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던 식당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났더라도 기억에 남는 법이었다.설마 정말 유지수가 아니란 말인가?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그녀는 또 누구일 것인가.“잊었어? 그럼 네 목뒤에 있던 그 모반은? 수술해서 지운 거야?”진서준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잠시 침묵을 지킨 유지수가 이내 싱글벙글 웃으며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언제 내가 가짜라는 걸 안 거야?”유지수가 바로 인정하자 허사연 일행도 넋이 나갔다.“정말 유지수가 아니라고? 그럼 왜 똑같이 생긴 거야?”“친동생이니까.”유지수가 웃으며 답했다.“진서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언제부터 내가 유지수가 아니라고 의심한 거야?”그녀는 자신이 시종일관 유지수를 잘 연기해 왔다고 생각했다.유지수를 완벽하게 따라 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공을 들였다.“고양시에서 만나 네가 세 가지 임무를 주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비록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유지수 특유의 분위기와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네. 유지수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이지성에게 시집갔다 해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 하지만 너는 일거수일투족에 상류층 사람이 풍길 법한 분위기를 풍겼지. 이건 오랜 세월 동안 겪어야만 가질 수 있는 분위기야.”진서준이 유지수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대학 시절 유지수와 3년을 함께 했는데 그녀의 습성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정말 유씨 가문 가주의 딸이라고 해도, 한순간 백조로 탈바꿈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너는? 사연이랑 김연아랑도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지. 그리고 별장의 이름을 바로 말할 때는 더 이상했어.”진서준의 설명을 들은 유지수가 어깨를 으쓱했다.“하... 역시 완벽한 복제는 불가능하네.”진서준이 캐물었다.“유지수는? 어디 갔어?”진서준은 유지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씨 가문에서 또 어떤 망신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눈앞에 있는 이 유지수는 틈만 나면 진서준을 꼬셨다.만에 하나라도 진서준이 참
유연비는 유지수보다 더 대담했다.유지수는 지난 시간 동안 진서준과 재결합하고 싶어도 이렇게까지 대담한 말은 한 적이 없었다.“역시 친자매네. 하나같이 낯이 두꺼워.”허윤진이 진서준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며 유연비가 닿지 못하도록 막았다.“그래? 대체 누가 뻔뻔하단 거야? 너랑 허사연은 친자매 아니야? 하지만 같은 남자를 좋아하고 심지어 그 사람을 함께 섬길 계획을 하고 있지 않아?”유연비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 말에 서지은도 깜짝 놀랐다.‘허윤진도 진서준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진서준과 허사연이 커플인데... 허윤진은 허사연의 친동생이고... 이게...’보수적인 사상을 지닌 서지은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무슨 헛소리야!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면 네 입을 갈기갈기 찢을 거야.”화가 난 허윤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이를 갈았다.이런 일은 모두가 마음속으로 알고만 있으면 되었다.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웠다.“내가 헛소리하는 건지 아닌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잘 알겠지.”유연비가 웃으며 답했다.“됐어. 너희랑 싸우기도 싫네. 간다.”“잠깐만. 이번 달 약 줘야지!”진서준이 얼른 유연비를 불러 세웠다.곧 월말인데 유연비는 아직 진서라의 약을 주지 않았다.“약을 원해? 그럼 애원해 봐.”유연비가 고개를 돌려 장난스럽게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안 줄 거면 오늘 여기서 나갈 생각하지 마.”허윤진이 바로 협박을 가했다.그녀는 유연비에게 인내심이 없었다.‘저 여자... 정말 가증스럽네.’“좋네. 어차피 죽는 것도 두렵지 않고, 가는 길에 진서라 같은 미인도 있으니 나야 좋지 뭐.”유연비가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주먹을 불끈 쥔 진서준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한 여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느낌은 너무 괴로웠다.“정말 나쁜 년이네.”“칭찬 고마워.”유연비의 낯은 여간 두꺼운 게 아니었다.그녀는 허윤진의 욕설에 면역되었다시피 있었다.“내가 진서준 대신 빌게. 서라 약 좀
