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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

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

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

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

“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

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

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

‘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

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한편, 자녕궁.

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

“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

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

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

“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이 또 들려왔다.

“태후마마, 폐하께서 궁으로 복귀하시고 바로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

“황당하군!”

태후는 버럭 화를 내며 탁자를 쳤다.

“그 요사한 것이 오늘 같은 날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황제를 불러냈단 말이냐!”

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없고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황귀비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봉가의 딸이라 하여 봉장미에게 그래도 기대했는데 이런 상황에도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무능하고 약해 빠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봉장미를 이용해 황귀비를 견제하려던 태후의 바람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태후뿐이 아니라 다른 비빈들의 생각도 똑같았다.

그 시각 몇몇 친하게 지내는 비빈들은 한곳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혼인 첫날밤에도 폐하의 은총을 받지 못 하다니. 결국 귀비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황후가 되겠네요.”

청색 의상을 입은 여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후마마도 참 가엾은 분이야. 동하야, 내일 이 옥부채를 마마께 가져다드리거라.”

“예, 마마.”

옆에 있던 여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중에 영비마마를 가장 닮은 사람이 황귀비니까 총애를 받는 건 당연하지. 황후께서 현명한 분이라면 폐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일로 소란을 부린다면…”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시종이 달려와서 소식을 전했다.

“마마님들, 금방 들은 소식인데 황후께서 영소전으로 가셨다고 하옵니다.”

여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야.”

“현명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지!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폐하의 미움밖에 더 사곘어?”

“어차피 일이 커져도 폐하께서는 황귀비를 편애하실 건데 황후께서는 왜 굳이 험난한 길을 자초하신 걸까?”

후궁의 비빈들은 현명하고 유능한 황후를 기대했다. 역대 봉가의 황후들처럼 후궁을 잘 다스려 평화가 찾아오고 비빈들이 합심하여 황제의 시중을 드는 그런 태평 성세를 기대한 것이다. 그들은 후궁에 총애를 위한 피바람이 더 이상 불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들은 헛된 기대를 했다고 생각했다.

황귀비가 그리 대단한 계략을 쓴 것도 아닌데 참을성 없는 황후가 꾀에 넘어갔다고 다들 생각했다.

영소전.

봉구안은 혼례식 때 입었던 예복을 그대로 입고 머리에는 왕관을 쓴 채, 근엄한 자태를 뽐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황귀비의 농간에 신혼밤이 엉망이 된 황후이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제가 신혼방에 버려두고 간 셈이니 정장적인 여자라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텐데 왜 굳이 찾아와서 모욕을 자처하는 것일까?

용소전을 지키는 호위는 그녀가 황제에게 합방을 애원하러 온 줄로 알고 먼저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황귀비마마께서는 지금 안에서 태의의 진료를 받고 계십니다. 치료에 방해되지 않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으니 부디 돌아가 주시지요.”

오늘부터 황후의 시중을 들기로 한 최 상궁이 간곡한 말투로 말했다.

“마마, 이러셔도 소용없습니다. 후궁의 모든 일은 황귀비에게 우선권이 돌아갑니다. 이 시간에 폐하를 알현해도 폐하께서는 절대…”

달빛 아래, 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담담히 되물었다.

“내가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고 누가 그랬느냐?”

사람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들 그럼 여긴 왜 왔냐는 눈빛이었다.

풍경을 보러 온 건 당연히 아닐 테고 황제가 귀비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확인하러 온 걸까?

봉구안이 눈짓하자 연상이 나무 상자 하나를 호위에게 건넸다.

“황귀비의 두통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주려고 왔을 뿐이다. 이건 내 오라버니께서 변방에 나가 계실 때 우연히 얻은 귀한 두통약인데 효과가 아주 좋다고 들었다. 가져가서 황귀비에게 전하거라.”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황후가 이렇게까지 아량이 넓은 분이었다고?’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그녀가 일부러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호위는 잠시 주저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명을 전했다.

잠시 후, 안에서 나온 태의가 약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더니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귀한 약이로군요!”

태의가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 지나서 태감 한 명이 밖으로 나와 공손히 봉구안에게 말했다.

“마마, 황귀비께서는 약을 드시고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마의 마음을 좋게 사시어 이따가 황후궁으로 드실 테니 밤시중을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태감은 황후가 이 소식을 들으면 무척 기뻐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봉구안 본인은 전혀 기쁜 내색이 없었다.

‘남강인들보다 뻔뻔한 황제로군. 밤시중을 무슨 큰 포상처럼 얘기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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