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은 통증을 참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안 될 건 없잖아요. 어차피 연신 씨 마음속에는 시연 씨밖에 없으니까. 저희만 헤어지면 세 사람 다 편안해지겠네요.”성연신은 화가 난 듯 위험하게 번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하, 사과하는 게 그렇게 서러웠어요?”“네, 서러웠어요.”심지안은 진짜 성심성의껏 오레오를 돌봐줬다. 수제 간식을 만들어 줄 정도로 말이다. 퇴근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산책을 잊지 않았고, 강아지들이 아무리 사고를 쳐도 그 모습마저 귀여워 크게 혼내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나면 모든 책임이 그녀에게 돌아왔다.심지안이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그녀는 성연신이 의심하더라도 조사를 거친 후 결단을 내렸으면 했다. 첫사랑 앞에서 그녀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아무리 무딘 그녀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성연신은 시선을 떨궈 심지안을 바라봤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보고서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생각할 시간은 됐어요. 그냥 지금 헤어져요. 저랑 사귈 여자라면 널려 빠졌으니까요.”“차인 사람은 성연 씨니까 착각하지 마요.”심지안의 안색은 창백하고도 비참했다. 이 순간 그녀는 성연신이 한 번도 자신을 좋아한 적 없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이만 풀어주시겠어요, 대표님? 저는 이만 일 보러 가야 해서요.”심지안은 성연신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를 뒤로 밀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정욱은 심지안이 나가는 것을 보고 당연히 두 사람이 화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찻잔을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정욱의 왼발이 사무실 문턱을 넘은 순간, 성연신은 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피는 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나가!”성연신의 위압감에 정욱은 손을 흠칫 떨다가 자칫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와... 대표님 상태를 보아하니 이번엔 좀 심각한 것 같은데?’정욱은 두려운 마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진현수는 심지안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진유진의 손에서 그녀를 안아왔다. 그리고 다정한 동작으로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진유진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진현수가 그녀의 망설임을 보아내고 먼저 말했다.“길을 안내해 줘요. 저는 그냥 집까지 데려다주기만 할게요.”진유진은 머쓱한 듯 코를 쓱 만지며 말했다.“죄송해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지안이랑 성연신 씨는 자주 다투고 싸우니까, 이번에도 아마 그냥 잠깐 이러다 말 거예요. 그러니 지안이는 포기하고 다른 여자도 좀 만나요.”“하하, 그게 어디 생각대로 되나요.”“하긴...”‘지안이도 참... 계약에 진심을 담는 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는데. 어휴, 됐어.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해서 지안이가 오해한 것도 있으니까.’진유진은 조용히 진현수를 훑어봤다. 깔끔한 정장에 우아한 모습,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비록 성연신보다는 못하지만... 또다시 심지안이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진유진은 요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심지안을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호텔을 잡아야 했다.진현수는 조심스럽게 심지안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까지 덮어줬다. 그녀의 발목이 퉁퉁 부은 것을 보고서는 또 약방에 가서 파스까지 사주고 나서야 돌아갔다.진유진은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밀린 업무를 처리하며 심지안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저녁 7시.심지안은 비몽사몽 눈을 떴다. 곁에 타자하고 있는 진유진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알림창에는 세 개의 문자가 와 있었는데 그것은 전부 진현수가 보낸 것이었다. 순간 밀려오는 실망감에 심지안은 피식 웃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었다.심지안은 몸을 일으키며 간단하게 답장 몇 마디를 보냈다.“어이, 주정뱅이. 깼어?”진유진은 기지개를 켜면서 심지안에게 파스를 뿌려줬
몸을 일으켜 문을 열러 간 진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배달원이 건네는 배달 음식 받아서 들었다.“지안아, 네가 배달 음식 시켰어?”“아니.”“나도 아닌데...”이때 진현수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안 씨, 제가 호텔로 배달 음식을 보냈어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달콤한 걸 먹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기에 마실 것도 보냈어요.”“고마워요, 현수 씨.”“별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네...”진유진은 심지안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캐러멜 마키아토를 건네며 싱긋 웃었다.“성연신 씨랑 헤어졌으면 이제 진현수 씨랑 만나보는 건 어때?”“헤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약은 유효하니까, 당분간은 계속 연신 씨 아내인 척해야 해.”“그거 어른들 속이려고 한 계약이라며? 성연신 씨 첫사랑이 돌아왔는데 계약도 필요 없어지는 거 아니야?”“모르지, 그건 연신 씨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심지안은 회사를 사흘이나 쉬었다. 발목을 접질리고 걷기가 불편한 데다가 성연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개와 남자가 사라지자,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이 사흘 동안 진현수는 매일 같이 심지안을 만나러 온 반면 성연신은 전화 한 통도 없었다. 그러는 쪽이 그의 성격에 더 어울리기도 했다.오후.진현수는 디저트를 사서 심지안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살펴보며 말했다.“부기가 빠진 걸 보니 이젠 걸어도 되겠네요.”“맞아요, 이제는 하나도 안 아파요. 약 사줘서 정말 고마워요.”“안 아프다니 다행이에요.”진현수는 안경을 슥 올리면서 무심코 물었다.“지안 씨, 바다 보러 가고 싶지 않아요?”“글쎄요. 