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은 눈가를 찌푸린 채 이를 갈며 성우주의 귀를 움켜잡았다.“너 이 녀석, 다시 한번 말해봐.”어린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엄마, 아파요!”성우주가 얼른 심지안에게 도움을 청했다.심지안은 얼른 성연신의 손을 쳐내며 마음이 아픈 듯 질책했다.“어린아이랑 뭘 따져요,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애인데.”성연신이 어이없는 듯 웃었다.“아는 게 많은 거 아닌가?”성연신은 힘도 주지 않았는데, 성우주가 엄살을 부린 것이었다.성우주는 심지안의 뒤에 숨어 성연신을 향해 혀를 내밀며 약 오르는 표정을 지었다.예전 같았으면 무뚝뚝했을 얼굴에, 또래처럼 앳되고 발랄한 표정들이 많이 생겼다.성연신은 눈동자를 굴리며 답답한 표정을 지웠다.지금이 좋았다.심지안은 확실한 효과를 위해 오늘도 세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지만,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우주의 얼굴은 모자이크했다.성연신도 이어 리트윗하며 받아쳤다. 맞장구치는 상황이 진심인지 가식인지에 대해서는 당사자들도 이제 헷갈렸다.가식적으로 보여준다기보다는 이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성연신은 즐거워했지만, 정욱은 머리가 아팠다.성연신의 인스타 계정은 정욱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보광 그룹의 중요한 정보들을 발표하는 용도였다.하지만 네티즌들이 그와 심지안이 천생연분으로 더 잘 어울린다고 평가한 후, 그는 정욱의 관리 권한을 철회했고 정욱은 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성연신의 흥을 방해할 수 없어 회사 공식 계정으로 올렸다. 공식 계정은 팔로우가 많지 않아 조회수가 적었다.“지안씨, 세움 주얼리 비서 실장의 거주지를 찾았어요. 장학수 변호사가 찾은 단서에 의하면 주식 양도에 관한 일은 그분이 담당한 거예요.”심지안은 한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비서 실장은 이미 거의 정년퇴직한 상태 아닌가요?”심지안도 비서 실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십 대 초반에 굉장히 능력 있는 여자였다.“맞습니다. 하지만 그녀 수중의 관리 권
“약을 마시면 좋아지나?”하지원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서 뭐라 답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선배,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채린 언니가 선배 병을 고쳐줄 거예요.”“믿어?”“당연히 고 선배가 장수할 거라고 믿죠!”하지원이 진심 어리고 애정이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고청민은 고개를 돌려 비아냥거렸다. “이미 몇 년이 지났어. 내 몸인데 내가 모를까?”하지원은 손을 움켜쥐며 고집을 부렸다.“제 병은 선천적인 병이지만, 선배는 다르잖아요. 채린 언니가 있으니, 회복할 가능성은 저보다 높죠.”그녀는 심장 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맞는 심장은 구하기 어려웠다. 이식에 성공하더라도 배척반응이 있을 수 있었다.고 선배는 아직 젊고, 장래가 밝았다. 중요한 건, 그녀도 그와의 미래를 꿈꿨다.“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고청민이 맥없이 그녀를 제지하며 탁자를 짚고 일어나 한약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선배!”하지원이 말리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한약과 쓰레기가 뒤섞인 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심지안은 성연신이랑 재결합했어요. 선배가 이렇게 지낸다고 해서, 심지안은 몰라요. 봐도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고. 병원 한번 가봐요. 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지. 만약 그 사람들에게 하루라도 더 살 기회를 준다면 얼마나 기뻐할지 알아요? 왜 선배는 본인을 아낄 줄 몰라요?”“내가 왜 아껴야 하는데?”고청민이 웃으며 하지원은 똑바로 바라봤다. 이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잘 아껴서 너랑 결혼할까?”하지원은 목소리가 단호해졌다.“맞아요, 선배랑 결혼하고 싶은 거, 선배도 수락한 거 아니었어요?”“맞아, 그런데 뭐? 내가 널 사랑하기라도 바라는 거야? 꿈꾸지 마.”그날, 사당에서 뛰쳐나와 의사를 불러 할아버지를 구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절했었다.다시 깨어났을
