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 심지안의 부탁을 받고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왔어요. 심지안이 너무 바빠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요. 전 현장 일을 맡은 회사 사장님의 비서예요.”정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조금 전 그는 성연신에게 심지안이 곧 도시락을 들고 올 거라 말했었다. 그 말을 들은 성연신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책상을 깨끗이 정리했었다. 하지만 심지안을 대신해 엉뚱한 사람이 왔으니 이제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직업 정신이 투철한 정욱은 마음은 더없이 복잡했지만 겉으론 친절한 얼굴로 정중하게 연설아를 안내했다.“네. 이쪽으로 오세요.”‘모르겠다. 일단 먹잇감으로 던져줘야지.’연설아는 정욱의 등 뒤에서 기대에 찬 얼굴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을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대표님, 도시락이 도착했습니다.”말을 마친 뒤 정욱은 곧바로 사무실 문을 나섰다. 분노의 불길이 자신에게 덮치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를 피한 것이다.성연신은 핸드폰을 보며 나긋한 목소리로 ‘응.’이라 대답했다.그는 오늘 옅은 남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책장을 넘기는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 검은 눈동자 속 한기를 감춰주는 속눈썹이 그의 준수함과 우아함을 한층 더 밝혀주고 있었다.연설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저번 쇼핑몰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아닌가.저 사람이 보광 그룹 대표였구나. 자신과 그가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연설아였다...연설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심장은 저항 없이 요동쳤으며 호흡까지 가빠졌다.그녀는 도시락을 성연신의 눈앞에 내려놓고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성연신은 머리를 들진 않았지만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저 여자 오늘 왜 저러는 거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저 눈빛은 좀...’잔잔했던 호수에 돌이라도 던진 듯 그의 가슴에 파도가 일었다. 그가 내심 흐뭇한 마음에 말했다. “먼저 음식을 좀 데운 다음 여기에서 같이 먹어요.
연설아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성연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부하직원을 호되게 혼내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말이다.하지만 성연신이 풍기는 등골이 싸늘해지게 만드는 오싹한 분위기는 눈앞 이 비서보다도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연설아는 결국 정욱을 한동안 쏘아보다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연설아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현장에 돌아와 심지안을 찾아가 따졌다.“너 일부러 그랬지?”심지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일부러 날 성 대표한테 보내 모욕을 당하게 만든 거지?”“응? 분명 네가 먼저 도시락을 빼앗아가면서 나 대신 가져가겠다고 했잖아.”심지안이 이어 대표에게로 눈길을 돌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제 기억이 틀렸나요?”대표는 난처한 얼굴로 연설아에게 말했다.“설아야, 그만하고 우리한테 커피나 타줘.”“삼촌, 저 모욕을 당했단 말이에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요?”삼촌?심지안은 그제야 머릿속의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연설아의 능력으로 빽을 쓰지 않고 그 어떤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겠는가.대표는 난처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친척이라는 관계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애써 삼키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심지안은 팔짱을 끼고 태연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옆에 앉아있던 김인정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 성 대표님는 평소 차갑고 무뚝뚝하긴 해도 절대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 연설아가 성 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도리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있다.“일단 회사 내부 직원의 문제부터 해결한 다음 상의하는 게 좋겠네요.”김인정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대표가 연설아의 부모님을 끄집어내며 말했다.“내 회사에서 일하는 게 그토록 억울하고 힘들면 부모님한테 지금 당장 데리러 오라고 말해.”그의 이 작은 회사는 보광 그룹과 협력하기 위해
급기야 완전히 미쳐버린 연설아는 주위에 있는 손에 들리는 물건 모두를 심지안에게로 내던졌다.김인정은 심지안의 팔을 끌어당겨 황급히 자리를 떴고 대표도 급히 달려가 연설아를 막아 세웠다.현장을 떠난 뒤 심지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중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일을 망쳤어요. 제가 직접 대표님한테 얘기할게요. 언니가 아닌 저한테 벌을 내려달라고요.”김인정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지안 씨를 왜 탓하겠어요. 나도 그쪽 비서가 지안 씨한테 앙심을 품고 있다는 거 눈치챘어요. 사람이 화를 낼 줄도 알아야지, 아니면 바보가 돼버려요.”심지안이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 언니가 절 호되게 혼낼 줄 알았어요.”“지안 씨가 잘못했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지안 씨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지안 씨를 혼내겠어요.”김인정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됐어요. 돌아가서 나랑 같이 성 대표님에게 설명하자고요. 별일 없을 거예요.”“정말이에요? 하지만 대표님은 워낙 막무가내라 설명한다고 될지 모르겠네요.”심지안이 안전벨트를 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성연신은 모든 일에서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말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김인정은 그녀의 말은 듣지 못하고 어떻게 성연신에게 설명해야 할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이 잘못한 건 없지만 매섭고 차가운 성연신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초조해하는 김인정과 비교하면 심지안의 표정이 오히려 훨씬 더 태연하고 편안해 보였다.돌아가는 길 신호등 앞.