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서왕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황제를 말렸다.“폐하, 이건 황후께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하지만 소욱은 이미 그에게 등을 보이고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바람이 사내의 옷소매를 스치며 바람에 흩날리게 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어화원과 마장의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기억 속 말을 타고 달리던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많이 놀란 탓에 태후를 자녕궁으로 모신 뒤, 봉구안은 자신의 영화궁으로 돌아갔다.황궁 법도대로 황후는 뭇 비빈들의 문안 인사를 받아야 했다.물론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비빈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비빈들은 아프거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봉구안은 뭇 여자들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대충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돌아가라고 명했다.그리고 잠시 후, 황제의 어명이 도착했다.“황후마마, 폐하께서는 태후를 구하신 마마의 공로를 높게 사시어 이 옥여의를 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미쳐 날뛰던 말은 참수형에 처할 것이니 마마께서 직접 감독하라고 하셨습니다.”연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참수형을 황후에게 감독하라니, 이런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게다가 회임 중인 어미 말을 참수하는 것도 처음 있는 경우였다.연상이 폭군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하지만 봉구안은 전혀 놀라거나 속상한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응대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태감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정말 인내심 깊으신 분이시구나.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오찬 후, 어마장.마장 관리는 어미 말을 마구간 밖으로 끌고 나와 참수형에 처할 준비를 마쳤다.말을 사랑하는 이들은 분분히 봉구안에게 간청했다.“마마, 정말 명을 회수할 수 없는 것이옵니까? 이 녀석도 전장을 달리던 녀석이란 말입니다!”봉구안은 고삐를 잡고 손으로 말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고 고요한 눈빛으로 말과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말했다.“참형을 시작하거라.”처형자가 말을 끌고 참수대로 다가갔다. 끈만
서왕 역시 자녕궁에 문안 올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황후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소신, 형수님을 뵈옵니다.”그는 봉구안을 황후마마라 칭하지 않고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으로 보아 서왕과 황제 사이는 꽤 돈독해 보였다.연상은 약간 넋을 잃고 서왕을 바라보았다.서왕은 준수한 용모에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미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성격 포악하고 쩍하면 사람을 죽이는 폭군보다는 서왕이 백배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아가씨와 혼례를 올린 사람이 전하였다면…’곧이어 연상은 그런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황궁은 군영과 달라 후궁들은 사사로이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와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봉구안이 자리를 뜨려는데 서왕이 관심 어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형수님, 어제 참수 현장을 감독하였다 들었는데 놀라진 않으셨지요?”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딱딱하게 대꾸했다.“괜찮습니다.”“어제 우연히 지나가다가 형수님께서 말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기마술이었어요. 사실 폐하는 말을 달래고 달릴 줄 아는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형수님도 이쪽으로 노력하시면 폐하의 총애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서왕은 마치 친구처럼 봉구안에게 친절히 황제의 취향까지 일깨워주었다.봉구안은 그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고맙습니다.”충고는 감사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기마술을 익힌 것은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기에.자녕궁.태후는 봉구안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쳤다.“무릇 황후라면 후궁의 여인과 시종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위로는 비빈이 있고 아래로는 궁녀와 태감이 있지. 그리고 황제에게 간언을 드려야 하는 의무도 있어.”“예를 들면 황상은 황귀비 한사람만 총애하고 다른 비빈들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넌 황후로서 각 세력의 균형을 위해 황상이 총애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느니라.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기고 욕조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하지만 그녀의 등 전체가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다.