그 시각, 루갈.심지안은 비서 실장과 저녁 내내 대화를 나눴다. 그럴듯한 말로 타일러도, 거칠게 협박을 해도, 비서 실장은 끝까지 눈을 감고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헌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말만 안 했어도 성연신은 다른 방법을 택했을 것이었다.“바래다줄게요. 오늘은 집에서 일찍 쉬고 세움은 가지 마요. 에너지를 충분히 회복해야 또 전력을 다하죠.”심지안은 손으로 눈가를 주무르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조소했다.“밤을 새우고 싶어도 안 되네요. 더 새면 아주 판다가 될 거 같아요.”사람은 찾았으니, 결과를 못 낸다는 결말은 없었다.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이 고생하고 있었다.밤새 아무런 성과가 없어 성연신은 심지안의 기분이 나쁠까 봐 걱정되었지만, 그녀의 농담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성연신과 심지안은 나란히 서서 가까지 걸었다. 가끔 스치는 손등은 분위기를 더 설레게 했다. 성연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손은 계속 움찔거렸다.비록 이틀 전에 심지안의 손을 잡았지만, 그는 아름다운 몸매의 작은 여인에게 중독이라도 된 듯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하루만 못 봐도 자꾸 꿈에 나타나고, 시시각각 옆에 묶어두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통나무집 뒤에 숨어있던 소민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성연신이 심지안의 손을 잡고 싶어 안달 나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질투가 나 옷을 비틀어 찢을뻔했다.안철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낮에 있었던 일로 인해 화를 내는 줄로만 알고 위로했다.“화내지 마세요, 몸만 안 좋아져요. 대표님도 고의로 우주 도련님을 못 보게 하는 건 아닐 거예요.”“맞아요, 대표님도 고의가 아니죠. 그저 지안 아가씨가 갑자기 나타나서 대표님도 생각이 바뀐 거죠.”소민정은 불쌍한 척하며 고개를 숙여 작게 흐느꼈다.“지안 아가씨가 저 싫어하는 건 아니겠죠?”“아니에요, 지안 아가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두 사람은 사이좋아요? 접점이 많았나요? 어떻게 좋은 사람인지 알아요?”소민정은 이해되지 않는 듯 말투에 적의가 서려
안철수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길을 안내했다.“지안 아가씨도 저희 루갈의 솜씨를 한 번 맛보세요.”“보잘것없는 음식인데 뭘 맛 봐요.”성연신이 담담히 답했다. 이곳에는 몸을 쓰는 남자들이 많아 음식은 담백하고 고단백 위주여서 별로 맛이 없었다.안철수는 멈칫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달걀죽과 닭가슴살은 확실히 맛이 없었다.통나무집 안, 원형 탁자 주위로 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탁자에는 죽 두 그릇, 달걀 그리고 소고기 무침이 놓여있었다. 심지안은 편식하는 편이 아니었다. 산해진미도 집밥도 가리지 않았다.보잘것없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죽을 먹으려고 하는데, 문 뒤로 치맛자락이 눈에 띄었다. 눈을 돌려 바라보니 소민정인 듯했다.심지안은 고개를 내려 눈앞의 죽을 보고 안철수를 다시 보며 마음속으로 추측했다.“입맛에 안 맞아요?”심지안이 먹지 않자, 성연신이 물어왔다.심지안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죽을 밀어내고 말했다.“맞아요. 딱 봐도 맛없게 생겼어요.”문밖에서 듣고 있던 소민정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뭐야, 맛없을 거 같았으면 오지를 말았어야지. 대표님한테 도움 청하러 왔으면서 여행하러 온 줄 아는 건가? 정말 낯짝이 두껍네.’죽을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달걀에도 손을 써 두었기 때문이다.허겁지겁 죽을 먹던 안철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맛이 없다고? 못 느꼈는데.’“그럼, 달걀 하나 먹어요. 까 줄게요.”성연신은 수려한 손가락으로 달걀 하나를 꺼내며 심지안을 향해 말했다.“안 먹을래요. 냄새가 안 좋아요. 손버릇이 나쁜 사람이 건드린 건 아니겠죠?”심지안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성연신은 미간을 찌푸릴 뿐, 바로 답하지는 않았다.소민정의 얼굴이 밝아지며, 강 건너 불구경 하는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대표님은 손이 많이 가는 여자를 싫어하는데, 이제 역린을 건드렸네. 꼴 좋다.’성연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소민정은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지를