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심지안이 옆에 정차되어 있는 차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찌푸렸다.도요타 차 안에 젊은 남녀 한 쌍이 앉아있었는데 신호등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안에도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걸 보니 아주 친밀한 커플 같았다.중요한 건 그 남자의 목에 매어져 있는 넥타이였다. 진유진과 함께 쇼핑하던 날, 진유진이 남자친구에게 사준 그 넥타이와 완벽히 일치했다.심지안은 곧바로 진유진에게 문자를 보내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심지안은 부자연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말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옅은 기대감까지 부풀어 올랐다.“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내가 말했잖아요. 지안 씨는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성씨 가문을 대표하기도 한다고.”“하지만 우리의 관계를 발설하지 말라고 했잖아요...”“회사에선 안 되지만 밖에선 밝혀도 돼요.”“하지만 그러면 회사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예요.”지금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꽁꽁 숨기는 연예인들의 열애도 밝혀지는 세상이다. 하물며 일반인인 그들은 어떻겠는가.그 말에 성연신도 아직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너무 제멋대로라 한동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그는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발표하지 않아도 난 지안 씨를 위해 나설 수 있어요. 지안 씨는 항상 자신이 성씨 집안의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해요.”“아...”심지안의 초롱초롱하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역시 그는 그녀가 성씨 집안의 체면을 떨어뜨릴까 봐 걱정했던 것일 뿐, 진정으로 그녀를 걱정했던 것이 아니다.그녀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실낱같은 기대가 또다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녀가 서운한 마음에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성연신이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가두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속해요.”“뭘요?”“오늘 뭘 잘못했어요?”심지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작은 얼굴에 아득함이 스쳐 지나갔다.“다 얘기했잖아요.”성연신이 거만함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론 내 일을 첫 순위에 두어야 해요. 일은 2순위고요. 또한 내 일은 지안 씨가 직접 해주어야 해요. 오늘 낯선 여자를 보냈다는 게 난 너무 화가 났어요.”심지안이 입을 삐죽거렸다.“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요. 일이 다 한 번에 몰리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연신 씨도 이해해 줘요.”그녀는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다. 어제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했
심지안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서류를 살펴보았다. 순간 조금 전에 있었던 불쾌했던 일이 머릿속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그녀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한 단계 높이 올라간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이게 홍성준이 탈세한 증거예요?”“맞아요.”“연신 씨가 고소하려고요?”심지안이 두 팔로 책상을 짚고 서서 물었다.“두 사람은 아는 사이잖아요. 왜 이렇게 하는 거예요?”“겉으로 보이는 관계를 믿어요?”그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 눈엔 가소로움이 가득 담겨있었다.홍교은의 야심은 이마에 씌어있지만 않을 뿐 너무나도 투명하게 훤히 꿰뚫어 보인다. 하여 할아버지가 그에게 여자를 소개해줄 때에도 홍교은은 고려하지 않았다. 혼사를 맺음에 있어 집안 배경도 중요하지만 자칫 승냥이를 끌어들이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심지안은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홍교은은 어쩌면 정말 성연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익을 가장 중요히 여기는 그녀에게 성연신에 대한 진심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성씨 가문이나 보광 그룹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일 것이다.“언제 할 생각이에요?”“며칠 뒤로 생각하고 있어요.”“아...”심지안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홍성준에게 곧 무슨 일이 생길 거라 하지 않았어요? 그럼 그냥 기다리면 될 텐데 왜 고소하려는 거예요?”설마 저번 자선 파티에서 홍 씨 가문 남매가 그녀와 맞선 것 때문에...성연신의 손가락이 리듬을 타고 번갈아 가며 책상을 두드렸다.“마음에 안 들어요.”심지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는데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됐어. 이 사람이 언제 상식대로 행동한 적이 있었던가. 그가 그녀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일은 생각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이다. 깊게 따져 묻다간 함정에 빠지는 게 오히려 자신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심지안은 성연신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태
그 깊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깨어있었다니. 심연아와 헤어진 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나간 인연에겐 다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강우석이 깊은 밤 전화해 무엇을 하려 했든 전혀 관심이 없다.심지안은 샤워를 마친 뒤 성연신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오늘은 파란 하늘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화창한 날씨였다. 사무실에서 심지안의 책상은 창가 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창문을 여니 산산이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한결 들떠 올랐다. 손가락에도 그 흥이 전해졌는지 리듬을 타며 끊임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지안 씨, 아래에서 누가 찾아요.”얼마가 지났을까. 프런트에서 그녀에게 말을 전하러 왔다.심지안은 이어폰을 내려놓고 말했다.“알겠어요. 내려갈게요.”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그녀의 눈에 강우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여긴 왜 왔어?”