소욱의 냉담한 시선이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허리에 손바닥 자국이나 멍은 보이지 않았다.아주 깨끗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눈앞에 펼쳐졌다.하지만 소욱의 얼굴을 맴도는 한기는 흩어지지 않았다.봉구안은 손바닥에서 열이 나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는 내력으로 피멍을 흩어지게 했다.하지만 내력 소모가 심해서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폭군은 당연히 그렇게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곧이어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허리에 대고 힘을 주었다.“윽!”봉구안은 갑자기 느껴진 극심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뼈가 부러지는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꾹 참고 인내했다.뒤에서 사내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허리를 다친 것이냐?”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옵니까?”“허리가 너무 뻣뻣해서 말이야.”사내의 손은 마치 시험하듯이 그녀의 허리 주변을 지그시 누르며 더듬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애무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언제든 봉구안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봉구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지에서 먹을 것도 없이 의지 하나로 살아남은 그녀였다.참군하여 장군이 된 후 쇠갈고리가 어깨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눈물 한번 흘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오히려 상처를 치료해 주러 달려온 사모가 대성통곡했었다.그랬기에 폭군의 이 정도 시험을 그녀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단지 처음 남자의 손길을 받아서 그런지 간질간질하더니 갑자기 전율이 찾아오면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피부는 홍조를 띈 것처럼 분홍빛으로 반짝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지만 소욱은 그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는 금세 흥미가 식었다.황후는 겉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
이 순간, 완부옥은 혈기가 잔뜩 끓어올랐다.그녀는 소환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평소에는 입으로만 희롱하며 진정으로 강제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이번에 그녀는 은혜를 빌미 삼아 소환을 곁에 붙잡아두려 했는데, 뜻밖에도 소환이 정말로 응한 것이다.“너…”완부옥은 침을 삼키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그러나 봉구안이 허리띠를 풀고 옷깃을 여미자, 그녀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가슴싸개?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세상에, 여인이었던 것이다!완부옥의 얼굴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아… 아니, 어찌…”봉구안은 가짜 목젖을 떼어내고 태연히 인정했다.“맞아. 사실 난 여인이었어.”완부옥은 몸이 굳어져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여인… 네가 여인이라니!”그녀의 손은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봉구안은 다시 옷을 정돈하고 진지하게 강호의 예를 올려 사죄했다.그녀가 진실을 고백한 것은 완부옥의 요구 때문만이 아니었다.완부옥의 진심 어린 집착을 깨닫고 더 이상 그녀를 속이며 시간을 허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여러 번 자신이 완부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완부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제야 그녀가 완전히 체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너와 나는 오랜 벗이었지. 너에 대한 나의 진심은 결코 거짓이 아니야.”“그러나 짐짓 너를 기만하여 오해를 안긴 것은 내 잘못이 맞아.”“오늘 내가 여인임을 밝힌 것은 용서를 바라서가 아니야. 단지, 네게 무의를 빌리기 위함이지.”“일이 끝난 뒤 마땅히 매를 맞을 테니, 지금 당장은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봉구안은 완부옥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완부옥이 이 기만을 용서할 리는 없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완부옥은 뻣뻣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리고 가짜 목젖을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네가 여인이라니, 정말…”갑자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잘됐구나!”“??!!”완부옥의 웃음소리는 매우 기괴했다.그 소리에 봉구안
