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이 들으면 오해할지도 몰라요.”상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넌 몇 년을 좋아했으면서 아직도 고백하지 않은 거야?”우진은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제, 제 마음을 표현하긴 했어요.”“자꾸 질질 끌면 남한테 뺏기게 될지도 몰라.”도준을 생각하자 우진은 마음이 좀 복잡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고백하지 않아 시윤이가 마음을 몰라주고 있다고 오해했다.우진은 머뭇거리며 물었다.“그,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몇몇 선배들은 이러쿵저러쿵 방법을 제시하기 시작했다.“오늘이 바로 기회잖아. 공연이 끝나면 바로 고백하는 거야!”우진은 그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미리 이야기하지 않고 고백했다가 선배가 저한테 화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넌 겁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누가 고백할 때 미리 이야기를 해? 어차피 넌 이 무대에서 그 선배한테 반한 거라며, 지금이 바로 네 마음을 고백할 가장 좋은 타이밍이야.”우진은 마음이 두근거렸지만 여전히 걱정되었다.“하지만...”“그만 고민해! 내가 꽃을 준비할 테니 넌 좀 이따 고백하기만 하면 돼.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고백 안 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우진은 건방진 모습의 도준을 떠올렸다. ‘어쩌면 선배님은 그런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걸까? 내가 한번 용기를 내면 나한테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이런 생각에 우진은 결심을 굳혔다.“그래요, 좀 이따 선배님한테 고백할게요!”...7시.학교 공연장의 불빛이 어두워졌다.시윤과 윤영미, 수아는 모두 함께 앉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윤영미는 빈번히 고개를 끄덕였다.“우진이는 재능이 조금 부족하긴 해도 정말 노력하는 아이야.”시윤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요.”시윤이 말을 마치자마자 윤영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넌 정반대야! 재능이 정말 뛰어난 데 노력을 너무 안 해!”‘괜히 말을 꺼냈네.’공연이 막바지에 이르자 모든 관계자들이 무대에 올라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
시윤은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그녀가 망설이던 찰나 윤영미가 앞질러 마이크를 받았다.“오늘 공연은 정말 진보가 컸어. 하지만 소원을 빌어도 될 정도는 아니야. 나랑 네 선배님들은 네 공연을 보러 온 것뿐이야. 오늘 공연은 이미 끝났으니 다른 할 말이 있다면 사석에서 얘기해. 오늘 공연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현장에 계신 모든 분들의 지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윤영미가 말을 꺼낸 이상 아무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윤영미는 시윤과 수아를 데리고 공연장을 떠났다.시윤과 두 사람이 멀리 나가기도 전에 우진이가 달려왔다. 그는 무대의상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잘못을 저질렀다는 불안함에 떨었다.“선배님, 혹, 혹시 화나셨나요?”우진의 숨길 수 없는 표정을 보자 시윤은 눈살을 찌푸린 뒤 엄숙하게 말했다.“우진아, 내가 여러 번 말했었지. 넌 나한테 그냥 후배일 뿐이야. 왜 굳이 이런 자리에서 고백을 한 거야? 넌 내가 사람들이 지켜보면 어쩔 수 없이 동의할 것 같아 보였어?”“아, 아니에요. 선배님, 전 그게 아니라...”우진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정말 부인하고 싶었지만 평소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시윤이라면 이런 일 때문에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을 통해 시윤이가 감동받기를 바랐다.이런 생각에 우진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막무가내로 행동했어요. 전 선배님이 정말 좋아서 선배님과 도윤이를 보살펴드리고 싶어요. 친구로서도 좋으니 정말 도와드리고 싶어요.”우진이가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시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날 보살펴준다고? 지금 네 실력으로 정말 날 먹여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네 부모님까지 동원해 도와주려던 속셈이었어?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네가 도윤이를 보살필 수 있을 것 같아? 나랑 훈련하는 시간마저 똑같으면서 어떻게 보살펴줄 건데? 왜? 이것마저 그만둘 생각이야?”“전...”우진은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시윤의 신상도 밝혀졌다.[이 사람은 얼마 전 ‘지젤’의 수석 배우 아니야?][맞아, 그 배우는 경서에서 엄청 유명한 그분과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나 알아! 바로 민 사장님이잖아!][두 사람 이혼했다던 소문도 있는데, 서로 마음이 변한 거 아니야?][부자들이 뭔 사랑을 하겠어? 민 사장은 딱 봐도 일편단심 할 만한 사람은 아이야.][그래서 수석님은 이제 그 남자 발레리나랑 만나는 거야?][이 남자는 ‘지젤’의 서브잖아! 이런 짝사랑 이야기는 정말 예쁜 것 같아!][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네.][두 사람 잘 됐으면 좋겠어!]...이 영상은 시윤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퍼졌다. 인터뷰를 하려고 연락 온 기자들이 벌써 세 명이나 생겼기 때문이다.시윤은 몇 개의 플랫폼 아래에 해명을 하려고 했지만 곧 새로운 댓글에 밀려났다. 그녀의 계정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기에 글을 올려도 아무도 바지 않았다.결국 시윤은 이전에 알고 있던 기자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고, 우진과 함께 인터뷰를 하여 해명하기로 했다.우진은 자신이 한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두말없이 시윤의 집 앞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지프 한 대가 곧장 우진을 향해 달려왔다. 지프는 마치 맹수처럼 우진을 향해 돌진했는데 당장이라도 우진을 치어 죽일 것 같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진을 죽을 준비를 하고 눈을 감았으나 곧 귀를 찌르는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는 그와 1미터를 사이 두고 멈추었다.우진과 시윤은 모두 이 상황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곧 차 문이 열렸다.차에서 내린 남자는 무서운 기운을 내뿜으며 걸어왔다. 남자는 키가 매우 높아 압도적인 분위기를 내뿜어 다가올수록 시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도준은 사악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훑어본 뒤 미소를 지었다.“죄송합니다. 브레이크를 밟는 걸 깜빡했거든요.”...우진이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시윤
