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서왕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황제를 말렸다.“폐하, 이건 황후께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하지만 소욱은 이미 그에게 등을 보이고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바람이 사내의 옷소매를 스치며 바람에 흩날리게 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어화원과 마장의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기억 속 말을 타고 달리던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많이 놀란 탓에 태후를 자녕궁으로 모신 뒤, 봉구안은 자신의 영화궁으로 돌아갔다.황궁 법도대로 황후는 뭇 비빈들의 문안 인사를 받아야 했다.물론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비빈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비빈들은 아프거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봉구안은 뭇 여자들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대충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돌아가라고 명했다.그리고 잠시 후, 황제의 어명이 도착했다.“황후마마, 폐하께서는 태후를 구하신 마마의 공로를 높게 사시어 이 옥여의를 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미쳐 날뛰던 말은 참수형에 처할 것이니 마마께서 직접 감독하라고 하셨습니다.”연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참수형을 황후에게 감독하라니, 이런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게다가 회임 중인 어미 말을 참수하는 것도 처음 있는 경우였다.연상이 폭군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하지만 봉구안은 전혀 놀라거나 속상한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응대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태감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정말 인내심 깊으신 분이시구나.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오찬 후, 어마장.마장 관리는 어미 말을 마구간 밖으로 끌고 나와 참수형에 처할 준비를 마쳤다.말을 사랑하는 이들은 분분히 봉구안에게 간청했다.“마마, 정말 명을 회수할 수 없는 것이옵니까? 이 녀석도 전장을 달리던 녀석이란 말입니다!”봉구안은 고삐를 잡고 손으로 말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고 고요한 눈빛으로 말과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말했다.“참형을 시작하거라.”처형자가 말을 끌고 참수대로 다가갔다. 끈만
서왕 역시 자녕궁에 문안 올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황후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소신, 형수님을 뵈옵니다.”그는 봉구안을 황후마마라 칭하지 않고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으로 보아 서왕과 황제 사이는 꽤 돈독해 보였다.연상은 약간 넋을 잃고 서왕을 바라보았다.서왕은 준수한 용모에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미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성격 포악하고 쩍하면 사람을 죽이는 폭군보다는 서왕이 백배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아가씨와 혼례를 올린 사람이 전하였다면…’곧이어 연상은 그런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황궁은 군영과 달라 후궁들은 사사로이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와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봉구안이 자리를 뜨려는데 서왕이 관심 어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형수님, 어제 참수 현장을 감독하였다 들었는데 놀라진 않으셨지요?”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딱딱하게 대꾸했다.“괜찮습니다.”“어제 우연히 지나가다가 형수님께서 말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기마술이었어요. 사실 폐하는 말을 달래고 달릴 줄 아는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형수님도 이쪽으로 노력하시면 폐하의 총애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서왕은 마치 친구처럼 봉구안에게 친절히 황제의 취향까지 일깨워주었다.봉구안은 그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고맙습니다.”충고는 감사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기마술을 익힌 것은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기에.자녕궁.태후는 봉구안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쳤다.“무릇 황후라면 후궁의 여인과 시종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위로는 비빈이 있고 아래로는 궁녀와 태감이 있지. 그리고 황제에게 간언을 드려야 하는 의무도 있어.”“예를 들면 황상은 황귀비 한사람만 총애하고 다른 비빈들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넌 황후로서 각 세력의 균형을 위해 황상이 총애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느니라.
