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서왕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황제를 말렸다.“폐하, 이건 황후께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하지만 소욱은 이미 그에게 등을 보이고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바람이 사내의 옷소매를 스치며 바람에 흩날리게 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어화원과 마장의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기억 속 말을 타고 달리던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많이 놀란 탓에 태후를 자녕궁으로 모신 뒤, 봉구안은 자신의 영화궁으로 돌아갔다.황궁 법도대로 황후는 뭇 비빈들의 문안 인사를 받아야 했다.물론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비빈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비빈들은 아프거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봉구안은 뭇 여자들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대충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돌아가라고 명했다.그리고 잠시 후, 황제의 어명이 도착했다.“황후마마, 폐하께서는 태후를 구하신 마마의 공로를 높게 사시어 이 옥여의를 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미쳐 날뛰던 말은 참수형에 처할 것이니 마마께서 직접 감독하라고 하셨습니다.”연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참수형을 황후에게 감독하라니, 이런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게다가 회임 중인 어미 말을 참수하는 것도 처음 있는 경우였다.연상이 폭군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하지만 봉구안은 전혀 놀라거나 속상한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응대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태감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정말 인내심 깊으신 분이시구나.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오찬 후, 어마장.마장 관리는 어미 말을 마구간 밖으로 끌고 나와 참수형에 처할 준비를 마쳤다.말을 사랑하는 이들은 분분히 봉구안에게 간청했다.“마마, 정말 명을 회수할 수 없는 것이옵니까? 이 녀석도 전장을 달리던 녀석이란 말입니다!”봉구안은 고삐를 잡고 손으로 말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고 고요한 눈빛으로 말과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말했다.“참형을 시작하거라.”처형자가 말을 끌고 참수대로 다가갔다. 끈만
서왕 역시 자녕궁에 문안 올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황후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소신, 형수님을 뵈옵니다.”그는 봉구안을 황후마마라 칭하지 않고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으로 보아 서왕과 황제 사이는 꽤 돈독해 보였다.연상은 약간 넋을 잃고 서왕을 바라보았다.서왕은 준수한 용모에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미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성격 포악하고 쩍하면 사람을 죽이는 폭군보다는 서왕이 백배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아가씨와 혼례를 올린 사람이 전하였다면…’곧이어 연상은 그런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황궁은 군영과 달라 후궁들은 사사로이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와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봉구안이 자리를 뜨려는데 서왕이 관심 어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형수님, 어제 참수 현장을 감독하였다 들었는데 놀라진 않으셨지요?”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딱딱하게 대꾸했다.“괜찮습니다.”“어제 우연히 지나가다가 형수님께서 말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기마술이었어요. 사실 폐하는 말을 달래고 달릴 줄 아는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형수님도 이쪽으로 노력하시면 폐하의 총애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서왕은 마치 친구처럼 봉구안에게 친절히 황제의 취향까지 일깨워주었다.봉구안은 그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고맙습니다.”충고는 감사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기마술을 익힌 것은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기에.자녕궁.태후는 봉구안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쳤다.“무릇 황후라면 후궁의 여인과 시종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위로는 비빈이 있고 아래로는 궁녀와 태감이 있지. 그리고 황제에게 간언을 드려야 하는 의무도 있어.”“예를 들면 황상은 황귀비 한사람만 총애하고 다른 비빈들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넌 황후로서 각 세력의 균형을 위해 황상이 총애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느니라.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기고 욕조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하지만 그녀의 등 전체가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다.소욱의 냉담한 시선이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허리에 손바닥 자국이나 멍은 보이지 않았다.아주 깨끗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눈앞에 펼쳐졌다.하지만 소욱의 얼굴을 맴도는 한기는 흩어지지 않았다.봉구안은 손바닥에서 열이 나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는 내력으로 피멍을 흩어지게 했다.하지만 내력 소모가 심해서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폭군은 당연히 그렇게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곧이어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허리에 대고 힘을 주었다.“윽!”봉구안은 갑자기 느껴진 극심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뼈가 부러지는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꾹 참고 인내했다.