“심문이라니? 그럴 리가.”도준은 비스듬히 우진을 쳐다보며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난 후배님과 이야기하러 온 거야.”시윤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입을 열려고 했으나 우진이가 먼저 말했다.“마침 저도 민 사장님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우진은 긴장된 마음에 온몸이 경직되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한적한 곳을 가리켰다.“저쪽으로 갑시다.”도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즐거워했다.“좋아요, 그럼 이야기 좀 하죠.”시윤은 도준의 포악한 수단을 봤었기에 막으려고 했지만 소혜가 그녀를 막아 나섰다.“형수님, 가지 마세요. 괜히 형수님한테 불통이 튈지도 몰라요.”이 말을 들은 시윤은 더욱 두 사람이 떠나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잠깐만!”우진은 고개를 돌려 정중히 말했다.“저도 더 이상 선배님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젠 성인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고 있어요.”하지만 시윤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예전에 도준이가 은우를 괴롭히던 섬뜩한 기억들이 선명하기에 더 이상 주변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시윤이가 따라가려던 찰나 양현숙이 집안에서 뛰어나왔다.“시윤아! 도윤이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게다가 이마도 엄청 뜨거워!”“뭐라고요?”시윤은 집안으로 달려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도윤을 보며 아이를 안고 초조하게 말했다.“빨, 빨리 병원으로 가요!”바람을 맞으면 병이 더 심해질지도 모르기에 소혜는 빠르게 뛰어나가 차를 잡았다. 시윤이가 도윤을 안고 차에 오르려던 찰나 갑자기 뒷길에서 차가 부딪힌 것 같은 큰 소리가 들려왔다.‘우, 우진이야!’시윤은 하마터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아이를 소혜에게 맡겼다.“먼저 저희 엄마랑 같이 병원으로 가요. 도착한 후 주소를 보내주시면 곧 갈게요.”말을 마친 후 시윤은 황급히 뒷길로 뛰어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도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도준은 전조등이 부서진 차 앞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시윤을
말을 마치자마자 뒤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 지금...”고개를 돌리자 우진이와 경비원 아저씨가 뒤에 서있었다.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은 우진을 보자 시윤은 깜짝 놀랐다.“이 땅에...”우진이가 말했다.“방금 실수로 페인트 통에 부딪히게 되어 제가 경비원 아저씨를 부르러 갔거든요.”시윤은 그제야 동그란 페인트통이 화단에 부딪힌 것을 발견하고 말문이 막혔다.방금 전의 화가 순식간에 사라진 시윤은 고개를 돌려 도준을 보았다. 입을 열려던 찰나 경비원이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페인트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배상할 필요 없어요. 제가 좀 이따 사람을 불러 청소만 하면 그만이에요.”우진은 시윤과 도준을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경비원 아저씨, 저도 같이 갈게요.”두 사람이 떠나자 시윤과 도준 두 사람만 남았다.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시윤이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제가 방금...”“괜찮아.”도준은 웃으며 말했다.“내 이미지가 너무 나쁜 탓이지 뭐.”도준이가 웃고 있었지만 시윤은 오히려 가슴이 답답했다. 시윤은 서둘러 설명하려고 했다.“제가 방금 많이 혼란스러웠거든요. 왜냐하면...”도윤이가 아팠기 때문이다.“말 안 해도 돼.”도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네 후배가 걱정되었던 거겠지.”시윤은 정말 우진이가 걱정되긴 했었다. 도준이가 예전처럼 또 무고한 사람을 죽일 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시윤은 땅바닥의 얼룩덜룩한 붉은 페인트를 보며 지금 두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방금 시윤의 말은 도준에게 상처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방금 자신이 한 날카로운 말을 생각하자 시윤도 더 이상 설명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도준은 그녀의 처진 머리를 보았는데 마치 방금 말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예전처럼 손을 들어 시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손이
시윤은 마음이 좀 불안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저랑 우진이는 선후배 사이일 뿐이에요. 이미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해 해명하기로 이야기도 마친 상태에요.”시윤은 말하면서 도준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도준의 핸드폰은 꺼진 상태였다.“왜 전원이 꺼져있는 거지?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이에 소혜는 웃음을 터뜨렸다.“안 좋은 일이 생기다뇨. 오빠는 지금쯤 아마 비행기에 있을 거예요.”시윤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비행기요? 어디로 간 거죠?”“경성이요.”도준이가 경성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자 시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도준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데려다주진 않을 게.”‘그 말은 정말 떠난다는 거야?’시윤은 정신이 혼미해져 소혜가 하는 말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소혜는 연속 그녀를 몇 번이나 부르며 손을 뻗어 눈앞에서 흔들었다.