도끼는 역량형 무기이지만 도끼날의 곡선은 도끼에 실리는 많은 힘을 손실하게 한다. 날카로운 창은 쉽게 도끼의 방어를 뚫을 수 있다.그래서 창과 도끼가 상극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돌고 있었다.병기에 정통한 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단춘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남제에서 나온 어린 장수는 대체 정체가 뭘까?봉구안은 안정적으로 창을 잡고 상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세를 시작했다.장코는 강력한 기류를 느끼고는 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왼손 도끼는 방어, 오른손 도끼는 공격용이었다.도끼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조금 둔해 보여도 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봉구안의 창술이 더 현란했다.두 사람은 십여차례 공격을 주고받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현기증이 올 정도였다.단춘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장코의 쌍도끼는 거의 적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대에게 계속 끌려만 다니면서 역습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조유관 성루.북소리가 점점 힘차게 울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있었다.황후의 창술을 본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북대영의 유명한 명장 맹 소장군답게 그녀의 창술은 가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봉구안은 점점 더 빠르게 공격을 시전했고 장코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쌍도끼의 위력은 그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점점 짜증을 느낀 장코가 소리를 질렀다.“죽여버릴 테다! 악!”아둔한 그는 맹공격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봉구안은 날렵하게 피해 후방으로 간 뒤에 창을 휘둘러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그가 뒤돌아서자 그녀의 창은 곧바로 그의 눈앞까지 날아왔다.“악!”상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예리한 창끝은 쌍도끼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어 상대의 눈을 찔렀다.극심한 고통에 장코는 도끼 하나를 버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피가 철철 흐르는 눈으로 가져갔다.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남제의 쥐새끼, 죽여 버릴 테다! 피하지 마! 당장 널 가루로 만들어 시체
단춘은 고개를 잔뜩 뺴들고 출전한 남제 전사를 바라보았다.체구가 건장한 것도 아니고 몸이 무척 가벼운 것으로 보아 남제의 부장인 서봉은 아닌 듯했다.‘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축경관을 도전한 거지?’단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 가득한 미소가 지어졌다.첩자를 보내 알아본 결과, 남제 동부에는 관내경과 서봉을 제외하면 인물이라고 할 자가 없었다.출전한 상대가 서봉이 아니라면 남제는 축경관을 완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단춘은 자신이 직접 선발한 백명의 무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남제군의 목을 벤 자에게 황금 백냥을 하사하겠다.”무사들은 장창을 들고 전방을 바라보며 사기를 불태웠다.“죽인다! 죽인다! 죽인다!”가면 아래 봉구안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그녀는 여기 혼자 나왔지만 등 뒤의 성루에는 천만 수성군이 관전하고 있었다.그들은 주먹을 쥐고 승리가를 부르며 징을 울렸다.부장 서봉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제발 황후와 태중의 아이가 무사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다.봉구안은 장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이때 바람이 일었다.동부는 북방보다 기후가 따스하지만 모래바람이 불어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바람이 흙먼지를 일으켰고 봉구안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그녀는 위축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적군의 첫 번째 도전자였다.광풍이 휘몰아쳐서 모래폭풍 속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싸우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럼에도 단춘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이 그쳤다.남제 대표는 장창을 쥐고 꼿꼿하게 서 있고 옆에는 전마가 서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대하 무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아무도 대하의 무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 못했다.게다가 이 짧은 시간 안에 목이 날아간 채로 말에서 떨어지다니.단춘이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이럴 수는 없어.”그가 선발한 무사는 전부 다 정예병들이었다. 상대에게 지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