뒤에서 사내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허리를 다친 것이냐?”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옵니까?”“허리가 너무 뻣뻣해서 말이야.”사내의 손은 마치 시험하듯이 그녀의 허리 주변을 지그시 누르며 더듬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애무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언제든 봉구안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봉구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지에서 먹을 것도 없이 의지 하나로 살아남은 그녀였다.참군하여 장군이 된 후 쇠갈고리가 어깨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눈물 한번 흘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오히려 상처를 치료해 주러 달려온 사모가 대성통곡했었다.그랬기에 폭군의 이 정도 시험을 그녀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단지 처음 남자의 손길을 받아서 그런지 간질간질하더니 갑자기 전율이 찾아오면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피부는 홍조를 띈 것처럼 분홍빛으로 반짝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지만 소욱은 그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는 금세 흥미가 식었다.황후는 겉
황제의 서재.상소문을 읽고 있던 소욱이 흠칫하더니 싸늘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황후가 금인장을 요구한다고?”말을 전하러 온 태감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예, 폐하. 마마께서 이 일로 대전 밖에서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금인장이 황귀비에게 있다는 건 온 황궁이 아는 사실이었다.황후가 대놓고 금인장을 요구한 건 모순을 크게 만들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태감은 황제가 격노하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조마조마해서 식은땀을 훔쳤다.소욱의 음침하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위험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거라. 얌전히 있지 않고 자꾸 소란을 부리면 그 자리를 폐해 버릴 수도 있다고.”“예, 폐하!”황실 서재 밖.봉구안은 여전희 희비를 알 수 없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태감의 전갈을 듣고 있었다.“마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금인장은 줄곧 황귀비 마마께서 관리하고 계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절대 그분의 손에서 인장을 회수하지 않을 겁니다.”“황귀비 마마께서 스스로 포기한다면 모를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태감의 말을 전해들은 연상은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금인장은 본디 황후가 관리하는 것이고 후궁 대권의 상징인 물건이었다.폭군은 법도를 어기면서 황후의 자리를 두고 넘보지 말라 협박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아마 소욱에게 있어 진짜 황후는 황귀비뿐일지도 모른다.‘이렇게까지 황귀비를 편애하다니! 마마가 무슨 수로 귀비를 꺾는단 말인가!’봉구안 역시 황제의 처사에 불만이었다.법도를 따르지 않으면 기강이 무너지는 건 군영이나 황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정말 우매하기 짝이 없는 군왕이로군!’“연상아, 이만 돌아가자꾸나.”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예, 마마.”연상은 이 걸음을 하는 게 아니었다고 속으로 한탄했다.영소전.황귀비는 기분이 좋은지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황후가 금인장을 대놓고 요구했다고? 멍청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정말 웃기는 여인이로구나
영소전, 황귀비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내전에서 태의가 통증을 완화하는 침술을 시전 중이었다.내전 밖 단나무 의자에 인상을 잔뜩 구긴 황제가 온갖 위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앉아 있었다.“영화궁에 보낸 태감은 아직이더냐!”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전갈을 나갔던 태감이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왔다.“폐하!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가진 약이 많지 않아 그냥 줄 수는 없다고 하옵니다…”소욱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황후한테 이리로 오라고 전하거라.”황제의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있는 상황이라 태감은 숨도 돌리지 못하고 바로 영화궁으로 달려갔다.그리고 잠시 후, 다시 영소전으로 돌아온 태감은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황후께서는… 이미 침소에 드셨다고 하옵니다.”쾅!소욱이 신경질적으로 상을 내려치자 여파로 상 위에 있던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졌다.그는 벌떡 일어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영화궁으로 간다.”한편, 황귀비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몸서리치며 황제를 찾았다.밖으로 나가려던 황제는 다시 침실로 달려가서 그녀를 달래주었다.“연아, 짐이 곧 다녀올 테니 조금만 참거라.”변덕스럽고 성격 포악하기로 소문난 젊은 황제는 유독 황귀비 앞에서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황귀비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신첩… 기다리고 있겠나이다.”잠시 후, 영화궁.오밤중에 황실 금위군이 궁을 포위했다. 기세를 보면 마치 황후가 큰 죄를 저질러서 잡으러 온 것만 같았다.연상은 문틈으로 바깥 동향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그녀는 다급히 침상 앞으로 달려가서 아직도 기를 운용 중인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금위군을 끌고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차라리 약을 그냥 내어주시는 게…”금인장 하나 바랐다가 목숨을 잃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었다.봉구안은 내력을 거두고 눈을 떴다.싸늘한 살기가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상은 저절로 오금이 저렸다.폭군도 무섭지만 지금은 자신의 주인인 황후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