심지안의 속눈썹이 정처 없이 떨렸다. 심장은 마치 무언가에 맞은 듯 설렘에 뛰기 시작했다.때로 여자는 돈보다, 넘치는 사랑이 필요했다. 온 마음, 온 눈동자에 그녀만이 담겨있는 깊은 사랑 말이다.성연신이 이상함을 감지하기 전에 심지안은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달걀 볶음밥이요.”“알겠어요.”성연신은 대답하고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안철수는 잠시 반응을 못 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젓가락을 놓고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제야 성연신이 직접 요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안철수가 놀라움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밥할 줄 아세요?”성연신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지금 의심하는 건가요?”“아니요!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요...”말을 이어 나갈수록 안철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안철수는 조금 억울했다, 대표님이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할 줄 알아요. 봤어요.”심지안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어줬다. 그녀는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하지만 한 번밖에 못 본 것 같아요. 철수 씨가 못 본 것도 당연한 일이죠.”안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대표님은 쉽게 주방으로 가지 않으시죠. 매번 아가씨를 위해서 직접 요리하나 봐요.”‘보아하니 대표님이 정말 아가씨를 아끼시는 것 같네.’심지안은 시큰둥하게 눈을 흘겼다.“오육년간 저를 위해서 두 번밖에 안 했는데, 치켜세울 필요 없어요. 고마워요.”성연신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앞으로는 배고프다고 하면 해줄게요. 제가 한 밥만 먹어요.”심지안이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냄비가 달궈지자, 그는 얼른 몸을 돌렸다.성연신의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지안은 잠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처음에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끌렸다, 또한 별 볼 일 없는 전 남자 친구에게 복수하려고 자존심마저 버린 채 그를 유혹해서 사귀게 되었다.하지만 심지안이 좋아하는 건 성연신의 얼굴뿐만이 아니었
“키득키득...”심지안은 참다못해 웃으면서 귀를 후비었다.밥 한 끼를 했을 뿐,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국수를 끓였다.그러나 그녀가 보기엔 성연신이 목숨을 바친 것처럼 보였다.소민정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고한 척하지 마!”‘오빠는 미혹되었어,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내가 얼마나 좋은지 발견할 거야.’“나가.”성연신은 버럭 화를 냈고 분위기도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추워졌다.소민정은 겁에 질려 몸을 떨며 억울해했다.눈물이 마치 바닥을 뚫을 듯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소민정는 슬픔에 잠겼다.“오빠, 이게 다 오빠를 위해서 에요.성연신은 눈살을 더욱 찌푸렸고 목소리에는 한기가 가득 찼다.“같은 말을 두 번씩 하게 하지 마.”안철수는 이 상황을 보고는 소민정을 끌고 나가려고 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대표님은 자신을 돌볼 줄 알아요.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나소민정은 내키지 않아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요? 오빠는 당신에게 진정으로 좋은 사람을 밀어낼 수 없어요.”안철수는 대뜸 소녀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눈빛이 복잡해졌다.“진정 좋은 사람?”심지안은 목소리가 높아졌고 연신 웃었다.“확실해?”소민정은 안철수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펴며 떳떳한 모습을 보였다.심지안은 입가의 웃음을 참지 못했고 눈에는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식탁 위에 손도 대지 않은 좁쌀 죽을 들어 서민정의 앞에 내밀었다.“내가 왜 맛이 없다고 했는지 아세요?”소민정은 가슴이 뜨끔해지며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왜...뭐라고요?”“당신은 아시잖아요.”심지안은 그녀에게 다가와 신비로운 어조로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아닌가요?”똑똑한 성연신은 민감하게 알아차리고는 좁쌀 죽에 시선이 꽂혔다. 그의 눈 밑에서는 한기가 돌았다.그는 소민정이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이러한 차이는 소민정이 루갈을 위해 공헌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가 심지안의 안전을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소민정은 그나마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행히 그저 설사약을 탄 거라서 화장실 몇 번 더 가는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먹으면 먹어요! 