막사 안, 장순이 분개해서 불만을 토로했다.“황후마마, 저들이 정말 그랬다니까요? 저런 이기적인 자들은 동정할 가치도 없어요! 마마께선 자신들의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려고 전장에 나가신다는데 마마의 아이가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잖아요! 도와줄 필요 없어요!”낮에 말을 너무 한 탓에 장순의 목 상태는 무척 좋지 않았다.얘기를 들은 봉구안은 관씨 모자 세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일의 전장은 그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관내경 개인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제의 승리였다.그녀는 한낱 시신 한구 수습한다고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4개국 연맹군이 동부군의 기세를 한풀 꺾어놓았으니 반격에서 이겨 그들의 사기를 꺾어야만 했다.장순이 계속해서 말했다.“마마, 귀한 황자님을 회임하신 몸인데 신중을 기하셔야 합니다!”황제는 그의 은인이니 그 역시도 황제의 자식을 지켜주고 싶었다.봉구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왜? 날 대신해 네가 전장에 나가려고?”순간 장순은 입을 다물었다.그의 나이 이제 겨우 열살, 키가 말보다 작은 아이인데 어찌 전장에 나간단 말인가!그날 밤, 조유관에만 있는 적미새가 긴 울음소리를 냈다.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밖을 경계했다.자진궁.늦은 시간임에도 소욱은 각지의 전보를 읽고 있었다.그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다.옆에서 시중을 들던 유사양이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옥체도 생각하셔야지요.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소욱은 갑자기 현기증이 일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글자를 똑똑히 보려고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흐릿해질 뿐이었다.그는 전보를 내려놓고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서렸다.이 전장이 언제쯤이면 끝날지 예측할 수 없어서 더 갑갑했다.그는 황후에게 미안했다.부군으로서 부인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해야 하건만 그녀는 항상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동부 상황이 어떤지 걱정도 되었다.고개를 든 소
남제가 축경관 전서를 내렸다는 말에 4개국 연합군 모두 건방지다고 생각했다.“단 장군, 남제인들은 정말 상황파악이 안 되는군요!”“우리가 우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절대 저들에게 승리를 내어줄 수 없어요!”“그래요, 단 장군! 겨우 관내경을 죽여서 남제군의 사기를 꺾었는데 다시 살아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단춘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전부 남제군이 자신과 자신의 아비를 모욕하던 노래뿐이었다.남제가 축경관을 신청했으니 가장 유능한 장수를 내보내 응전할 것이다!그 시각 남제 군영의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았다.서봉과 다른 장령들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서 장군, 정말 황후마마를 전장에 내보내야 합니까?”서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안 그럼 어쩌갰어? 누가 황후마마를 막을 수 있겠냐고.”한 장령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마마께선 회임 중이잖습니까! 어떻게 전투에 나간단 말입니까! 축경관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만약에 아이가…”“됐어!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서봉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회임한 여인이 전장에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하지만 황후에게는 동부군의 지휘권을 담당한다는 황제의 밀서가 있었다.그러니 어찌 명을 거스를 수가 있을까?막사 안.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지도를 보고 있었다.“마마, 관 부인께서 알현을 청합니다.”“들라 하라.”봉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작은 깃발을 들어 조유관 위치에 꽂았다.관 부인은 직접 끓인 닭백숙과 반찬을 들고 막사를 찾아왔다.그녀는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낮에 있었던 일은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내일이면 전장에 나가실 텐데 좋은 걸 드시고 체력을 보충하셔야지요.”관 부인은 말하면서 봉구안의 배를 살폈다.다들 황후가 회임했다고 하는데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봉구안은 그녀가 가져온 도시락을 받으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은 고맙게 받도록 하지