“지안아, 보광 그룹에 입사하게 된 걸 축하해.”강우석은 머리가 살짝 헝클어졌을 뿐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크서클이 시커멓게 내려앉았고 살도 많이 빠진 듯했다.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기운도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축하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내가 여기에서 일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파혼하러 심 씨 집안에 갔을 때 연아한테 들었어.”강우석이 잠시 고민하고는 일렁이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 말했다.“주원재와 연아에 관한 일 말이야. 사실이야?”심지안이 침묵하다가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이야. 심연아는 흥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의도적으로 주원재에게 접근했어.”“제기랄. 나쁜 년!”그날 그토록 섹시한 옷차림으로 연설아와 쇼핑을 하러 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분명 주원재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강우석은 주원재에게 약혼녀를 빼앗긴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그가 주혁재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안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성연신이 독차지한 층에서 멈췄다.그녀는 돌연 성연신이라는 이 남자는 성격이 거칠고 입이 독하긴 해도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왔지만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런 남자도 괜찮은 것 같다...그때 사무실에서 나온 정욱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는 심지안을 보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휘저었다.“심지안 씨,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어요?”“아... 네. 안에 있어요?”“네. 계십니다.”정욱은 말을 마친 뒤 특별히 한 마디 더 보탰다.“성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심지안 씨는 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방에 들어가면 된다고요. 번거롭잖아요.”심지안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매일 점심 도시락을 가져다줄 때 한 번 가는 것뿐인데 번거로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그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사무실 안. 성연신은 평소와는 다르게 일을 하지 않고 검은색 가죽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그런 그를 쳐다보며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잠시 생각해 보니 경호원을 빌리는 일쯤은 정욱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뜨려 했다.그녀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등 뒤에서 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얘기 있으면 해요.”심지안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심장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는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의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안 자고 있었어요?”귀신도 아니고. 어떻게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단 말인가.“잠들었었는데 지안 씨가 들어온 뒤 깼어요.”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이마를 쿡쿡 눌렀다.그 말인즉슨 심지안 때문에 잠에서 깼다는 것이다.“저기... 저한테 경호원 몇 명 빌려줄 수 있어요?”그 말에 성연신이 번쩍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내뿜
방 안.옷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물침대에 누워있던 알몸의 여자가 깜짝 놀라며 꺅 소리를 질렀다.모든 증거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심지안이 목격한 심연아와 강우석이 몸을 섞던 그 날의 광경과 정확히 일치했다.그녀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덤덤해진 줄 알았으나 같은 일이 생생히 눈앞에 펼쳐지니 또다시 위 속에서 메스꺼움이 기어올랐다.그녀가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할 때 귓가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욱은 성연신과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에 일을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데에 매우 능했다. 그는 곧바로 진유진과 남자를 떨어뜨려 놓고 핸드폰으로 현장에 널브러져 있는 증거 사진을 찍은 뒤 심지안과 진유진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아래로 내려가자 진유진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난 아직 저놈을 때리지도 못했어요. 왜 날 끌어낸 건데요?”“에너지를 무의미한 곳에 사용하지 마세요.”심지안이 누군가와 똑 닮은 말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심지안 씨, 대표님께서 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친구분은 제가 택시를 태워 보낼게요.”성 대표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심지안이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진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전 유진이와 함께 갈 거예요.”정욱은 성연신의 말을 떠올리고는 단호히 말했다.“제가 친구분을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는 길에 조금 전 찍은 사진도 보내드리고요.”심지안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유진이 정욱의 팔에 이끌려 택시를 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효율적이다.하지만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걸까.심지안이 차에 돌아가자 그녀를 한 번 슥 훑어본 성연신이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이마를 찌푸렸다.“얼굴색이 왜 그래요?”“아니에요... 조금 전 그 장면이 너무 역겨워서요.”성연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대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30분 뒤 중정원.홍교은은 성연신의 차가 보이자 멈추기도 전에 달려가 애처로운 얼굴로 말했다.“연신아, 오빠가 조사를 받으러 갔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