“형수님, 괜찮으세요?”시윤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왜 그래요?”소혜는 그녀의 떠도는 눈빛을 보자 음흉하게 웃었다.“형수님, 우리 오빠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쫓아가셔도 돼요. 도윤이는 제가 잘 보살피고 있을 게요.”“그게...”시윤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방금 했던 날카로운 말들을 생각하자 다시 기죽었다.끝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차라리 떨어져 있는 편이 좋을 지도 몰라요. 전 피곤해서 올라가 잠깐 쉬고 있을 게요. 도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절 깨워주세요.”-침대에 누운 시윤은 매우 피곤했지만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으면서 아직도 예전과 똑같아요!”시윤은 이제야 깨달았다. 달라지지 않은 사람은 도준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시윤은 줄곧 지난 기억으로 현재의 도준을 부정하고 있을 뿐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시윤은 핸드폰을 켜고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시윤은 잠시 망설인
시윤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도준이가 가정이 화목하다는 우진의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가짜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으면서 어떤 마음으로 우진이를 건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위해 가정에 대해 물어본 것인지.시윤은 줄곧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였지만, 도준은 시윤의 인생이 무너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모든 걸 다 물어본 후 떠난 것이다.하지만 시윤은 그런 도준을 이기적이라고 말했고, 포악하고 말했으며, 자신을 전혀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이때 시윤은 도준이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넌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시윤은 귀를 막고 생각을 멈추려 했으나 그 한마디는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그때 은우 씨도 똑같이 대하셨잖아요. 제가 바로 대답해 드리죠! 저와 민도준 씨의 관계는 이제 끝이에요!”시윤은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하며 고통스럽게 자신을 껴안았다.-시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그녀는 아침부터 재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나석훈의 전화를 받았다. 마침 우진이와 방송국에 가던 길이라 오후에 재검사를 받기로 약속했다.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는 시윤과 구면이었기에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뉴스는 곧 반나절 만에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해명 영상은 화제가 되어 그동안 오해할 만한 글이나 동영상을 올린 네티즌들을 비난했다.우진은 따로 영상을 하나 찍었는데 카메라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일이 널리 퍼진 건 네티즌들의 악의적의 편집 때문이지만 결국은 저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여 이런 방식으로 선배님을 잡아두려고 했던 겁니다. 이 기회를 빌어 선배님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선배님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이고 전 앞으로 후배의 신분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분들께 꼭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이
시윤은 도준과 비슷한 질문을 했다.“나 선생님께서 도준 씨를 오랫동안 치료해 주셨으니 도준 씨의 마음에 대해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사과해야 도준 씨의 화가 풀릴까요?”나석훈은 의사로서 환자의 상황에 대해 누설할 수 없다.“죄송하지만 현재 두 분은 부부 사이가 아니셔서 환자 사적인 일에 대해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시윤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시윤이가 도준보다 훨씬 상대하기 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나 선생님, 갑자기 숨쉬기 힘들어진 것 같은데 증상이 악화된 거 아닌 가요? 차라리 오늘 입원을 하는 게 어떨까요?”나석훈은 말문이 막혔다.‘갑자기 입원이라니? 병원에 들어설 땐 멀쩡하더니 내 치료를 받고 입원할 정도로 악화되었다고? 이 일이 민 사장의 귀에 들어가면 난 죽게 될지도 몰라.’나석훈은 고개를 돌려 시윤을 보았다.‘역시 부부는 닮는다더니, 이런 것마저 똑같네!’나석훈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우선은 시윤 씨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면, 이전엔 민 사장님께 마음을 열지 않아 상황이 악화되었던 겁니다. 지금은 마음의 매듭이 열렸으니 방금 말씀하신 대로 도준 씨한테 사과를 하시는 게 시윤 씨의 상황에도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시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궁금해하며 물었다.“그럼 어떻게 시도를 하는 게 저한테도 좋을까요?”“우선은 메시지를 통해 사건의 경위를 똑똑히 설명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도윤이 만나는 날에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진료실에서 나온 시윤은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역시 나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야.’시윤이가 병원을 떠나자 나석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스크린에 적힌 민도훈이라는 이름에 눈앞이 캄캄했다.통화를 마친 후 나석훈은 재빨리 안정제를 먹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다른 한편.시윤은 집으로 돌아온 후 나석훈의 건의에 따라 메시지를 통해 자초지종을 똑똑히 전달한 뒤 다시 한번 사과했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