잔뜩 풀이 죽었던 관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그녀는 제 귀를 의심했다.직접 시신을 수습해 오겠다니!관 부인의 두 아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서봉이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황후마마, 그건 아니 됩니다! 동부군이 천만이나 되는데 어찌 마마를 그 위험에 빠뜨리겠습니까! 하물며 마마는 황자를 회임 중이지 않습니까!”뭇 장령들도 정신을 차리고 봉구안을 말렸다.“마마, 심사숙고해 주십시오!”이 나라에 황제가 황후를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황후 태중의 아이는 황제의 첫 아이가 아닌가! 만약 동부에서 변을 당한다면 뒷감당을 누가 한단 말인가!광 부인의 시선이 봉구안의 복부에 닿았다.회임 중인 황후가 먼 길을 달려 이곳 동부까지 왔을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봉구안은 한번 내린 결정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부했다.“장순을 불러오너라.”은이가 공손히 답했다.“예.”조유관에서 십리 떨어진 곳, 대하를 필두로 한 4개국 연맹군이 주둔하고 있었다.주장 막사 안에서 장군들은 향긋한 술과 고기를 즐기고 있었다.상석에는 대하의 주장 단춘이 앉아 있었다.그의 앞에는 통양 구이가 놓여 있었고 그는 한창 칼로 고기를 베서 허겁지겁 입에 넣고 있었다.그의 좌측으로 타국 세 장령들이 앉아 아부를 떨고 있었다.“역시 단 장군입니다. 가장 적은 병력 손실로 남제를 침공하다니. 나중에 남제 요충지를 점령하게 되면 다른 나라들에 자랑해야겠습니다!”“단 장군을 위해 건배합시다! 앞으로 우린 대하만 믿겠습니다!”고기가 지겨워진 단춘은 술 몇 잔을 퍼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트림을 했다.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건방지게 말했다.“북연 그 놈들 속셈이야 뻔하지. 비록 같이 남제를 치기로 했지만 북연이 떡을 평등하게 나누려 하진 않을 거야. 교활한 놈들이니까!”“그러니 우리 4개국 연맹이 한마음을 가져야 해.”“조유관 전쟁에서 너무 많은 병사들을 희생할 필요가 없어.”“일대일 전투에서 남
관 부인은 통증에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돌려 자신을 제압한 자를 돌아보았다. 편한 복장을 입은 여인이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관 부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넌 누구지? 어찌 이렇게 거만을 떨어?”관 부인의 두 아들도 나서서 그녀를 비난했다.“당장 그 손 놓지 못할까! 우리 어머니가 누군 줄 알고!”관씨 모자와 다르게 서봉과 뭇 장령들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순식간에 당황하더니 공손히 예를 행했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관 부인도 순간 당황했다.“뭐? 화… 황후마마?”눈앞의 이 여인이 정말 이 나라의 황후란 말인가!황후가 어쩌다가 동부에 오게 된 걸까? 무릇 황후라면 시위들의 보호를 받으며 황궁에 있어야 마땅했다.관 부인의 두 아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황후마마라면 북대영의 맹 소장군 아닌가!그들은 곧장 예를 행했다.봉구안은 관 부인의 손을 놓아주고 싸늘한 눈으로 뭇 장령들을 노려보며 물었다.“방금 전에 뭘 하려고 했던 거지?”뭇 장령들은 여전히 분개하며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황후마마, 관 장군께서는 충직한 장군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지금 적들의 능욕을 당하고 있는데 저희가 어찌 지켜만 보겠습니까! 나가서 관 장군의 시신을 되찾아와야 합니다!”관 부인의 두 아들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마마. 저 사람들은 아버지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서봉 저 사람만 저희를 막고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제 어머니까지 몰아세워 죽게 만들 뻔했습니다.”서봉은 억울했다.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황후마마, 저는 단지...”“되었다. 더 말할 필요 없어.”봉구안이 서봉의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서봉을 처벌하려는 줄 알고 의기양양했지만 그녀에게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너는 장군으로서 병사들을 이끌고 조유관을 지키려 했던 것뿐이니 아무런 잘못이 없다.”“황후마마!”관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서봉이 무슨 생각이든 소인은 관심없습니다.
관내경이 죽고 동부 전선을 주관하는 자는 부장 서봉이었다.그는 달려나가려는 병사들을 가로막고 그들에게 호통쳤다.“관 장군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었느냐! 장군마저 저들의 상대가 안 됐는데 너희가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느냐! 헛된 죽음만 당할 게 뻔하지 않느냐!”서봉도 분노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이는 좋은 방도가 아니었다.성을 나가겠다고 나선 병사들은 평소에도 지시를 안 따르고 충동이 앞서는 인물들이었다.그들은 오히려 서봉의 말에 반박했다.“그럼 이대로 비웃음을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우리 남제군은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죽더라도 관 장군의 시신을 되찾아야 합니다!”“맞습니다! 되찾지 못하더라도 헛된 죽음은 아닙니다! 조유관 안에서 나약한 것 소리 듣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순간 다른 병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서봉은 상황이 통제를 잃어가자 선동자들을 전부 잡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군은 상급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조유관을 잘 지키고 성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병사들 틈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당신이 무슨 장군입니까! 우리의 대장군은 관 장군뿐입니다! 장군이 돌아가셨다고 상급이 된 양 하지 마세요!”또 누군가가 소리쳤다.“관 장군은 영웅입니다! 죽더라도 겁쟁이는 되지 않았어요!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서봉은 그자를 끌어내서 귀뺨을 쳤다.“멍청한 것! 다시 군심을 선동하는 날에는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짝!이때 사람들 틈에서 달려나온 한 여인이 서봉의 귀뺨을 쳤다.