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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서왕 역시 자녕궁에 문안 올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황후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소신, 형수님을 뵈옵니다.”

그는 봉구안을 황후마마라 칭하지 않고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으로 보아 서왕과 황제 사이는 꽤 돈독해 보였다.

연상은 약간 넋을 잃고 서왕을 바라보았다.

서왕은 준수한 용모에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미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성격 포악하고 쩍하면 사람을 죽이는 폭군보다는 서왕이 백배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가씨와 혼례를 올린 사람이 전하였다면…’

곧이어 연상은 그런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

황궁은 군영과 달라 후궁들은 사사로이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와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봉구안이 자리를 뜨려는데 서왕이 관심 어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형수님, 어제 참수 현장을 감독하였다 들었는데 놀라진 않으셨지요?”

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딱딱하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어제 우연히 지나가다가 형수님께서 말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기마술이었어요. 사실 폐하는 말을 달래고 달릴 줄 아는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형수님도 이쪽으로 노력하시면 폐하의 총애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서왕은 마치 친구처럼 봉구안에게 친절히 황제의 취향까지 일깨워주었다.

봉구안은 그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충고는 감사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마술을 익힌 것은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자녕궁.

태후는 봉구안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쳤다.

“무릇 황후라면 후궁의 여인과 시종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위로는 비빈이 있고 아래로는 궁녀와 태감이 있지. 그리고 황제에게 간언을 드려야 하는 의무도 있어.”

“예를 들면 황상은 황귀비 한사람만 총애하고 다른 비빈들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넌 황후로서 각 세력의 균형을 위해 황상이 총애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느니라.”

“후궁을 얕보면 절대 아니 된다. 궁중 비빈들의 배후에는 조정의 각 세력들이 있어.”

봉구안은 심혈을 기울여 듣고 있는 척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궁한지 이틀 째,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오늘 밤, 그녀는 다시 영소전으로 가서 염탐해 보기로 했다.

그 시각 영소전.

수방에서 새로 만든 화려한 의복을 가져왔다.

시녀는 황귀비에게 아첨하듯 말했다.

“폐하께서는 정말 마마를 총애하시나 봅니다. 공물로 막 들어온 부광 비단을 전부 황귀비 마마께 하사하셨지요. 오늘 밤에 마마께서 이 옷을 입고 폐하의 앞에 나타나면 폐하께서는 분명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황귀비는 웃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의복에 수놓인 영란초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엇이더냐!”

“마마, 진정하시옵소서.”

“곤장 80대를 쳐서 궁에서 내쫓거라.”

황귀비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 뒤, 옷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닥에 내다버렸다.

황귀비의 측근 시종조차도 이건 너무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곤장 80대는 연약한 시녀에게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이날, 수방에서 무려 열셋이나 되는 수녀가 죽자 궁중의 인심이 흉흉해졌다. 하지만 황귀비의 횡포에 아무도 불만을 얘기하지는 못했다.

그날 밤, 황제는 여느 때처럼 영소전을 찾았고 침실에서는 간드러진 교성이 새벽까지 지속되었다.

“폐하, 의복에 수놓은 자수가 너무 투박하여 신첩이 수방에 징계를 좀 내렸습니다. 어찌 그런 옷을 입고 외출할 수 있겠나요. 신첩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비는 잘못하지 않았어. 죽일만했으니 죽인 거지.”

그러던 그가 갑자기 시선을 들고 지붕을 살피더니 옷섶에서 표창을 꺼내 지붕으로 던졌다.

표창이 기와를 관통하자 대들보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시위들은 그제야 영소전에 자객이 혼입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검을 빼들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자객을 포위했지만 자객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자객은 푸른 연기가 되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시위들은 처음 보는 기괴한 장면에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봤다.

봉구안의 경공은 그녀의 사부조차 극찬할 정도였다.

그녀는 삼엄한 시위들을 따돌리고 곳곳에 숨겨진 함정을 피하여 영소전에 잠입했지만 끝내 폭군의 예민한 관찰력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존재를 간파할 수 있었다는 건 소욱이 강력한 내력을 지녔다는 것을 설명했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조금만 더 가면 영소전을 벗어날 수 있던 그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은 장발을 흩날리고 검은색 장포를 살짝 풀어헤친 사내는 온몸으로 강압적인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내는 아무런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장풍으로 그녀를 공격했다.

봉구안은 상대가 아주 강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그녀도 전혀 뒤처지지 않고 교묘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공중제비를 하여 물고기가 수면에 떠오르듯이 몸을 솟구쳐서 사내의 등 뒤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옷섶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소욱의 눈매가 무섭게 빛났다.

그 역시도 자객의 실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속도만 따지면 그를 능가할 실력이었다.

‘그렇다고 허점이 없진 않지.’

그는 몸을 기울여 단도를 피한 뒤에 장풍으로 그녀의 허리를 맞추었다.

봉구안은 앞으로 비틀거리다가 재빨리 중심을 잡고 뒤돌아섰다.

움직임이 너무 커서 묶고 있던 머리가 허공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흩날렸다.

소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인?’

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녀는 오래 전에 허리에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그걸 간파하고 정확히 허점을 노릴 줄은 몰랐다.

‘폭군 신변의 그림자 호위인가?’

시위들이 사면팔방에서 모여들었다.

봉구안은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연막탄을 사용해 압도적인 속도로 포위를 꿰뚫고 도망쳤다.

하지만 눈썰미가 빠른 소욱은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화궁.

봉구안이 궁으로 돌아오자 연상은 즉시 그녀를 도와 옷을 갈아입고 야행복을 안 보이는 곳으로 숨겼다.

“마마, 괜찮으시죠?”

“괜찮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봉구안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사내의 장풍을 맞으면서 부상으로 인한 고질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녀는 욕실로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밖으로 나온 연상은 나오자마자 문앞에 서 있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제왕의 상징인 용포를 입고 옥관으로 머리를 올린 사내는 한걸음 한걸음 위엄을 풍기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를 처음 알현하는 연상은 놀라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폭군이 이런 잘생긴 외모를 가졌을 줄이야! 하지만 너무 무서워! 분위기는 염라대왕 같아!’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

소욱은 곧장 내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조금 전 사라진 자객이 영화궁 근처에서 사라진 것을 똑똑히 보았다.

허리를 다쳤으니 확인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봉구안이 눈을 감고 뜨거운 열기를 즐기고 있을 때, 사내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사내를 등진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상황이 이래서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점 양해하여 주시옵소서.”

소욱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 시간에 목욕?’

“황후, 일어나 보거라.”

봉구안은 물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날 의심하는 건가.’

“황후, 내 말이 안 들리느냐!”

남자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봉구안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욕조에 앉아 있었다.

등 뒤에서 사내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날카로운 화살처럼 시위만 당기면 바로 그녀를 관통할 것 같았다.

지금 일어선다면 허리에 난 손바닥 자국 때문에 신분이 바로 들통날 것이다.

소욱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 각도에서 보니 황후와 그 여자객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그녀를 물속에서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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