 눌러주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땅속에 파묻힐지도 모르지.”집사는 불편하게 기대 있는 민상철의 침대를 조절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도준 도련님도 좋은 후계자잖습니까.”“예전엔 그랬지.”민상철의 표정은 일순 복잡해졌다.“헌데 둘째네 내외가 그렇게 가고 나서부터 도준이가 우리 가문을 미워하지 않나. 어디 그것뿐인가? 민씨 가문의 세력을 빌리지도 않고 5년 사이에 경성의 암거래 시장을 장악했지. 만약 그 애더러 민씨 가문을 백제그룹을 맡으라고 하면 회사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지옥으로 될지도 모르지.”예전의 민도준은 패기가 넘쳤다면 지금의 그는 마치 지옥문을 열고 나온 악마처럼 잔인하고 포악하다. 게다가 가장 무서운 건 같은 가족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다.심지어 민상철마저 그를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었기에 백제그룹과 가문의 모든 사람을 그의 손에 넘겨줄 수가 없었다.그에 관한 생각을 하니 민상철 얼굴에 드리운 피곤함은 더욱 짙어졌다.“됐어. 지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동림 부지 건만 보더라도 그 애가 민씨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왔으니.”“그래도 도준 도련님과 공씨 가문은 아직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던데 돌이킬 여지는 있지 않겠습니까?”“돌이킬 여지? 그 애가 결정한 걸 번복하는 애로 보이나?”민상철은 손을 저었다.“이 일은 자네도 신경 쓸 필요 없네.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있으니 애들도 많이 불안할
그 시각 위층.“아빠는 어쩜 그래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출지언정 친딸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뜻이에요?”“시영아, 네가 욕심 많은 건 이 아비도 안다. 그런데 넌 여자야. 태어나는 순간부터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성별이라고. 네가 계속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가족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민시영의 열과 성의를 다한 설득에도 민용국은 여전히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말 들어. 내가 꼭 너를 위해 훌륭한 가문 자제를 짝으로 찾아줄게. 집에서 누리던 걸 시댁에서도 모두 누릴 수 있게 도와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민시영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고 눈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아빠, 예전에 제가 그런 일을 겪었을 때도 아버지는 저더러 참으라고 했었죠?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또 참으라고 하고, 제가 결혼하면 시댁에서도 참으라고 할거죠?”“시영아…….”그때 그 일을 떠올리자 민용국은 약간 울먹이기 시작했다.“그때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너를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거야. 시영아, 아비 말 좀 들어. 우리 더 이상 싸우지 않으면 안 될까?”“싫어요! 전 한평생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민용국의 긴 한숨 소리를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그리고 곧이어 문소리가 들리더니 덩그러니 혼자 남은 민시영이 벽에 기댄 채 눈을 가렸다.그 시각 계단 아래.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권하윤은 마음속으로 대충 그 일에 대해 추리했다.하지만 언제 마음을 추스르고 나갈지 모르는 민시영 때문에 권하윤은 뒤에 바싹 붙어 있는 민도준을 밀며 떨어지라는 암시를 해댔다.그런데 민도준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일부러 바싹 붙으며 높은 소리로 경고해 대는 게 아니겠는가?“시영아, 울고 싶으면 다른 곳에서 울어. 오빠가 급한 일 처리하고 가서 위로해 줄 테니까.”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뱉은 그의 말에 권하윤은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보다 수치심이 더욱 커 이내 얼굴을 붉혔다.‘어쩜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자기만 괜찮으면 되나? 난 쪽팔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