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왕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황제를 말렸다.“폐하, 이건 황후께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하지만 소욱은 이미 그에게 등을 보이고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바람이 사내의 옷소매를 스치며 바람에 흩날리게 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어화원과 마장의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기억 속 말을 타고 달리던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많이 놀란 탓에 태후를 자녕궁으로 모신 뒤, 봉구안은 자신의 영화궁으로 돌아갔다.황궁 법도대로 황후는 뭇 비빈들의 문안 인사를 받아야 했다.물론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비빈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비빈들은 아프거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봉구안은 뭇 여자들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대충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돌아가라고 명했다.그리고 잠시 후, 황제의 어명이 도착했다.“황후마마, 폐하께서는 태후를 구하신 마마의 공로를 높게 사시어 이 옥여의를 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미쳐 날뛰던 말은 참수형에 처할 것이니 마마께서 직접 감독하라고 하셨습니다.”연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참수형을 황후에게 감독하라니, 이런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게다가 회임 중인 어미 말을 참수하는 것도 처음 있는 경우였다.연상이 폭군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하지만 봉구안은 전혀 놀라거나 속상한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응대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태감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정말 인내심 깊으신 분이시구나.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오찬 후, 어마장.마장 관리는 어미 말을 마구간 밖으로 끌고 나와 참수형에 처할 준비를 마쳤다.말을 사랑하는 이들은 분분히 봉구안에게 간청했다.“마마, 정말 명을 회수할 수 없는 것이옵니까? 이 녀석도 전장을 달리던 녀석이란 말입니다!”봉구안은 고삐를 잡고 손으로 말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고 고요한 눈빛으로 말과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말했다.“참형을 시작하거라.”처형자가 말을 끌고 참수대로 다가갔다. 끈만
서왕 역시 자녕궁에 문안 올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황후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소신, 형수님을 뵈옵니다.”그는 봉구안을 황후마마라 칭하지 않고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으로 보아 서왕과 황제 사이는 꽤 돈독해 보였다.연상은 약간 넋을 잃고 서왕을 바라보았다.서왕은 준수한 용모에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미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성격 포악하고 쩍하면 사람을 죽이는 폭군보다는 서왕이 백배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아가씨와 혼례를 올린 사람이 전하였다면…’곧이어 연상은 그런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황궁은 군영과 달라 후궁들은 사사로이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와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봉구안이 자리를 뜨려는데 서왕이 관심 어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형수님, 어제 참수 현장을 감독하였다 들었는데 놀라진 않으셨지요?”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딱딱하게 대꾸했다.“괜찮습니다.”“어제 우연히 지나가다가 형수님께서 말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기마술이었어요. 사실 폐하는 말을 달래고 달릴 줄 아는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형수님도 이쪽으로 노력하시면 폐하의 총애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서왕은 마치 친구처럼 봉구안에게 친절히 황제의 취향까지 일깨워주었다.봉구안은 그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고맙습니다.”충고는 감사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기마술을 익힌 것은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기에.자녕궁.태후는 봉구안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쳤다.“무릇 황후라면 후궁의 여인과 시종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위로는 비빈이 있고 아래로는 궁녀와 태감이 있지. 그리고 황제에게 간언을 드려야 하는 의무도 있어.”“예를 들면 황상은 황귀비 한사람만 총애하고 다른 비빈들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넌 황후로서 각 세력의 균형을 위해 황상이 총애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느니라.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기고 욕조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하지만 그녀의 등 전체가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다.소욱의 냉담한 시선이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허리에 손바닥 자국이나 멍은 보이지 않았다.아주 깨끗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눈앞에 펼쳐졌다.하지만 소욱의 얼굴을 맴도는 한기는 흩어지지 않았다.봉구안은 손바닥에서 열이 나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는 내력으로 피멍을 흩어지게 했다.하지만 내력 소모가 심해서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폭군은 당연히 그렇게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곧이어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허리에 대고 힘을 주었다.“윽!”봉구안은 갑자기 느껴진 극심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뼈가 부러지는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꾹 참고 인내했다.뒤에서 사내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허리를 다친 것이냐?”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옵니까?”“허리가 너무 뻣뻣해서 말이야.”사내의 손은 마치 시험하듯이 그녀의 허리 주변을 지그시 누르며 더듬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애무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언제든 봉구안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봉구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지에서 먹을 것도 없이 의지 하나로 살아남은 그녀였다.참군하여 장군이 된 후 쇠갈고리가 어깨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눈물 한번 흘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오히려 상처를 치료해 주러 달려온 사모가 대성통곡했었다.그랬기에 폭군의 이 정도 시험을 그녀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단지 처음 남자의 손길을 받아서 그런지 간질간질하더니 갑자기 전율이 찾아오면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피부는 홍조를 띈 것처럼 분홍빛으로 반짝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지만 소욱은 그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는 금세 흥미가 식었다.황후는 겉