진서준이 허사연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서준 씨랑 서라만 괜찮다면 된 거죠.”이때, 허윤진은 그녀와 허사연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그녀가 진서준에 대한 사랑은 이기적인 감정이었다.하지만 허사연이 진서준에 대한 사랑은 사심 없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진서준이 기쁘면 허사연도 기쁜 것이었다.이 차이는 허윤진이 오랜 시간을 거쳐서야 메울 수 있을 것이었다.늦은 밤, 허사연은 진서준에게 오랜 시간 시달렸다.허사연이 용서를 빌 때에야 진서준은 멈췄다.“오늘 웬일이에요? 약 먹은 것 같은데요?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요? 마음에 두지 마요. 서준 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허사연이 진서준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사연아,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진서준이 허사연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저도요.”봉호전 시작 하루 전이 되자 경성으로 입성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졌고 모든 특급 호텔은 이미 꽉 차 있었다.일부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차역 근처 작은 모텔에서 묵어야 했다.국안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30명의 호국사를 파견했다.심지어 명주를 지키고 있던 현천진군마저 달려왔다.특급 식당 안,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정란아, 함부로 보지 마.”식탁에 정란이 한 젊은이와 한 노인과 앉아 있었다.지난번 정란 가족이 진서준 가족과 밥을 먹었을 때 그녀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그 후 정란은 그녀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진서준보다 더 강한 사람을 찾아 진서준에게 타격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한 번의 타격을 겪은 후, 정란은 현재의 남자 친구를 만났다.이 남자 친구가 정란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줬고 그녀에게 이 세상에 무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평지 씨, 이 사람들은 전부 무인이에요?”정란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보며 호기심에 겨워 물었다.“맞아. 모두 강한 실력을 지닌 무인들이야.”임평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평소에는 무인을 보기
“진서준이 왜 여기 있지.”정란은 원래 구정이 지나면 임평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진서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돈 많은 여자 친구 찾은 게 뭔 대수인가? 무인인 평지 씨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할 거면서. 서울시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도 우리 평지 씨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임평지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왜? 아는 사람이야?”“네. 사촌 오빠인데 옥살이하고 나와서 돈 많은 아줌마 만나고 나서는 우리 가문을 무시하기 시작하더라고요.”정란이 차갑게 웃었다.“돈 때문에 자존심까지 내려놓는 남자라면 옥살이해도 싸지.”임평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임평지는 진서준이 돈 때문에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와 붙어먹었고 그런 사람은 남자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지가 멀쩡한데 왜 스스로 노력할 생각은 않고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내가 가서 데려올게요.”정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은 허사연, 그리고 다른 일행과 자리를 뜨려고 하던 참이었다. 밥 먹으러 왔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진서준.”진서준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정란이었다.진짜 신분을 알게 된 후로 진서준은 정란 일가가 그와 친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해 진서준의 어머니 임수련이 서울시로 도망 왔을 때 우연히 진짜 조희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조희선은 거의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임수련은 조희선이 자기와 외모가 퍽 닮은 걸 보고 조희선으로 위장했다.그때는 주민등록증이 생기기 전이었고 제대로 된 사진조차 없었다. 게다가 정란 일가는 조희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임수련이 조희선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친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 진서준도 더는 정란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부밖에 모르는 친척은 둘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경성에는 왜 올라온 거야?”정란이 거들먹거리며 진서준을 쳐다봤다. 진서준이 못 올 데라도 온 것처럼 말이다.진서준도 정란의 말뜻