저는 그냥 가만히 누워있고 싶어요.”심지안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걱정 없이 쉬는 것이라 딱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바닷가에 간다고 해도 진현수가 아닌 지금은 연락도 하지 못하는 그 사람과 가고 싶었다.“내일 저녁 제 생일파티는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에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볼 수 있길 바라요.”성연신은 몸을 일으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욱에게 커피를 내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바꿨다.“아니다, 커피 말고 차를 내려줘.”정욱은 성연신을 힐끗 봤다. 눈빛도 표정도 전보다 훨씬 풀린 것이 아무래도 심지안과 연락이 닿은 듯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좋은 날’의 3단 고음을 지를 수 있을 정도의 기쁨을 꾹꾹 누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를 내리러 갔다.성연신은 저녁 8시까지 회사에서 심지안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자, 결국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한참 울리다가 뚝 하고 끊겨버렸다.“???”성연신의 안색은 무섭게 식어갔다. 미간은 파리도 끼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찌푸려졌다.퍽!핸드폰을 사정없이 소파 위로 내동댕이친 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생각했다.‘하, 이 멍청한 여자가 제 발로 마지막 기회를 차버리네.’...시원하게 씻고 난 심지안은 예능을 보면서 배달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핸드폰에서 익숙한 이름으로 부재중 통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성연신은 아무래도 심지안이 샤워할 때나, 거실에서 배달 음식을 먹을 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통으로 끝난 것을 보면 잘못 걸었을 확률이 높았다.‘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걸어볼까? 만약 할아버지가 갑자기 중정원에 갔거나 하면 큰일이잖아.’심지안은 성연신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 연결음도 아닌 차가운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전화기가 꺼져있어...”심지안은 실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멀리에 두고 일찍 잠들었다. 꿈속에는 기대도 실망도 없기를 바라며 말이다....이튿날 초저녁.진현수는 약속대로 심지안을 데리러 호텔까지 왔다. 심지안은 곱게 포장한 정장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생일 축하해요, 현수 씨. 사이즈는 눈짐작으로 고른 거라 맞
장학수는 성연신의 답장을 기다리며 핸드폰만 바라봤다. 하지만 5분이 지나서도 반응이 없자 기다리다 못해 먼저 문자를 보냈다.「혹시 야근 중인가?」「이야, 설마 네가 일 밖에 할 줄 몰라서 지안 씨가 도망친 거 아니야?」「그렇다면 바람피운 것도 이해가 가는데ㅋㅋㅋ.」...진현수의 생일파티는 별장에서 열렸다.별장 앞에 도착한 성연신은 내부가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 차를 세우고 심지안을 바라봤다. 그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진현수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슬픔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멍청한 건 나였네. 정장이 내 것인 줄 알았다니...’성연신은 악마가 연상될 정도의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단호하게 말했다.“1분 줄게요. 지금 당장 나와요.”별장 안.심지안은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를 듣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연신 씨? 지금 어디예요?”“창밖을 봐 봐요.”머리를 돌리자 과연 어두운 안색의 성연신이 보였다. 심지안은 어쩐지 잘못을 저지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일단 나와요. 아니면 제가 들어갈까요?”“아니요, 나갈게요.”화난 상태의 성연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심지안은 남의 생일파티를 망치지 말고 자신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죄송해요, 현수 씨. 저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혹시 어디 불편해요?”“아니에요. 제 걱정은 말고 파티를 즐겨요.”심지안은 밖으로 나갔다. 진현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좇다가 성연신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팍 구겼다.“연신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심지안은 성연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뿐더러 이곳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심지안의 질문에 성연신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제가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아, 혹시 방해됐으려나?”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얼마 전 헤어졌다는 것이 떠올라 성연신의 도발을
예상치 못한 한 방에 진현수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곧바로 이를 악물며 일어나서는 성연신과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뒤엉키다가 성연신은 빠르고 정확하게 진현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심지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더니 앞으로 다가가서 두 사람을 말리려고 했다. 그녀의 비명을 듣고 별장 안에 있던 사람들도 나와서 두 사람을 말리는데 합세했다. 진현수는 피멍이 든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진현수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심지안은 한참 사과하고 나서야 성연신을 운전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제발 빨리 출발하라고 애원했다. 이토록 운전면허증의 중요성이 크게 느껴진 것은 또 처음이었다.성연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창문을 통해 진현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경멸 섞인 미소와 함께 시동을 걸고 멀어져 갔다.고속도로에서 성연신의 분노는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차 속은 거의 120 마일에 가까웠다. 심지안은 무서운 듯 운전대를 꼭 잡으며 말했다.“속도 너무 빨라요. 저 멀미할 것 같다고요.”