황제의 서재.상소문을 읽고 있던 소욱이 흠칫하더니 싸늘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황후가 금인장을 요구한다고?”말을 전하러 온 태감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예, 폐하. 마마께서 이 일로 대전 밖에서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금인장이 황귀비에게 있다는 건 온 황궁이 아는 사실이었다.황후가 대놓고 금인장을 요구한 건 모순을 크게 만들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태감은 황제가 격노하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조마조마해서 식은땀을 훔쳤다.소욱의 음침하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위험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거라. 얌전히 있지 않고 자꾸 소란을 부리면 그 자리를 폐해 버릴 수도 있다고.”“예, 폐하!”황실 서재 밖.봉구안은 여전희 희비를 알 수 없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태감의 전갈을 듣고 있었다.“마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금인장은 줄곧 황귀비 마마께서 관리하고 계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절대 그분의 손에서 인장을 회수하지 않을 겁니다.”“황귀비 마마께서 스스로 포기한다면 모를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태감의 말을 전해들은 연상은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금인장은 본디 황후가 관리하는 것이고 후궁 대권의 상징인 물건이었다.폭군은 법도를 어기면서 황후의 자리를 두고 넘보지 말라 협박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아마 소욱에게 있어 진짜 황후는 황귀비뿐일지도 모른다.‘이렇게까지 황귀비를 편애하다니! 마마가 무슨 수로 귀비를 꺾는단 말인가!’봉구안 역시 황제의 처사에 불만이었다.법도를 따르지 않으면 기강이 무너지는 건 군영이나 황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정말 우매하기 짝이 없는 군왕이로군!’“연상아, 이만 돌아가자꾸나.”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예, 마마.”연상은 이 걸음을 하는 게 아니었다고 속으로 한탄했다.영소전.황귀비는 기분이 좋은지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황후가 금인장을 대놓고 요구했다고? 멍청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정말 웃기는 여인이로구나
영소전, 황귀비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내전에서 태의가 통증을 완화하는 침술을 시전 중이었다.내전 밖 단나무 의자에 인상을 잔뜩 구긴 황제가 온갖 위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앉아 있었다.“영화궁에 보낸 태감은 아직이더냐!”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전갈을 나갔던 태감이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왔다.“폐하!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가진 약이 많지 않아 그냥 줄 수는 없다고 하옵니다…”소욱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황후한테 이리로 오라고 전하거라.”황제의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있는 상황이라 태감은 숨도 돌리지 못하고 바로 영화궁으로 달려갔다.그리고 잠시 후, 다시 영소전으로 돌아온 태감은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황후께서는… 이미 침소에 드셨다고 하옵니다.”쾅!소욱이 신경질적으로 상을 내려치자 여파로 상 위에 있던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졌다.그는 벌떡 일어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영화궁으로 간다.”한편, 황귀비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몸서리치며 황제를 찾았다.밖으로 나가려던 황제는 다시 침실로 달려가서 그녀를 달래주었다.“연아, 짐이 곧 다녀올 테니 조금만 참거라.”변덕스럽고 성격 포악하기로 소문난 젊은 황제는 유독 황귀비 앞에서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황귀비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신첩… 기다리고 있겠나이다.”잠시 후, 영화궁.오밤중에 황실 금위군이 궁을 포위했다. 기세를 보면 마치 황후가 큰 죄를 저질러서 잡으러 온 것만 같았다.연상은 문틈으로 바깥 동향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그녀는 다급히 침상 앞으로 달려가서 아직도 기를 운용 중인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금위군을 끌고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차라리 약을 그냥 내어주시는 게…”금인장 하나 바랐다가 목숨을 잃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었다.봉구안은 내력을 거두고 눈을 떴다.싸늘한 살기가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상은 저절로 오금이 저렸다.폭군도 무섭지만 지금은 자신의 주인인 황후가 더
