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대 위.소욱의 맞상대는 운산파 제자였다.그 눈빛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무언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외쳤다.“전진파의 그 고수야! 어제도 혼자서 전진파 승리를 이끌었다더라!”“맞아, 나도 싸워봤어! 가면만 썼을 뿐, 체격이 어마어마했지. 여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은사성이 독을 써서 겨우 이긴 상대야.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도 계속 이겼을걸!”하지만 오늘 소욱에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눈 한 번 깜빡할 틈도 없이, 상대의 검을 튕겨낸 소욱은 곧장 배를 노려 발을 찼다.“푸억!”상대는 땅에 구르며 쓰러졌다.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내가 졌단 말인가…”운산파 부장문이 벌떡 일어나,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무슨 짓을 한 거지… 단 한 합 만에 끝났다고?’그 이후로도 경기는 속속 이어졌다.하지만… 누가 올라와도, 결과는 같았다.소욱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했고, 폭풍처럼 매서웠다.불과 반 시진 만에 열 판을 내리 이겼다.심지어 피곤한 기색 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부장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이대로라면… 운산파가 패배하고 말 거야!’더는 전진파가 이기게 둘 수 없었다.저 여인을 지금 당장 끌어내려야 했다.운산파 부장문은 부랴부랴 제자들을 내세웠다.그러나 출전하는 자마다, 줄줄이 무대 위에서 나가떨어졌다.“전진파, 승!”심판의 외침이 또다시 울려 퍼지자, 운산파 측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말이 되나… 저 운산파 제자들이 당해내질 못하는군…”“벌써 열한 판째 연속으로 승리하고 있어. 전진파가 이 정도였어?”“차선아가 돌아온 이유, 이제야 알겠네. 저 고수 하나 믿고 온 거야.”“지금쯤 운산파 부장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겠지.”무대 위의 소욱은 검이면 검, 권이면 권. 허술한 틈 하나 없었다.이미 운산파 제자들의 버릇과 약점을 완전히 꿰뚫은 듯했다.이제 싸움은 더 이상 ‘승부’가 중요치 않았다.이 싸움은 소욱의
“운산파, 풍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소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살한 기운을 느꼈다. 풍고는 술에 취한 듯 흐릿한 눈으로 소욱을 노려보았다.“여자군…”그 음흉한 말투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풍고의 악명은 이미 다른 문파에도 퍼져 있었다. 수법이 음험하고 독해, 전진파의 제자조차도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하물며 이번은 그의 첫 시합이기도 했기에 체력 면에서도 절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벽력당 측 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이건 너무하잖소! 애초에 싸움이 되겠습니까!”운산파 부장문은 그저 태연하게 웃었다.“풍고도 우리 운산파의 정식 제자입니다. 어찌 출전하지 못하겠습니까?”벽력당 인사가 다시 차선아를 부추겼다.“차 부장문, 이걸 그냥 넘기시려는 것입니까? 운산파, 이건 명백한 갑질이 아닙니까?”다른 문파 사람들도 거들었다.“풍고가 손을 쓰면 죽든 다치든 뻔한 일입니다! 차 부장문, 정말 제자를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막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술 대회 하나로 또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풍고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소욱을 노려보았다.“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마음에 듭니다.”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겁먹고 물러섰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소욱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수차례 친정했고, 봉구안과 함께 강호를 누비며 구중탑의 흉인, 천룡회 교주, 지하 투기장의 악인들까지 직접 상대해왔다.그런 자들에 비하면 풍고는 그야말로 하찮은 졸개에 불과했다.시합대 아래서 차선아가 걱정스레 소욱을 바라보다가 봉구안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출지 묻는 신호였다.봉구안은 소욱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차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전진파는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운산파 부장문이 비웃듯 중얼였다.“정말, 승부에 제자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군.”시합이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운산파, 풍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소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살한 기운을 느꼈다. 풍고는 술에 취한 듯 흐릿한 눈으로 소욱을 노려보았다.“여자군…”그 음흉한 말투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풍고의 악명은 이미 다른 문파에도 퍼져 있었다. 수법이 음험하고 독해, 전진파의 제자조차도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하물며 이번은 그의 첫 시합이기도 했기에 체력 면에서도 절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벽력당 측 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이건 너무하잖소! 애초에 싸움이 되겠습니까!”운산파 부장문은 그저 태연하게 웃었다.“풍고도 우리 운산파의 정식 제자입니다. 어찌 출전하지 못하겠습니까?”벽력당 인사가 다시 차선아를 부추겼다.“차 부장문, 이걸 그냥 넘기시려는 것입니까? 운산파, 이건 명백한 갑질이 아닙니까?”다른 문파 사람들도 거들었다.“풍고가 손을 쓰면 죽든 다치든 뻔한 일입니다! 차 부장문, 정말 제자를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막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술 대회 하나로 또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풍고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소욱을 노려보았다.“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마음에 듭니다.”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겁먹고 물러섰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소욱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수차례 친정했고, 봉구안과 함께 강호를 누비며 구중탑의 흉인, 천룡회 교주, 지하 투기장의 악인들까지 직접 상대해왔다.그런 자들에 비하면 풍고는 그야말로 하찮은 졸개에 불과했다.시합대 아래서 차선아가 걱정스레 소욱을 바라보다가 봉구안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출지 묻는 신호였다.봉구안은 소욱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차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전진파는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운산파 부장문이 비웃듯 중얼였다.“정말, 승부에 제자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군.”시합이