성연신은 심지안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의 안색은 멀미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다행히 차 속은 천천히 늦춰졌고 두 사람은 안전하게 중정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심지안은 이제야 시름을 놓고 성연신에게 물었다.“현수 씨는 왜 때렸어요?”“꼴 보기 싫어서요.”성연신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설마 지금 그 자식 편을 들어주려는 거예요?”어이가 없었던 심지안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분위기가 왜 이러냐? 혹시 저 녀석이 또 무슨 잘못을 했나?”이때 무기력하지만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수광이 거실 문 앞에 서서 놀란 듯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심지안은 흠칫 놀라더니 바로 성수관의 곁으로 다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할아버지가 어떻게 오셨어요?”“오랜만에 한 번 와 봤다.”성수광은 예리한 눈빛으로 성연신과 심지안은 번갈아 쳐다봤다.“둘이 싸웠나?”성연
성수광이 물었다.“파티에 혼자 갔다고?”성연신의 모습은 마치 부모님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르는 듯한 어린아이 같았고, 그 혼자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성수광은 바로 심지안에게 시선을 옮기며 따지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지안아, 너는 이미 연신이와 결혼하지 않았느냐. 부부는 한 몸이다. 그런데 네가 혼자 친구가 연 파티에 참석하면 친구들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으냐. 뒤에서 몰래 너를 보며 수군수군하겠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 있으면 연신이랑 방에서 둘이서 해결하고 결정해.”“...할아버지, 죄송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심지안은 추욱 주눅이 든 모습으로 벽 끝에 바짝 붙어 서서 손만 뜯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착한 아이로 보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성연신을 엄청나게 욕하고 있었다.성수광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은 듯 두 사람을 붙잡고 한참이나 잔소리를 했고 그제야 두 사람을 놓아주었다.심지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신이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기더니 이내 안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키가 컸던 그는 심지안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할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티를 내고 싶었어요?”심지안은 불퉁한 모습으로 작게 중얼거렸다.“그냥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안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빈 의자에 찾아가 앉았다.방 안엔 온통 성연신의 체취로 가득했고 그녀는 ‘전여친 '이었기에 이 방이 다소 불편하기도 했다.‘할아버지께선 이따 저녁에 가시겠지?'‘안 가시고 계속 계시면, 난 계속 연신 씨랑 함께 있어야 하는 거잖아!'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착잡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고개를 떨구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심지안의 모습에 성연신은 그녀가 진현수를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해 눈빛이 확 가라앉더니 서늘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그의 서늘한 아우라에 심지안도 눈치챌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등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상처엔 이미 피가 딱딱하게 굳어
“아아악... 아빠! 아파요!”이유도 모른 채 머리채를 잡힌 심연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비록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지만 심전웅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걸 보면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은옥매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고 있었기에 그녀는 은연중에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더더욱 심전웅과 함께 병원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세 사람은 그렇게 병원 앞에서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그래, 끝까지 안 들어가겠다는 거지? 두 사람 딱 기다려!”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심전웅은 성큼 병원으로 들어가 의사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옆에서 말리는 심연아를 무시한 채 바로 힘으로 두 사람을 병원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병원 바로 앞엔 버블티 가게가 있었다.심지안은 그곳에서 세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표정 관리하고 있었다.“유전자 검사는 어느 정도 걸리나요?”“일주일 정도 걸려요. 특히 이런 유전자 검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병원이라면 더 빨리 결과를 받을 수 있겠네요.”“그럼 오늘 구경은 여기서 끝이겠네요?”성연신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쩌면 마음이 급한 심전웅이 유전자 검사가 아닌 혈액 검사를 먼저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혈액형으로만 봐도 친딸인지 아닌지를 추측해낼 수 있었다.심전웅이 심연아의 혈액형이 뭐여야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심지안은 두 눈을 반짝였다. 혈액 검사는 확실히 유전자 검사보다 더 빨랐고 보편적으로 반 시간 후에 바로 결과가 나왔다.심씨 가문은 줄곧 남자들이 돈을 벌어오고 여자들이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었다.그랬기에 은옥매가 살짝만 다른 짓을 저질러도 심전웅은 눈치를 채기가 어려웠다.심지안은 순간 마음속에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얼른 몸을 틀어 옆에 있던 남자를 보았다. 성연신은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입은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고마워요.”“뭐가 고마운데요?”성연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