소욱의 팔 상처는 깊지 않아 살갗만 약간 벗겨진 정도였다.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가 진짜 아파하는지, 아니면 연기인지 봉구안은 금세 분간할 수 있었다.지금은 전자였다.봉구안은 곧바로 군의관을 불러들였다.그러나 소욱은 여전히 강한 척하며 말했다.“짐은 아무렇지도 않다…”군의관은 그의 맥을 짚고, 상처를 다시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을 찾지 못했다.봉구안은 군의관을 움켜쥐고 단호히 물었다.“그 화살은! 제대로 보았느냐?”군의관은 잠시 얼어붙었다.“화, 화살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사옵니다…”봉구안은 그를 놓아주고 소욱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소욱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쥐고 있었다.이마와 목덜미의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역력했다.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숨기려 했지만, 제왕의 위엄이 손상될까 걱정되는 기색이 역력했다.군의관이 더 있어 봐야 무용하다고 판단한 봉구안은 그를 물러가게 했다.군의관이 나가자, 소욱은 고개를 들어올렸다.그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려 있었다.“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그가 이제 믿을 수 있는 이는 봉구안과 진한길뿐이었다.봉구안도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그는 분명 중독되지 않았는데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러던 중 봉구안은 문득 남강의 여자들이 죽어갔던 일이 떠올랐다.그녀는 소욱을 향해 불쑥 물었다.“전하, 저를… 원하십니까?”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봉구안의 눈빛은 엄숙하고 단호했다.그 어떠한 정욕적 뉘앙스도 없었다.“제가 의심하기로, 전하께서는 남강의 여자들처럼 진단이 어려운 독에 중독된 것이옵니다.”소욱은 몸속에서 밀려드는 격통을 참고 있었다.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듯 목이 타들어 갔다.“화살에 독이… 있었던 것이로구나…”소욱이 힘겹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하옵니다.”그녀는 바로 진한길을 불러들이고 당부했다.“폐하를 잘 지키시오!”진한길은 사태를 파악하지
봉구안은 소욱을 뒤로한 채 검은 옷을 입은 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죽음의 계곡 바깥까지 나아갔다.그녀는 마침내 그와 맞닥뜨렸고, 힘을 써서 그의 넓은 검은 옷을 잡아당겨 벗겼다.그러나 그는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었다.검은 옷을 입은 자는 몇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다시금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중, 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점을 발견하였다.‘그 자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바로 그날 천수지독의 주인임이 분명했다!봉구안의 눈에 살기가 짙게 피어올랐고, 그녀의 공격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그러나 그 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대체 너를 황후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맹 소장군이라 불러야 할까?”“단회욱이 자신의 목숨으로 너의 운명을 바꾸지 않았다면, 오늘 밤 너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익숙한 이름을 들은 순간, 봉구안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그가 단회욱의 이름을 아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정체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 틈을 타 검은 옷을 입은 자는 뒤로 물러나더니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냉소를 지었다.“보아하니, 너는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봉구안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어서 말하거라…!”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쳐왔다.그림자는 그녀를 껴안고 빙글 돌았고, 봉구안이 뒤를 돌아보니, 소욱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쳤다.“걱정했다.”소욱은 차갑게 말했다.그제야 봉구안은 검은 옷을 입은 자 외에 또 다른 인물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그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훨씬 젊어 보였다.그는 나뭇가지 위에 가볍게 몸을 얹고,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달빛 아래 그의 흰옷은 눈부시게 빛났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마치 흥미로운 연극을 보고 있는 듯했다.그가 두 번째 화살을 쏘려 하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그를 단호하게 꾸짖었다.“물러가거라!”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어둠
남방, 군영 안.소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서를 봉구안에게 건넸다.“연나라 황제의 글씨가 제법 괜찮구나.”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강서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길 원했다.그러나 봉구안은 문서를 흘긋 보고는 담담히 물었다.“폐하, 전쟁이 끝났사옵니다. 언제 귀경할 계획이시옵니까?”소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그와 황후 간의 혼인 계약은 1년으로 정해져 있었다.이번 전쟁으로 인해 이미 몇 달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황후가 그의 곁을 지켜준 덕분에 그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연나라 황제의 강서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연태자의 목숨까지 요구했을 터였다!황성.객잔에서 진왕의 호위가이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나으리… 북연이 항복하였습니다!”이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어야 했다.그러나 진왕에게 있어 이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이렇게 끝난단 말인가…”끝난 것은 단지 전쟁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황제에 대한 꿈도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진왕은 이를 갈며 후회했다.