잘못하게 없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어!”말을 마치고 소민정은 죽 그릇을 들고 몇 입에 다 먹었다.심지안은 의미심장은 웃음을 지었다.“독약은 아닌가 보네요.”‘안 그럼 소민정이 이렇게 통쾌하게 먹을 리 없지.’“먹으라고 해서 다 먹었는데도 저를 의심하시고 저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흑흑흑…”소민정은 그릇을 바닥에다 던지고는 울며불며 달려 나갔다.성연신은 소민정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눈길을 심지안에게 돌리고 미안함이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어떻게 발견한 거예요?”“아까 들어와서 앉자마자 입구에서 누군가가 몰래 뭘 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어요,”성연신은 괴로워하며 말했다,“미안해요. 하마터면 당신을 다치게 할 뻔했네요.”“괜찮아요. 그래도 죽일 간이 없다는 것을 예상했어요.”밖에 서면 모를까 루갈에서 생긴 일이면 조사해 내기 아주 쉬웠다.소민정이 총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완전 바보는 아니었다.설사약을 타면 많아 봤자, 설사하는 것밖에 없었다. 원래 위장이 안 좋은 심지안은 아마 죽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라고 소민정은 생각했었다.옆에 있던 안철수는 머뭇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와 안절부절못한 눈빛으로 말했다.“대표님, 지안 아가씨, 저는…”“닥쳐.”심지안과 성연신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둘의 케미는 장난이 아니었다.보나 마나 이 멍청이는 또 소민정을 위해 사정할 게 뻔했다. 민채린의 예상이 맞았다. 안철수는 소민정을 좋아한다.안철수는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입가까지 나온 말을 거두었다.심지안은 성씨 집안에 돌아와서 보충 잠을 잤다. 밤낮이 뒤바뀐 채, 대낮부터 저녁까지 자서 핸드폰을 볼 틈이 전혀 없었다.다른 한편, 성연신은 심지안을 집까지 바래다준 후 바로 집에서 성우주를 픽
엄 교수는 도윤지의 언어가 조금 거슬려 불쾌했다.“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마. 특히 상황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면 안 돼.”도윤지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 감히 교수님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국내에서 최면술을 받는 환자는 엄청 드물었다. 그래서 엄 교수는 심지안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심지안이 고청민이랑 헤어졌으면 그녀의 병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거 아니야…’엄교진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핑계를 대서 도윤지를 내보냈다.그러고는 심지안의 연락처를 찾으려고 혼자서 인터넷으로 그녀의 자료를 찾아 헤맸다.나이가 들고나서 컴퓨터를 쓰는 일이 적었다. 엄교진은 눈이 빠지도록 찾아서야 심지안의 SNS를 찾았다.DM을 어떻게 보내는지 몰라서 임 교수는 바로 심지안의 게시글에 댓글을 달았다.[심지안 씨, 안녕하세요. 저는 제명 심리연구소의 교수입니다. 당신과 소통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보면 연락해 주세요.]임교수는 이 댓글이 모든 사람한테 공개되는 줄도 모르고 댓글을 남겼다.[저기요, 연락처를 묻고 싶으면 DM을 하시지. 근데 유부녀를 이렇게 대놓고 건드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하하하, 그 와중에 교수인 척을 하네. 네가 교수면 난 CEO다.][제발요. 나이도 많으신 분이 편히 남은 날을 즐기면 안 좋나? 여기서 웬 지랄!][잠깐만! 이 사람 진짜 교수님인 것 같은데. 실명인증이 되어있어!][참 나. 연구소의 엄 교수님이시네! 아주 업계에서 거물급인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엄 교수의 댓글 아래 하도 많은 사람들이 대댓글을 달아서 이 댓글은 엄청 빠르게 제일 위로 올라갔다.저녁에 자고 일어난 심지안은 이 댓글을 보고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매우 감격스러웠다.‘예약하기 너무 어려워서 못 갔는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참 기적이야!’‘근데 엄 교수님께서 왜 주동적으로 나에게 연락을 주셨지?’이 점에 대해 심지안은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심지안은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