비무대 위.소욱의 맞상대는 운산파 제자였다.그 눈빛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무언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외쳤다.“전진파의 그 고수야! 어제도 혼자서 전진파 승리를 이끌었다더라!”“맞아, 나도 싸워봤어! 가면만 썼을 뿐, 체격이 어마어마했지. 여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은사성이 독을 써서 겨우 이긴 상대야.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도 계속 이겼을걸!”하지만 오늘 소욱에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눈 한 번 깜빡할 틈도 없이, 상대의 검을 튕겨낸 소욱은 곧장 배를 노려 발을 찼다.“푸억!”상대는 땅에 구르며 쓰러졌다.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내가 졌단 말인가…”운산파 부장문이 벌떡 일어나,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무슨 짓을 한 거지… 단 한 합 만에 끝났다고?’그 이후로도 경기는 속속 이어졌다.하지만… 누가 올라와도, 결과는 같았다.소욱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했고, 폭풍처럼 매서웠다.불과 반 시진 만에 열 판을 내리 이겼다.심지어 피곤한 기색 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부장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이대로라면… 운산파가 패배하고 말 거야!’더는 전진파가 이기게 둘 수 없었다.저 여인을 지금 당장 끌어내려야 했다.운산파 부장문은 부랴부랴 제자들을 내세웠다.그러나 출전하는 자마다, 줄줄이 무대 위에서 나가떨어졌다.“전진파, 승!”심판의 외침이 또다시 울려 퍼지자, 운산파 측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말이 되나… 저 운산파 제자들이 당해내질 못하는군…”“벌써 열한 판째 연속으로 승리하고 있어. 전진파가 이 정도였어?”“차선아가 돌아온 이유, 이제야 알겠네. 저 고수 하나 믿고 온 거야.”“지금쯤 운산파 부장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겠지.”무대 위의 소욱은 검이면 검, 권이면 권. 허술한 틈 하나 없었다.이미 운산파 제자들의 버릇과 약점을 완전히 꿰뚫은 듯했다.이제 싸움은 더 이상 ‘승부’가 중요치 않았다.이 싸움은 소욱의
서여국에서 도착한 편지를 받아든 봉구안은 혹여 장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먼저 걱정이 앞섰다.서둘러 봉투를 뜯고 펼쳐 보니, 편지엔 어머니 봉 부인의 안부가 담겨 있었다.봉장미에 따르면, 봉 부인은 현재 병환을 앓고 있지만 크게 위중한 상태는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다만 현재 봉 부인은 남제 땅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는 것이었다.봉구안에게 이 일은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억지로 머물게 할 이유도 없었다.봉 부인의 뜻이 정해졌다면, 곧장 사람을 보내 모셔오면 그만이었다.그녀는 곧장 붓을 들어 답장을 써내려갔다.어머니의 뜻을 존중하고, 직접 맞이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편지를 막 봉했다 싶을 무렵… 방 안에서 소욱이 갈아입은 옷차림으로 나왔다.봉구안이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순간적으로 시선이 멈췄다.오늘 그가 입은 옷은 색감이 수수했지만, 오히려 그런 담백함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긴 머리는 아직 묶지 않아 어깨 너머로 흘렀고, 뒷모습만 보면 전진파 제자라 해도 믿을 만했다.마치 세속을 벗어난 신선 같다고 해야 할까.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얼굴이 보이는 순간, 봉구안은 애써 눈길을 거뒀다.그만 보면 좋겠는데, 이상하게도 더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운산파.비무대회는 예정대로 이어지고 있었다.운산파 장문 구학이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된 채, 그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부장문이 대회를 관장하게 되었다고만 알려졌다.오전 내내 각 문파가 격돌했지만, 가장 큰 수확을 거둔 건 운산파였다.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우승에 한 발 더 가까워졌고, 비록 은사성이 사망했지만 그 자리를 채울 인재가 운산파엔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 사이, 벽력당은 가장 먼저 전멸한 상황이었다. 오직 신검종만이 한 번 운산파를 꺾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운산파가 이번에도 무림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 순간, 전진파가 돌아왔다.산문이 열리자,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는 전진파 제자들이 줄지
“폐하, 조금 지칩니다.”봉구안이 조용히, 그러나 깊은 피로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소욱은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늘 강인하던 그녀가 이토록 나약하고 아득한 얼굴이라니.그는 이내 다가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봉구안은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움켜쥐었다.“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 저를 좋아하라고도, 대신 죽어 달라고도 한 적 없습니다.”“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소욱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말했다.“그것이 바로 인연이 아니더냐.”“네가 선한 뜻으로 씨를 뿌렸기에, 그들이 너를 따르는 것이다.”“그리고 네가 살아 있다면, 더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이내,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눈빛을 바로 세웠다.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나섰다.가던 길을 멈춘 차선아를 향해 그녀가 소리쳤다.“끝은 내야하지 않겠느냐.”“전진파는 두 번만 더 이기면 된다, 얼마 남지 않았다.”차선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두 사람의 머릿결이 날리고, 봉구안의 음성이 그 틈을 뚫고 나왔다.“많은 이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서는 게 올바르다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판단이 옳지만은 않았던 것 같구나.”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네게… 말 못한 일을 하나 알려줄까 한다.”그다음, 봉구안은 약쟁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차근히 풀어냈다.차선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운산파가 그런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니요…!”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차선아에게 맡겼다.“약쟁이는 나라를 좀먹는 독이다.”“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어. 더는 미룰 수 없다.”“전진파가 물러설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선택도 있지 않겠느냐?”차선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나섰다.그 눈빛은 한겨울 설산처럼 차갑고 단단했다.“저희가 걷는 길은 정도입니다.”“황후마마. 이토록 중대한 일이라면… 누구도 물러서선 아니 되지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