“그 내기 따위에 집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문득 깨달은 듯, 그는 호위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내가 어리석었구나. 양식을 탈취하려고만 하였거늘… 차라리 황궁을 바로 공격했어야 했다!”호위는 그의 점점 험악해지는 표정을 보고 불안에 떨었다.“나으리, 폐하께서 곧 돌아오십니다. 차라리 서주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진왕은 그제야 표정이 풀리더니, 곧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야겠다. 소욱이 곧 돌아오겠구나. 내가 무엇을 하려 해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그는 차마 황제를 시해할 수도 없었다.황후가 숨긴 양식조차 찾아내지 못한 무능한 자들이 어찌 황제를 시해할 수 있으랴!모두 쓸모없었다!진왕은 즉각 명령을 내렸다.“짐을 챙겨라. 서주성으로 돌아간다!”호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그의 주군이 충동적이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만약 연태자 같은 군주
양나라와 비교하자면, 북연의 병사들은 훨씬 용맹하였다.이번 전투는 무려 보름 이상 이어졌다.연나라 태자는 ‘화룡’이 파괴된 이후로 마음이 흐트러져 전쟁을 지휘하는 데 있어 전혀 체계가 없었다.그는 다른 이의 조언조차 용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휘두르는 칼날의 쾌감에만 몰두하였다.겉보기엔 북연군이 진지를 굳건히 지키는 듯하였으나, 실상은 매일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이에 반해 남제는 대체로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전투가 날이 갈수록 길어지자, 소욱조차도 눈에 띄게 초조함을 보였다.북연군은 끝까지 저항하며, 이번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한편, 남제 황궁에서는 진왕이 또 다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그는 여러 사람을 동원하였으나, 황후의 밀실 통로를 끝내 찾지 못했다.남방으로 꾸준히 양식이 운반되는 것을 보고 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찾아라! 땅이라도 뒤엎어서 남은 양식을 전부 찾아내라!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들이 정말 땅굴로 운반한 것이란 말인가!!”진왕은 히스테릭하게 분노하며 외쳤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는 점점 초라해지고 있었다.…10월 말.북연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그 와중에도 연나라 태자는 미쳐 날뛰며, 병사들에게 진천뢰를 몸에 묶고 남제군을 향해 자폭하라 명령하였다.그 순간,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칙서와 함께 황궁의 고수들이 나타나, 연나라 태자를 강제로 결박하여 마차에 던져 넣었다.“태자 전하, 무례를 용서하소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진천뢰를 몸에 묶은 병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로 칙서를 낭독하는 환관을 바라보았다.한 신참 병사는 두려움에 떨며 흐느꼈다.“흑흑… 드디어 폐하께서 깨어나셨구나. 이 칙서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야…”그가 처음 전장에 나섰는데, 이런 광기의 군주를 만나다니, 누가 이런 상황을 예상했으랴.연나라 태자는 마차에 실린 후에도 끊임없이 외쳤다.“이 몸을 당장 풀거
원래 멀쩡하던 ‘화룡’이 절반 이상 망가져 버렸다.가장 약한 지지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비록 포신은 남아 있지만, 이미 쓸모가 없었다.연나라 태자의 비장한 병기, 그 무기가 이렇게 허망하게 파괴되고 말았다.연나라 태자는 분노에 휩싸였고, 그의 곁에 있던 호위무사에게 명령을 내렸다.“저 여인을 쫓아라!”봉구안은 경공이 뛰어나 빠르게 달렸으나, 강한 자 위에 더 강한 자가 있다더니, 그 호위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국경을 넘으려는 찰나, 살기 가득한 호위가 그녀에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그때였다.쉭!멀리서 날아온 화살 한 발이 그 호위의 이마를 정통으로 꿰뚫었다.이 화살은 예리하고 정확하여, 호위는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즉사하고 말았다.봉구안은 뒤를 돌아 시체를 한 번 보고, 곧이어 고개를 돌려 활을 내린 인물을 보았다.그는 죽음의 계곡 고지에서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바로 소욱이었다.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에 든 화살을 내려놓았다.…남대영.황제와 황후의 장막 밖에는 오백과 진한길이 각각 경비를 서고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며 끝내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장막 안에서는, 봉구안이 서둘러 머릿속의 설계도를 꺼내 종이에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말할 겨를도 없이 설계도를 베끼는 데 급급하였다.소욱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유황 냄새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그의 걱정은 단 하나였다.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 것.그녀가 그리는 것은 바로 ‘화룡’의 병기 설계도였기 때문이다.한 시진이 지나자, 봉구안은 간신히 완성된 설계도를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소욱이 조심스레 물었다.“다 그린 것이냐?”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모자랍니다.”그녀는 특히 지지대와 포신을 연결하는 부분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당시 연나라 태자가 갑작스레 나타나는 바람에 끝까지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다.안타깝게도, ‘화룡’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