두 사람은 다 무인이었다. 그중 임진우 무도 대종사였다.진서준은 그제야 정란이 왜 밥을 사주겠다며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작정하고 면박을 주려는 것이었다.“당연하죠. 식당을 통으로 예약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임평지가 꽤 열정적으로 대꾸했다.정란도 예쁘게 생겼지만 허사연 그리고 그 일행과 비기면 천지 차이였다. 임평지는 그들의 외모에 이미 마음을 완전히 뺏겨버린 상태였다.“평지 씨, 지금 뭐 보는 거예요?”임평지는 정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허사연과 그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정란은 기분이 매우 잡쳤다.임평지는 정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허사연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임평지라고 합니다. 내공경 무인입니다.”“아, 네.”임평지의 이글이글한 눈빛에 허사연은 몸에 소름이 돋아 역겹다는 표정으로 단답형으로 말했다.임평지는 허사연의 반응을 예상했다. 일반인은 무인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기에 이따가 강력한 실력만 보여주면 무조건 반해서 먼저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다.“내공경의 무인이 뭔지 모르죠?”“이렇게 설명하면 쉬우려나? 앞에 보이는 이 벽을 주먹 한 방에 구멍 낼 수 있다고 보면 돼요.”오만한 임평지의 말에 허사연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그녀가 내공경을 모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공경이라면 그녀와 비슷한 경지였다.남자가 돼서 실력이 비슷한 것도 모자라 그걸로 우쭐대고 있으니 정말 우스웠다.허사연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바로 이렇게 쏘아붙였다.“그러면 나와 비슷하네요.”“네?”임평지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비슷하다고요? 무슨 그런 농담을.”허윤진이 콧방귀를 꼈다.“우리 언니 농담한 거 아니거든요. 그쪽은 우리 언니 상대도 못 돼요.”‘뭐야? 둘이 자매였어? 정란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너무 예쁜데?’임평지는 침을 질질 흘릴 지경이었다.옆에 선 정란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원래는 임평지에게 진서준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하지만 임평지는 오히려 그녀를
순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를 꼬시려고 한 거야?”“아가씨, 오빠가 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보다 훨씬 세니까 오빠랑 갈래?”“아가씨들, 오늘 저녁에 같이 재미 좀 볼래?”다른 테이블에 앉은 무인들도 이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자들이 무도를 수련하는 건 다 돈과 여자를 위해서였다.허사연 같은 미녀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임평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봤으니 더 무시했다.“다들 저리 안 꺼져? 우리 사부님에게 혼쭐나고 싶지 않으면 그만해라.”임평지가 목청을 높였지만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제자가 이 모양인데 스승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얼마든지 불러. 사부님도 찍소리 못하고 도망가게 해줄 테니까.”내공 정점에 다다른 무인이 하찮다는 듯 말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젓가락 하나가 갑자기 날아왔다.푹.젓가락은 그 사람의 귀를 아예 뚫어버렸고 그대로 귀가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보고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랐는지 허사연의 어여쁜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진서준의 손을 꼭 잡았다.이 자리에서 임진우가 어떻게 공격했는지 똑똑히 본 사람은 진서준 밖에 없었다. 임진우의 실력은 일급 대종사였다.“사부님을 모욕하는 사람은 다 이렇게 만들어줄게.”임평지가 우쭐거리며 말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임진우에게로 쏠렸다. 아까는 눈에 띄지 않아 몰랐는데 이제 보니 노인네가 숨겨진 강자 같았다.“어떻게 공격했는지 보지도 못했어. 아마 종사의 경지는 된 것 같은데.”“사부님이 종사니까 저렇게 나대는 거겠지.”“종사는 무슨. 저 사람 대종사야. 얼른 가자.”한 종사가 임진우의 실력을 알아보고는 잽싸게 몸을 돌렸다.오지성이 대종사라는 말에 사람들이 안색을 굳히더니 얼른 뒷걸음질 쳤다. 젓가락에 귀가 잘린 내공경 무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바닥에 꿇어앉아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선생님, 죄송합니