서봉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여인의 얼굴을 보고 안색이 급변했다.“형수님….”여인은 다름아닌 관내경의 부인이었다.“서 부장군! 병사들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 내 부군이 영웅이 아니라 말할 셈이냐? 당연히 시신을 되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머리에 흰 꽃을 달은 관 부인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서봉을 노려보고 있었다.“평소에는 내 부군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소욱은 잠깐의 침묵 후에 결단을 내렸다.“좋아. 네 말대로 하자꾸나! 다만 이거 하나만 약조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네 자신의 안전이 최우선이야!”봉구안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폐하.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소욱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우리가 다시 만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떨어져 지내야 하다니.”상위자로서 참 많은 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봉구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정색해서 말했다.“잠깐의 헤어짐은 신혼 때의 열정을 되찾게 한다고 합니다. 우린 일반 부부보다 더 많은 신혼을 얻게 된 셈이지요.”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매혹적으로 속삭였다.“이번에 돌아오면 완벽한 신혼밤을 선사해 드리지요.”그렇게 그녀의 홀림에 홀딱 넘어간 소욱은 그날 밤 황후에게 대장군의 권한을 하사하고 동부로 진군한다는 비밀 첩지를 내리게 되었다.비밀 첩지였기에 봉구안이 황성을 떠난 다음 날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변방 곳곳에 전쟁이 터진 상황에 서왕은 더 이상 소식만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전장에 나가 조금이나마 자신의 힘을 보태고 싶었다.그리하여 그는 입궁하여 황제에게 간청을 드릴 생각이었다.소욱도 그에게 중임을 맡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부에는 황후가, 북부에는 맹건이 있는데 유독 남부에만 유능한 장수가 없었다.게다가 남부는 남강과 잇닿아 있고 서왕비 완부옥이 남강 사람이니 서왕을 남부군 수장으로 보내는 것도 이치에 맞았다.한편, 서왕부.완부옥은 남부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동문의 동생인 갈십칠이 왕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래도 양심은 있어 서왕에게 서신을 남겼다.그렇게 조용히 떠나려는데 어찌 알았는지 서왕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왕비.”서왕의 온화한 표정은 그녀가 메고 있는 짐가방을 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그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완부옥은
관내경이 죽었다.봉구안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충의로운 대장부였다.지금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관내경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동방군 상황은 어떠합니까?”주장의 죽음은 사기를 반드시 흔들 것이었다.소욱이 봉구안에게 설명하였다.“동방군은 조유관 안에서 방어 중이다. 조유관 밖에는 대하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병력이 집결해 있지.”봉구안이 의아한 듯 물었다.“이미 조유관 안에서 방어 중이라면, 관내경은 어찌하여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까?”소욱이 차근차근 대답했다.“적군이 관문 앞에서 입에 담기 어려운 모욕적인 말로 관내경을 자극했다고 하더군. 관내경은 이를 참지 못하고 관문 밖으로 나가 맞섰다가, 결국 대하국의 한 젊은 무장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들었다.”일대일 결투, 즉 단독 싸움은 '대장 싸움'이라 불리기도 한다.이는 두 군대가 진을 치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각 군의 장수를 한 명씩 내보내 결투로 승패를 가르는 방식이다.결투에서 승리한 쪽은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리고 자부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반대로, 패배한 쪽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이처럼 단독 결투는 위험성이 너무 커, 이미 오래전에 폐지된 방식이었다.아무리 뛰어난 장수라 할지라도, 자신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관내경처럼 경험 많은 노련한 장수라면, 함부로 응전하지 말았어야 했다.그러나 상황을 돌아보건대, 적군의 도발이 워낙 심각했을 것으로 보였다.게다가 일반적으로 장수들은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전투에 나서는 것이 보통이다.이처럼 단독으로 나가 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더구나 결투에서 승리한 측은 패배한 자를 추격하거나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단지 상처를 입히는 데 그쳐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하지만 관내경이 단독 결투 중 살해당한 것은, 대하를 포함한 연합군이 명백히 이 규칙을 어겼음을 보여준다.봉구안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폐하, 이제 동방으로 지원군을 보내야 할 때입니다.”그녀의 목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