자녕궁.태후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내가 뻔히 보이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황후, 이제 금인장을 손에 넣었으니 후궁 업무를 처리하기에 훨씬 쉬워졌을 게야.”“비빈들의 밤시중을 안배하는 일지를 작성하고 후궁의 기강을 잡을 때가 되었지.”“신인들이면 몰라도 입궁한지 오래된 비빈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현비와 녕비 같이 오래된 비빈들이 황실에 실망하는 일이 없게 네가 균형을 잘 잡아줘야 해.”“황상이 총애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게 한다면 비빈들도 자연히 너를 따르고 존경할 거야. 그래야 너도 후궁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법이고…”봉구안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마마마.”“신첩, 친정에서 생활할 시기 어머니께서도 후궁이 평화로워야 폐하께서도 안심하고 정무에 몰두할 수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요.”태후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황후가 그리 말하니 나도 안심이 되는구나.”자녕궁을 나오자 연상이 굳은 얼굴로 봉구안을 일깨웠다.“마마, 태후마마는 폐하의 생모가 아닙니다. 과거 영비의 죽음에 태후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도 많이 돌았어요. 그래서 폐하와 태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해요.”“태후는 폐하께서 황귀비만 총애하시는 걸 알면서도 방치하다가 입궁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마마께 이런 큰 짐을 지우는 건 너무 뻔하지 않나요!”“녕비를 굳이 꼬집어 말한 것도 그래요. 녕비가 태후의 조카딸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조카딸을 위해 마마를 사지로 내몰다니. 폐하께서 애초에 마마의 말씀에 귀 기울일 분도 아니고. 그런 말을 무리하게 꺼냈다가 마마만 다치실 거예요.”그래도 황궁에서 태후는 인자한 웃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연상은 오늘 부로 태후에게 무한한 실망만 남았다.물론 봉구안이 태후의 속셈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솔직히 매일 자녕궁에 불려와서 가르침을 빙자한 잔소리를 듣는 것도 지치던 참이었다.태후가 대놓고 그녀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도 그녀를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다음 날,
태후는 소식을 전하러 온 궁인에게 다급히 물었다.“대체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냐? 싸움을 먼저 시작한 자가 누구냐?”궁인이 답했다.“몇몇 비빈 마마들이… 녕비마마께 불만을 품고 처음에는 말싸움으로 시작했던 것이… 나중에는 주먹질까지 하게 되면서… 녕비마마는 다른 비빈들 틈에 끼워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 하고 계십니다….”“뭐라고!”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태후는 조카딸이 맞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 다시 조바심이 났다.“황후는?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황후는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이냐!”영화궁.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녕비는 이런 치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입궁한 이래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하고 꽃 같은 어린 소녀에서 점점 나이만 먹어갔다.이제 한낱 후궁 비빈들마저 자신에게 태후를 등에 업고 분에 넘치는 자리에 올랐다고 손가락질하니 참을 수 없었다.누가 먼저 주먹질을 시작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갑자기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뭇 비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누군가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고 누군가는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심지어 그녀의 얼굴에 대고 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녕비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봉구안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군영에서 장령들끼리 비무하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여자들 싸움도 그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연상은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후궁 비빈들은 성품이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다고 하는데 지금 보니 원숭이 떼가 자꾸 떠올랐다.궁에만 오래 갇혀 있어서 드디어 미친 것인가?연상은 서책에 자주 나오는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야 정서가 안정된다는 말이 참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싸움에 가담한 비빈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비빈들은 불똥이 튈까 멀리 피해 있었다.녕비는 혼자서 여러 명을 감당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하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이때 누군가가 그녀를 힘껏 밀쳤고 그녀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뒤통수를 바닥에 찧기 일보직전에
좁은 지하실에서 적을 만나면 둘 중에 한 명은 죽기 마련이다.사내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봉구안은 야행복이 아닌 궁중예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다.만약 일격에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들통날 것이고 스스로 그날 밤 자객이 자신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폭군과는 달리 무고한 자를 죽이는 습관이 없었다.‘어차피 주인 명을 받고 움직이는 자야. 악하다고 볼 수 없어.’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너 누구냐? 왜 여기 있어?”순간 소욱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그는 황후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은 고작 두 번 만난 게 다였다.신혼밤에는 촛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이니 당연히 얼굴을 못봤을 것이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욕조에 앉아 그를 등지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그렇게 생각하니 황후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하지만 황후가 자신의 비밀을 발견한 이상, 살려둘 수는 없었다.“죽음을 자초하는군.”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봉구안은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상대를 관찰했다.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소욱은 그녀의 신분을 모르는 척, 공중에 몸을 날려 그녀에게 접근했다.봉구안은 무공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제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사내의 손이 그녀의 목을 비틀던 순간, 그녀는 예민한 관찰력으로 그의 목에 그어져 있는 은빛 띠를 발견했다. 그녀는 곧장 소매에서 은침을 꺼내 그의 뒷목 풍지혈에 꽂았다.순식간에 사내는 힘을 잃은 듯,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그는 침을 제거하려고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이때,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그걸 뽑으면 넌 죽는다!”소욱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봉구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의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