정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뭐라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란이 임평지를 우러러보면서 빌붙은 거라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진서준은 시종일관 옆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허사연이 내공경 무인을 이길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전에 운대산에 있을 때 진서준이 여러 번 허사연 자매를 바로잡아줬기에 내공경 무인과 상대해도 이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허사연이 임평지를 이기지 못한다 해도 진서준은 허사연이 다치지 않게 관건적인 순간에 손을 내밀어 보호해 줄 생각이었다.진서준은 허사연이 보내온 눈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그래요. 겨루자고 하면 내가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어요?”허사연이 코웃음 쳤다.이내 지켜보던 사람들이 홀에 있는 탁자와 의자를 구석으로 옮겨 최대한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언니. 저 변태 같은 놈 잘 좀 손봐줘요. 아예 남자구실 못 하게 만들어요.”허윤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임평지가 차갑게 웃었다. 오늘 밤 허사연 자매를 길들일 생각에 들떠 있었다.“약속대로 저는 한 손만 쓸게요. 시작하죠.”임평지는 폼을 잡고 허사연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허사연이 땅을 살짝 밟더니 화살처럼 임평지를 향해 달려갔다.“대박. 이 여자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내공 중기의 실력은 되는 것 같은데.”“저 남자 너무 오버한 거 같은데. 한 손이 아니라 두 손으로 해도 저 여자의 상대가 될지 의문이야.”“아가씨, 저 남자 고자로 만들어버려요. 다시는 여자에게 치근덕대지 못하게요.”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며 허사연에게 힘을 북돋아 줬다.임평지는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허사연의 속도가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 임쳥지가 반응하기도 전에 허사연은 이미 임평지에게로 바짝 다가간 상태였다.임평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공격을 막았다.펑.두 사람의 주먹이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임평지는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섰지만 허사연은 끄떡하지 않고 임평지가 손 쓸 새도 없이 다시 공격
임진우에게 귀싸대기를 맞은 임평지도 차분해지기 시작했다.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구경꾼들도 각지에서 모여들었을 테니 오늘 일은 무조건 소문날 것이다.“하지만 사부님, 이걸 어떻게 참아요?”임평지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했으니 여자 하나 이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임진우가 차가운 말투로 호통쳤다.“죽은 너희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나도 손 놓았어.”“더 쪽팔리기 전에 얼른 가자.”허사연에게 얻어터져서 도망가는 임평지를 보고 허윤진은 찢어질 듯이 기뻤다.“고작 그 실력으로 나와서 우쭐댄 거예요?”허윤진이 우쭐대며 비웃었다.“그쪽 사부님만 없었으면 여기서 제 발로 걸어 나가지도 못했을 거예요.”임평지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인데 두고 봐요.”이때 진서준이 임평지를 막아섰다.“아까 약속했잖아요. 지면 내 여자 친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기로.”“홀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쪽이 한 말을 증명할 수 있어요.”진서준이 덤덤한 표정으로 임평지를 바라봤다.“맞아요. 아까 우리도 다 들었어요. 이 아가씨에게 지면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겠다고요.”“남아일언 중천금인데 지켜야죠. 아니면 남자가 아니라고 인정하든지요.”“하얗고 깔끔하게 생긴 게 정말 그쪽일지도 몰라요.”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났다는 듯이 임평지를 놀려대기 시작했다.임평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진서준을 바라봤다.“가끔은 여지를 남기는 게 좋을 때도 있는데.”“그쪽이 뭐라고 내가 여지를 남겨요?”진서준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내 여자 친구를 희롱하고도 이 세상에 멀쩡히 살아있는게 나의 제일 큰 은혜에요.”허사연의 실력을 검증할 생각만 아니었다면 아까 바로 임평지를 손봐줬을 것이다.고작 내공 무인밖에 안 되면서 어디서 난 용기로 이렇게 우쭐대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진서준이 싸울 준비를 하자 구경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까부터 실력을 숨기고 가만히 서